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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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알제리 독립전쟁 ,1954 ~ 19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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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쟁 ثورة التحرير الجزائرية Guerre d'Algérie Tagrawla Tazzayrit ⵜⴰⴳⵔⴰⵡⵍⴰⵜⴰⵣⵣⴰⵢⵔⵉⵜ Algerian War of Independence | |||
기간 | |||
1954년 11월 1일 ~ 1962년 3월 19일 | |||
장소 | |||
프랑스령 알제리 | |||
원인 |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의 등장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알제리의 독립 요구 폭발 프랑스 정부의 알제리 독립운동 탄압 | |||
결과 | |||
에비앙 협정 체결, 알제리의 독립 | |||
영향 | |||
프랑스 제4공화국 해체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 [[국민해방전선|]]국민해방전선 알제리 국가운동 알제리 공산당 | 프랑스령 알제리 전선 (1960~1960) 비밀군사조직[1] (1961~1962) | |
지원국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쿠바|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
르네 코티 미셸 드브레 샤를 드골 페르낭 감비에즈 라울 살랑 자크 마쉬 폴 오사레스 모리스 샬 | 페르하트 아바스 아메드 벤 벨라 우아리 부메디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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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국민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FLN)과 프랑스 공화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알제리에서는 '11월 1일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한때 프랑스에서는 '북아프리카 질서 유지 작전'이라는 명칭을 쓴 바 있으나 1999년 6월 프랑스 의회는 전쟁이 끝난 지 37년 만에 이 사건이 "전쟁"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2]전쟁의 결과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가장 중요한 식민지를 잃었고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되어 프랑스 제5공화국이 들어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대세와 흐름을 무시하고 벌어졌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유럽 식민제국의 식민지 재침략의 예시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2. 배경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이자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으로 여겨 관심을 가졌다. 1830년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의 지방 총독에게 프랑스 외교관이 부채로 뺨을 맞고 쫓겨난 일을 계기로 프랑스는 알제리 정복을 결의하였다.결국 알제리 북부 해역의 바르바리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이었던 알제리의 술탄을 제거하고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가 로마 제국 이후 아프리카에서 몇몇 도시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 단위의 정복을 다시 시작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알제리에서는 독립할 때까지 수많은 항쟁과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회유와 무력을 통해 알제리 식민지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아예 프랑스 본토의 일부라고 간주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지중해를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우며 유럽 프랑스 본토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서 알제리를 영구히 지배할 목적으로 132년 동안 기반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적어도 대도시는 완전한 유럽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고 수출용 제조 공장들도 다수 있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프랑스군의 주요 기지와 많은 군수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다.
다만 이러한 시설들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본국과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을 위주로 한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정작 알제리인들은 프랑스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알제리인들의 90% 가량이 문맹이었으며 절대다수의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시민권조차 받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렸다. 그나마 20세기 초반에 알제리인들이 이슬람교를 버리면 프랑스 시민권을 주는 제한적인 조건이 붙었으나 이러한 조건에 응하여 이슬람교를 버리는 알제리인들은 매우 적었다. 이렇게 비참한 현실은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저절로 갖게 해 주었다.
물론 프랑스 본국도 이런 알제리인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좌파 성향이 강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알제리인들의 독립과 저항 의지를 없애려면 그들을 프랑스인들과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했으나 프랑스 본국은 알제리인들의 비참한 사정을 알면서도 우격다짐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비참한 상태로 놓아두었다. 이러한 프랑스 본국의 오만함은 알제리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만들어낸 텃밭이었다.[3]
현지에 정착해서 사는 알제리 거주 백인을 피에 누아르(Pied-Noir)라고 불렀다. 피에 누아르의 후손들은 프랑스계뿐만 아니라 스페인계, 이탈리아계 역시 모두 피에 누아르로 불렸다. 피에 누아르와 그 후손 역시 알제리에서 엄청난 숫자를 자랑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기 전에 샤를 드골은 "모로코와 알제리는 절대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도 않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유럽 민족의 피가 흐르는 형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환경의 차원이 매우 다르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본토가 점령되면서 프랑스가 큰 타격을 입자 프랑스 당국의 권위는 떨어졌고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치솟았다. 그럼에도 자유 프랑스 당국은 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타협을 거절했다.
1945년 5월 8일 승리의 날,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다. 이는 사전에 계획적으로 준비된 시위였는데 이미 3월부터 알제리인들은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해 독립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이미 시위대가 식민당국과 충돌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사망자 5명이 발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계획에 따라 시위가 벌어진 곳들 중 스티프 주 세티프 시에서는 참극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다.
5천 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위대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자 경찰과 프랑스 헌병대가 막아섰다. 이때 경찰과 헌병들이 독립을 상징하는 알제리 깃발을 빼앗으려는 도중에 쌍방간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쪽이 먼저 쐈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총격전으로 대규모 충돌이 벌어져 프랑스 경찰과 헌병대에서 일부 총상자가 발생했고 시위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이후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주변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면서 비무장 민간 유럽인에 대한 공격으로 102명의 유럽인이 사망했으며 시신이 훼손된 사례와 유럽인 여성이 강간당한 사례도 1건 발생했다.
프랑스 당국은 이 사건을 그동안 진행된 반항을 무력으로 제압할 명분을 주는 기회로 여겼다. 세티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프랑스 경찰 병력뿐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규군, 알제리인-튀니지인-모로코인-세네갈인 식민지 부대, 프랑스 외인부대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군 포로들까지 무장을 지급받고 동원되었다. 덤으로 백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까지 가담했다.
