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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1:48:14

5.15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어 : 五·一五事件(ご·いち·ごじけん)
영어: May 15th Incident

파일:external/pds.exblog.jp/c0190486_0384494.jpg
問答無用、射て、射て
문답무용, 쏴라! 쏴!
- 야마기시 히로시 해군 중위[1]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및 영향5. 2.26 사건과의 관계6. 여담

1. 개요

1932년 5월 15일 일본 제국 해군 소속 현역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암살한 사건.

4년 후에 벌어진 2.26 사건과 더불어 일제 군부가 폭주를 시작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의원내각제민주주의를 갖추어 나가던 일본은 정치적으로 크게 후퇴했다.

2. 배경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일본도 불황의 여파가 밀어닥쳐 기업도산이 줄을 잇고 사회불안이 높아졌다. 일본 산업은 비단 등의 경공업이 주요 산업이었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생각한 중공업도 타국에 비해 품질이 안좋아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긴급한 요청으로 짭짤하게 돈을 벌면서 수출한 통조림 내부에 모래와 흙만 있을 정도로 저급한 제품을 팔아치울 정도였다. 이렇듯 일본은 이미 제품 품질에 대한 국제적 신용도가 당시의 열강 국가보다 낮은 상황에 대공황이 발생했으니 제품을 판매할 시장이 싹 사라지면서 대공황의 타격을 더 심하게 받았다. 이렇게 되자 타국을 침략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1931년일본 육군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형국이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이러던 중 일본 해군은 혼란한 일본의 상황과 1930년에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한 일로 일본 정부 일각에 불만이 가득했다. 일본 해군뿐만 아니라 기타 잇키, 오카와 슈메이 등의 국가주의자들과 극우 세력들은 런던 군축조약을 통수권 침해[2]로 규정하며 반발하였고 이러한 가운데 육해군을 막론하고 불온한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특히 과격파 일본 제국 해군 소속 장교들은 군축 조약 체결 직후부터 입헌민정당의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를 죽일 기회를 노렸다.

1931년 12월에는 와카쓰키의 입헌민정당이 실각하고 입헌정우회로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이누카이 쓰요시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도 만주사변을 묵인하는 등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지만 일본 해군 장교들은 (군축조약이 유효하니) 정부가 해군에 제약을 가한다는 이유로 경쟁당 소속에 오히려 원래 갈등하던 와카쓰키의 정적이자 총리로 취임한 지 겨우 석 달도 안된 (군축조약 체결 당시 야당이었던) 입헌정우회의 이누카이 신임 총리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오카와 슈메이 등 민간의 극우 사상가들이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오카와 같은 경우는 아예 권총 5정, 실탄 125발, 군자금 3500엔을 주동자들에게 건네며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3. 전개

총리 암살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혈맹단 사건(血盟団事件)이다. 혈맹단 사건은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라는 승려가 혈맹단이라는 테러 단체를 조직해 연쇄 암살테러를 벌여 1932년 2월 9일에는 전 대장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귀족원 의원을, 3월 5일에는 단다쿠마 미쓰이 그룹 총수를 암살한 사건이다. 이 혈맹단에는 해군 장교들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혈맹단 일당을 체포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혈맹단에 해군 중위이자 항공모함 카가의 조종사인 후지이 히토시(藤井齊)가 중책을 맡았고 암살 계획에 사용되었던 권총도 후지이가 구해 닛쇼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당연히 관련 해군 인물을 조사, 처벌할 필요가 있었는데 해군 장교들은 이 수사에 위기를 느꼈다. 마침 후지이는 중화민국 공군과의 교전에서 전사[3]하였고 후지이가 돌아오면 계획을 실행한다는 작전을 바꿔서 해군장교들은 수상관저, 내대신 관저, 입헌정우회 본부, 미츠비시 은행, 경시청을 차례로 습격한 후 별동대로 변전소를 습격해 도쿄를 암흑천지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일요일이었던 1932년 5월 15일, 즉 거사일에 해군 장교들은 쿠데타를 실행에 옮겨 정문조(表門組)와 후문조(裏門組)로 나뉜 택시 2대로 이누카이 총리대신이 머물던 수상관저로 쳐들어갔다. 이때 제일 먼저 들어간 미카미 다쿠(三上卓)[4]가 이끈 정문조는 후문조와 합류한 후 이누카이를 만났는데 당시 이누카이는 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장교들은 다짜고짜 이누카이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발사하려 했지만 발사되지 않았다. 이에 이누카이는 이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한 후 응접실로 안내하여 일본의 장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장교들에게 말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이누카이의 설득이 약간 먹혔다. 방에서 이누카이와 미카미가 문답(問答, 묻고 답함)을 하던 와중 갑자기 후문조의 야마기시가 "문답무용! 쏴라! 쏴!" 라며 외쳤다. 마침 그때 혼자 늦게 응접실에 들어오던 정문조의 쿠로이와 이사무가 이누카이의 머리 왼쪽을 쏘자 미카미도 이누카이의 오른쪽 머리를 쏘았다. 이누카이 총리는 총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장교들이 떠난 후에 달려온 하녀에게 "아까 그 젊은이들을 다시 불러오거라. 잘 이야기해 보겠다."고 말할 의식은 있었지만 그후 쇠약해져서 당일 11시 경에 사망했다. 해군 장교들은 극우 사상가들이 '임금 측근의 간신'으로 지목한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5] 저택과 입헌정우회 본부, 일본은행, 경시청 본부 등도 습격하여 수류탄을 투척했지만 불발로 그쳤다.[6]

