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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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운동 義和團 運動 Boxer Rebell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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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전투에서의 미 해병대 병력을 그린 기록화 | ||
▲ 독일 제국군 해군 육전대 | ||
▲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성 함락전 | ||
시기 | 1899년 (덕종 25년) 10월 18일 ~ 1901년 (덕종 27년) 9월 7일 | |
장소 | 청나라 화북지방, 만주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8개국 연합 (공세)
승 | 청-의화단 연합 (수세) [[청나라| ]][[틀:국기| ]][[틀:국기| ]] 패 |
주요 인물 | 영국 지휘관 에드워드 시모어 경 클라우드 맥도날드 알프레드 가젤리 | 청나라 지휘관 ''' 덕종 (청 황제) 서태후 육현 영록 유록 † 동복상 섭사성 송경 마옥곤 애신각라 재의 (단군왕) 마복흥 마복상 이병형 † 의화단 장덕성 † 조복전 †''' |
프랑스 지휘관 로베르 니벨 | ||
러시아 지휘관 니콜라이 리네비치 알렉세이 쿠로팟킨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파울 폰 렌넨캄프 | ||
독일 지휘관 · 연합군 총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 | ||
미국 지휘관 애드너 채피 에머슨 H. 리스컴 | ||
일본 지휘관 후쿠시마 야스마사 | ||
병력 | 연합군: 71,920명 | 청군: 300,000명 |
피해 | 사상자: 33,000명 ↑ - 군인: 757명 - 중국 내 그리스도교인: 32,000여 명 - 서양인 선교사: 200여 명 | 사상자: 100,000명 ↑ |
결과 | 8개국 연합의 승리 | |
영향 | 신축조약 체결 |
언어별 명칭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ecd21,#000080><colcolor=#00386a,#fefd48> 한국어 | 의화단 운동 |
중국어 | [ruby(义和团, ruby=Yìhétuán)][ruby(运动, ruby=yùndòng)] | |
영어 | Yihetuan Movement[1] Boxer Rebellion[2] | |
러시아어 | Ихэтуаньское восстание | |
프랑스어 | Révolte des Boxers | |
이탈리아어 | Ribellione dei Boxer | |
독일어 | Boxeraufstand | |
일본어 | [ruby(義和団, ruby=ぎわだん)]の[ruby(乱, ruby=らん)]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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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神)이 의화단을 돕는 이유는 도깨비 같은 놈들이 중국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놈들은 기독교를 선전하고 다니면서 하늘을 모독하고 부처를 경배하지 않으며 조상을 돌보지 않는다. 철도를 부수고, 전선을 끊고, 커다란 기선을 파괴하자. 그렇게 하면 프랑스는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고, 영국과 러시아는 조용해질 것이다. 도깨비 같은 놈들을 모두 죽여서 청나라의 평화를 축하하자.
의화단 선전물
의화단 선전물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1899년 ~ 1901년 약 2년에 걸쳐 청나라와 의화단(義和團)이 일본 제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미국의 열강 8개국 연합군과 벌인 국제전쟁이다. 청나라와 의화단은 8개국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1901년 신축조약을 통해 종결되었다. 이를 통해 외국 군대가 중국에 주둔하게 허가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수도 베이징까지 유린당했다.
2. 명칭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이 운동의 폭력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고 도리어 의화단을 앞세워 유럽에 도전한 청이 패배한 후 전쟁의 책임을 의화단에 떠넘겨 버리기 위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즉 실상은 청나라가 이끈 전쟁이지만 “의화단이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서양인을 죽인 거에요 청나라는 몰라요”한 셈. 실제로 이 전쟁의 화평조약인 신축조약에서 의화단을 부르는 이름은 권비(拳匪)고 그들의 행동은 권비창란(拳匪倡亂)이라고 일컫는데 영어 명칭인 Boxer Rebellion은 의화권이 권투 같다고[3] 하여 당시의 스타일로 직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화권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학계에서는 반외세 운동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어 의화단 운동(義和團 運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일본 제국에서는 이 이름을 따서 권비(拳匪)의 난이라고도 불렀다.옛 표현으로는 의화단사변(義和團事變)이 있다. 조금 마이너하지만 북청사변(北淸事變)[4]이라 부르기도 한다.
