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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2:19:15

2.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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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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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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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mainichi.jp/012.jpg
시내를 행군하는 쿠데타군
날짜
1936년 2월 26일 ~ 2월 29일
장소
일본 제국 도쿄
원인
통제파황도파의 갈등
일본 제국 내 부정부패, 경제 악화에 대한 불만
교전세력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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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파 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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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파 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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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파
황도파 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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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황도파 청년 장교 16명

고노 히사시(河野壽) 육군항공대 대위
노나카 시로(野中四郎) 육군 보병 대위
고다 기요사다(香田清貞) 육군 보병 대위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육군 보병 대위
무라나카 다카지(村中 孝次) 육군 보병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예비역 육군 경리 대위[1]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육군 보병 중위
나카하시 모토나키(中橋基明) 육군 보병 중위
다케시마 쓰키오(竹嶌継夫) 육군 보병 중위
니우 마사타다(丹生誠忠) 육군 보병 중위
사카이 나오시(坂井 直) 육군 보병 중위
다나카 마사루(田中勝) 육군 포병 중위

야스다 유타카(安田 優) 육군 포병 소위
나카시마 간지(中島莞爾) 육군 공병 소위
다카하시 다로(高橋太郎) 육군 보병 소위
하야시 하치로(林八郎) 육군 보병 소위
이케다 도시히코(池田俊彦) 육군 보병 소위

기타 잇키(北一輝)
니시다 미쓰기(西田税)
시부카와 젠스케(渋川善助)
쇼와 천황

내각총리대신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육군참모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 載仁親王)
해군 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伏見宮 博恭王)
우쓰노미야 보병 제 59연대장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육군 보병 대좌
육군대신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대장
해군대신 오스미 미네오(大角岑生) 대장

일본육군사관학교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육군 중장
계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香椎 浩平) 육군 중장
근위 사단장 하시모토 토라노스케(橋本虎之助) 육군 중장
근위 1여단장 오오시마 리쿠타로(大島陸太郎) 육군 소장
도쿄도 경시청 경시총감 오구리 가즈오(小栗一雄)
고등경찰국장 아베 겐키(安倍 源基)
병력 1,483~1,558명 23,841명
피해 장교 2명 자살, 19명 처형
부사관 43명, 병사 3명, 민간인 10명 투옥
병사 4명 전사, 4명 부상
전직 총리 2명 사망[2]
관료 1명[3] 사망, 1명 부상
장교 1명 부상
경찰 5명 순직, 다수 부상
민간인 1명 사망, 1명 부상
목적
황도파 주도 파시즘 군사정권 수립
결과
반란 실패, 진압 성공
영향
일본 제국 육군황도파 소멸 및 통제파의 일본 정국 장악

1. 개요2. 서론3. 진행
3.1. 배경3.2. 쿠데타로 향하는 길3.3. 쿠데타 발발3.4. 진압3.5. 이후
4. 기타5. 매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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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황도파 깃발.svg
황도파의 기. 사면에 적힌 문구는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의 뜻을 받들어 간신들을 토벌한다는 뜻이다. 여담으로 尊이 이체자로 쓰여 있다.
1936년 (쇼와 11년) 2월 26일 일본 제국 육군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2. 서론

이 사건에 관한 주요 공적인 기록은 완전 비공개가 되어 사건 이후 '암흑재판'이라고 불리던 일본 육군 군법 회의의 자료가 주된 공식 문서로 여겨져 이 사건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1차 자료는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2019년에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옛 일본 해군이 몰래 기록 및 보관하고 있었던 제1급 기밀 문서 6권을 토미오카 사다토시(富岡定俊) 전직 해군 소장[4]이 비밀리에 반출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 발견되어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반란과 진압에 이르는 4일 동안의 상세한 내용이 세상에 드러났다.

기밀 문서의 내용에는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현장에 풀어 놓은 해군 '조사 부대'나 몰래 설치된 '감시 초소'로부터 그야말로 분 단위로 전달된 긴박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 사건의 이면에 있었던 일본 육군 고위 간부의 알려지지 않은 회담과 해군이 반란을 넘어선 대규모 내전[5]까지 상정해 대비한 일, 그리고 쇼와 덴노의 알려지지 않은 행동도 담겨 있었다.

3. 진행

3.1. 배경

황도파(皇道派)는 일본 제국 육군의 청년 장교 파벌들 중 하나였다. 이들이 황도파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천황이 국가 수반으로서 직접적인 친정을 하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천황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고 문민 정부와의 상호불개입[6]를 존중하는 파벌을 통제파(統制派)라고 했다.[7]

황도파들은 사악한 일본 제국 정부의 중신들이 천황을 등에 업고 권위를 침탈하여 민생의 피를 빨아먹고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데 급급할 뿐 일본 제국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대내적으로는 정·재계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수년 동안 냉해가 지속되면서 도호쿠 지방을 비롯하여 심각한 흉년이 거듭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농민들의 삶은 재앙적으로 파탄나고 있었는데 군인들의 상당수가 농민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변혁에 대한 갈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첨언하자면 도호쿠 지방은 당시 일본에서도 개발이 더뎠던 지역으로 에도 막부 말기까지도 보릿고개로 인한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고 강물에는 굶어 죽은 어린이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는 실정이었다.[8] 그래서 가난한 집안에서는 부모가 어린 딸을 인신매매해서 창부로 팔려가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특히 일본군에서는 도호쿠 출신의 청년들이 머리가 좋아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대학에 진학할 돈이 없어서 이시와라 간지처럼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국가 세금으로 돈도 주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직업군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9] 자신들이 자란 도호쿠 지방의 참혹한 실상과 자신의 가족, 친우, 전우, 이웃의 여동생 같은 어린 여자애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간다는 사실에 대단히 슬퍼하고 분노했다.

