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우리 의사 세계에서는 상대편에서 요청하지 않는 한 자진해서 정보를 보내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쓸데 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잘난 체한다는 소릴 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엔 나름의 집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마츠모토 사린 사건 때 목숨을 잃은 일곱 사람 가운데 신슈 대학 의학부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학생이었는데 성적도 아주 우수했어요. 만일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날 졸업식에 참석했을 겁니다. 그 학생의 일이 제 마음 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1] 중, 신슈대학 의학부장 야나기사와 노부오(柳澤信夫)
-<언더그라운드>[1] 중, 신슈대학 의학부장 야나기사와 노부오(柳澤信夫)
1. 개요
松本サリン事件 (松本市内における毒物使用多数殺人事件)Matsumoto Incident
번역기를 이용해 일본어 위키백과의 마츠모토 사린 사건 문서도 참고해 보는 것도 좋다.
1994년 6월 27일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서 일어난 사린 가스 살포 사건. 나중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옴진리교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마츠모토 '살인' 사건이 아니다. 물론 사린 가스는 살인을 하고도 남을 독극물이 맞다.[2]
2. 배경
이 사건의 본래 목적은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당시 옴진리교의 마츠모토시 지부는 마츠모토 시민들에게 퇴거 압력을 받고 소송까지 제기되어 있었으며, 한국어 위키백과의 마츠모토 사린 사건 문서에 의하면 마츠모토시의 땅 주인들이 옴진리교를 사기죄로 고발한 것까지 걸려 있었다. 상당히 복잡한 이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는 1995년 3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기자의 「그러나 옴진리교는 지난 1990년대부터 대중의 지탄을 받기 시작합니다. 강제 헌납받은 재산으로 곳곳에 임야를 사들여 기도원을 건축하다가 시민들과 마찰을 빚었고 당국에도 미움을 삽니다」라는 발언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후술하겠지만 이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 옴진리교 관련 사건 사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사고 타이틀을 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광신도들로부터 강제로 헌납받은 재산과 금품 일체를 일본 곳곳의 임야와 땅 등을 사들이는 데 꼬라박고 기도원을 건축하는 짓을 저지르기 전 옴진리교는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던 시민들만 골라 지위고하 막론하고 살해하거나 테러를 저질렀다. 이쯤 되면 현대판 백백교. 이런 시점에 터진 게 바로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이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의 노선을 바꿔 일본 곳곳에 기도원을 건축하려다 그 주변 지역들(사실상 전 일본 국민들)과 정면충돌했고 경찰과 행정관청 공무원들로부터도 반발을 자초한 후부터는 전(全) 일본 시민들은 옴진리교에게서 오만정이 다 떠나갔고, 옴진리교가 이러고도 정신 못 차리고 국토이용계획법을 위반하자 일본 시민 전체가 옴진리교를 일본의 시민사회 전체에서 몰아낼 결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터진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 실종[3]에 옴진리교가 관여했다고 의혹을 제기한 저널리스트 에가와 쇼코(江川紹子) 살해미수 사건과 옴진리교를 가장 많이 비판하며 사카모토 건에 대한 추리를 했던 만화작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살해미수 사건은[4] 지위고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부 총단결한 일본의 전(全) 시민사회의 불타는 분노에 등유를 유조선 통째로 들이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마당에 나가오카 히로유키(永岡弘行)와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까지 살해당할 뻔했으니 설명 끝. 이제 전 일본 시민들은 옴진리교 광신도들의 칼부림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앞서 기술한 기도원 건축 시도와 관련한 일본 전역에서의 계약무산, 임야 및 계약금 매입금 전액 반환 청구소송 및 승소까지 줄줄이 터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옴진리교가 건축하려는 것은 기도원 겸 옴진리교 식품공장"이라는 미확인 소문까지 퍼지자 일본 시민들의 옴진리교 혐오 여론이 더 확산되었고, 옴진리교는 그야말로 일본 전역에서 계약파기, 임야 및 계약금 매입금 전액 반환 청구소송 패소, 그리고 기타 사유로 인한 고발 피소 등을 줄줄이 당하게 된다. 이쯤 되면 거의 줄초상 수준. 몇몇 지역에서는 옴진리교 지부가 아예 쫓겨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 것은 덤.