3. 전개
3.1. 배경
청나라는 아편전쟁의 패배와 영국,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불평등 조약 체결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동치 연간의 양무운동의 전개로 이러한 내리막길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어 다시 몰락을 시작한다. 이런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유럽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유교 등의 동양사상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마음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침략하는 앞잡이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반외세, 반서양 감정이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는 서양 선교사들의 문제도 있었는데 이들이 중국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중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원래부터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이던 청나라 조정과 지방 정부도 반서양, 반그리스도교 정서를 부추겼으며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국이 그리스도교의 나라가 될 것을 우려했다.<colcolor=#00386a> |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의화단의 격문에 그려진 <사저참양도>(射猪斬羊圖)[5] (컬러 그림 & 출처) |
3.2. 의화단의 봉기와 만행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이었다. 소규모 지반이었던 이들은 무술을 기반으로 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백련교 세력과 결합하면서 큰 무리가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강경한 진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의 세력은 계속해서 번져나갔고 이들은 마침 서양 세력에 원한이 있던 단군왕 아이신기오로 자이이의 부추김을 받아[6] '청을 돕고 함께 양인들을 물리치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와 공사관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폭행과 함께 무참히 희생되었고 45,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 그리스도교인들마저 살해되었다.당시 의화단은 극심한 잔혹 행위를 자행했는데 학살과 고문 외에도 서양 여성과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국민 여성을 붙잡으면 곧바로 옷을 벗기고 돌아가면서 윤간한 뒤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였다. 특히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던 의화단은 서양 여성은 좌용(锉舂)이라고 하여 무참히 윤간한 후 가슴과 음부를 짓뭉개는 등 각종 끔찍한 고문을 하고 죽였다. 이후 외국 공관이 의화단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했던 서양 여성들은 이미 의화단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자살을 준비할 정도였다.
더구나 양인 여자 1명을 죽이면 은 50냥을, 양인 아이 1명을 죽이면 30냥을 상금으로 주었는데 이런 상금을 받기 위해 기존 의화단 단원뿐만 아니라 비의화단 중국인들까지 도처에서 살인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서양제 성냥이나 연필을 쓴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据记载,义和团之杀教民毛子也,备诸酷虐,锉舂,烧磨,活埋,炮烹,支解,腰杀,殆难尽述。京西天主堂坟地,悉遭发掘,若利玛窦,庞迪我,汤若望,南怀仁诸名公遗骨,无一免者。保定属有张登者,多教民,团匪得其妇女,则挖坑倒置,填土露其下体,以为笑乐.”
당시 의화단의 자행한 살해 방식으로는 서양 남녀를 벗겨서 남성의 성기를 자르거나 여성의 음부를 짓뭉개는 좌용(锉舂),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굽는 소마(烧磨), 물속에 넣고 삶아서 익혀 썰어먹는 포팽(炮烹) 등이 벌어졌으며 사람을 산채로 묻어 죽이는 활매(活埋), 팔과 다리 각을 뜨는 지해(支解), 칼이나 작두로 머리나 허리를 양단해 버리는 요살(腰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화단의 봉기에 따른 폭력행위에 관한 주장은 다음 글에 정리되어 있어 신빙성을 잘 따져서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글1, 글2
의화단의 잔혹행위를 묘사한 그림.
3.3. 청나라의 선전포고
의화단의 무차별적인 잔학행위에 자국민까지 피해를 입자 서구열강은 청 조정에 의화단의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단군왕 등 일부 황족 세력은 오히려 이들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결국 청나라의 태도와 의화단의 만행을 보다못한 열강들은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군을 동원해 이들이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태후가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7] 이 때 광서제는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실권 없는 허수아비였다.청나라 조정은 1900년 6월 21일 서양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선전포고의 양식이 결정된 것은 1907년 개전에 관한 협약 이후이고 이전에는 관습법상 국내건 국외건 전쟁을 벌이는 포고 행위만으로도 선전포고로 간주되었다. 1900년 6월 21일에 내려진 선전조서는 국제법상 de facto declaration of war에 해당하며 국제법상으로는 이것도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광서제는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의화단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했다. 독일 제국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는 이에 항의하려고 외출했다가 만주족인 엔 하이가 지휘하는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8] 이에 독일 공사관을 경비하던 독일 제국 해군의 해군 보병들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청나라 외무아문(외교부)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공무원들을 잡아 단체로 린치를 가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도 의화단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한편 베이징에서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고 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외국인 지구로 도망쳐 약 4,000여명이 외국인 지구에 갇히게 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로 호위해서 톈진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으나 안전을 우려한 외국인 지구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 등 기본물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외국인 지구로 피신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
3.4. 8개국 연합군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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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국 연합군 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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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공격에 맞서 교전하는 영국군과 일본군 |
이때 동원된 병력의 규모는 지상 병력만 약 50,000명에 달했다. 이 중 주력은 일본군(육전대 포함 21,000명)과 러시아군(수병연대 포함 13,000명), 그리고 영국군(해병대 포함 12,000명)이었다. 여기에 프랑스군과 미군이 각각 3,000명, 독일 제국군이 육군과 해군 보병 900명, 이탈리아 왕국군은 해군 함정과 육군의 베르살리에리 연대[10]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해군 함정만 파견하고 각 함정의 육상병력을 모아 중대 이하 규모로 명목상의 지상군을 편성해서 독일군 또는 영국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갔다.