무계획, 무차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습격하던 이들은 당일 헌병대 본부에서 자수했으며 자수하지 않은 인원은 후일 체포되어 해군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테러 수준이 아니라 체제전복을 도모하였고 실제로 농본주의를 내세운 극우 민간단체 아이쿄주쿠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2·26 사건을 벌인 육군 장교들에게도 참가를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혈맹단 사건의 지도자 이노우에 잇쇼의 자수로 계획이 앞당겨지고 육군 장교들이 불참하게 되면서 5·15 사건은 사실상 반란이라기보다는 그냥 테러에 가까워졌다.

4. 결과 및 영향

일본군은 반란죄를 적용하여 요코스카에서 열린 해군 군법회의에서 반란을 일으킨 해군 장교를 처리하고 여기에 가담했던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생은 육군군법회의, 민간인은 폭발물취급위반죄 및 살인,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도쿄 지방재판소에 회부했다. 전 육군사관학교 후보생이었던 이케마쓰 다케시(池松武志)는 육군형법 대신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일반형법을 적용받았다.

이들은 가담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를 받았다. 당시 일본 민중들이 정당정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던 터라 반란장교들을 구명하려는 탄원을 봇물 터지듯 했기 때문에 아무도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탄원서명만 35만 명이 했을 정도였고 결국 판결은 생각보다 가볍게 형을 언도하는 것에 그쳤다. 아무리 정치꾼에게 불만이 높았다지만 과격파 군장교의 쿠테타를 찬양하는 민중이 이토록 많았음은 당시의 일본 사회에 이미 법치보다는 극단주의가 만연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 경찰이나 사법부 역시 일반적인 살인 행위가 아닌 정치가에 대한 테러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처벌하는 경향이 생겼다.

한편 5·15 사건에 참여한 민간인에게는 매우 엄한 기준이 적용되어 무기징역 같은 중형이 내려졌다. 단 사형 선고 사례는 없었고 이들도 얼마 안 가 석방되었다. 이 일은 훗날 2.26 사건 당시 육군 장교들이 투항 후 형량을 낙관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들의 생각과 달리 천황을 빙자해서 내란을 꾸몄다고 하여 중형이 내려지자 반란에 참여한 장교들은 크게 당황하였다고 한다.

5. 2.26 사건과의 관계

재미있는 것은 5·15 사건 주동자들이 애당초 훗날 2.26 사건을 일으킨 육군 장교들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다는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육군 장교들의 사상적 지도자인 니시다 미쓰기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 자신의 스승이자 후견인인 기타 잇키에게 상담하였으나 기타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며 불참을 종용했고[7] 결국 니시다가 이러한 기타의 의견을 육군 장교들에게 전하면서 육군 측은 5·15 사건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에 사건을 일으킨 해군 장교들은 니시다가 자신들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건 당일 니시다까지 쏴 버렸다. 중상을 입은 니시다는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이때 니시다를 간호하던 기타는 니시다의 병상에서 2·26 사건 주동자들을 모두 만났다.

5·15 사건은 2·26 사건과 함께 군인에 의한 쿠데타 및 테러 사건으로 취급되지만 반란을 일으킨 해군 장교는 비록 군복을 입었지만 2·26 사건과는 달리 무기는 민간에서 조달하고 장교들이 휘하의 부하들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격은 크게 다르다.

같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도 2·26 사건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체제전복 및 권력탈취를 노려 군사력을 동원한 위법적인 쿠데타였기에 형벌도 중했지만 5·15 사건은 군사력 동원도 없었고 국민들도 불만을 가진 정치꾼의 암살(테러)이란 색채가 짙어 형벌이 가벼웠던 것이다.

6. 여담

하마터면 찰리 채플린이 이 사건에 휘말릴 뻔했다. 당시 채플린은 자신의 일본인 비서인 고노 도라이치(高野虎市)의 조언에 따라 휴가차 방일했었는데 이에 이누카이 쓰요시는 채플린을 초청하고자 비서격이였던 아들 다케루(健)를 채플린에게 보내 수행을 지시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원래 총리만 암살하려다가 하마터면 같이 있는 채플린까지 휘말릴 뻔했다…고 여기기 쉽지만 반란장교들은 애초에 채플린도 같이 암살할 계획이었다. 채플린은 미국인이므로 채플린을 죽이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주무대가 미국이었을 뿐 엄연히 영국인이었고[8] 만약 진짜로 죽였다면 1931년에 터진 만주사변 때문에 서먹해진 영일관계제대로 틀어져 버렸을 것이다.[9] 반란 장교들이 국제 정세 감각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10]

