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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살된 류큐인들의 시신이 묻힌 묘
모란사 사건 牡丹社事件 | ||
기간 | 1874년 5월 6일 ~ 1874년 12월 3일(출처) | |
장소 | 청국령 대만, 낭교(瑯嶠) 모란향 석문 (現 대만 핑둥현 무단향) | |
원인 | 류큐인들을 학살한 대만 원주민에 대한 보복 | |
교전 세력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 ]][[틀:깃발| ]][[대만 원주민| ]]
일본 제국 해군 일본 제국 해병대 | 파이완 부족 | |
지휘관 | [[틀:깃발|사쿠마 사타마 [[틀:깃발| ]][[틀:깃발| ]][[사이고 주도| ]]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아루쿠 † | ]][[틀:깃발| ]][[틀:깃발| ]]
병력 | 육군병원 3,658명 하사관 781명 이상 군인 2,643명 군속 172명 종복 62명 군함 승조원 734명 | 약 600명 추정 |
피해규모 | 전사 12명 병사 561명 | 최소 20명 이상 사망 (지도자이자 족장 아루쿠와 그의 아들) 부상 50명 이상 |
결과 | 일본 제국군이 타격을 입고 퇴각했으나 승리, 지휘자 아루쿠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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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이 1874년에 청나라가 지배한 타이완섬을 공격한 사건. 타이완 침략(臺灣侵略), 타이완 출병, 모단사 사건 등으로 불린다.태풍으로 인해 대만에 표류한 류큐인들이 대만 원주민 중 하나인 파이완 부족에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류큐를 노리고 있었던 일본 제국이 류큐인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타이완 섬에 쳐들어와 원주민들과 교전을 벌여 이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2. 배경
당시 류큐인, 서양인 등이 타이완 섬에 표류했다가 원주민들에 의해 붙잡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일반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청나라가 규정에 따라 구출해 보호하는 것이었다.1871년 10월 18일, 류큐인들이 귀국 도중 태풍으로 배가 파괴되면서 타이완 섬에 표류했다. 69명 중 2명은 익사, 1명은 실종되어 살아남은 66명은 섬을 돌아다니다 두 명의 한족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한족들은 서쪽에는 '큰 귀 귀신'인 사나운 원주민들이 있으니 남쪽으로 가라는 조언을 했다. 류큐인들은 그 두명의 한족과 함께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려 했으나 동굴의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고 이내 한족과 류큐인의 다툼이 생겼다. 류큐인들은 이 두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남쪽으로 가라는 조언을 따르지 않고 서쪽으로 갔다.
그러다 12월경 파이완 족과 만났고 수화와 중국어로 그들과 대화를 하여 파이완 족 마을에 머무르면서 고구마, 토란죽, 쌀 등을 대접받았다. 이튿날 총을 든 5~6명의 파이완 족이 사냥하러 갈테니 류큐인들에게 집에서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류큐인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탈출한다.
류큐인들이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자, 파이완 족들은 그들이 해적의 간첩이고 나중에 해적들을 끌고올 것이라고 오해하여 류큐인들을 추격해 66명 중 54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살아남은 12명은 한족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이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무단 사건, 미야코섬 조난 사건(宮古島島民遭難事件), 바야오만 류큐인 사건(八瑤灣琉球人事件), 바야오만 사건, 류큐 표류민 살해사건, 류큐 표류민족 사건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1][2]은 1872년 3월, 일본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청나라에 항의했으나, 청나라는 대만 원주민들은 화외(華外) 종족 즉, 중화 문화권 밖의 민족이라 책임질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에 일본은 1874년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3]를 대만지사무국 장관으로 또한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를 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하여 대만 출병을 준비했다.
3. 전개
서양 외교관들의 우려와 기도 다카요시의 반대로 출병 중지가 결정되었으나, 사이고 주도는 독단으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하여 1874년(청 동치 13년, 일본 메이지 7년) 5월 6일, 대만 남부 헝춘반도에 병력 3,600명을 상륙시키고 5월 22일, 대만 서남부 사료항(社寮港)에 전군을 집결시킨 후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사건의 진앙지인 모란사(牡丹社) 등을 점령하고, 사건의 주모자인 파이완족 추장 아루쿠와 그의 아들을 사살하고, 인근 원주민 마을을 토벌하였다. 7월 1일 원주민들이 항복함으로써 전투는 끝났다.당시 대만은 청나라의 영토였으므로 청군 수천명이 대만으로 파병되었고, 일본과 청나라는 영국의 중재로 협상에 임하게 된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홍장 간의 교섭 결과, 일본은 타이완 출병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받고 배상금 은 50만 냥을 받은 후 12월에 철수했다.