원정군 사령관은 병력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고위급 외교관이 피살된 독일 제국에서 맡아 총사령관으로는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 참모총장을 지낸 독일 육군 제3군 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 육군 원수가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도 하기 전에 청 정부는 연합군에 굴복했으나, 이후 1년간 중국에 주둔하면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그가 사실상의 전제군주인 독일 황제(카이저)의 신하이며 백작 작위를 소유한 귀족[11]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화국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은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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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을 함락시킨 연합군 |
후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연합군은 군사력을 집중하여 빠르게 텐진을 함락시키고, 곧장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8개국 연합군 내에서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때 만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는 등 세력 확장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영국 등 다른 열강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특히 러시아에 팽창에 맞서 '그레이트 게임'을 치르던 영국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연합군을 상대하게 된 청군과 의화단은 무장이나 조직력이 형편없었고 계속해서 패배했다. 의화단의 실체는 깡패와 도적, 사회하류층이 섞여있는 폭도에 불과했고, 청군은 청나라 기득권층의 방해로 제대로된 개혁을 이룩하지 못해 전근대적인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가지고 전세계에서 정복활동을 해오던 서구열강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3.5. 연합군의 베이징 함락과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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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자금성에 입성하는 연합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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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단 공원을 점령한 벵갈 창기병 연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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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전(자금성의 정전) 황제의 용상 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연합군 소속의 이등병, 상등병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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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이 미화한 의화단과 연합군의 전투를 그린 일러스트 |
결국 선전포고한지 2개월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4일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 이는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두 번째 함락이었다.
서태후는 수도에 남아 강화를 맺으려는 광서제를 반강제로 대동한 채 8월 15일에 베이징에서 간신히 달아났다. 그리고 천춘쉬안의 보좌를 받아 서안(장안=시안)으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광서제가 총애한 후궁인 진비 타타라씨가 죽었다. 전후 조정의 공식 입장은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운 다급한 상황에서 정절을 위협받은 진비가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태감과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술정변 이후 유폐되었던 진비가 서태후 앞으로 끌려왔을 때 황제가 "피난하지 말고 연합군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격노한 서태후가 태감 최옥귀에게 명령해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었다. 상황이 다급해서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웠다는 조정의 입장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서안 피난길에 대동한 여성 중 진비의 자매이자 광서제의 후궁인 근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국민이 의화단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대노한 8개국 연합군들의 피의 복수는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황제가 떠난 베이징을 점령한 8개국 연합군은 3일간 자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는 경사(京師)의 변(變)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연합군들은 베이징 시내 거리와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중국인들을 폭행하거나 납치, 강간하는 등의 보복을 자행했다. 납치당한 중국인들은 강제노역을 하거나 강제로 서양인들의 첩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군은 청나라인의 특징인 변발된 머리가죽을 뜯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외인부대>라는 책자에 의하면 프랑스 외인부대도 이 전쟁에 참전하여 의화단 반군을 죽이고 변발이 붙은 머리가죽을 트로피처럼 가지고 다니거나 부대를 장식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렇게 장식하다가 현재는 말꼬리로 바꾸었다고 서술하며 말꼬리를 장식한 외인부대 행사 사진을 싣기도 했다.
가장 심하게 약탈을 자행한 군대는 독일군이었다. 공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은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크게 분노하여 중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독일 제국군 병사들에게 "옛날 훈족의 아틸라가 그랬듯이, 중국을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마음껏 저질러서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라."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잔혹한 보복의 결과, 의화단은 궤멸되었고[12] 의화단이 아닌 수많은 일개 민간인들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의화단이 아닌 중국인들조차 상금을 탐내고 외국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으니 순수한 피해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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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8개 연합국의 병사들을 대표로 차출해 찍은 사진.[13] 왼쪽부터 영국, 미국, 호주 자치령, 인도 제국(영국),[14] 독일 제국,[15] 프랑스 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16] 일본 제국.[17] |
3.6. 전쟁의 종결