계급 적체도 갈등을 촉발시킨 주요 원인들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 군대는 건군 초기인 메이지 시대와 달리 이미 포화상태라 장교층은 윗대가리들이 잔뜩 쌓여 있어서 밑의 청년 장교들은 계급 진급이 안 되었다.[10] 나이 먹고 무능한 고급 장교들은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했고 아무 일 안 해도 높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왔으며 힘든 일은 아랫 계급이 다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서로 격렬하게 갈등하고 국민의 세금으로는 전함이니 항공모함이니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전쟁무기만을 늘렸으며 군비 확장만을 욕심냈다. 이런 불공평한 부조리에 청년 장교는
'무능하고 멍청한 윗대가리 장교를 싹 다 숙청해 버리고, 우리가 천황과 담판을 지어서 권력을 쥐자'
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 등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한 미국영국과의 관계 악화 등으로 혼란과 갈등이 초래되었는데 이 혼란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극대화되었다. 국체론자들에 따르면 천황의 대권과 통수권은 각각 내각과 군부에 위임되어 있는데 해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군령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각이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강행하자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멋대로 말아먹던 간신들이 이제는 아예 신성불가침한 통수권까지 침해하는 것으로 과격파가 받아들이면서 육·해군과 민간 극우파들 모두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 사상가들의 자극을 받은 해군 장교들에 의해 5·15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군에 의한 정변은 가시화되었고, 육군 장교들에 의한 2·26 사건은 그 절정이었다.

2·26 사건을 주동한 청년 장교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 등이 있었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통수권이 농락을 당하는' 현실에 분개하던 청년 장교들에게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비롯한 기타의 저작들은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에 일어나 만주족청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경험을 통해 혁명의 주요 기반은 군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기타 잇키의 전략 및 전술은 '변혁'에 목말라하던 청년 장교들에게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는 간신과 재벌들을 타도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동력은 오로지 순수한 청년 장교 자신들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적들을 살해한 뒤 쇼와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는[11] "쇼와 유신"(昭和維新)을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반대로 통제파들은 '장차 다가올 미국과 소련 등 열강들과의 결전을 위해서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준비가 필요함을 주장했는데 황도파 장교들은 이를 일본의 파쇼화로 보고 경계했다(!).

이들이 몇 년 전부터 이런 낌새를 보였으므로 육군 고위층과 헌병 등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이런 성향인 사람들을 찾아내 체포하기도 했으며 특히 훗날 다른 의미로 전쟁에서 활약하게 되는 '작전의 신'(?)츠지 마사노부는 당시 이런 인물들을 찾아내 고발하기도 했다. 츠지는 2·26 사건 직전 자신을 따르던 사관후보생 사토 가쓰로에게 불온한 움직임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 그를 2·26 사건의 주동자들에게 침투시켜 쿠데타 음모를 캐내려고 했다. 2·26 사건 주동자들은 처음에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으나 사토 후보생이 "청년 장교들이 미지근하게 나온다면 당신들과 절연하고, 후보생들끼리라도 궐기하겠다"고 강수를 두자 마지 못해 일부 계획을 공유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2·26 사건은 이미 1934년 11월 20일, 덜미가 잡혔으나 사건 관계자들은 "과격하게 나오는 후보생을 달래지 않았다가는 또 다시 5·15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터질까봐 거짓 계획으로 상황을 무마한 것"이라며 변론했고, 재판정에서 이 변론이 받아들여지면서 가벼운 처분만 받게 되었다.

참고로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이들이 이런 짓거리를 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해당 사건 가담자들의 이름들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2019년에 발견된 해군이 작성한 2·26 사건 관련 극비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1주일도 더 전에 도쿄 육군 헌병대측 인사가 해군성을 방문하면서 해당 사건 가담자 및 살인 대상자들의 이름들을 모조리 불어 버린 탓이 컸다. 헌병이 모군인 육군이 아닌 해군에 이를 제보한 것은, 일본 군법상 육군 헌병은 육·해군 모두의 헌병 업무를, 관할 지역 육·해군 지휘관 및 법무관 등의 지휘하에 처리하여 양군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었고, 사실상 육군과는 반독립적인 별개 군처럼 활동하는 조직이었기에, 누가 반란 세력이고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육군보다는 일단 육군이라면 황도파건 통제파건 다 싫어하는 해군에 알려주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3.2. 쿠데타로 향하는 길

육군이 입헌민정당하마구치 내각을 뒤엎고, 군사독재를 현실화하기 위해 계획했던 3월 사건 당시 황도파는 육군 중진들의 정권 탈취 시도를 비판하며 종국에는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후 1931년 10월 사건[12] 등을 거치면서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이 붕괴되고, 입헌정우회이누카이 내각이 들어서자 황도파의 수장격 인물이었던 아라키 사다오 육군 중장이 육군대신에 임명되는 등 육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황도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자파 위주의 인사가 지속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통제파를 구성하면서 아라키 등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해 이후 황도파의 거두들이 차례로 거세당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3.3. 쿠데타 발발

1935년이 되자 황도파 숙청이 본 궤도에 올랐다. 황족으로서 무력한 허수아비 역할에 불과했으나 황도파 거두들의 실각 이전까지 최대한 숙청을 자제할 것을 주문하던 참모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13]까지 태도를 바꾸어 황도파 숙청에 가담했고, 황도파의 중심인물로 여겨지던 육군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가 교육총감직에서 해임되면서 황도파 내 청년 장교 세력은 더 이상 통제파의 '전횡'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35년 8월 12일, 마사키 대장을 경질 요청했던 통제파의 초대 영수이자 당시 육군성 군무국장[14]이었던 나가타 테츠잔이 청년 장교들의 큰 형님격이었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 의해 대낮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군도로 참살당하는 사건[15]이 발생하면서 아이자와를 따르던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근위보병 제3연대ㆍ보병 제1연대ㆍ보병 제3연대ㆍ야전중포병 제7연대를 주축 병력으로 삼고, 살해할 주요 고위 관료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결국 1936년 2월 26일 새벽 5시에 제국수도 도쿄의 주요 정부기관을 점거했다.
당시 황도파의 암살 대상
오카다 게이스케 당시 일본 제국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당시 대장대신
前 일본 제국 총리
사이토 마코토 당시 내대신
前 일본 제국 총리
와타나베 조타로 당시 육군교육총감
마키노 노부아키 전 외무대신
스즈키 간타로 당시 시종장

황도파 장교들은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당시 내각총리대신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지만 총리 본인은 쿠데타 소식을 듣자마자 매부였던 마츠오 덴조와 옷을 바꿔입고 급히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기에 얼굴이 비슷한데다 복장까지 총리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마츠오 덴조를 총리와 오인하여 살해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내대신[16](전 조선 총독,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대장대신(전 내각총리대신), 와타나베 조타로(渡辺錠太郎)[17] 육군 교육총감[18]을 살해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Okada_Matsuo.jpg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와 그의 매부인 마츠오 덴조(松尾傳藏) 육군 대좌.