앞서도 기술했듯이 이미 경찰은 물론이고 행정관청 공무원들로부터 옴진리교는 미움을 샀기 때문에, 당연히 이 대열에는 일본 검찰 및 법원, 판검사들도 합류했다. 옴진리교 관련 재판은 어떤 것이든 옴진리교를 혐오하던 전 일본 시민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옴진리교는 일본 전체에서 거의 가루가 되기 직전으로 털려나갔다. 설령 시민들이 옴진리교에 대한 혐오를 담아 거짓말을 퍼뜨려도 옴진리교의 반론을 묵살할 정도였으니 설명 끝.
이 과정에서 앞서 기술한 대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의 땅 주인들이 옴진리교를 사기죄로 고발하게 된다.(한국어 위키백과의 마츠모토 사린 사건 문서에도 나온다)[5]
당연히 줄줄이 이어진 재판들에서 옴진리교가 승소할 가능성이 절대 없었기에 아사하라 쇼코가 휘하 간부들에게 명령해서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를 암살하여 재판을 막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 발생한 원인 자체가 애시당초부터 이것인데... 옴진리교와 일본 전 시민사회+행정관청 간 토지 분쟁과 관련하여 옴진리교에 때려박은 고발 폭탄, 소송 폭탄에 망하게 생긴 옴진리교가 일본 법원들이 진행하게 될 재판을 막기 위해 판사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실행에 옮겨 터진 게 바로 이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다.
3. 사건 전개
간부들은 특수 개조한 트럭[6][7]을 이용해 마츠모토시로 가서 재판소 관사가 있는 지구에 사린 가스를 살포한 후 도주했다. 6월 27일 저녁 무렵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사린 가스가 살포되면서 총 7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나왔다.옴진리교의 의도대로 재판을 진행해야 할 판사들이 죽거나 중경상을 당하면서 재판은 이뤄지지 못했다. 마츠모토 사린 사건만 아니었으면 1994년 6-7월 중으로 일본은 옴진리교의 목을 쳤을지도 모른다.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살포된 가스가 사린이라는 것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7월에야 가스 크로마토그래피 검사 등으로 사린 가스임이 확인됐다. 1994년과 1995년 당시 화학테러에 대한 대비책 하나 거의 없었던 일본의 안전불감증을 제대로 폭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안전불감증뿐만 아니라 사고 후 일본 경찰의 문제도 제대로 터져나왔다.
3.1. 억울한 누명 피해자의 발생[8]
한국어 위키백과의 마츠모토 사린 사건 문서에 의하면 최초 신고는 6월 27일 23시(밤 11시)에 접수됐는데 피해자이자 신고자인 고노 요시유키(河野義行 / 일본어 위키백의 코노 요시유키 문서 참고)가 어처구니 없게 진범으로 몰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이유는 요시유키의 집에서 농약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본인도 위험물관리기사 자격을 가진 제약회사 직원이었기 때문.하지만 TV 등지에서 전문가들이 '농약으로는 사린을 합성할 수 없다'고 증명했고 "수상한 트럭을 목격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었으며 수사진 일부도 "법원 관사를 노리고 한 범행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경찰은 집요하게 요시유키만 추궁했으며 일부 언론은 경찰의 발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 다 밝혀진 이후 나가노현 경찰과 일부 언론은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사건 다음날인 6월 28일, 경찰들은 사건 경위를 듣고 싶다면서 독가스 흡입으로 입원한 고노를 찾아왔다. 집을 지키던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화의 용건을 모두 메모해 두라는 말을 들었는데 언론의 취재 및 문의전화는 물론 비난과 협박 전화들이 무서울 정도로 걸려 왔다.
