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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6:40:29

노트르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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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파일:6877.jpg
국가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소재지 일드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지구
건축시기 착공1163년~완공1345년(총 183년)
건축가 모리스 드 쉴리 주교 등
건축 양식 고딕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명칭3. 역사
3.1. 파이프 오르간
4. 건축5. 성유물6. 화재7. 미디어
7.1. 이 성당을 소재로 한 작품7.2. 단순 출연/배경
8.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노트르담광장.jpg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 동쪽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파리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14세기에 완공된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틀담의 꼽추)의 무대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에도 파리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이다. 다만 단독등재는 아니고, 파리의 센 강변이라 하여 센 강 일대의 자연환경 및 그 주변 문화유산인 에펠 탑, 루브르 박물관, 앵발리드 등과 묶여서 지정되었다.

2. 명칭

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1] (약어: Notre-Dame)
한국어: 파리의 성모 주교좌성당(통칭: 노트르담 대성당)
영어: Our Lady of Paris Cathedral
이탈리아어: Basilica Cattedrale Metropolitana di Notre-Dame
스페인어: Catedral de Nuestra Señora de París
독일어: Kathedrale Notre-Dame de Paris
중국어: 巴黎聖母院
일본어: ノートルダム大聖堂
러시아어: НотрДа́м-де-Пари́
프랑스어로 노트르담(Notre-Dame)은 우리의Notre 마님Dame[2], 곧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단어다. 이런 식의 작명법(Notre-Dame, Our Lady)은 비단 프랑스어권뿐만 아니라 영어권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가톨릭의 전통적인 작명법이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에겐 봉헌된 샤르트르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샤르트르의 성모 주교좌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이며, 서울 명동에 위치한 '무염시태의 성모 주교좌성당'Cathédrale Notre-Dame-de-l'Immaculée-Conception, 통칭 명동성당 역시도 엄연히 '무염시태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이다.

그렇지만 프랑스 밖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하면 파리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칭하기에 이 문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만을 서술하고 있다.

3. 역사

지금의 대성당이 있던 곳에는 성 스테파노[3]에게 봉헌한 작은 성당이 있었지만, 1160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 1110 ~ 1196) 주교는 보다 더 큰 규모의 성당을 짓기 위해 파리대교구에 착좌하자마자 옛 성당을 가차없이 부수고 주변의 몇몇 가옥들도 함께 철거했다. 그리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초석을 놓으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곳은 후진과 성가대석으로 1182년에 완공되었으나, 전체 공정의 절반도 채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공사가 시작된 지 33년 후인 1196년 9월 11일 모리스 드 쉴리 주교가 사망했다. 대성당의 서쪽 정면은 1200년경~1225년에 완성되었고, 서쪽 정면의 탑 2개와 북쪽의 장미창은 1250년에 마무리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사는 1250년부터 약 1세기 동안 진행되어 마침내 착공 183년 만인 1345년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백년전쟁의 와중인 1431년 영국의 왕 헨리 6세가 이곳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으나 당시 파리 시민들이 잔 다르크를 적으로 여겨 싸웠을 만큼 영국에 우호적이었음에도 그들의 반발을 불렀다.[4] 1456년에는 이 곳에서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재판을 교황청이 열어서 1431년 영국 측과 친영국파 프랑스 성직자들이 벌였던 종교재판으로 화형당한 잔 다르크의 이단 판결과 마녀 혐의를 무효화하여 복권했다. 그래서 잔 다르크 성녀의 성상이 이 성당 안에 있다.