새벽 5시 10분 300여명의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 오카다 총리는 수상관저에 있다가 관저에서 일하는 하녀의 방에 숨었다. 경찰 4명이 반란군에 응전해 권총 사격을 했으나 곧 사살되었다. 총리의 비서이자 경호 담당이기도 했던 마츠오 덴조가 총리를 대신하여 자진해서 나갔는데, 오카다와 마츠오의 외모가 비슷했으므로 반란군은 마츠오를 총리로 착각하고 살해했다. 반란군은 오인 사살에 대비해 시신의 얼굴을 응접실에 걸린 총리 초상화와 대조해보기까지 했지만 구분하지 못한채 오카다 총리가 맞다고 판단했다. 총리 비서관이었던 후쿠다 타카야스와 육군 헌병조장 코우사카 게이스케는 오카다 총리가 생존했음을 눈치채고, 관저에 빈소를 차려 사람들이 조문하게 하여 혼잡해진 틈을 타 오카다를 탈출시켰다. 오카다 총리가 탈출한 뒤 차 안에서 처음으로 한 말은 "자네, 담배 가지고 있는가?"였다. 이후 총리 관저에서 오카다의 비서이자 조카 겸 사위였던 사코미즈 히사츠네[19]가 계속 마츠오 덴조의 시신을 노출시킬 경우, 들킬 것을 우려해 관을 준비한 다음 시신을 천으로 감싸서 집어넣고, 오카다의 자택으로 운송시켜서 오카다 총리의 안전을 확보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orekiyo_Takahashi_and_Makoto_Saito_last_pic_together.jpg
전임 내각총리대신들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과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쿠데타 6일 전인 1936년 2월 20일 출근길 찍힌 사진.

약 100명의 반란군은 새벽 5시 5분 다카하시의 사저를 기습하여 응전한 경찰을 제압하고, 총을 쏜 후 군도로 다카하시를 찔러 살해했다. 단순히 총에 쏘이고 칼 맞은 정도가 아니라 장기가 헤집어질 정도로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사이토는 사저에 있었는데 새벽 5시 5분 150명 가량의 반란군이 와서 그의 몸에 47발을 발사하여 살해했다. 사이토의 아내 사이토 하루코도 반란군의 총검에 부상당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하루코는 97세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패전 후인 197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애초에 총리보다 근소하게 먼저, 그것도 새벽 5시에 맨 첫 타겟으로 습격당해 살해당한지라 쿠데타가 발발해버린 이상 다카하시와 사이토의 목숨을 살릴 수 없었다.

2.26 사건 당시 황도파 장교들은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을 암살하고 새벽 6시경 약 30명의 병력은 와타나베 육군 교육총감 자택으로 침입했는데 와타나베가 이에 순순히 당하지 않고 딸을 피난시킨 다음 권총으로 직접 응전했다. 이로인해 다른 암살된 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기관총에 수 발이나 맞고 죽었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서 특히 궁내성 시종장 직을 맡으며 측근에서 천황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으로 지목된 스즈키 간타로 역시 살해 대상으로 지목되어 새벽 5시 10분 150명 가량의 병력에 의해 습격당했다. 하지만 스즈키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쿠데타군의 안도 데루조 대위가 병사들을 물린 후 홀로 권총을 쐈고 마지막에는 군도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했으나 그 순간 스즈키의 부인이 만류하면서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스즈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스즈키는 3발을 맞았으나 운좋게도 모두 급소를 피해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추밀원 의장을 거쳐 최고령 총리이자 전시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전직 총리이자 마지막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 역시 이들의 살해 대상이었으나 이미 86세의 고령이라 의료진이고 수행원이고 잔뜩 달라붙어 있었던지라 살해는 커녕 부상조차 당하지 않았다.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20] 전 외무대신은 외손녀[21] 요시다 카즈코(吉田和子)와 아타미의 유가와라 온천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중에 반란군에게 습격당했다. 마키노 노부아키와 요시다 카즈코는 아타미 언덕으로 도주했는데 그 과정에서 카즈코가 추격해오는 군인들을 몸으로 가로 막고 추적을 지연시켰다. 카즈코는 훗날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와 결혼하여 아들 아소 다로 총리와 딸 아소 노부코를 낳았다. 노부코는 이후 쇼와 천황의 막내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 토모히토[22] 친왕과 결혼하여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를 낳았다. 아버지도 본인도 고관대작, 사위도 총리, 증손대까지 총리에 친왕비 등 후대까지 집안 대대로 명문가인 셈이다.[2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Troops_occupying_Nagata-cho_1.jpg

나가타초를 점령한 병사들이다. 나가타초는 일본 국회가 있는 길의 이름이다.

이 사건은 전후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 달리 쇼와 천황이 아무 것도 못하는 허수아비가 아니었다는 주장의 주된 근거 중 하나가 된다. 천황이 드물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자 2.26 쿠데타 자체의 향방에 영향이 갔기 때문이다.

3.4. 진압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과 황도파 장성들이 쿠데타 주동자들과 면담했다. 가와시마 육군대신은 "대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쿠데타군에 즉답을 피했지만 청년 장교들의 취지서를 쇼와 천황에게 상주했다.[24] 육군 군사참의관들은 청년 장교들을 방문하여 지지를 표했고, 청년 장교들은 마사키 진자부로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 정권을 건의했다.

