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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32대 내각총리대신 히로타 고키'''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78년 2월 14일 | ||
후쿠오카현 나카군 가지정 (現 후쿠오카시 주오구) | |||
사망 | 1948년 12월 23일 (향년 70세) | ||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 |||
재임기간 | 제32대 내각총리대신 | ||
1936년 3월 9일 ~ 1937년 2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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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후쿠오카 현립 진죠 중학교 (졸업)[1] 제1고등학교 (졸업)[2]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법학 / 학사)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약력 | 제15회 고등문관시험 합격 외무성 관료 주네덜란드 일본 공사 주소련 일본 특명전권대사 제49-51·55대 외무대신 제32대 내각총리대신 귀족원 의원 내각 참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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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외교관, 정치인, 내각총리대신. 패전 후 사형당한 A급 전범 중 유일한 문관(文官)이다.당시 A급 전범 중 사형당한 사람은 7명으로,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무토 아키라, 마쓰이 이와네,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이렇게 7명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 중 히로타 고키만 외교관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3명은 군에서 은퇴한 예비역, 3명은 현역 군인이었다. 즉 6명 무관과 1명 문관이다.
2. 생애
2.1. 초기
1878년 후쿠오카현 출생. 부모는 남의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었는데, 맡은 일을 열심히 해주자 자식이 없었던 주인 부부의 마음에 들어 아버지가 주인의 양자로 들어가 히로타 씨를 받았다. 어렸을 때 이름은 죠타로(丈太郞)였다.히로타의 집안이 그리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죠타로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학비를 절약하려고 생각했으나, 당시 독일-러시아-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청일전에서 빼앗은 뤼순을 뱉어내자 그걸 보고 군인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종의 승려에게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갔다가 선종의 스님과 상담했을 당시에 "너는 스스로 자신에게 책임을 지며 스스로의 이름을 생각하라"라고 이야기 했고, 외교관으로 생각을 바꾸어 먹으면서 이름도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3]라는 구절에서 넓은 식견을 뜻하는 "弘(넓을 홍)"과 강한 의지력을 의미하는 "毅(굳셀 의)"자를 따서 '고키(弘毅)'로 바꿨다.
2.2. 외교관과 정치인 시절
1906년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그와 같이 들어간 동기가 요시다 시게루다.1907년 베이징 영사관보를 시작으로 영국, 미국, 소련 등으로 부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대부분의 외교관들이 그러하듯 그도 시데하라 기주로의 협조외교론을 지지했고 한때는 시데하라 외교론의 중추로 불릴 정도로 신봉했었다.
1933년 사이토 내각(1933-1934)의 외무대신을 시작으로 오카다 내각(1934-1936)에서도 계속 외무대신을 맡았다.
1934년 당시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재임하고 있던 네빌 체임벌린과 접촉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종료된 영일동맹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1935년,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일관계를 특명전권대사급으로 격상시키는 등 성과가 없진 않았으나 관동군이 미쳐 날뛰는 것을 막지 못해 하매 협정, 진토 협정 등이 정부의 승인 없이 체결되는 데도 이를 묵인했고 11월에는 기동사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10월 4일, 각의를 통해 히로타 3원칙을 결정, 국민정부에 만주국 승인을 대가로 불평등조약의 폐지, 공동방공, 무력외교 금지 등을 제안했지만 중국에서 거부하였다.
2.3. 총리 시절
32대 총리 취임 후 |
사실 그는 오카다의 사임 직후 곧바로 총리로 임명되지 않았는데, 원래 히로히토 천황은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으로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후임 총리를 맡을 것을 부탁했으나 고노에는 건강을 핑계로 빠져나갔고, 고노에 이후 이치키 기토쿠로 궁내대신 등 여러 원로들에게 후임 총리를 부탁했으나, 원로들은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사망한 5.15 사건과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이 사망한 2.26 사건을 보고 겁을 먹은 나머지 모두 거절했다. 결국 순번이 돌아와 외무대신이었던 히로타에게 조각을 권고했는데, 히로타도 거절하면 되겠지 싶어서 계속 거절하다가 사이온지 긴모치의 압력에 의해 반강제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히로타는 그렇게 총리에 취임했으나, 원래 처음부터 거론되던 인선이 아니었고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던 데다 야쿠자와의 연계설도 떠돌고 있어서, 히로히토 천황이나 인선에 개입한 사이온지나 둘 다 마뜩찮아했다. 게다가 총리 취임 이후 히로타가 군부에게 끌려가는 듯한 인상까지 주게 되자, 히로타에 대한 신뢰도가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례로, 히로타 고키가 외교관 동기인 요시다 시게루를 외무대신으로 입각시키려하자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군대신이 반대하였다고 한다. 이때 육군성 군무국장이던 무토 아키라가 각료 명단에서 요시다와 시모무라 히로시, 오하라 나오시[4]의 3명의 이름을 붉은색 펜으로 죽죽 그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온건파였던 히로타는 소위 협화외교라 불리는 대중 유화 정책을 실시해서 중국과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일단 군부를 억제하기 위해 취임 이후 군부에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는데, 데라우치 히사이치를 포함한 정치군인 세 명을 현역에서 은퇴시키고, 숙군 과정에서 반발하는 장교 열다섯 명을 잡아다 처형시키는 등 처음에는 의외로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나 결국 군부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국방 예산을 올려줬으며,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부활시키는 등 완전히 기가 꺾인다.
결정적으로 1937년 1월 21일 할복 문답(腹切り問答)으로 인한 내각 불일치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히로타 내각은 낮은 지지도와 강성 군부 때문에 1년도 채 못 채우고 11개월 만인 동년 2월 2일에 사임해버렸다.