여기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알제리인 마을을 초토화시킨답시고 케라타(Kherrata)라는 해안 마을에는 해군 순양함 뒤게-트루앵 함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공군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대량학살을 벌였다. 당시 인구 4천 명이 넘었던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3명은 중년 여성 1명, 20대 남성 1명, 어린이 1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어린이는 커서 알제리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부모와 형제, 친구들을 죄다 잃은 이 천인공노할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해 글로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알베르 카뮈 연구로 알려진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로 가서 이 소설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2007년 당시 6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꿈에서 그 날이 자주 떠오른다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살고 있던 마을이 박살나 친구들도 모조리 죽었다며 동병상련으로 살아남은 다른 두 생존자랑 이후 만나 이야기도 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이제 60년이 지나다 보니 그 둘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만 생존자로 살아 있다며 씁쓸하게 증언했다.
5월 16일까지 계속된 학살로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이후 이 수치는 2만 명으로 늘었고 알제리인들은 못해도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한다.[4]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싸운다고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나치 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 병사들이 이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들 중 다수가 FLN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다음 세대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도 속속 여기 가담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중 북아프리카인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122,920명이며. 이들 중 일부는 베트민의 포로가 되어 "피압박민족으로서 가져야 할 저항의식"에 관한 교육까지 받고 돌아왔다.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었던 FLN은 이전과 다르게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 군경을 괴롭히게 된다. 독립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아메드 벤 벨라(1916~2012)도 이렇게 해서 반프랑스 항쟁에 뛰어든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육군 부사관 출신으로 자유 프랑스에서 최고 등급 무공훈장까지 받았다. 벤 벨라에 이어 알제리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우아리 부메디엔(1932~1978)도 프랑스 육군 부사관이었다.
여하튼 학살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고작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유럽계 백인과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한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이런 기만적인 조치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힘으로 일어서자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제리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했다. 봉기가 시작된 1954년 11월 1일까지는 말이다.
3. 전쟁
결국 1954년 국민해방전선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유혈폭동으로 규정하고 NATO에 파견된 정예 사단까지 빼내서는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기 베트남에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쟁취한 것도 알제리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영화 알제리 전쟁의 한 장면. 중심의 인물은 알제리의 배우 브라힘 해기아그다. |
게다가 정규전이 아니라 아랍 제국과 소련의 지원 속에서 게릴라와 테러를 일삼는 FLN의 활동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프랑스는 이에 대한 맞불로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다. FLN이 1955년 필립빌 학살을 일으켜 100여명의 프랑스 민간인을 죽이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알제리인 1000명 이상을 죽였다. 이에 알제리인들도 똑같이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맞서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1957년 내내 진행된 알제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만명을 불법체포해서 그중 3천명을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FLN의 내부 조직망을 일망타진하는 군사적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부녀자와 노인들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해서 고문한 것이 폭로되면서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어 도덕적으로 패배하게 되었고 병사와 장교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명령 불복종과 탈영이 이어졌다.
프랑스군의 잔혹한 학살과 진압은 전세계적으로 욕을 먹었다. 냉전 시절 소련은 전세계적인 반제국주의연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의 반미/반서방 세력에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굳이 좌익 성향이 아니더라도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도와주곤 했다. 그런 소련 및 다른 공산권 나라들이 전쟁에 끼어들 기미가 보이자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한다. 알제리와 같이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었던 튀니지나 모로코 같은 북아프리카 주변 국가들도 프랑스를 비난했다. 튀니지와 모로코는 알제리보다 먼저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상태였다.
특히 튀니지는 자국에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독립운동 활동을 허용하며 사실상 알제리를 지지했기 때문에 알제리와 튀니지는 이웃나라이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다. 튀니지가 알제리를 지지하자 프랑스는 알제리 임시정부가 있는 주권국가인 튀니지를 반란군 소굴로 규정한 뒤 폭격을 감행해 알제리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튀니지인들을 사살했다. 튀니지는 프랑스의 공격과 학살에 분노했지만 힘이 없다 보니 어쩔 방도가 없었다. 이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는 미국의 요구에는 "대통령은 미국의 개인가?"라고 총궐기하여 무시했다.
그나마 독립 운동에 유화적이던 좌파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사회당의 전신) 정권의 르네 코티는 여론의 반발과 프랑스 정규군의 쿠데타 위협 속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은 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고 알제리 민간인도 200만 명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억지로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르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났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자 아랍 국가와 소련, 미국의 압력은 가중되었다.
프랑스군 장병들 중에서 전쟁에 회의를 느낀 (피에 누아르 출신 포함) 일부 장병들은 탈영하거나 심지어 FLN에 가담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나치 SS와 다르다!"라며 나름 자부심을 지녔으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먼 훗날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1956년 8월 말, 프랑스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제리인들에 대한 고문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크 파리스 드 볼라르디에르 장군은 자진해서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볼라르디에르 장군은 이후 1973년에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프랑스 해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1956년 5월 알제리 제8공수 연대에 징집된 노엘 파블리에르(Noël Favrelière) 육군 하사는 약식 처형을 앞둔 알제리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그 길로 탈영해 알제리 국민 해방군에 들어갔고 10개월 후 튀니지로 넘어갔다. 1928년 3월 31일의 법 90조에 따르면 원대 복귀 불이행은 1개월에서 1년의 구금형에 처할 수 있었다. 탈영으로 두 차례의 궐석 재판을 받은 노엘은 프랑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제가 조국을 배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죠. 전 지금, 배반과는 정반대로, 알제리인이 사랑한 프랑스를 그들이 미워하지 않도록 막고 있습니다. 프랑스인이 다 식민주의자는 아니며 우리 공수부대는 나치 SS가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옳았음이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알제리 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244쪽
출처: 알제리 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244쪽
또한 좌파 성향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아예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은 신문을 발행하였고 프랑스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발행인과 기자들의 이름은 모두 익명으로 처리했다.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은 FLN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알제리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 알제리인들을 무료로 변호하기도 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나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의 암살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국 내 좌-우익 간 여론이 분열되며 지속적으로 피해가 누적되었지만 1957년 알제 전투에서 프랑스가 다시 한 번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알제리 전쟁의 행방은 오리무중으로 치달았다. 이 와중에 1958년 5월 알제리에 대해 유화적인 중도우파 플림맹 정부가 출범하자 알제리 주둔군을 시작으로 군부는 총궐기하여 정부를 협박하고 드골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였다.[5] 드골은 즉각 이에 호응하여 군부의 지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갈등 등을 십분 활용하여 단독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5월 위기'라 불리는 쿠데타와 정상적 레짐 체인지가 뒤섞인 기묘한 과정을 거친 후 프랑스 제4공화국은 무너지고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프랑스 제5공화국이 들어섰다.