기타 잇키는 런던 해군 군축조약 당시 군령부총장으로서 조약에 반대했던 가토 간지 대장에게 연락하여 해군 내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등 나름 대책 마련에 힘썼고, 가토 대장으로부터 해군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25]이 천황을 배알하기로 했다는 답[26]을 들었다. 쇼와 천황의 첫 번째 동생이었던 야스히토 친왕은 육사 동기이며 기타 잇키의 제자였던 니시다 미쓰기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2.26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27][28] 상기의 고위 장성들과 일부 황족들이 지지하는 와중에 사태는 쿠데타군이나 기타 잇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쇼와 천황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종친과 신하가 주청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쿠데타군에게 원대복귀하라고 명령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쿠데타 발발에 당황하던 쇼와 천황이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하여 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군에게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천황의 노여움을 초래했다.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은 아예 토벌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혼조 시게루 등 궐기에 호의적이었던 신하들은 "그래도 젊은 애들이 폐하께 충성하겠다고 저런 건데 좀 너그럽게 봐 주시지요."라고 권했다. 하지만 쇼와 천황은 "충성이고 나발이고 내 군대가 내 명령도 없이 움직인 것 자체가 이미 반역이고, 그것들은 이미 내 군대가 아니다."라며 역정을 냈다. 청년 장교단으로부터 취지서를 받은 육군대신이 이를 대독하자 "왜 그것을 내 앞에서 읽느냐." 라며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다. 군부가 이들을 진압하기에 미온적이라고 질책하면서 "군부가 안 나서겠다면 내가 몸소 내 근위대를 이끌고라도 저놈들을 진압하러 가겠다."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3일 동안 회유와 무력시위가 잇따랐다. 2월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 복귀 명령이 결정되었으나,[29] 2월 28일 5시 8분 시점에서도 일부 부대에는 여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다음날인 2월 29일 오전 5시 8분에 이 봉칙명령이 쿠데타군에게 하달되었다. 공식적인 봉칙명령이 나오면서 쿠데타군을 부르는 칭호는 '점거부대'에서 '반항부대', 그리고 종국에는 '반란부대'로 바뀌었다.

쇼와 유신을 부르짖으며 궐기하고, 천황의 대어심(결정)을 기다렸던 청년 장교들에게 천황이 원대복귀를 명하는 봉칙명령을 내렸음은 큰 충격이었다. 자살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버티며 마사키 군사 정권 수립 공작을 계속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청년 장교들이 하사관 이하는 원대 복귀시키고, 자신들은 자결할 생각이니 칙사를 보내달라고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을 통해 천황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천황은 "자살을 하려면 마음대로 하든지, 그런 자들에게 칙사라니 말도 안 된다." 라며 냉담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가 토벌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문책까지 했다.

일본군은 육·해군 모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단 병사와 수병 한 명까지 모두 최고 통수권자인 천황에게 속한 존재라고 규정되어, 그들이 먹고 입는 것은 물론 '숨쉬는 것' 하나까지도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살고 죽는 문제조차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상, 이런 무모한 봉기를 일으켜 쇼와 천황의 분노를 샀다고 해도 어쨌든 청년 장교들은 '우리는 천황의 신하이자 황군의 일원'이라고 자처했다. 그래서 본인들의 의지로 자결하더라도 역시 '천황의 자결 명령'을 받아서 행한다고 처리하고자 자결 명령 칙사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아무리 천황의 뜻을 거스르는 봉기를 해서 관군 손에 죽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천황의 신하이며 엄연한 황군의 일원이라고 대내외적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한 것이다.

쇼와 천황이 그런 형식적으로나마 칙사를 보내 청년 장교들에게 자결을 명령한다는 절차를 거부한 것은 앞에서 쇼와 천황 본인이 분노해서 한 말 그대로였다. "너희는 내 신하도 황군의 일원도 아니며, 너희들의 행동은 나에 대한 충성도 그 무엇도 아니고, 내 병사도 아닌 너희들의 목숨 같은 건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장교들 입장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쇼와 천황에게 내쳐진 것이었다. 물론 쇼와 천황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내 군인이라면 내 명령에 따라야 하고,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너희들은 내 군인이 아니다.'라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쇼와 천황의 거절에 분노한 반란군은 자결 및 원대 복귀 결정을 번복해버렸다. 반란군은 멈출 생각이 없고, 천황은 진압 명령을 내리고, 참모차장인 스기야마 하지메와 계엄참모인 이시와라 간지는 강경하게 토벌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결국 가사이 계엄사령관은 태도를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했다. 2월 28일 오후 3시 육군 헌병대는 쿠데타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타 잇키를 연행했다. 그 직전까지 기타의 저택에 있었던 니시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내뺐다가 3월에 체포되었다.

8시 30분에는 <계엄작전명령 제14호>를 근거로 '무력'에 의한 '반란부대' 진압이 명령되었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인근 주민들에게 긴급 피난 권고[30]가 내려진 가운데 비행기와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육군 병력뿐 아니라 일본 제국 해군 역시 움직였는데, 전함 나가토도쿄도 앞바다에 있었던 제1함대 예하 함정들에 2월 27일 원대 복귀 명령이 떨어지고, 전투배치지시와 함께 함포를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31]하도록 했다. 또한 해군 육전대를 긴급히 편성하여[32] 쿠데타군에게 점거당한 내무성외무성 청사를 탈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3일차 이후에는 일부 병력들을 해군성 경비에 투입했다. 살해당한 이들 중 퇴역 해군대장 출신 원로인 사이토 마코토도 있었으므로 해군은 더욱 반란군에게 이를 갈았다.

같은 날 제2함대가 오사카 만에 투입되어 오사카 시내와 육군 제4사단을 상대로 한 전투배치 지시를 하달받았다.

오전 9시, 계엄군은 일본방송협회의 협조를 받아 본격적으로 쿠데타군의 투항과 자대 복귀를 지시했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투항을 종용하는 방송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계엄군은 에드벌룬을 띄우고 항공기 3대를 동원해 무력 시위 겸 부대 복귀를 지시하는 내용의 삐라를 도쿄 시내에 살포했다.

2·26 사건의 주동자들은 척살 대상과 점거 장소만 정했을 뿐 궐기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어떠한 통일된 계획이 없었고[33] 상층의 명확한 협조자를 포섭해 두지도 못했다.[34] 그저 간신들을 소탕하고 천황의 대어심(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이 전부였다.[35] 특히 하사관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장교들에게 끌려온 터라 불안해했다.[36]
下士官兵ニ吿グ
하사관·병에게 고함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들의 부모·형제는 국가의 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 사령부
반란군 측 하사관과 병사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다. #

戒嚴司令部發表
계엄사령부 발표

兵に告ぐ
장병들에게 고한다.

敕命が發せられたのである。
칙령은 이미 하달되었다.

