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시대 전전 제2차 와카쓰키 내각 第2次若槻内閣 | Second Wakatsuki Cabinet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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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내각 | 이누카이 내각 | }}} | |
<colbgcolor=#00ff00> 내각총리대신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제28대 | ||
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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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의 부상 악화로 1931년 4월 14일 하마구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하마구치의 후임으로 입헌민정당 총재가 된 와카쓰키 레이지로 前 총리가 내각총리대신으로 다시 임명되어 설립된 내각이다.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각료회의를 열어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 시기 내각의 구조 상[1] 끝내 흐지부지되었다.
이후에도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제안으로 군부를 억제하기 위해 입헌정우회와 거국내각을 구성하고자 했으나, 각료의 대다수가 반대해 지지부진한 상태가 계속되면서 이에 반발한 아다치가 사직을 요구하면서 보이콧을 계속해 내각이 마비되어 통제력을 상실해, 결국 1931년 12월 13일 총사퇴했다.
2. 각료 목록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ff00; border-right: 10px solid #00ff0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 직위 | 명단 |
<colcolor=#fff> 외무대신 | <colbgcolor=#ffffff,#1f2024> 시데하라 기주로 | |
내무대신 | 아다치 겐조 | |
대장대신 | 이노우에 준노스케 | |
육군대신 | 미나미 지로 | |
해군대신 | 아보 기요카즈 | |
사법대신 | 와타나베 치후유 | |
문부대신 | 다나카 류조 | |
농림대신 | 마치다 추지 | |
상공대신 | 사쿠라우치 유키오 | |
체신대신 | 고이즈미 마타지로 | |
철도대신 | 에기 다스쿠 → 하라 슈지로 | |
척무대신 | 하라 슈지로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 |
2.1. 국무대신
* 비고란에 쓰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1931년 4월 14일 임명직책 | 대수 | 성명 | 소속 | 특이 사항 | 비고 |
내각총리대신 | 제28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 귀족원 입헌민정당 | 척무대신 겸임 | 재입각 입헌민정당 총재 |
외무대신 | 제40대 | 시데하라 기주로 | 귀족원 (동화회) 남작 | 유임 | |
내무대신 | 제41대 | 아다치 겐조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유임 | |
대장대신 | 제30대 | 이노우에 준노스케 | 귀족원 입헌민정당 | 유임 | |
육군대신 | 제36대 | 미나미 지로 | 군인 육군 대장 (육군대학 17기) | 첫 입각 | |
해군대신 | 제33대 | 아보 기요카즈 | 군인 해군 대장 (해군병학교 18기) 남작 | 유임 | |
사법대신 | 제32대 | 와타나베 치후유 | 귀족원 연구회 자작 | 유임 | |
문부대신 | 제39대 | 다나카 류조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유임 | |
농림대신 | 제6대 | 마치다 추지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유임 | |
상공대신 | 제7대 | 사쿠라우치 유키오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첫 입각 | |
체신대신 | 제33대 | 고이즈미 마타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유임 | |
철도대신 | 제8대 | 에기 다스쿠 | 귀족원 입헌민정당 (동성회) | 유임 1931년 9월 10일 사임 | |
제9대 | 하라 슈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첫 입각 1931년 9월 10일 취임 | ||
척무대신 | 제3대 | 하라 슈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첫 입각 1931년 9월 10일 사임 | |
제4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 귀족원 입헌민정당 | 내각총리대신 겸임 | 1931년 9월 10일 겸임 입헌민정당 총재 |
[1] 제국 헌법 당시 일본의 내각은 국무대신 한 사람만 사퇴해도 내각 전체를 해산해야 했기에 강경파 한명이 쿨하게 사퇴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황고둔 사건 당시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초기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처벌을 요청했으나 육군의 강력한 반발로 "묻어둘 수밖에 없다."라고 말을 돌렸다. 히로히토 천황은 이에 역정을 냈고 "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 는 발언까지 하자 결국 7월 2일, 사건이 터진지 한 달만에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한다. 뒤이어 그의 후원으로 총리가 된 동창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도 비리로 물러났다. 이렇게 내각이 단기간에 여러번 무너지자, 천황과 궁내대신들은 가급적 군과 내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