드골 정부는 초기에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FLN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실시하는 한편 협상을 제시했으나 FLN이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드골 정부는 여성 해방 정책 등으로 알제리 내부 프랑스 지지 세력이 확고하다고 생각하여 1959년 "알제리의 운명은 알제리인이 결정한다"는 파격적인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드골은 알제리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 FLN을 알제리 내 소수 알제리 내셔널리스트들의 모임 정도로 인식하였으며 그는 일반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와 연을 완전히 끊는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1958년에 드골의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에 대한 승인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알제리 지역의 찬성률은 90%가 넘게 나왔다. 이 투표는 알제리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투표한 선거였고 200만명의 여성 유권자들이 투표했다. 그렇기에 드골은 자신이 일반 알제리인의 지지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알제리에 자결원칙을 적용하여 알제리인들이 일반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알제리의 자치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방안을 생각했고 이것이 알제리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이자 전쟁을 끝낼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격렬히 반발한 지휘관들을 대거 숙청한 드골은 자신의 알제리 정책을 강행하였다.
드골 정부는 1961년에 알제리에 대한 자결원칙 적용 및 독립을 포함한 FLN과의 알제리 신정부 구상안 협상 개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고 프랑스와 알제리 유권자의 75%의 동의를 얻었다. 이렇게 드골에 의해 1961년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이 확정되자 군 내부 사조직인 비밀군사조직(Organization armée secrète, OAS) 소속 극우파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에 주둔하였던 제14, 18 공수연대외 제1외인공수연대를 동원해 알제리의 주요 전략거점을 수 시간 동안 무력으로 장악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1961년 프랑스 쿠데타 시도)
4월 21일 일어난 이 반란이 확산되자 드골 대통령이 육군 정복 차림으로 방송에 나와서 반란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반란에 참가한 3개 공수연대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전력의 0.6%에 불과했기 때문에 반란은 5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반란에 가담한 공수연대들은 해체되었고 그 번호가 결번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OAS에 가입한 일부 반란군은 탈영하여 드골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하고 알제리 내에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하였다. 결국 프랑스군과 국민해방전선이 서로 손잡고 이들을 진압하게 된다.
프랑스군 극우파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매스컴의 발달이었다. 징집병 중 다수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본토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은 이들은 쿠데타에 동참한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여 쿠데타를 무산시켰다.
드골 정부는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FLN과 협상을 개시하여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동등한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의 세 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FLN은 3번안을 선택했다. 드골은 알제리가 프랑스의 품에 남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알제리인들은 드골에 대한 태도, FLN에 대한 태도와 상관없이 프랑스와 연을 끊는 완전 독립을 갈망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FLN은 1962년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 협정을 체결하였고 협정이 양국의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을 얻음으로써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했다.
3.1. 결과
알제리 국민해방전선 | 병력: 340,000명 피해: 141,000~152,863명 전사 및 160,000여 명 부상 민간인 25만명(프랑스 역사가 추산) ~150만 명(알제리 역사가 추산) 사망 |
프랑스 | 병력: 프랑스군 670,000명, 아르키(알제리계 프랑스인) 260,000명 피해: 프랑스군 30,000여 명 전사 및 65,000여 명 부상, 아르키 30,000~90,000여 명 전사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 6,000여 명 사망 |
프랑스 내 반전 및 알제리 독립 지지 세력 | 100여 명 사망 2,000여 명 투옥 |
3.2. 학살
진압을 시도하던 프랑스군은 FLN의 게릴라전에 분노해 암살, 테러, 학살로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알제리보다 인구가 4배 많았던 프랑스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진압에 나서자 FLN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프랑스는 독립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학살을 벌였다. 파리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알제리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1961년 파리 학살을 벌였다. 참고로 이 학살을 주도했던 모리스 파퐁 파리 경찰서장은 학살 이후에도 처벌은 커녕 오히려 승승장구했으나 1981년에 들어서 비시 프랑스에 협조하며 유대인 1,600명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한 것을 주도한 것이 발각되어 몰락했다. 1961년의 이 파리 학살을 기점으로 프랑스는 알제리 내에서 민간인들 거주지를 폭격하고 각종 전쟁범죄를 일으키는 등 막장 행보를 일삼았다.
물론 학살은 당장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1958년경에는 확실히 반란이 진압되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으로는 이런 무자비한 군사 작전을 지속하면서 들어가는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잔혹 행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시대가 된 데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군이 내부 붕괴를 일으키면서 허사로 돌아가게 된다.
알제리의 FLN은 1962년에 오랑 학살(1962 مذبحة وهران عام, Le massacre d'Oran ou massacre du 5 juillet 1962)을 저질렀다. 1962년 7월 5일부터 7일까지 오랑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대다수가 피에 누아르, 즉 알제리에서 태어난 백인들이다. 사망자는 400~1,500명 정도로 각 주장이 다르다. 이 오랑 학살에 대해서 알제리는 지금도 사과는커녕 인정도 하지 않고 있다.