旣に天皇陛下の御命令が發せられたのである。
이미 천황 폐하의 어명이 내려졌다.

お前達は上官の命令を正しいものと信じて絶對服從をして、誠心誠意活動して來たのであろうが、お前達の上官のした行爲は間違ってゐたのである。
너희는 상관의 명령을 옳은 것으로 믿고, 절대 복종하여 성심성의껏 활동해 왔겠지만 너희 상관이 한 행동들은 잘못되었다.

旣に敕命天皇陛下の御命令によってお前達は皆原隊に復歸せよと仰せられたのである。
이미 천황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에 따라 너희는 모두 자대로 복귀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此上お前達が飽くまでも抵抗したならば、それは敕命に反抗することとなり逆賊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만일 너희가 끝까지 저항한다면 그것은 폐하의 명령에 반항하는 것이고, 역적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正しいことをしてゐると信じてゐたのに、それが間違って居ったと知ったならば、徒らに今迄の行がゝりや、義理上からいつまでも反抗的態度をとって天皇陛下にそむき奉り、逆賊としての汚名を永久に受ける樣なことがあってはならない。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동안 저질러온 행동이나 상관과의 의리를 핑계로 계속 반항적 태도를 취하여 천황 폐하께 반기를 들어 역적으로서의 오명을 영원히 뒤집어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今からでも決して遲くはないから直ちに抵抗をやめて軍旗の下に復歸する樣にせよ。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즉각 저항을 그만두고 지휘체계 아래로[37] 복귀하도록 하라.

そうしたら今迄の罪も許されるのである。
그리하면 지금까지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お前達の父兄は勿論のこと、国民全体もそれを心から祈ってゐるのである。
너희의 부모·형제는 물론 모든 국민 전체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速かに現在の位置を棄てゝ歸って來い。
신속하게 현재의 위치를 이탈해 자대로 복귀하라.

戒嚴司令官 香椎中將
계엄사령관 가시이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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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에게 투항을 독려하는 애드벌룬. "칙명은 하달되었다. 군기에 맞서지 마라."라고 적혀 있다.

간신들을 제거하여 천황을 떠받들고, 국가를 개조한다는 대의명분과 애국심으로 궐기했다고 생각하던 청년 장교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귀순 전단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앞서 스즈키 간타로를 습격한 바 있었던 안도 데루조 대위는 전단을 보고 크게 격노하여 계엄군의 전차 앞에 드러누웠다. 그러고 "전차에 저항하지 말라. 모두 여기서 깔려 죽자."라며 큰 소리로 명령했고, 이에 따라 하사관과 병사들 30여 명이 도로에 드러누웠다. 30m 앞까지 다가온 전차는 이 광경에 당황하여 물러났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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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를 겨누는 반란군들.

결국 이들은 투항했다. 2월 29일 오후 2시 무렵,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하고 오후 5시에는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어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는 2월 29일 당일, 고노 히사시 대위는 3월 6일 자결했으며,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파면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4년 전인 1932년에 본 사건과 비슷하게 총리가 암살당한 5.15 사건을 일으킨 해군 장교들과 육군사관학교 본과생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었으므로 2.26 사건을 일으킨 황도파 육군 장교들은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 데다가 단순 총리만 암살한 테러 수준을 넘겨 조직적으로 조를 짜서 고관들을 모두 죽이고 천황 이하의 체제 자체를 전부 바꾸려고 했던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되었다. 무엇보다도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사이토 마코토를 살해한 일은 쿠데타이기 이전에 전직 총리이자 현직 장관이었던 고관대작을 죽인 일이었기 때문에 사형 아니면 달리 내릴 형벌이 없었다.

1936년 7월 12일,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총살되었다.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을 습격했던 안도 데루조 대위만 유일하게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지 않고 대신 지치부노미야 전하 만세를 외치고 죽었는데, 이에 대해선 자신들을 오히려 역적 취급한 천황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표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타 잇키와 니시다 미쓰기는 재판이 조금 더 오래 걸려서 1년 반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1937년 8월 19일 처형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사형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엄연한 민간인에게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때린 것도 절차적으로 문제였거니와, 두 사람은 쿠데타 주모자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아서 니시다는 쿠데타 직전, 기타는 쿠데타 당일에야 거사를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재야 우익과 육군 황도파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했던 마당발 니시다는 그렇다 쳐도, 기타는 중일전쟁을 막아보겠답시고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에 한참이었기 때문에[39] 쿠데타 당일까지 이에 연루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40]

하지만 군부는 쿠데타의 실체적인 배경인 군 내부의 파벌 싸움이 이런 대형사고로 만천하에 드러나서 병영국가 수립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외부의 불순분자들이 순진한 위관들에게 빨간 물을 들인 것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래서 기타와 니시다를 희생양으로 삼아 극형을 내린다는 방침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41][42] 거기다 기타 잇키는 본인의 목숨을 부지함으로서 한평생 본인의 사상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항소하지 않고 얌전히 사형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기타 잇키는 제자인 니시다와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淺一) 중위를 비롯한 일부 추종자들과 함께 총살형으로 숨을 거두었다.

3.5. 이후

비록 이 전대미문의 쿠데타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황도파가 스스로(?) 몰락하면서 도조 히데키의 통제파가 육군을 완전히 장악한 탓에 결과적으로 군부의 권력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지게 되었다. 2.26 사건이 수습된 직후 총리로 취임한 히로타 고키는 처음에는 군부를 견제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비를 증액하고,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부활시켜야 했다.