18세기에는 성당이 어둡다는 이유로 성직자들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일반 유리로 바꾸고 그로테스크가고일 상을 제거하는 등 신고전주의적인 취향에 따라 손을 보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자 귀족문화, 종교문화 자체를 증오하는 시민들에게 에마뉘엘 이라는 종을 제외한 모든 종이 녹여지고, '옛 프랑스 왕으로 오인된' 성경 속의 왕의 조각이 목이 잘리는 등 각종 조각이 훼손되고 이신론자들의 신전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선 이 성당이 프랑스의 기득권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는 프랑스 귀족 계층에서 배출되었으며, 프랑스 귀족과 기득권층의 법률적 옹호기관인 고등법원의 관료 역시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혈연관계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때문에 이 대성당이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먼저 공격을 받고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1804년 12월 2일에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대관식을 이 성당에서 치렀는데, 이를 위해 대성당의 주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많은 정비를 하였다. 성당의 입구에는 신 고딕식의 나무 문을, 실내는 신고전주의 건축처럼 보이게 장식하였으나, 임시로 덧댄 것들이라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다(대관식에 대해서는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참조)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내부가 외양간으로 쓰여지는 등 성당의 사회적 가치는 심하게 손상되었다. 결국 파리시 당국은 성당의 철거까지 검토하였는데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빅토르 위고가 성당의 훼손, 파괴를 막으려고 쓴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이 인기를 끌면서 평가도 좋아졌으며, 건축가인 장바티스트 라쉬(Jean-Baptiste Lassus)와 외젠 비올레르뒤크(Eugène Viollet-le-Duc)에 의해 1845년부터 근 20여년 동안 복원에 들어간다. 스테인드 글라스성상들, 중앙 첨탑(flèche)[5] 등이 이 시기에 복원되었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것들은 뒤크의 취향에 따른 창작에 가깝다.

이후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양차대전을 겪으면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2019년 4월 15일 원인 불명의 화재로 인해 13세기로부터 내려오던 목조 지붕[6]과 19세기에 만들어진 중앙 첨탑이 소실되고 석조 볼트가 일부 파손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2024년 11월 원형 그대로 복구하는 데에 성공해 12월 7일 공식적으로 재개관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자세한 건 복원 과정 참조.

3.1. 파이프 오르간

파일:AP24340551878544-1000x667.jpg
노트르담 대성당의 또다른 명물은 바로 성당 내 파이프 오르간이라 할 수 있다.[7] 1357년 쯤 소규모의 오르간이 최초로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 오르간의 품질이 미흡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고 수리를 위해 샤를 6세의 재정적 지원도 받았다고 한다. 이 같은 지원에도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결국 1400년대에 들어서서는 파이프를 2,000여개로 늘리는 대규모 개조를 하였다. 참고로 이전에 계속 사용하던 오르간은 돈을 받고 폐기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수 백년간 여러번 리프팅 작업과 사용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1800년대 말 노후된 오르간을 개조하며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은 더 화려해졌다. 개조한 인물은 오르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아리스티드 카바이예콜(Aristide Cavaillé-Coll, 1811~1899)이었다. 그가 오르간을 복원하면서 동시에 성당 복원도 진행되었고 이때부터 오르간의 거장들이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0년에 루이 비에른(Louis Vierne, 1870~1937)이[8]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오르간의 음향, 음색 등을 전체적으로 개조하기도 하였다. 이때 당시 여러 명의 오르간 거장들이 있었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뜻하지 않게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후 노트르담 대성당의 최고 즉흥 연주자로 불리는 피에르 코슈로(Pierre Cochereau, 1924~1984)가 남다른 활약을 보이면서 성당의 오르간은 보다 더 발전하고 유명해져 갔으며,[9] 그가 사망하고 나서도 오르간의 거장들이 여전히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현재 연주자는 올리비에 라트리(Olivier Latry), 필립 르페브르(Philippe Lefebvre), 뱅상 뒤부아(Vincent Dubois), 이브 카스타네트(Yves Castagnet)[10]이다.

현재 오르간은 7,952개의 파이프 개수를 가졌으며 화재 이후 대대적인 복원, 청소 작업을 마쳐 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도 아무런 문제없이 연주되고 있다.

4. 건축

파일:노트르담 광장 2.jpg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고딕 양식의 전성기로 가기 전, 초기 고딕의 마지막 걸작쯤 되는 건축물이다. (다만 장식에 따른 분류로는 하이 고딕으로 분류되는 등 다른 분류 기준도 있다.)

플라잉 버트레스라고 불리는 고딕의 특징적인 구조물이 구조적으로 의미있게 처음 사용된 건물로 평가받는 등, 고딕 건축 역사의 중요한 지점을 만든 건물이다.