전쟁에서 크게 패한 청 정부는 화친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배상할 것과 의화단과 의화단과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의화단을 묵인하고 지원해 준 산동순무 육현(毓賢)은 처형되었으며 의화단을 지지했던 재의(아이신기오로 자이의)는 황족임을 고려하여 아들 부준과 함께 서북 신강으로 추방되었다. 특히, 독일의 외교관이 사망한 것 때문에 광서제의 이복동생으로 훗날 선통제의 생부가 되는 순친왕이 직접 독일까지 가서 빌헬름 2세에게 사죄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이 황족인 재풍에게 고두를 요구했다는 것은 당시 유럽 언론에 실린 헛소문으로, 이런 보도가 나오면서 독일은 전쟁 이겼다고 눈에 뵈는게 없는 깡패들로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어서 독일 측은 엄청나게 당혹스러워했다. 실상은 독일이 재풍의 수행원들에게 고두를 하라고 요구한 것인데, 청나라 측이 이를 로비를 쓰는 대신에 정치적 책략을 써서 회피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독일 훈장을 받은 음창을 통역관으로 배치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사작위와 훈장을 받은 고위 인물들을 수행원들로 보내어 독일 황제가 영국과 프랑스의 기사와 훈작사들에게 동양식 이교도 군신관계의 예를 요구하는 매우 곤란한 구도를 만들어버림으로써 독일이 고두 요구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재풍을 접견하면서 재풍과 음창 두 사람만 입장하게 했고 수행원들은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정리했으며 음창도 고두를 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이후 청나라와 열강은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했다. 당시 양무운동의 실패로 실각한 이홍장이 청나라측 전권대사로 참여했다.[18] 조약의 결과로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받아냈고 서태후는 의화단에게 패배의 책임을 다 뒤집어 씌우고 숙청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잡음이 있었다. 이전부터 러시아의 계속된 세력 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동안에도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병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0,000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일본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 신축조약의 청나라측 전권대사 이홍장과 청황실이 러시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을 사실상 묵인했다. 더 나아가서 연해주처럼 헤이룽장성 및 하얼빈의 북만주, 위구르, 내외몽골을 전부 병탄하여 송화강-고비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 로 삼으려고 했으며 이는 러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푸젠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샤먼 침공 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나 서양 열강들이 단칼에 거절함으로 인해서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실패했지만 당시 일본의 실력을 눈여겨 본 영국과 1901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서양 열강의 주구, 극동의 헌병,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은 푸젠성 대신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19]
4. 종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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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중국, 미국 독수리가 뒤에서 보는 와중 유럽 열강들과 일본이 의화단 운동 후 중국을 분할하려 한다, 1900[20][21][22] |
특히 신축조약의 결과로 사건에 관여한 열강 11개국[23]에게 백은 9억 8,000만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액을 지급하게 되었다. 4억 5,000만 냥에 연이율 4%로 39년 분납 조건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11년치 재정과 맞먹는다. 현 가치로는 300억 정도며 이후 북양정부, 국민정부 모두 이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조건으로 상환을 잠시 유예받았으며, 이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야 탕감받았다.
더불어 베이징을 지키는 최종 방어선인 톈진 대고구의 포대를 해체하고 코앞 베이징~산해관까지 연합군 군대가 주둔하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는 청나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조치였는데, 이곳은 제1차, 2차 아편전쟁에서 활약했던 포대였다. 특히 2차에서는 당시 최강이었던 서양 함대를 박살낸 전력이 있는 대단한 포대였는데 이를 해체했으니 수도 베이징 방어가 부실해져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인천광역시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해안포를 모조리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비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특히 '주술로 총을 막으려고 한' 의화단의 이미지는 중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며 서양 열강의 조롱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 '덩치만 큰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겨지던 풍조가 이때 완전히 고착되었다. 그나마 중국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점은 러시아를 제외한 열강들은 경제적 이득을 노렸지 영토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령 인도는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영국의 인도 지배는 100년 이상 원래 동인도 회사가 벵골 태수를 얼굴마담으로 삼다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무늬만 남았던 무굴 제국을 해체하고 수십 개 인도 번왕국을 병립시켜 영국령이 아닌 인도 제국령으로 간접통치했다. 평상시 영국군 정규군과 관료들의 숫자는 수천이 넘지 않았다. 즉 대부분의 식민지 주둔군은 현지 병력이었다.[24][25]
미국은 식민지 확보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가령 스페인과의 전쟁 후 전리품으로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필리핀을 얻었지만 쿠바와 필리핀은 즉시 독립시키겠다고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경우 공화당 내 인종차별적인 고립주의자들이 야만인들을 자국의 세금으로 먹여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포기할 것을 종용할 정도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열강들과 달리 미국은 본토에도 미개척지가 상당부분 남아 있을 정도로 가진 영토가 많았다. 때문에 해외 영토 개척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광활한 영토에는 세계 최대 매장량과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애팔래치아의 탄전, 20세기 초반에 전세계 생산량 50% 이상을 차지한 텍사스의 유전, 캘리포니아의 금광산, 오대호 지방의 엄청난 수자원과 대륙 중부 대평원의 농업지대가 있었다. 이미 미국은 자원부국이었고 20세기 초반 식민지 없이도 미국의 경제력은 최대의 식민제국 영국을 두 배 이상 추월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의 영토와 자원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1840년대 아편전쟁 이전부터 임칙서 같은 인물들이 구미 열강들이 영토보다는 교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홍장도 1870년대 조선 조정에 영미는 교역이익만 추구해서 위험하지 않으니 이들과 수교하여 러시아를 견제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직접적으로 일리 지방에서 충돌하여 신강 지역을 일부 가져갔고 2차 아편전쟁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통째로 할양받았다. 그리고 만주 몽골 횡단 철도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가져가고 뤼순항을 조차하는 등 만주와 몽골 전체를 영향권 하에 넣기 위해 노골적으로 청 조정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미가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하는 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작전을 폈다.