그 후에 군부는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을 받아들여 쇼와 덴노가 총리로 지명한 우가키 가즈시게의 취임을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자신들 입맛에 맞는 하야시 센주로를 총리 자리에 앉히며 정부를 통째로 쥐락펴락하는 수준에 이르러게 되었다. 그 다음 총리인 고노에 후미마로 또한 군부에게 끌려다니기만 했으며, 이윽고 군부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가 총리 자리에 올라 군부는 일본 제국이 거의 패망하는 순간까지 아예 나라를 송두리째 삼키게 되었다.[43]

통제파가 육군에 이어 정권까지 완전히 장악하면서 결국 일본 제국은 군부 독재의 수렁에 빠졌고, 그들이 주도한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에 의하여 국정은 파탄에 이르러게 되었다. 전쟁 말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등 대규모의 희생 끝에 패전에 이르러서야 군부의 폭주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26 사건으로 육군 내에서 황도파는 소멸되었지만, 정작 통제파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지면서 군부의 힘이 끝없이 치솟아버리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44]

간혹 이 사건이 상술하듯 천황의 통수권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거나 천황의 권위를 드높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는 오해에 가깝다. 2.26 사건이 유사시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칠 정도의 힘이 천황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천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첫 번째로, 천황은 자신이 총애하던 중신들이 살해당한 시점부터 크게 분노하여 즉시 진압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는 즉각 이행되지 않았다. 육군대신과 계엄사령관은 반란군이 자신들과 같은 파벌에 속한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진압명령을 즉각 이행하기는커녕 천황을 역으로 설득하려 하고, 며칠 동안 천황의 명령과는 반대로 지리멸렬한 협상전을 벌이며 시간만 낭비했다.

두 번째로, 애초에 2.26 쿠데타는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기에 천황이 동조하지 않는 순간 성공할 수가 없는 구멍투성이 쿠데타였다. 이들은 군을 장악하지도, 황궁을 장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45] 육군의 통제파와 해군 전체는 언제든지 이들을 쓸어버릴 생각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었고, 천황은 황궁에 안전하게 머무르고 있는 데다가 본인의 측근들을 잃어 분노까지 폭발한 상황에서 반란군에게는 이미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반란군이 다 이긴 싸움이 천황의 말 한마디로 뒤집힌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반란군이 천황을 끌어내리고 그의 아우인 야스히토를 즉위시키려 했다는 뜬소문까지 퍼진 것은 천황의 권위에 큰 흠집을 내었다. 한마디로 2.26 사건은 천황에게 무시 못할 영향력이 남아있음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군부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울 수준으로 상황이 위험해졌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적어도 국민들 사이에서는 천황의 권위가 꽤 높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천황의 결단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졌기에 공기나 다름없던 에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천황의 권위가 커졌지만 다이쇼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대신들의 기세가 커지고 다이쇼 천황의 와병으로 인해 천황의 권위는 다시 실추되었고, 존재감 자체가 매우 옅어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천황으로 즉위한 히로히토는 본인의 성격부터가 적극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타입이 아니라, 과묵한 학자[46] 타입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천황의 권위와 존재감은 여전히 옅었다.[47] 그러나 2.26 사건 당시에 히로히토가 드물게도 강경 진압 명령을 내리고 결과적으로 쿠데타가 진압되자, 당시 불안감에 떨던 시민들에게는 '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인 천황'의 존재감이 강하게 각인된 것이었다. 이렇다보니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모르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천황의 권위와 존재감이 다시 높아졌고, 군부는 이런 정세를 이용하여 천황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청년 장교들에 편승해 집권을 꾀했던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과 아라키 사다오 대장 등 황도파 지도자들은 궐기군과의 연관성을 부인해 법적 심판을 피했다. 마사키나 아라키 등이 예비역으로 예편되어 군 내 황도파 세력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한 사례도 있고, 예편된 이들 역시 각료나 정객으로서 잘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피를 본 것은 청년 장교들 뿐이었다. 한편, 유죄를 선고받은 궐기군의 관계자들은 1945년 일본 제국이 패전한 이후 GHQ에 의해 강요된 정치범 사면 정책에 따라 1946년 모두 사면, 복권되었다고 한다. #[48]
전쟁 전 발생한 쿠데타인 '5·15 사건'때는 경시청이 습격당했고, '2·26 사건'때는 5명의 경찰관이 순직했습니다. 이에 경찰들은 지금도 '자위대의 쿠데타'를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전과'가 있는 이상,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 戦前に発生したクーデター『五・一五事件』では警視庁が襲撃され、『二・二六事件』では警察官5名の殉職者を出しています。警察は現在でも『自衛隊部隊によるクーデター』を警戒している。馬鹿げた話かもしれませんが、“前科”がある以上、可能性はゼロではないと考えているのです。)
경시청 관계자의 증언 中.
한편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5·15 사건과 2.26 사건 때문에 일본 경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공안경찰에 자위대 감시반(自衛隊監視班)까지 만들어 가면서 자위대의 군사반란을 경계하고 있다.

4. 기타

우리가 미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고, 마침내 한길로 치솟을 뿐!
노나카 시로 대위
* 당시 영친왕 이은은 일본 제국 육군 대좌로서 도쿄 근처에 있는 우츠노미야 59연대의 연대장이었다. 2월 28일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연대에서 긴급하게 차출한 혼성대대를 이끌고 상경해 2월 29일 0시에 신주쿠역에 도착하여 구단에 있는 호텔에 주둔하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치했다. 2월 29일에 반란군이 와해되었으니 대치는 그리 길게 끌지 않았다.

5. 매체에서

[navertv(29608920)]
<[다큐] 전모(全貌) 2·26 사건 완전판>[56]