당시 이런 학살이 이뤄질 때 알제리에 남은 프랑스군 1만 8천여 명은 구경만 했다. 오랑에서 남은 4만여 명의 피에 누아르들을 알제리 해방전선이 공격할 때 몇몇 피에 누아르들은 오랑에서 달아나 프랑스군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빌었으나 프랑스군들이 외면하고 그냥 가 버렸다는 피에 누아르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다. 심지어 도움을 요청하다가 묵살당한 피에 누아르가 흥분하여 덤벼들자 프랑스군이 개머리판으로 구타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드골 정부가 프랑스군에 어떤 전투적 행동도 하지 말고 그냥 대기하며 알제리 측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학살이 1년 전 1961년 파리 학살에 대한 알제리의 보복이라는 이들도 많다. 1962년 8월 샤를 드골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1963년에 총살된 프랑스군 중령 장 바스티앵티리는 오랑 학살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학살 피해자로서 알제리를 공격해야 한다고 법정에서 외쳤다. 그 때문에 티리 중령을 불명예 퇴역시키고 총살형에 처한 드골 정부는 오랑 학살을 방치한 프랑스군과 그 책임 등을 따지자면 프랑스 내부에서도 좋을 게 없기 때문에 티리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프랑스 극우를 중심으로 오랑 학살을 따져들고 있긴 하지만 그런 문제를 지적하면 프랑스군의 학살도 다시 부각되어야 하기에 프랑스는 여전히 깊이 따지지 못하고 있다.
구글에 algeria france war로 검색하면 프랑스군에 의해 벌어진 각종 전쟁범죄들을 담은 충격적인 사진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알제리 여성을 성폭행하고 웃는 프랑스 군인들의 충격적인 모습이나 프랑스 군인이 알제리 사람을 참수하고 기념으로 촬영한 웃고 있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사진 등. 시청 주의
한편 FLN은 전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프랑스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프랑스와 알제리의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 아랍인이나 아랍인 공무원, 알제리에 우호적인 온건파 유럽인에 대한 공격을 우선했다. 그래야만 중도파가 사라지고 양극단 세력만 남아 대결 국면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FLN은 알제리에서 지지받던 세력이 아니었다. 1956년 2월 조사에 따르면 FLN의 지지율은 10%밖에 안 됐지만 반대 여론은 20%가 넘었으며 알제리인의 80% 이상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론 과격화는 매우 손쉬운 입지 강화책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FLN은 프랑스가 알제리 통치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건 여성 참정권 확대 정책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투표인 등록을 한 여성들을 참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또 프랑스군과 FLN은 서로서로 변장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다음 "프랑스/FLN 놈들이 선량한 민간인을 학살했다!"며 언론플레이도 했다. 서로서로 대놓고도 하고 변장하고도 하면서 시민들만 죽어나갔다.
그 외에도 FLN은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들과 심각한 내분을 벌였다. 심지어 FLN이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를 습격하여 구성원들을 잔인하게 죽여 버린 사건도 있었다. 특히 MNA(Mouvement national algérien, 알제리 국민 운동)와 FLN 사이에서 진행된 카페 전쟁에서는 5천 명이 사망하였고 이는 알제리 전쟁이 단순히 프랑스 VS. 알제리 독립군의 구도로 해석될 수 없었던 알제리 내전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MNA 당원이란 이유로 30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당한 멜루자 학살 사건은 이런 폭력의 절정으로, 멜루자 출신 알제리 노동자 168명은 FLN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며 모두 아르키에 입대했다.
또한 FLN은 시골을 장악하기 위해서 가공할 정도의 폭력을 사용했다. 산악과 농촌의 알제리인들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국민해방군'들이 총을 겨누고 국민해방을 위해 가진 재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 부딪혔고 머뭇거리면 구타는 기본이요 참살당하고 교살당하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자기 아이들도 먹을 것이 없는데 먹을 것 입을 것을 FLN에게 바쳐야 했다. 반면 프랑스는 알제리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유화책과 알제리의 경제개발 등 당근을 제시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숫자의 알제리인들은 자발적으로 프랑스 통치에 합류했다.
아르키들의 숫자가 수십만에 이르렀던 것도 FLN 통치 하에서 살기 어려워진 알제리 농민들의 자발적 입대나 그냥 프랑스인과 같이 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낙인찍혀 약식 사형선고가 내려진 알제리인들이 살기 위해서 입대한 사례가 엄청난 비율을 차지한다.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만행을 크게 보도했다가는 자칫 알제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할까봐 일단 숨겼기에 당시에는 사건의 정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제리가 독립한 후에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4. 이후
4.1. 알제리의 반불 감정
알제리가 독립을 이루면서 알제리 내의 프랑스의 흔적은 깡그리 사라졌다. 1962년에 알제리 군중들은 알제에 있던 프랑스의 영웅이자 성녀인 잔 다르크 동상을 끌어내려 참수했다. # 자신들에게 악랄한 식민 지배와 탄압을 하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알제리 군중들에게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잔 다르크의 동상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의 알제리에도 스킥다에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한데 그나마 식민 지배와 전혀 무관한 동상이라 파괴하지는 않았다.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 크게 보기잔 다르크 광장으로 불리던 알제에 있던 중앙 광장도 독립하자마자 독립 전쟁의 시초가 된 사르 알 부지드(위에 서술한 대로 당시 사살된 12살 사내아이)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알제리 전역의 프랑스 관련 건물은 죄다 용도가 달라졌다. 알제에 있던 노트르담("우리 귀한 성모님"이라는 뜻의 보통명사, 놀르-드-데임) 성당은 국립도서관으로 바뀐 지 오래이며, 많은 성당들이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알제리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 또한 엄청나게 강해져서 전국의 교회와 성당을 경찰 및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폐쇄해버리고, 1996년과 2003년에는 프랑스인 신부 및 수녀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에 알제리 정부는 일부러 범인들을 잡는 척 하다가 대충 묵인해버리는 반응을 보였다.