하지만 전성기 고딕의 시작인 샤르트르 대성당, 전성기 고딕의 완성작이라고 불리는 랭스 대성당, 아미엥 대성당 등에 비해 네이브의 높이나 폭, 스테인드 글라스의 비율이 작으며 기둥의 장식이나 플라잉 버트레스의 구조 등이 통일되지 않아 깔끔하지 않은 등 과도기적인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건축적으로 고딕 양식의 최고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지방이 아닌 파리 중심에 있는데다가 대중문화 작품들의 배경이었고 역사적인 사건들의 장소라는 점 등으로 인해 인지도와 대중적 명성만큼은 프랑스 제일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문객 수로만 보면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을 능가하는 성당이다.

5. 성유물

파일:90_20241213-765_c_marie-christine_bertin_-_diocese_de_paris.jpg
이곳에는 예수의 가시 면류관, 성십자가의 일부, 성정과 같은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성유물이 봉안되어 있다. 위 사진은 가시 면류관.

성왕 루이 9세가 1238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구입한 예수의 가시 면류관으로 믿어지는 성유물은 이곳에 보관되다가, 아예 서쪽 근처에 왕실 전용 경당인 생트샤펠을 건립하여 그 곳에 이동 안치되었다. 그러나 왕실이 무너지고 프랑스가 세속국가화되어 생트샤펠이 더 이상 성당으로 쓰이지 않게 되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되돌아와서 노트르담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성유물이 되었다. 교황청은 위 가시 면류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성직자를 관리인으로 지정하여 엄중하게 관리하게 하고 있는데,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당시에도 가시 면류관의 안전이 초미의 관심사였으나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해 살아남았다.

2024년 1월 아직도 노트르담 대성당이 폐쇄중인 현재, 성십자가를 비롯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주요 성유물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특별실로 옮겨졌으며 일부는 전시되고 있다.

6. 화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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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현지시각으로 2019년 4월 15일 오후에[11] 큰 화재가 발생하여 첨탑과 13세기부터 내려오던 목조 지붕이 소실되고 볼트가 파손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석조 구조물들이 대체로 무사하고 소실된 성유물도 거의 없으므로 복원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18세기 최고의 오르간 제작자인 A.Cavaillé Coll 오르간이 보존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뱅상 듀보아 인터뷰

2019년 6월 15일, 화재 이후 처음으로 부속 성당에서 소규모 미사가 봉헌되었다. 오후 6시 노트르담 대성당의 동쪽 성가대석 뒤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열렸으며, 안전상의 이유로 30여명의 인원만 안전모를 착용하고 참례했다.기사 이 미사는 프랑스 전역의 가톨릭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TV 방송을 통해 생중계했다.기사

2024년 11월 복구 완료되었다. 기사 재개관은 동년 12월 7일이며, 약 1조원이 소모되었다.

7. 미디어

7.1. 이 성당을 소재로 한 작품

7.2. 단순 출연/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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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1] 프랑스어에서 r이 구개수음인 관계로 실제 발음은 노트담에 가깝다.[2] Dame은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영어 Lady에 대응한다.[3] 프랑스어로는 성 에티엔[4] 원래 프랑스 왕이 정식으로 즉위를 하려면, 랭스에 있는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해야 한다. 당연히 영국 왕실도 헨리 6세를 그곳에서 프랑스 왕으로 정식으로 즉위시키고자 했으나, 이미 잔 다르크가 1429년에 랭스를 탈환하고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게 해서 샤를 7세를 프랑스의 정식왕으로 즉위시킨 바람에 헨리 6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 건데, 오히려 이게 엉터리 대관식이 되어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다.[5] 13세기에 지어졌으나, 1786년에 헐렸다.[6] 코러스 부분에는 건축이 시작되던 12세기의 지붕이 있었지만, 원인미상으로 사라져 13세기에 네이브 등 나머지 부분들의 지붕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7] 이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이프 오르간 중 하나이다.[8] 작곡 겸 즉흥 연주자[9] 특히 1968년에는 오르간 오디션을 개최하며 더욱 유명세가 퍼져나갔다.[10] 성가대 오르간을 맡고 있다.[11] 한국시간으로는 16일 자정~새벽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