채플린이 무사했던 이유는 비서가 이누카이 쓰요시와의 접견 전에 이미 스모 경기를 관람하고 덴뿌라를 시식하는 일정을 잡아 두었기 때문. 이 덕분에 수행하러 간 다케루까지 채플린과 함께 일정을 수행하여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아들로서는 아버지를 잃은 불행을 겪긴 했어도 채플린 덕에 자기 목숨은 건진 셈. 이 부분은 채플린이 암살될 뻔했다는 내용으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2018년 3월 18일 방송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채플린보다 앞서 일본에 와서 준비하던 고노가 군 관계자로부터 미리 채플린도 암살 대상이라는 정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따르면 채플린이 일본에 도착해서 숙소인 도쿄 제국호텔로 가려는데 채플린이 탄 차를 어떤 차량이 미행하자 갑자기 고노가 목적지를 고쿄가 있는 니혼바시 쪽으로 바꾸도록 기사에게 지시해서 니혼바시에 도착한 뒤 고쿄가 보이는 쪽에서 채플린과 함께 내려서 고쿄를 향해 고개를 숙이게 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채플린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쿄 쪽으로 차를 몰게 한 건 암살 실행범들이 차마 덴노가 있는 고쿄 근처에서 채플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기에 고노에게 정보를 준 군 관계자가 미리 내린 지령이었을 것이란 것. 또 이누카이 총리와의 접견 전에 스모 경기 관람과 덴뿌라 시식 일정을 잡은 것도 고노가 군 관계자의 지시를 따른 행동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암살당할 뻔했던 채플린은 1936년 2월 하순에 다시 방일했는데 그때 2.26 사건이 터졌다. 이때는 채플린이 암살을 당할 뻔하거나 한 일은 없었지만.
전쟁 전 발생한 쿠데타인 5.15 사건에는 경시청이 습격당했고, 2.26 사건에서는 5명의 경찰관이 순직했습니다. 이에 경찰들은 지금도 자위대의 쿠데타를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전과가 있는 이상,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 戦前に発生したクーデター『五・一五事件』では警視庁が襲撃され、『二・二六事件』では警察官5名の殉職者を出しています。警察は現在でも『自衛隊部隊によるクーデター』を警戒している。馬鹿げた話かもしれませんが、“前科”がある以上、可能性はゼロではないと考えているのです。)
경시청 관계자의 증언 中.
2.26 사건[11]과 5.15 사건 때문에 일본 경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공안경찰에 "자위대 감시반(自衛隊監視班)" 까지 만들어 가면서 자위대군사반란을 경계하고 있다.

공각기동대 SAC 2기에서도 이 사건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당시 탄원 서명 중 잘린 손가락 11개가 동봉된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서 개별의 11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에 참가한 미카미 타쿠는 1930년에 쇼와유신의 노래라는 황도파의 극우 군국주의적 사상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물론 쿠데타 실패 이후 바로 금지당했다.

한국과도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시의 유지였던 모리기쿠 고로(森菊五郞)는 아들이 사건에 연루되자 재빠르게 월명공원에 '보국탑'과 '공자묘'를 세워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보국탑에는 '후손들이 이곳 군산에 영원히 살면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새겼다고 한다. 출처

뒤에 벌어진 2.26 사건과 더불어 수상관저에 귀신이 나온다는 미신이 퍼지게 되었고 지금도 일본 총리들은 수상관저에 거주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1] 이 말에 호응한 쿠로이와 이사무 해군 예비역 소위가 이누카이 총리를 쏘면서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2] 천황은 내각에 대권을 위임했을 뿐이지 군 통수권을 위임한 것이 아닌데 통수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해군 군령부의 반대를 내각에서 묵살하고 멋대로 군축조약에 조인한 것은 반역이라는 것이다.[3] 2차대전 때 일본 해군 항공대 최초의 전사자다.[4] 미카미는 훗날 삼무사건에도 관여했다.[5]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이다.[6] 마키노 내대신 저택 같은 경우는 장교들이 이후 실행할 경시청으로의 습격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저택 습격을 중도포기하여 아예 가내로 침입하지도 않고 문 앞에서 폭탄을 던진 수준에 그쳤다. 후술하는 니시다 저격사건과 더불어 마키노 체제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기타 잇키는 5.15 사건을 좋게 보지 않았다.[7] 한때 동지였던 오카와 슈메이가 5·15 사건을 적극 지원한 것과는 대조적인 처사다.[8] 찰리 채플린은 영국에서 데뷔하고 경력이 약간 쌓이자 할리우드로 곧장 진출해 유명해진 케이스다.[9] 당장 국제연맹에서 영국 정치인 리튼 경이 이끈 조사단을 구성하여 일본과 만주에 파견한 게 이 사건 4개월 전이다.[10] 게다가 정말 반란장교들의 계획대로 채플린을 암살해 미국과의 전쟁을 벌였다면 그 결과가 어땠을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진주만 공습을 통해 미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자국의 국토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목표물만든 처절한 참패였다. 더구나 진주만 공습의 입안자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미군에 의해 암살되었다.[11] 실제로 2016년에는 시큐리티 폴리스가 2·26 사건 때 순직한 경찰관들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