독립 이후 알제리는 좌경 노선을 걷게 되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였고 초대 알제리 대통령이자 수상이었던 아흐메드 벤 벨라는 제3세계의 해방 및 좌익 혁명을 위해 적극적 지원을 하다 너무 지나치다는 좌익 세력 내부의 불만으로 인해 쿠데타로 망명을 떠났다가 1990년대에 알제리로 돌아와 알제에서 2012년 만 95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독립 후에도 알제리는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전까지는 국제 사회에서 좌경 노선을 따르는 제3세계 대표 국가 중 하나였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는 좋지 않으며 1980년대 초까지는 알제리의 경제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1980년대 중반의 유가하락으로 알제리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20~30대 알제리 청년들이 프랑스에 밀입국해 프랑스 사회의 심각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4.2. 여성 정책
FLN은 본래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해 프랑스의 문화 침략이며 이슬람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죄다 잡혀가는 상황에서 여자들이 혼자 남아 생계를 꾸려가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같은 사례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성의 경제적 역할이 커지자 미국,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수밖에 없어졌다. FLN에서 상당한 숫자의 여성 전투원의 참여 및 히잡을 벗어던진 서구화된 여성 조직원들의 공작이 매우 실용적이었다는 점에서 FLN도 완고한 태도를 바꿔서 여성 해방 담론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여성해방 정책을 통해서 여자들이 프랑스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남녀 가리지 않고 고문하는 프랑스의 강압적 통치와 더불어 여성들에 대한 성고문이 자행되는 사실에 여성들은 프랑스에 등을 돌려 버렸고 이는 1962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독립 찬성 투표로 이어졌다.허나 해방 이후 권력을 장악한 FLN은 군사주의적 통치로 일관하면서 진보적 가족법의 입법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나마 2대 대통령이던 우아리 부메디엔이 보수파의 반발을 물리치며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는 정책을 폈고, 뒤이어 1976년 국민헌장을 통해 남녀 평등을 선언했지만 프랑스 치하에서 금지된 일부다처제는 다시 돌아왔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한 명의 남자가 최대 4명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으나 각 아내들에게 동등한 경제적 지원을 해 주어야 하며 이 때문에 실제 일부다처제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가 그렇듯이 일부다처제를 한다고 해도 개나소나 여러 아내를 두는 건 아니라서 80년대까지 일부다처를 하는 가정은 3~5%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성 감별 낙태나 영아살해,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 같은 게 없다면 성비는 자연적으로 1:1로 수렴하니 어지간한 갑부가 아닌 이상 1:1가정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80년대 알제리에서는 남자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포할 수 있고 여자들이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가족법이 입법되자 대대적인 여성해방 운동이 벌어졌고, 이에 알제리 정부는 남녀평등은 친불반역이라는 요술방망이같은 구실로 이들을 억압했다.
4.3. 아르키와 피에 누아르가 겪은 수난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알제리계 보조병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는데 당시 프랑스군에는 1962년 기준으로 총 26만 명이나 되는 아랍인 병사가 있었다.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프랑스와 알제리는 아르키들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독립하자 그 약속은 휴지가 되었고 이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프랑스에 빌붙은 매국노가 된 그들에게는 알제리 전역에서 무자비한 보복학살이 기다릴 뿐이었다. 당사자 본인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들까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노인들은 굶겨죽이고 여자들은 사창가로 팔아넘기고 남자들은 지뢰밭에 맨몸으로 떠밀리기도 하고 광장으로 끌려나와 사람들의 욕설과 같이 침으로 범벅이 되어 산 채로 몰매를 맞아 죽거나, 총살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거세당하거나, 광장에서 목 매달린 시체로 며칠이고 방치되었는데 1963년까지 최저 3만에서 최대 15만에 달하는 아르키들이 학살되었다. 심지어 처형당하기 전에 프랑스군에서 받은 훈장을 직접 삼켜야 하기도 했다고 한다.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알제리를 탈출한 91,000명의 아르키와 그 가족들은 프랑스로 도망가서 살아야 했다. 사회 명사, 공무원, 고급장교 등 엘리트 아르키들은 프랑스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고 프랑스 정계에 닿은 연줄을 통해서 정착도 쉬웠지만 일자무식의 농민 출신 아르키들에게 프랑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온갖 잡일과 차별뿐이었다. 그렇게 알제리에서 쫓겨나고 프랑스에서도 차별받으니 이들이 사우디발 와하비즘 선교에 현혹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알제리의 주류 정치권은 아랍 사회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상당했다.
