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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8·17대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38년 3월 11일 | ||
히젠국 사가군 가이쇼코지 (現 사가현 사가시 미즈가에) | |||
사망 | 1922년 1월 10일 (향년 83세) | ||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 |||
재임기간 | 제8대 내각총리대신 | ||
1898년 6월 30일 ~ 1898년 11월 8일 | |||
제17대 내각총리대신 | |||
1914년 4월 16일 ~ 1916년 10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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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고도칸(弘道館)[1] | ||
신체 | 180cm | ||
작위 | 후작 | ||
정당 | |||
약력 | 참의 제4대 대장경 초대 입헌개진당 총재 제3·4·11·14·29대 외무대신 제13대 농상무대신 제8·17대 내각총리대신 헌정본당 총재 도쿄전문학교 설립자 겸 초대 총장[2] 제30·32대 내무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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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8, 17대 내각총리대신. 그러나 총리보다는 일본의 의회민주주의와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기여와 와세다대학의 설립자로 더 기억되는 인물이다. 와세다대학에서는 아래처럼 그의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2. 생애
2.1. 초기
사가현(히젠) 출생으로 유년기와 청년기, 장년기를 모두 메이지 유신으로 지낸 인물. 무진전쟁 당시 사가 번은 도막파에 줄 선 대가로[3] 사가 번 출신 인물들이 신정부에서 대거 등용되었고 오쿠마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다. 경제 쪽으로 유능해서 주로 재무 쪽으로 일하였다.
그는 헌법, 의회, 정당정치를 추구한 인물이었다.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오쿠마는 이에 동조하여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요청하였고 정당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개진당, 헌법정당을 창당하여 그가 훗날 총리에 올랐을 때 최초로 정당 내각을 출범시킨다. 그는 급진적인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여 온건한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추구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하였고 이 싸움에서 이토가 이김으로써 일본은 독일식 모델을 채택하게 된다.
1888년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당시 초대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요구로 외무대신으로 옮겨갔다. 치외법권 폐지, 관세 자주권 확립을 목표로 하여 협상에 나섰으나 즉시 폐지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치외법권의 완전한 폐지는 12년 후로 하고, 일부 자유 관세로 우선 전환한 뒤 12년 후에 완전한 관세 자주권을 갖는다는 내용의 개정안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 역시 불평등하다고 일부 일본 국민들은 반발하였고 이듬해 외무성 입구에서 극우 단체 현양사(겐요샤, 玄洋社)의 폭탄 테러를 당해 오른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사퇴하였다. 노년의 오쿠마를 지팡이 짚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게 이 사건 때문이다. 사고 후부터 오쿠마가 착용한 의족은 현재 와세다 대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2. 총리 시절
8대 총리 취임 후. |
1898년 6월,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으나 오자키 유키오 당시 문부대신의 '공화연설'과 후임 총리가 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적절한 방해[4]로 반년도 못 채우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다가 다이쇼 덴노가 즉위하고 민중운동이 폭발한 이후 1914년, 지멘스 사건으로 퇴임한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후임으로 다시 총리 자리를 꿰찬다. 거물들이 넷이나 한꺼번에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차기 총리직은 정권 교체의 주역인 공화파들의 인망을 얻고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업적은 없었으나 어쨌든 경험도 있고 해외에도 명성이 있으며 원로들과도 적당히 친한 오쿠마 시게노부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취임 석달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다. 오쿠마는 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내렸다.[5] 독일이 본토의 전쟁에 전력을 쏟고 있을 동안 빈 집이 된 독일의 아시아 식민지에 일본군을 보내 독일 주둔군과 함대를 격멸하고 독일의 중국과 태평양 지역 이권을 손아귀에 넣는다. 전승에 힘입어 의회해산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쿠마 시게노부는 권력의 정점에 서는 듯 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오쿠마 정권은 위안스카이에게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를 내밀고 이것은 결정적인 실책이 된다. 21개조 요구의 내용이 민중에 유출되면서 중국인들이 폭발, 거대한 반일 조류를 발생시키고 만다. 하지만 구미열강 대다수가 세계대전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열강은 5호 요구를 제외한 21개조 요구를 승인하였고 미국 조차도 이시이-랜싱 협정을 체결하여 만몽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하는 등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오쿠마 내각이 이를 얻기 위해 분명히 우호국인 중국을 상대로 최후통첩을 운운하면서 막무가내로 군 것에 대해 이시바시 단잔[6], 하라 다카시를 비롯한 정치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무식한 방법으로 반일감정만 부추겼다고 오쿠마와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을 혹독하게 깠다.
결국 이 21개조 요구는 오쿠마와 가토가 내각과 외교에 대한 문민통제, 정당지배를 강화하고 있다고 불만을 품고 있던 야마가타의 역린을 건드려 오쿠마 내각이 총선에서 압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의 주도로 2차 오쿠마 내각은 선거 중 뇌물 사건을 빌미로 가토 외무대신이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총사퇴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前 조선 총독이 총리에 입각하여 초당파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2.3. 이후
1882년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세웠고, 1907년부터는 죽을 때까지 아예 총장, 이사장의 자리를 모두 꿰차고 앉았다고 한다.
3. 여담
1908년 11월 22일 토츠카 구장에서 열린 리치 올 아메리칸즈 대 와세다대학 야구부의 친선 경기에서 있었던 오쿠마 시게노부의 시구는 일본 야구 역사상 최초의 시구이다. 오쿠마 시게노부의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크게 빗나갔지만, 와세다대학의 설립자 겸 총장이며,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오쿠마의 투구를 볼로 만들면 실례가 될 것 같아 와세다대학의 1번 타자이자 당시 주장이었던 야마와키 쇼지(山脇正治)가 일부러 헛스윙을 해 스트라이크로 만들었다. 이후 1번 타자는 시구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헛스윙하는 게 관례화되었다.
[1] 사가 번의 교육기관[2] 1920년 사립 구제대학 승격 이후부턴 와세다대학 초대 총장 겸 이사장이었다.[3] 무진전쟁에서 신정부군 편에 섰던 번은 사쓰마, 조슈, 도사, 사가의 네 개의 번으로 그 중 사가 번이 가장 뒤늦게 참전했다.[4] 오자키 유키오 문부대신의 이 연설은 일본에서의 공화제 실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금권정치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걸 들은 야마가타파는 그를 공화주의자로 매도했고, 결국 오자키는 문부대신직을 내려놓았다.[5] 이때 오쿠마는 국내 정책의 실패로 위기에 놓여있었지만 전쟁으로 국내의 불만을 누를 수 있었다. 오죽하면 "오쿠마를 살린건 '카이저'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6] 이 당시에는 한창 혈기왕성할 스물아홉 청년이었다. 총리로 영전한 시기가 무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고, 본인이 제55대, 제2차 오쿠마 내각이 제17대였으니 정말 오래 전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여 이시바시는 오쿠마가 설립한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생이었다.[7] 정확한 키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80cm 이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