4. 평가 및 영향
- 모란사 사건은 20년 뒤 청일전쟁 이후 청국령 대만의 행정력이 타이완섬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함을 일본이 물고 늘어지며, 또다시 자국민이 표류되어 살해당해 군사충돌이 일어날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란 핑계로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타이완섬(대만)을 할양 받아 대만일치시기의 단초를 제공한다. 즉, 모란사 사건은 대만과 류큐국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 사건이다.
- 류큐와 대만은 물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교류도 역사적으로 많았기에, 이런 사건은 이전에도 흔했었고, 일본이 류큐를 100% 실효지배까지는 아니어도 명목상 지배를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였기에, 사실 일본 정부는 에도시대 이전부터 류큐 사람들이 종종 타이완 섬에서 죽는 일이 있다는 걸 알면서 관여를 거의 안 했었다. 타이완 침공은 250년 역사의 도쿠가와 정권을 내쫓고 새로 들어선 메이지 정권이 본래의 정권 목적인 "대동아공영"이라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계획한 테크트리 (i.e. "명목상 일본 영토 중 행정관리가 약했던 전지역(e.g. 도호쿠 일부, 홋카이도) 실효지배 → 류큐 정복 → 대만 정복 → 조선 정복 → 만주 정복 → 청나라(중국대륙) 본토 정복 → 태평양 총독부")의 마스터플랜에 첫단계를 완성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나선 공격적 정책 행위였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류큐는 일본 정부가 완전히 행정적으로 실효지배하기 시작했고, 20년 뒤에는 청일전쟁으로 타이완조차 공식적으로 빼앗기에 이른다.
- 청나라는 일본의 타이완 출병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했다. 즉, 이는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인정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어, 청과 사대 관계에 있던 류큐 왕국이 일본에 합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청나라는 청불전쟁과 이 사건의 영향으로 타이완섬이 자국 방어에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대만 근대화와 개발에 나섰다. 그전의 청나라는 동중국해 해적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 대만을 지배했지만 개발에는 무관심했다. 심지어 대항해시대의 분위기가 끝나가고는 있었지만 다 끝나지는 않았던 청나라 초기였던 17세기 후반에는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대만 땅의 일부를 지배하고 군인뿐만 아니라 농부들까지 보내 10여 년간 사탕수수를 재배했던 기록도 있다. 이후 청나라 군대가 스페인군과 네덜란드군을 섬멸했고, 겨우 도망쳐서 생존에 성공한 두 나라 사람들은 모두 자국으로 도망쳤다. 청나라 정부가 인식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서로 대만이 자기 땅인 양 견제했었다.
5. 기타
-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해당 사건에 일본과 중국 양국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중국 입장과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본 입장만 봐도 온도차가 분명히 있다. 영어 위키백과의 입장이 그나마 중립적이다.영미권의 시각
[1] 중국어 위키백과의 중국 입장(번체), 중국 입장(간체)과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본 입장은 이렇다. 중국 측은 청국령 대만과 류큐 왕국 사이의 외교 문제에 일본이 무단으로 끼어들었다 주장하고, 일본 측은 자신들의 속국인 류큐 왕국에 대한 공격은 일본에 대한 공격이라 주장한다..[2] 1871년 12월 19일의 이 사건은 1872년 10월 16일, 류큐 왕국에서 류큐 번으로 강등 및 류큐 국왕에서 번왕으로 격하#, 1874년 모란사 사건, 1879년 4월 4일 류큐 번마저 폐지, 오키나와현 설치까지 이어지는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다. 일국의 운명이 본토가 아닌 외국에서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다른 두 나라 사이의 무력 충돌로 결정되어버린 매우 씁쓸한 사례. 영상[3] 14년 뒤, 일본 제국 제8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와세다대학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