당시 프랑스는 사실 아르키가 아니라 피에 누아르들조차도 받고 싶지 않았다. 100만명이나 되는 피에 누아르와 알제리 유대인들이 피난 오는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아르키들에게 프랑스 군대 편입과 즉시 전역이라는 선택지를 제시했고 해방을 선전한 FLN의 협정도 있거니와 설마 자신들을 죽이겠거니 싶었던 아르키들의 대다수는 전역을 선택했다. 4천명도 안 되는 소수의 아르키들만 프랑스군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앞서 서술된 광란의 대학살극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아르키들은 허겁지겁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했지만 프랑스는 에비앙 협정을 구실로 개입을 거부하였고 새로운 알제리 정부와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아르키들 상당수가 FLN 첩자라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아르키들이 무기를 FLN에게 넘겨줄까봐 매우 철저하게 무장해제시켰는데 무장 해제에 투입된 프랑스군은 아르키들에게 낡은 무기를 신품으로 바꿔 주기 위해서 무기를 회수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는 아랍계 무슬림인 이들이 기독교 백인 국가인 프랑스의 인종적 순수성을 더럽힐 것이라고 꺼렸다. 결국 프랑스 장교단의 개입이 더해져 4만명 정도가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고 추가적으로 만명이 프랑스로 밀입국했다. 이 상황을 보면 가서 천대를 받을지언정 프랑스로 갈 수 있었던 아르키들은 행운아라고 해야 할 정도. -
알제리에 살던 유럽인, 즉 피에 누아르들의 처지도 아르키나 마찬가지였다. 백인이지만 알제리에서 100년이 넘게 살다 보니 모국이 낯설고 알제리에 모아둔 재산은 죄다 가루가 되었으며 급히 챙길 돈이나 귀중품만 가지고 프랑스로 가 보니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아니꼽게 보았다. 드골 정부는 이들에게 가급적 알제리에 남고 정 알제리를 떠나고 싶으면 브라질로 대신 가라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결국 드골 정부의 당초 예상인 38만명을 훨씬 넘는 90만명의 피에 누아르와 10만명의 유대인이 프랑스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 제국의 붕괴를 상징하여 프랑스 민족주의에 상처를 주는 존재들이었고 정체성도 크게 달랐다. 결국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이민가거나 다시 튀니지 같이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지만 프랑스에 대한 증오가 덜한 이웃 나라로 이민을 가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떠나는 이들만 속출했다. 알제리가 아르키 후손들을 용서해 주면서 이들 일부가 프랑스로 가서 살기도 하는 와중에 피에 누아르들도 알제리로 돌아가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피에 누아르들은 알제리 독립 당시 몰수당한 농장이라든지 여러 재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알제리 측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청년실업 문제 해결이 급한 상태인 데다 알제리 정부 입장에서 농장을 다시 되돌려 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에 다시 줄 이유도 없다. 프랑스 측도 알아서 하라는 투로 물러서기에 실현, 반영될 일은 없어 보인다.
프랑스로 귀국한 피에 누아르들은 대부분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했는데 오늘날 이곳은 극우파 국민전선의 주요 정치적 기반이 되고 있다.
현직 프랑스 내무장관인 제랄드 다르마낭(Gérald Darmanin, 1982~)이 아르키의 손자다. 그도 가난했다가 자수성가하여 내무장관이 될 수 있었다.
알제리에서 아르키는 매국노로 여겨지고 있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알제리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이슬람 반군들이 정부군과 정부측 경찰을 비난할 때 쓴 표현이 '아르키'였으며, 2012년 알제리 언론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알제리인의 84%가 아르키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고 한다.[7]
한편 2001년에는 몇몇 아르키들이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을 '반인륜 범죄'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 하지만, 알제리에선 적반하장이라고 비난만 거세졌고 프랑스에선 입다물고 모른 척했기에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4. 프랑스에 미친 영향
알제리 독립 전쟁은 프랑스군의 전력을 퇴보시켰다. 아무리 정예 기계화 부대라도 알제리에 일단 투입되면 그저 대게릴라전에 종사하는 보병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1958년에는 공군에서 병력 1만 명을 차출해 육군으로 전군시켜 알제리에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병력이 부족해서 예비역을 소집하고 현역병 복무기간을 27개월로 연장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의 인구구조를 보면 1920~40년대 전반기에 출생한 세대들이 적은 편이었는데 안 그래도 적은 이들을 데리고가니 전후 복구에 상당한 지장을 주는 것은 당연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베이비붐 시절이라서 아이가 많았다는 점이 위안거리.그리고 이 전쟁으로 기득권 기성 세대에 환멸을 느낀 청년층이 들고 일어나 68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2차대전의 6주 항복에 이어 베트남에서 지고 알제리에서까지 지는 3연타를 기록하면서 프랑스군의 '자존심과 실력이 반비례하는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독일에게 지고 식민지한테도 졌는데도 무슨 열강이냐는 것. 나치에게 진 것은 피해자 이미지라도 있지만 베트남/알제리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패배한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이후 프랑스군은 걸프 전쟁에 참전하여 실전도 치르고 전사자도 내면서 승리에 기여했지만 정작 전세계에는 "걸프전에 프랑스군도 실전에 참전했냐? 미국이 거의 주력을 다 맡지 않았냐?"는 인식만 뿌리박혀 있다.
프랑스에서 좌우익의 견해가 가장 다른 것이 이 알제리 전쟁이다. 좌익들은 이 전쟁을 불의한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우익들은 이 전쟁을 "소련과 이집트를 위시한 아랍 국가들의 지원으로 발생한 자국 내의 중대한 반란"으로 취급하여 알제리의 독립운동 성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부 극우들은 아직도 알제리가 프랑스 땅이라고 주장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거부해 왔던 공식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요구하는 학살 보상 및 핵실험 관련 문제와 같은 일은 보류하고 있기에 알제리에서는 반쪽도 안 되는 사과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랑스 백인 우월주의자이며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총재인 장마리 르펜이 젊은 시절 육군 공수부대 장교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바 있는데 당연히 학살을 부정하고 알제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프랑스계 거주자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2009년 선거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는 그림으로 대문을 장식했다가 알제리 여론의 반발을 불러오자 사르코지 정부는 알제리에서 반프랑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결국 2011년 정계에서 완전 은퇴하면서도 알제리를 내버린 프랑스를 따져가며 자기 잘못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알제리는 프랑스의 영토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노리면서 알제리 및 북아프리카 이슬람 나라들의 교류를 위하여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알제리와 관계개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알제리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그동안 알제리의 폭동, 프랑스 영토 알제리라고 하던 여자가 잘도 이제와서 일부 학살 인정에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며 진정으로 사죄한다면 200만 학살 인정 및 보상을 하라고 맞설 뿐이다. 결국 알제리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던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알제리에서 축하하며 반가워했다.