한편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지식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잡았다. 지식층은 서구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한편 사실상 서구 제국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린 만주족의 청 조정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커졌다. 이 시기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는 밑바탕이 되었다.
5. 기타 국가들의 참전
5.1. 대한제국의 참전
의화단 운동은 바로 옆의 대한제국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던 중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당시 대한제국군은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과 청군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의화단과 청군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월경하여 약탈하자 점차 대한제국군을 강화시켰고 1901년에는 예산의 41%를 국방비에 편성하여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다.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이들과 교전하였으며 이후 연합군이 유리해지자 고종이 참전 의사를 밝혔지만 그 때는 이미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이후였고, 결국 참전은 무산되었다.5.1.1. 영향
그러나 참전과는 별개로 당시 청과 가까운 대한제국이 물자를 보급받기 좋은 요지였고, 일본 제국을 제외한 연합군,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의 군수물자 보급을 맡아 인력[26]과 자원[27]을 수출하여 2년간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수출액이 1.9배 증가했으며 많은 외국 군함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이때 얻은 경제적 이득은 광무개혁의 주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만주 지역을 러시아군이 점령하는 등 만주의 정세가 급변한 틈을 타 간도로 진출하기도 했다.좋은 영향만 끼친 건 아니었는데, 의화단과 러시아군의 약탈로 인해 의주의 한국인들이 대량으로 도망가는 등 국경 지대와 간도의 한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패잔병, 선교사, 난민 등 수많은 외국인들이 대한제국으로 피난을 오자 이를 빌미로 한 열강들의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한 의화단 운동에 영향을 받은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대부분 대한제국군에게 진압당했다.
5.2. 오스만 제국의 참전
당대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도 전쟁에 관여하여 오스만 제국군 장교단을 중국에 보냈는데 오스만이 칼리파의 권위를 내세워 무슬림들인 청나라 회족 부대를 분열시키길 원했던 독일 제국의 제안 때문이었다.6. 국가별 주요 참전자
- 독일 제국
-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발더제: 연합군 총사령관
- 육군 중위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28]
- 육군 소위 빌헬름 리터 폰 레프[29]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해군 대령 안톤 하우스[30]: SMS 마리아 테레지아함 함장
- 해군 사관후보생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31]
7. 창작물에서
7.1. 소설
-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 2부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다. 주인공 이선의 활약으로 원래 역사보다 오래 생존한 영국의 찰스 조지 고든과 대한제국의 주청공사 홍영식이 열강들과 청의 평화적인 합의를 모색하기 위해 서태후와 광서제에게 최후의 접선을 하러 가지만 청의 군인들에게 잔혹하게 피살당하고[32] 결국 의화단 전쟁이 발발한다. 이후는 원래 역사와 동일하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도 소설상 메인 이벤트 중 하나다. 원래 역사에선 참전을 안 했던 대한제국이지만 여기서는 군대가 어느 정도 키워지고 결정적으로 간도지역 한인촌 및 접경지 보호, 청에 파견된 주재관의 위험이라는 명분이 생기면서 참전하게 된다. 주인공의 각종 개혁으로 성장한 대한제국군의 첫 국제 무대 데뷔전이며 실제로 활약을 이어가지만 고종이 폭주하면서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었지만 다행히 전리품으로 보낸 자금을 본인 비자금으로 돌린 거 외엔 큰 트롤짓은 없었으며 그마저도 해군 육성 자금으로 투자된다.
7.2. 연극
-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에서 재평가를 받아서 관련 연극이 만들어졌다. 중국 공산당은 의화단을 태평천국과 같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보아 농민봉기들 중 하나로 여긴다. 의화단 자체가 여러 세력들의 할거였으니 그 중에서도 반청 성향이 강한 집단이 있었고, 그것을 의화단 전체의 성향으로 오인하여 반봉건 반제 투쟁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의화단의 모태인 대도회의 성향이다. 상당수의 의화단 집단은 사실상 청 황실의 꼭두각시였고 혁명적 가치는 커녕 단순한 정치깡패에 불과했다. 청의 식인적인 시스템과 그에 공모하는 열강들에게 의의를 제기하지 않고 만만한 외국 시민들에게 화풀이를 한 이들은 여러모로 혁명과도, 운동과도 인연이 없는 집단이다.