6. 관련 문서



[1] 쿠데타를 종용하는 문건을 돌려 파면되었다.[2] 제20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제30대 사이토 마코토.[3] 와타나베 조타로(1874 ~ 1936) 당시 육군교육총감.[4] 해군 군령부 제1부장으로, 1945년 9월 2일 미 해군의 미주리 전함에서 행해진 항복문서 조인식에도 참석했다.[5] 일본 제국 해군은 연합함대의 전함을 주력으로 하는 제1함대까지 동원(전함 나가토, 후소, 하루나, 키리시마가 소속)하여 반란군인 황도파 육군 장교의 궐기 부대가 점령한 치요다구의 제국의회 의사당을 함포 사격으로 날려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까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연출된 셈이었다.[6] 이는 문민통제와 다른 개념으로 군과 내각이 서로를 존중하는 개념이다. 다만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거쳐 내각이 군부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내각을 군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7] 이에 반해 공통점도 있었는데 양측 모두 군부지배체제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2·26 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치의 붕괴와 군부 지배가 강화된 이유가 이 두 파벌의 공통점 때문이었다.[8] 실제로 도호쿠는 쇼와 시대 말기까지 시골 깡촌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숨겨진 검, 오니노츠메>에 이런 실상이 잘 그려지고 있다.[9]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는 좋지만 가난하고 빽 없는 서러운 청년들에게 있어서 군대는 사실상 유일한 사회 진출의 발판이자 동시에 출세의 동아줄이었다.[10] 당장 쿠데타를 주도한 장교들만 봐도 노나카 시로(1903년생, 대위), 고다 키요사다(1903년생, 대위), 안도 테루조(1905년생, 대위) 등의 나이를 보면 알 수 있듯 30대인데도 대위였다. 이 정도면 현재의 대한민국 국군보다도 진급이 근소하게 늦은 편이다.[11] 2·26 사건 당시 궐기한 청년 장교들의 사상적인 토대였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기타 잇키는 천황의 존재를 천황기관설에 입각해서 바라봤다. 즉 천황 절대주의가 아닌 '국민의 천황'으로서 하나의 '국가기관'으로 기능해 변혁에 정당성을 제공해 줄 얼굴마담이었다. 따라서 기타 잇키의 뜻대로라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구실로 초헌법적인 급진 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궐기한 청년 장교들은 천황에 대한 기타 잇키의 마키아벨리즘적인 시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바라봤고,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면 천황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이는 결국 쿠데타의 패착으로 이어졌다.[12] 1931년 10월에 만주에 전개한 관동군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빌미로 육군이 정권을 전복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쿠데타 시도였다.[13] 쇼와 천황의 34촌 고조부뻘이다. 이게 이 정도까지 벌어진 건 아버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가 63세에 그를 가졌기 때문.[14] 당시 육군성 군무국장은 모든 정부 부처 관료 직위중 가장 실세였던 요직으로 평가받았다.[15] 훗날 이 사건을 아이자와 사건이라 명명한다.[16] 內大臣. 궁중에서 천황을 항상 모시고 보필하며, 궁정의 문서 사무 등을 맡았다. 일본의 고대 율령제 시기부터 설치된 내대신과는 이름만 같다. 내각이 현실 권력을 지녔다면 2·26 사건 당시의 내대신은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권위가 있었다. 내대신이라는 명칭 때문에 내무성의 수장인 내무대신의 준말로 오인되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내대신과 내무대신은 궁내성과 내각이라는 다른 조직에 속한 다른 관직이었다. 2·26 사건 당시 오카다 내각의 내무대신은 고토 후미오(後藤文夫)였다. (비록 무사히 탈출했지만)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가 난리통에 잠시 사망한 것으로 착각되자 2월 26일부터 29일까지 내무대신으로서 이틀간 잠시 총리 임시 대리를 지냈다. 그런데 오카다가 살아 돌아오자 쇼와 천황은 그를 경질시켰고, 이에 반발해 오카다를 탄핵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17] 일본 제국 육군 장성 중 유일하게 극빈곤 가정 출신으로 초등학교 중퇴 출신이라 무학이지만 1894년 20살이 되고 갑종간부후보생 입대 후 당시 갑종들에게 사관학교 시험 전형이 개방되어 합격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였다. 이후 참모, 해외 파견 무관 장교를 하다가 1903년 육군대학교 17기 수석 졸업하여 참모, 해외 파견 무관 장교로서 계속 경력을 쌓아 끝내 1931년 육군대장(친임관)이 되었다. 대학(육군사관학교)만 나오고 초, 중, 고등학교 등 기초 학력이 없어서 장교가 되고 끊임없이 못다한 공부를 하고자 인문 소양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일본 장군들 중에서는 합리적이라고 평가받으며, 황도파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고 공개적인 회의에서도 천황기관설에 근거한 기존 입헌 의회 내각제를 찬성하고 황도파에 대한 반대 의견을 꾸준하게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소수이지만 국제 관계를 중시하던 국제파 원로로서 군부에서 영향력이 있었다.[18] 참모총장, 육군대신과 함께 일본 제국 육군의 3대 수장이었다.[19] 궁성사건 당시 내각서기관장이었다.[20] 내각제 출범 이전에 사실상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역할을 수행(명목상으로는 태정대신이었지만 실권은 내무경이 갖고 있었음)한 오쿠보 도시미치 초대 내무경의 차남이었지만, 마키노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다.[21] 패전 후 총리가 되는 요시다 시게루와 결혼한 장녀 요시다 유키코(吉田雪子)의 딸이었다.[22] 나루히토 천황의 당숙이다.[23] 아소 다로만 해도 벌써 5대째인데 아소 다로가 당연하다는 듯이 장남 아소 마사히로에게 지역구를 물려줄 예정이라 이렇게 되면 6대 세습이 된다. 사실상 이 가문이 메이지 유신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모든 정치사를 함께 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24] 하지만 해군 기밀 문서에 의하면 당시 육군대신 가와시마는 주저하던 중, 쿠데타군의 협박에 일단 구두로 동조한다고 밝혔으며, 그 결과로 취지서가 천황에게 간 것이었다고 한다.[25] 육군 측의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에게는 조카들 중 한 명이었지만, 고토히토의 육군참모총장 등장에 해군측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히로야스 왕을 군령부총장에 올린 것이었다. 다른 궁가였지만 친척인 이유가 있다. 고토히토 친왕은 원래 후시미노미야의 서자였으나, 천황을 배출한 직궁가 간인노미야가 단절될 위기에 몰리자 천황이 직접 그를 간인노미야로 입양시켰다. 그 덕분에 당시 세습친왕가들 중에서 유일한 친왕 작위를 받았고, 고토히토 친왕 이후 간인노미야의 황위 계승 서열이 세습친왕가 중 하위권으로 떨어졌다.[26]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쇼와 천황은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보자마자 "해군 장교들은 이들 쿠데타군에 가담하지 않을까."라고 물었으며, 후시미노미야는 "그런 일 없다." 라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쇼와 천황은 해군 육전대 지휘관에 대해서 조건을 거는 등 해군이 가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해군이 2.26 사건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확인한 이후에는 덴노가 대본영의 해군에다가 공식적인 진압 명령을 3번이나 내리면서 사실상 해군을 이용해 황도파 쿠데타군을 제압하려고 했다.[27] 쇼와 천황이 쿠데타 강경 진압을 명령한 데엔 이런 배경도 있었다. 