5. 일화
- 프랑스가 알제리를 통합하려고 시도하던 독립 전쟁 전의 알제리 초등학교에서는 프랑스 본토와 같은 교과서를 사용했다. 그 역사 교과서의 첫 문장은 "우리의 조상인 갈리아인들은...(후략)"으로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알제리인은 갈리아인과 혈통상으로 전혀 상관 없으며, 갈리아인보다는 차라리 로마 제국 시절에 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모두 지배했던 라틴족과 더 관련이 있다. 갈리아로 이주한 라틴족은 원주민인 갈리아인과 더불어 프랑스인의 조상이 되었고,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라틴족은 알제리인을 포함한 북아프리카인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 이방인으로 유명한 문인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출신 피에 누아르로서 프랑스-스페인 혼혈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 좌파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알제리의 독립에 반대하였다. 그는 독립보다는 프랑스 내에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프랑스 좌우익 및 알제리 독립진영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왕따 취급당했는데 카뮈는 그에 개의치 않긴 했다. 알제리인들에게 카뮈는 침략자의 상징이 되어 지금은 알제리에 가면 그가 살던 집들은 부서지거나 재공사 후 사람들이 새로 들어가 살면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더불어 알제리에서 그의 이름은 아예 모르는 이름이다. 카뮈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세워진 그의 문학 기념비는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을 누군가가 부숴 놓아서 누굴 위하여 만든 건지도 모르게 되었다. 당연히 관리도 되지 않아서 금이 가 있고 한동안 누군가가 신나게 두들겨패서인지 낡아 있다.
-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는 이브 생로랑 역시 프랑스령 알제리의 제2의 도시인 오랑에서 출생한 후 살아온 피에 누아르다. 그는 1960년 알제리 전쟁 당시 육군에 징집되어 전쟁에 투입되었으나 평소 소극적이고 여성스러운 성격이었던 그는 군대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잔혹한 전쟁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20일만에 정신병이 발병했고 다행히 파리에 있는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다.
- 베트남의 황제인 함응이는 살아 생전 독립운동 혐의로 프랑스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후 알제리로 유배 온 후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대부분이 이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래도 일부는 그 와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지라 알제리 국민혁명군은 온갖 잡다한 무기를 다 사용했다. 1958년에 외국인 기자가 방문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독일제 81mm 박격포(대대당 1~2문), 독일제 MG42 기관총, 영국제 브렌 기관총, 미국제 57mm 무반동총, 영국제 리엔필드 소총, 이집트가 제공한 마우저 소총, 미국제 개런드 소총, 프랑스제 MAS 소총, 독일제 대전차지뢰, 영국제 또는 프랑스제 C3 폭약, 영국제 수통, 미국제 탄띠 등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6. 알제리의 독립유공자 대우
알제리는 독립 직후인 1962년부터 무자헤딘부(Ministère des Moudjahidine)[8]를 통해 독립유공자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위한 전국순교자자녀기구도 1997년 만들어졌다.무자히드와 순교자의 법은 1999년 현행으로 개정되었다. 법 전문(아랍어)
7. 창작물에서
이 직후 벌어진 베트남 전쟁이 워낙 시끄러웠고 정작 프랑스에서는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인 탓인지 그 규모와 피해에 비하자면 이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그리 많지 않다.1964년에 나온 자크 드미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남주인공이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다리를 다치고 애인과도 헤어진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리고 은근슬쩍 전쟁으로 인해 힘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전반에 깔아두고 있지만 태생적인 한계(멜로 영화) 때문에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쟁 기간이 누벨바그 감독들이 왕성하던 시절이라 검열로 인해 표현은 못 해도 은근슬쩍 언급되는 영화들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장뤽 고다르의 작은 병정이 있다. 그 중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인 아름다운 5월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의 차별주의적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후 미국의 콜롬비아 영화사에서 제작한 1966년작 로스트 커맨드(라스페기)가 이 전쟁을 최초로 직접 다룬 영화이다. 라스페기는 한국 상영 제목으로 장년층들의 경우 대부분 이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케이블의 클래식 영화 채널 등에서 다시 방영할 때는 원래 제목 로스트 커맨드로 방송하고 있다. 이 영화는 안소니 퀸과 알랭 들롱이 주연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함께한 프랑스군 공수부대의 라스피기 대령과 그 부하들이 포로 생활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전공을 세우고싶은 라스피기 대령을 따라 부하들이 뭉쳐 다시 한번 알제리에 파병을 가고 거기서 디엔비엔푸 시절 동료였던 알제리 출신 장교인 마흐디 중위가 이끄는 독립군과 싸운다는 내용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로서, 특히 도입부의 디엔비엔푸 전투 부분의 처절함이 상당히 묘사가 잘 되어 있다. 베트민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로 전투가 벌어져서 전투 초반에 대부분의 프랑스군 방어진지가 그대로 휩쓸려 나간다. 남은 프랑스군은 죽을 때만 기다리며 절망적인 저항을 하고 있고 그 뒤 증원으로 투입되는 공수부대는 대부분 전부 적진으로 떨어져 투입 즉시 전멸한다.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 초반부의 의기롭던 라스피기 대령과 그 부하들이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고 점점더 무자비해지며 포로 시절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던 마흐디 중위 역시 기껏 돌아온 고향이 피폐해지고 가정이 초토화되자 독립군이 되는 등 선악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지기도 한다. 결국 마흐디 중위의 독립군을 소탕한 라스피기와 그 부하들은 진급하며 훈장도 받지만 그의 부하 중 하나였던 에스클레비어 대위는 환멸을 느껴 군복을 벗는다. 하지만 군복을 벗고 프랑스로 돌아가던 그는 알제리인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짐을 느끼게 되고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조국의 더러운 전쟁이 망할 것을 예상하듯이 대하며 영화는 끝난다.