2.4. 총리 퇴임 후
총리 퇴임 이후에도 계속 외교관 생활을 지속해,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맡았고 이후에는 추밀원 의원으로 재직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10월 21일 주일 독일대사 디르크젠에게 적절한 조건 하에 중화민국과 휴전할 의사가 있다고 전하면서 트라우트만 공작이 시작되었으나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과 더불어 중화민국에게 매우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였고 이에 중화민국이 반발하자 중화민국에 성의가 없다는 이유로 중화민국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며 아예 말살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2.5. 전범 재판
패전 이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연합군에게 체포되었고 스가모 구치소에서 투옥되었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형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하지만 히로타가 A형 전범으로 분류된 과정이 석연치 않다. 물론 히로타 역시 전범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적어도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을 주도하거나 직접 지시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그 외 여러가지 천인공노할 전쟁 범죄와도 연관성이 적은 사람이었다. 비슷한 전범들의 처벌선례를 보면 무기징역 정도는 선고할 수도 있지만 이조차 죄질에 비해 상당히 무거운 처벌이고 장기 유기징역형 정도가 보통이었다. 당시에도 사형은 집행방법과 무관하게 법정최고형이었으니까 어지간히 죄질이 나쁘다는 정도로는 사형에 처할 수는 없었기 때문.
사실 연합군이 히로타를 기소한 주 내용은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전 시기부터 전쟁 준비를 해오고 있었느냐 아니냐(그 전쟁 준비를 총리 재직 당시 묵인하였는가에 대한 것)에 초점을 더 두고 있었다. 물론 히로타 고키보다도 더 전쟁에 관여하거나 참여한 전직 총리들[5]은 전후에도 많이 살아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종신형이나 징역형, 금고형을 당했을 뿐이었다. 결국 같은 동급의 죄목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은 사람은 히로타 고키 뿐이었다. 물론 히로타는 자신이 총리직을 수행 할 당시 전쟁 준비를 묵인 하였다고 스스로 자백 했으며, 전직 총리로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억제하지 못한 점, 그리고 고노에 후미마로와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추천한 중신 중 한 명이 히로타였던 것을 감안하면 무죄로 판결나는 것은 무리이긴 했다.
게다가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의 최고 지휘자임에도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고, 전범으로 확실하게 족치려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가 음독자살해버리자 전쟁에 협력했던 관료층에서 전쟁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게다가 히로타와 야쿠자의 연계설도 전범으로 낙인찍히는 데 영향을 줬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가 버무려진 끝에 히로타는 A형 전범으로 규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리수에 대해서 그나마 개연성이 가장 강한 추측은 고노에 후미마로를 대신한 희생양이 필요했다는 것. 태평양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인 중일전쟁의 책임자가 될 고노에 후미마로를 처형해야 하는데 하필 자살해버렸고, 자살한 사람을 처벌할 수 없으니 그와 연계된 사람들 중에 그나마 가장 고위직에 있고, 해놓은 것도 많아 어차피 전범 처벌은 피할 수 없었던 히로타에게 어차피 처벌받을 거 고노에의 죄까지 다 짊어지고 죽으라고 했다는 것 이다.
당시 히로타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일본으로 파견된 연합군 재판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게 갈라졌었다고 하고, 일본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히로타의 사형을 반대하는 서명을 연합군에 보내올 정도였으나 결국 미국의 결정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2.6. 사형 집행
1948년 12월 23일 오전 0시 21분에 스가모 구치소 내의 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 시기, 같이 사형당한 여섯명의 사형수[6]들은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각자 부르고 사형당했는데 비해 히로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죽었다.사형 집행 이후 히로타 고키는 그 후 다른 A.B.C급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화장 후에 태평양 바다에 산골되어졌으나, 일부 유골이 빼돌려졌고, 순국칠사묘에 안장되었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그러나 2001년에 히로타의 손자는 확신범도 아닌 자신의 할아버지를 전범들이 모인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적으로 합사 한 것은 잘못 되었다고 주장해서 파문이 일어나기도 했다.
3. 기타
- 히로타는 특이하게도 일본의 범죄조직인 야쿠자와 연줄이 많이 닿아있었는데, 스스로 맺은 연줄인지 아니면 아버지 대에서 내려온 연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야쿠자에서 히로타에게 많은 도움을 준 건 확실한데, 히로타의 대학 학비도 지원한 것을 보면 꽤 깊숙히 연줄이 닿아있었던 듯 하다.
- 히로타의 아내는 남편의 재판 전에 자살했는데 자살한 이유는 우익단체에 관여한 그녀가 남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1] 현 후쿠오카 슈우칸 고등학교. 자민당 전 총재인 야마사키 타쿠, 성우 야나미 조지 등이 그의 후배이다.[2] 구제 도쿄대학의 예비문이었으나 제국대학 개편 때 분리되었고, 1949년 학제가 개정되어 신제 도쿄대학에 재통합되었다.[3] 증자의 말로 ‘ 선비는 도량(度量)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의 일부분이다.출처[4] 小原直. 전임 오카다 내각에서 사법대신을 맡았는데, 원래 히로타는 오하라를 유임시키고자 했으나, 2.26 사건 당시 다른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카다 제독의 입궐을 강하게 주장한 것과 천황기관설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군부의 반대와 간섭으로 인해 결국 자진사퇴했다.[5]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고이소 구니아키는 전쟁에 적극 참여했음에도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6]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마쓰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도조 히데키, 기무라 헤이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