야스히토 친왕이 황도파를 등에 업고, 자신을 타도한 후 황위를 찬탈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쇼와 천황으로 하여금 평소 같지 않은 강경 대응으로 나오게 한 것이었다.[28] 또, 당시 오카다 내각에서 입헌민정당 총재로서 입각해있었던 마치다 추지 상공대신이 '단연하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패닉이 일어나서 금융 방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라고 조언해 쇼와 천황의 쿠데타군 토벌 방침을 뒷받침한 것도 한 몫 했다.#[29] 봉칙명령을 하달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 중장이나, 쿠데타군에게 이를 전달하러 간 코후지 육군 소좌 등도 쿠데타군에게 동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이 다소 지연되었다고 한다.[30] 대피장소는 학교나 극장이었다.[31] 당시를 기록한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이들 제1함대의 목표 중에는 당시 쿠데타군에 점거된 제국의회, 즉 국회도 있었다. 해군 기밀문서에서도 포격시 제국의회 인근에 있는 해군 측 감시 초소에 영향이 미칠지 논의했으니, 여차하면 제국의회를 점거한 쿠데타군을 대상으로 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32] 당시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무려 200,000발 이상의 탄약이 이번 쿠데타 사건 제압을 위하여 해군 육전대 병력들에게 불출되었으며, 긴급 소집된 이들 병력의 규모는 대략 연대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건 발생 3일차 이후에는 이들에게 화학전에 대비한 방독면까지 지급되었다.[33] 가령 군사 정부를 수립할지의 여부,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을 그대로 적용할지의 여부를 두고도 주동자들 사이의 생각이 달랐다.[34]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고위급 인사들도 많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실제로 협력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거사에 가담한다는 명확한 협조를 받아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사행동이나 사후 수습에 협조가 절실했던 이들이 포섭되지 않은 것은 패착 중 하나였다.[35] 기타 잇키는 이에 대해 본인이 궐기를 지휘했다면 궁성부터 점령했을 것이라며, 순진하게 천황을 맹신한 황도파 장교단을 혹평했다.[36] 해당 사건을 다룬 NHK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촬영 당시 103세였던 쿠데타군 중 한 명은 자신과 동료들이 있었던 국회의사당으로 오는 전차들의 소리를 듣고서야 그제서야 자기들이 반란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37] 원문은 "군기 아래로"[38] 안도 데루조는 결국 자살하려고 했는데 심복 병사가 만류하자 이렇게 울먹였다고 한다. "언젠가 자네가 내게 '농가의 상황을 중대장님은 알고 계시냐'고 따진 적이 있었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가 걱정하는 농촌도 끝내 구원하지 못하고 말았군." 말을 마친 안도는 뒤이어 자살을 기도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결국 법정에서 선고받은 사형으로 죽게 되었다.[39] 신해혁명 참여자였던 기타 잇키는 중국국민당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다.[40] 거사를 전달받은 후에는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정국을 만들기 위해서 거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쿠데타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 부외자에 머물렀다.[41] 혈맹단 사건에서도 테러범들이 사용한 권총이 해군 내 협조자에게서 얻은 것이라는 진술이 나왔지만 민간인 참여자들만 처벌되고, 해군 내 참여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혈맹단 잔당들이 5·15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2·26 사건 때도 혈맹단 사건의 사후 처리를 그대로 따랐다.[42] 이때 반란 자금에 관련된 전화 통화내용을 지어냈는데 기타 잇키 본인은 앞서 청년 장교들이 사형되자 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신을 사형시켜 달라며 탄원했다.[43] 심지어 도조가 사이판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에도 그의 꼭두각시인 고이소 구니아키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패전이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는 전쟁을 일으킨 도조의 입지가 흔들린 덕에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스즈키 간타로가 총리로 임명될 수 있었으나, 여전히 내각은 도조와 육군을 통제할 수 없었다.[44] 물론 제국 해군은 파벌에 상관없이 여전히 통제파에게 적대적이었지만, 해군의 정치권력은 단 한번도 육군만큼 강했던 적이 없었기에 결국 그들의 위세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했다.[45] 황도파의 장성급 인물들은 반란군을 옹호했을 뿐, 가담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육군성과 참모본부에는 당연히 통제파 장교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46] 실제로 패전 이후 완전히 상징적인 존재가 된 후로는 공식적인 공무 수행 외에는 생물학자로 활동했다.[47] 이 때문에 군인들 사이에서는 적극적이고 호쾌한 스포츠맨 타입인 야스히토가 인기가 많았던 것이다.[48] 다만 그 사면 복권 사실이 생존했던 당사자나 유족들에게 따로 공지되지 않았기에, 수십 년이 지나서야 사면, 복권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49] 이는 반란군 역시 천황을 신으로 숭배했다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메이지 유신 자체가 권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천황을 팔아 '쇼군이 행사하던 국권을 본래대로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시작했고, 이것 저것 서양의 절대군주와 같은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다 붙이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한 얼굴마담으로 천황을 내세운 것뿐이었다.[50] 사실 김재규의 부하들인 박선호, 박흥주 등등은 이미 경호원 살해를 진행한 바 있기에 애초에 사형을 피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본 사건 역시 아무리 주범격 인사들만 처형되었다지만 17명이나 처형되었다. 단순 잡범 정도가 아니라면 사형당할 수밖에 없었다.[51] 참고로 기타는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당시 박열을 피신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 우익 노선과 사회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짬뽕된 경우라 행적에 모순점이 꽤 생긴 듯하다.[52]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명령한다. 조조가 했던 바로 그거.[53] 와카도노(わかとの)는 도련님이 아니라 유주(幼主)다. 참고 단성소에서 선왕의 고아 운운하듯이 비꼰 것이다.[54] 기밀문서 기록에 의하면 해군성 당직사관이 해당 사건에 대한 초동 보고를 들은 게 오전 7시였고 그때조차도 간략하게나마 상황 파악을 했고 이후 해군으로 실시간으로 들어온 정보들은 사건 종료 후 수사를 통해서 밝혀진 진실과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었다고 한다.[55] 장교들이 천황 자신에게 충성한답시고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일단 쿠데타 자체가 천황 본인의 뜻이 아닌 이상 수 틀리면 그 총구가 천황을 향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PTSD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56] 2019년 8월 15일 방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