종전 직후 알제리 정부와 FLN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좌파 영화인들이 제작한 장편영화 《알제리 전투(La battaglia di Algeri. 1965)》가 가장 유명하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데, 상영 당시 프랑수와 트뤼포만 마지막까지 남아 시상될때 손뼉까지 치며 축하해 주었다. 그밖에도 장뤽 고다르[9], 루이 말과 같은 프랑스 유명 영화인들은 앞서 언급한 트뤼포 한 사람을 빼고 모두 보이콧한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 질로 폰테코르보는 평소 카예 뒤 시네마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크 리베트가 폰테코르보의 영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글은 아직도 언급된다. 그 뒤에 트뤼포를 프랑스 극우들이 엄청 씹었으나 트뤼포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참고로 영화음악의 거장 엔리오 모리코네의 초기 대표작중 하나가 바로 알제리 전투의 메인 테마이다. 2009년 10월 한국에서도 아트하우스 극장 재개봉 형식으로 개봉되었다.
한편 알제리에서는 1975년 모하메드 라크다르 하미 감독이 식민지 시절부터 알제리 전쟁 발발까지 다룬 《불타는 해의 연대기》라는 영화를 만들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수상 당시 프랑스 극우파들이 모하메드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프랑스 내무장관이 급하게 영화제에 참석한 모하메드 감독 가족들에게 호위 부대를 붙여줘야 했다. 모하메드는 이후 마그레브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과작 감독으로 남았다. 그리고 2014년에 오래간만에 신작을 만들었다.
전쟁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흘러서야 비로소 프랑스의 시각으로 다루어진 창작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오스트리아 출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프랑스에서 만든 2005년작 '히든'이라는 영화가 유명하다. 이 쪽은 1961년 파리 학살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망각을 스릴러로 비판한 영화. 이 영화를 보면 지금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다. 2005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DVD 출시.
하지만 프랑스 영화로서 알제리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은 2007년에 등장한 《친밀한 적(L'ennemi intime)》이 사실상 최초이다.
이외에도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인 라쉬드 부샤렙 감독은 《영광의 날들》(2006)과 《무법자》(2010)라는 연작을 만들었다. 《영광의 날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알제리 출신 식민지군 병사들의 이야기고 《무법자》는 파리 학살에 대한 이야기다.
《Simon: An English Legionnaire(한국 개봉명-톰 하디의 도망자)》(2002)는 이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한 영국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톰 하디가 국적을 조작하고 입대한 프랑스인 전우로 출연했다. 결국 이 프랑스인 전우는 샤를 드골이 알제리의 독립을 허락한 것에 반발하며 알제리인들을 총으로 학살하다가 주인공에게 사살당한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은 알제리 전쟁 직후 백색테러의 표적이 된 샤를 드골에 대한 암살 음모를 배경으로 한다.
택시 2에서 여주인공 릴리의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때의 무용담을 말하는 걸 선호한다.
8. 관련 문서
9. 참고 자료
2017년 9월 29일 문학동네에서 알제리 독립 전쟁을 다룬 책인 <알제리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이 출간되었다. 672쪽의 방대한 분량에 상세한 자료들을 첨부하여 알제리 전쟁에 대한 자료나 인식이 희박한 대한민국의 세계사 지식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저서다. 대한민국에서 알제리 전쟁을 자세하게 다룬 도서 중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링크그 외에 모던 타임즈(폴 존슨), 세계유격전사(육군본부), 1945년 이후의 전쟁(마이클 카버) 등도 구할 수 있다면 참고하면 좋다.
[1] 소설 자칼의 날에서 샤를 드골의 암살을 사주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2] 이름이 뭣하긴 하지만 프랑스와 알제리 간의 전쟁이므로 불알전쟁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 단어로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3] 출처: <알제리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4] 최소 6,000명에서 최대 45,000명 정도로 추산한다.[5] 이때 군부는 드골의 집권이 여러 이유로든 승인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낙하산병과 기갑부대를 이용해 파리를 점령할 후 프랑스 정부를 제거할 계획까지 비밀리에 짰다고 한다. 그러나 군부가 코르시카를 점령하자 기겁한 프랑스 정부가 사임하면서 파리 점령은 무산되었다. 만약 실제로 군부의 파리 점령이 일어났더라면 2차 대전 후 선진국 본토에서 일어난 유이한 쿠데타들인 23-F와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을 줬을 것이다.(상임이사국 수도에서 대놓고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격이니...)[6] 지단의 아버지인 스마일 지단(Smail Zidane)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협력했던 알제리 출신 민병대인 아르키(harki) 출신이라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지단의 부모는 전쟁 발발 이전에 프랑스로 건너왔으며, 지단 본인도 자신의 부친은 아르키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7] 비교하자면 한국에서 전두환을 부정평가하는 사람 비율이 71%, 루마니아에서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부정평가하는 사람 비율이 80%다.[8] 무자헤딘이란 단어가 아랍어로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를 뜻한다.[9] 고다르가 감독한 영화 《작은 병정》은 알제리 전쟁을 간접적으로 다뤘는데,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걸려서 3년 동안 상영금지를 당해서 1963년에서야 개봉한 경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