7.3. 영화
- 의화단의 난을 다룬 영화로 미국에서 제작한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1963)과 장철 감독이 중화민국군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팔국련군>이란 영화가 있다. <북경의 55일>은 서양의 시각으로 다룬 영화로, 찰턴 헤스턴, 데이비드 니븐 같은 당대의 명배우들이 출연하는데 의화단의 난에 대해 매우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반대로 중화민국에서 제작한 <팔국련군>(八國聯軍, 1976)은 소품같은 물증 쪽은 고증이 제대로 안 되어 있지만 서양 열강들의 만행을 생생히 그리고 있으며 의화단 전쟁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장철 감독이 대만에서 '장궁전영공사'라는 자신의 영화사를 세웠으나 사실상 홍콩의 쇼브라더스의 자회사였으며 당연히 영화의 제작비도 쇼브라더스에서 댔다. 더불어 서태후의 악행과 청나라의 무능함도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는데 이 점이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심기를 거슬려 검열에서 난도질을 당했으며 제목도 <팔국련군>에서 <신권 3장사>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개봉되었다. 당연히 영화는 흥행에서도 실패하였다.
장철은 자신이 아끼던 심혈을 기울였던 영화의 이러한 비극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고백하기도 하였다. 장철은 젊은 시절에 국부천대 이전 국민정부에서 문화, 선전, 영화 분야에서 일했는데 이때 영화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를 계기로 영화감독이 되었다.
당시 장철은 국민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장경국의 심복이었던 장도번의 막하에서 일하면서 장경국과 장도번에게 인정을 받았었지만 한편으로는 장철을 질시하는 세력들도 있었는데 우선 당시 장철의 나이가 20대 중후반으로 어렸던 데다 당시에는 모든 공무원들은 중국국민당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장철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뒷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 작품은 다행히 천영오락에서 쇼브라더스 영화들을 DVD로 출시할 때는 검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원본으로 출시되었다.
- <호소자 5>편이란 제목으로 한국에 개봉하던 중화민국 코믹 영화 <만능 운동원>(萬能運動員 1988년작)이란 작품에도 나온다. <호소자>에 나온 세 아역배우가 나왔기 때문에 이런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문제는 <호소자 1>편 오프닝을 무단으로 삽입하여 억지 <호소자 시리즈>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20세기 초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코믹한 올림픽을 배경으로 하는데, 인트로에서 짧게 의화단의 난이 언급된다. 물론 코믹 영화이기 때문에 많이 희화화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의화단원들은 웃통을 벗고 중국의 슈퍼맨이라는 팻말을 들면서 연합국 군인을 도발하다가 오히려 공포탄 쏘는 소리만 듣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황비홍 2>에서 백련교가 주적으로 나오는데 하는 언행은 의화단과 똑같다. 홍콩 영화임에도 의화단이 주적으로 나오는 게 묘한 느낌을 주지만 현대인 입장에서는 제 아무리 자국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녀자를 겁간한 후 야만적인 방식으로 죽이고 심지어 서양 물건 좀 썼다고 자국민까지 거리낌없이 죽였으며 살인에 현상금까지 걸었던 의화단을 좋게 봐 줄 래야 봐 줄 수 없긴 하다.
- <황비홍 4>에서는 8개국 연합군이 본 영화의 사왕쟁패 대회를 주최했다는 설정이며 의화단의 여성 집단인 홍등조(紅燈照)가 등장하고 영화 후반부에 8개국 연합군이 자금성을 점령하고 서태후가 피난갔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외전인 <철계투오공>에서도 주요 악당으로 등장하며 자금을 마련하고자 여자들을 납치해 인신매매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영국 상인인 사선(沙仙)을 납치하려고 한 건 덤.
7.4. 만화
- 방학기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서 어린 최영의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머슴 범수가 바로 의화단 반군 소속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던 이에게 무술을 배워 고수가 되었다고 각색됐다. 이 만화에서도 의화단 운동이 무술 고수들이 일으킨 전쟁 정도로 엉터리로 잠깐 나온다.
- 아앙의 전설 만화들 중 <수색>편과 <약속>편을 그린 중국계 미국인인 진루엔 양(Gene Luen Yang/楊謹倫)이 2013년 《의화단과 성녀》(Boxers and Saints)라는 만화로 그린 적이 있다. <의화단 소년의 전쟁>(1부)과 <소녀의 전쟁>(2부)으로 특이하게도 진짜 사건과 판타지(주인공들이 신의 힘을 빌려 서양인들과 싸운다)가 섞여있다. '소녀의 전쟁'의 주인공은 서양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중국인 소녀 비비아나가, '소년의 전쟁'은 경극을 좋아하던 중국인 소년 바오가 주인공이다. 이 두 책에서는 각각 그리스도교와 외국 세력, 그리고 전통신앙과 의화단의 모순을 다룬다. 스토리 중반부에 비비아나는 바오가 속한 의화단 부대에 잡히게 되고 바오는 비비아나에게 배교할 것을 종용하지만 비비아나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바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바오도 서양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기도하고 부적을 태워 재를 먹어 신의 힘을 빌리지만 결국 부대는 몰살당하고 바오 혼자만 살아남는다.[33] 서양 병사에 의해 죽을 뻔하지만 비비아나가 죽기 전 바오에게 보여주었던 천주교식 기도를 하면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즉 자신이 죽였던 사람 덕분에 오히려 살게 된것이다.
신의 힘을 빌린다 해도 총칼에 맞으면 바로 사망하는 걸 보니 아마 망상인지 진짜인지는 불명. 위에 나와 있는 의화단의 만행도 순화되긴 했지만 표현되어 있으며 순수했던 소년 바오가 점점 의화단의 광기에 물들어가는 묘사도 일품이다. 처음에 서양인들과 중국인 그리스도교도들이 타고 탈출하려던 기차를 습격했을 때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보냈으나 이후 중국인 그리스도교도 마을을 공격할 때(비비아나가 여기서 잡혀 죽는다) 기차에서 살아남았던 서양인 여성들이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던 교회를 불지르고 그리스도인 가족을 몰살하는 등 변하게 된다. 그 자신도 괴로운지 "서양인은 악한 귀신이다."라고 계속 되뇌인다.
7.5. 게임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에서는 등장인물 코넬리우스 슬레이트와 주인공인 부커 드윗이 참전했으며, 공중도시 컬럼비아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공중포격을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설정이다. 이후 컬럼비아는 미국의 제재를 피해 독립하게 된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의화단 진압을 기념하는 기념관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곳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된 의화단 모형들을 볼 수 있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스팀판 공식 한국어 번역에서는 의화단 운동의 영어 명칭인 'Boxer Rebellion'이 '중국인 권투선수 반란'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 유럽전쟁 3에 의화단 전쟁이 배경인 미션이 존재한다.
- [BETA] 55 Days at Peking - 로블록스 의화단 운동 게임 중에서 재현을 잘 한 게임이다.
8. 기타
- 훗날 미국 대통령을 역임하는 허버트 후버와 아내인 루 후버가 톈진에서 포위된 거류민들 사이에 있었는데 청나라 황제의 광산업 자문관으로 일하기 위해 청나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 독일 국방군 원수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소위 시절에 참전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해 '아프리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은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장군도 참전했다. 당시 계급은 중위.
- <사운드 오브 뮤직>의 실제 주인공인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해군 소령이 이때 오스트리아 해군 육전대로 참전한 경력이 있다. 당시 계급은 사관후보생.[34]
- 의회단 운동 당시 미국 지상군을 구성했던 부대 중에는 9보병연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당시 참전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만주라는 상징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만주에서 북경까지 85마일(약 137km)을 행군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만추마일이라는 장거리 행군 행사를 한다. 물론 85마일을 전부 행군하진 않고 25마일(약 40km)만 한다. 9보병연대는 2015년까지 주한미군 2사단 예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경험해 본 카투사 출신도 제법 많다.
- 2021년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 시대에 미국과 EU를 비롯한 여러 서방세력이 중국의 위구르 탄압에 대해 제재를 가하자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의화단 운동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중국은 12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고 많은 중국 네티즌들은 이에 찬성하고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신축조약이 체결된 1901년과 2021년 모두 신축년이다. #
- 2022년 대만 사태에 대한 G7의 우려에 대해 중국공산당의 <환구시보>는 G7의 '간섭'이 의화단 사건 당시의 '8국 연합군'을 연상케 한다며 반발했다. # 당시 8국 연합군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캐나다가 들어가면 G7 회원국과 일치하긴 한다.
- 중국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인 칭화대학의 설립 배경도 의화단 운동이랑 관련이 있다. 신축조약으로 배상금을 타낸 미국이 중국의 교육 발전에 쓰라고 배상금 일부를 반환했는데 이 자금을 가지고 도미유학생 양성을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 바로 칭화대학의 전신인 칭화학당이다.
9. 같이 보기
[1] 의화단 운동을 영어로 옮긴 표현.[2] '복서 반란'. 의화단원들이 권법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권투선수(boxer)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다른 유럽권 언어 명칭도 이와 같다.[3] 참고로 현대와 같은 복싱이 정립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며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복싱은 기술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막싸움에 가까웠다.[4] 현재 일본에서는 이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5] 그림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화살을 잔뜩 맞은 돼지는 예수를, 목이 베이는 양은 서양 세력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가리키는 '주'(主)와 '돼지 '저'(猪) 자, 서양을 가리키는 '양'(洋)과 '양'양(羊) 자의 중국어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림에 그려진 양이 염소인 이유는 과거에 중국에서 양으로 불리던 종은 실제 염소였기 때문이다.[6] 아이신기오로 자이이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푸쥔은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새 허수아비 황제 보경제로 세울 것을 내정했으나 양무파와 서양 외교관들의 비협조로 황제가 되지 못했는데 단군왕은 이에 원한을 품었다.[7] 서태후는 당시 광서제를 폐위하고 아이신기오로 푸쥔을 새로운 황제로 세우려 하였는데, 열강의 의화단 진압 병력이 광서제를 돕기 위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한다.[8] 이때 엔 하이는 케텔러의 가죽을 벗기고 그의 심장을 먹었다고 한다. 의화단이 진압된 후 그는 독일 제국군에게 잡혀 참수형에 처해졌다.[9] 심지어 이 같은 구도에 섰던 국가도 완전히 같은 편이 아닌 경쟁과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때 닭털 꽂고 다니기로 유명했던 바로 그 정예 부대다.[11] 안할트 데사우 공 레오폴트 3세의 사생아의 후손이다.[12] 영화 <팔국연군>을 보면 의화단 포로들이 일본군의 손에 일제히 참수되는 것을 볼 수 있다.[13] 1900년 6월 10일에 촬영. 여담으로 러시아 제국은 열강 8개국의 병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진에서 제외되어 있다.[14] 터번을 쓰고 있다.[15] 피켈하우베를 쓰고 있다.[16] 베르살리에리 부대원이다.[17] 여담으로 37년 후 이들의 후임들이 다시 한 번 베이징을 점령한 다음 자금성과 천단에 난입해 베이징 점령 기념 사진을 찍었다.[18] 그러나 이홍장은 서구에도 잘 알려진 청나라 측 인물이라서 얼굴마담으로 참여한 것일 뿐 실질적인 전권대사는 아이신기오로 이쾅이었다.[19]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이견이 많았다. 대한제국의 전략적 이점상 대한제국에 일본의 이권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식민지화 또는 보호국화, 친일 정부 수립 등 여러가지 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병합만 해도 대한제국에 자체 의회와 전주 이씨 왕실을 두고 독일 제국-여러 영방국가들의 모델을 따르는 방식 등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처럼 보호국화를 주장하는 인사도 있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대한제국 황실을 폐지하고 단순한 식민지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여러 주장이 병립했다. 결론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우대하지만 조선은 식민지로 병탄하는 것으로 되었다.[20] 왼쪽 위 부터 미국 흰머리수리, 러시아 곰, 프랑스 수탉, 독일 검독수리, 영국 사자, 이탈리아 늑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쌍두독수리, 청나라 용, 그리고 일본 표범이다.[21] 열강들이 청나라를 상대로 싸울 때는 힘을 합쳤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해 누가 더 많은 이권을 가져갈지 으르렁거리며 싸운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중 러시아와 일본은 몇년 뒤에 러일전쟁때 진짜로 싸우게 되고, 20년도 안 되서 청나라를 제외한 여기 나온 모든 국가들이 1차 세계 대전때 싸우게 된다.[22] 이 중 러시아 곰과 영국 사자가 특히나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데, 이는 그레이트 게임을 상징한다.[23] 직접 참전하여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8개국과 의화단에게 피해를 입은 3개국(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이었다.[24] 이는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동아시아 통치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25] 물론 영국이 인도를 용이하게 통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 제국을 설립하는 것도 논란이 많았고 의화단 운동 시점에도 영국이 과연 다음 세기에도 과거처럼 인도를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회의적이었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식민지를 착취해서 노예무역하고 귀금속을 탈취하던 시대가 아니라 이미 제국주의도 자본주의화라 식민지를 교육하고 발전시켜야 이익이 나는데 그럴수록 식민지에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통치비용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있기 때문이다.[26] 연합군 측에서 전쟁 중인 중국인들을 고용하는 걸 꺼렸기 때문에 한국인을 대량으로 고용했다. 이들은 주로 보급품을 북경으로 운반하는 일, 끊어진 철로와 전선을 복구하는 일을 했다.다만 임금체불을 당하거나 고용주에게 학대를 당하는 등 취급은 중국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27] 소나 말 등의 가축과 쌀과 콩 등의 곡물을 주로 수출했다.[28] 최종 계급 보병대장[29] 최종 계급 원수[30] 최종 계급 원수[31] 최종 계급 소령[32] 물론 이건 청군의 폭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 소식을 들은 서태후가 "야! 과등(고든의 한자 표기)은 왜 죽인건데!"라며 경악했다.[33] 총상을 입고 기절한뒤 의화단원들의 시체를 넣고 태우는 구덩이에서 겨우 탈출했다.[34] 이때 대한제국의 제물포(현 인천광역시)에 온 적이 있다. 당시 제물포는 가장 가까운 국제항구로서 8개국 함대가 물자를 보급받고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SMS 센타 함과 마리아 테레지아함 등 오스트리아 군함들이 대한제국을 기항지로 자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