언론은 28일 아침부터 고노의 집 정원에 들어와서 곳곳을 찍어 대고 독가스로 죽은 개의 영상을 찍었다. '이 집이 사건의 진원지인 것 같다'는 추측 때문에 경찰과 소방관을 포함해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이 집을 주목했고, 그날 저녁 각종 언론이 "살인 용의자로 첫 신고자인 회사원 고노 요시유키의 자택이 가택수색을 받고 있다."는 속보를 냈다. 다시 다음날인 6월 29일, 조간신문에는 고노가 범인이라는 듯한 기사가 지면을 채웠다. 고노의 집에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 취재 전화와 협박 및 비난 전화가 절반을 차지했다. 주로 중년 남자였고, 비난이 점점 심해져면서 마츠모토를 떠나라는 사람도 있었다. 놀란 큰아들은 결국 근처 교회로 피신했다. 집 앞에는 호기심으로 "여기가 거기일까?"하면서 구경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방송과 언론에서 연이어 보도가 이어지자, 막연한 의심이 확신에 찬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정작 경찰은 단 한 번도 '독가스를 제조한 고노 요시유키가 유력한 용의자다'같은 발표를 한 적이 없는데도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모 기자가 이른바 '야간순찰'이라는 경찰서에서 얻은 카더라정보가 원천이었다. 공식 발표도 아닌 비공개 취재에서 얻은 정보로 제멋대로 범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경찰보다는 기레기가 큰 영향을 미친 용의자 추정이였다. 범죄 가해자의 가족과 친인척에 대한 괴롭힘이 매우 심각한 편인 일본에서 가해자(이 사건에서는 사실 아니었지만) 가족이 궁지에 몰리는 과정과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례이기도 하다.
사건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협박과 비난 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독가스 피해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고노는 집에 돌아온 후에도 한밤중까지 협박과 비난 전화가 끊이지 않아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가족들은 "혹시 체포되더라도 부끄러워할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다니세요.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잘못된 거예요. 그 사람이 불쌍한 인간이에요."라며 그를 믿어 주었고, 직장에서도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판명날 때까지 냉정을 유지하자."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년 후인 1995년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났고 해당 사건 직후 체포된 간부가 "마츠모토 사린 사건은 우리 소행이다"라고 자백하여 코노 요시유키에 대한 의심은 이렇게 풀리게 된다. 그렇지만 요시유키는 억울했기에 이후 <'의혹'은 풀렸지만-마츠모토 사린 사건의 범인이 된 나('疑惑'は晴れようとも-松本サリン事件の犯人とされた私)>(문예춘추, 2001)이란 제목의 책을 저술하여 언론과 경찰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합리적이고 결정적인 근거도 없이 너무나 빠르게 자신을 범인처럼 다루던 언론에 대해 고노는 이렇게 토로했다.
사건 발생 후 불과 23시간 만에 경찰이 나를 범인으로 낙인을 찍자, 매스컴 역시 이틀 만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범인으로 확정해 보도해버렸다. 아무리 스피드 시대라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오해는 풀렸으나 그의 부인인 코노 스미코(河野澄子)는 사건 당시에 사린 가스를 흡입해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옛날 영상이긴 하지만 코노 요시유키의 부인 스미코가 병중에 있었던 당시에 촬영한 VOD가 있다. 처음부터 요시유키의 인터뷰 부분 1분 8초를 시청하면 된다. 또한 유튜브에서 河野義行(코노 요시유키)와 松本サリン事件(마츠모토 사린 사건)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관련 영상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이 영상은 스미코가 마츠모토 사린 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 전의 모습과 코노 요시유키의 장남 코노 니시(河野仁志), 장녀 코노 마스미(河野真澄)의 인터뷰도 담겨 있다. 일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두 자녀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병중에 있게 된 날벼락에 대해 어떤 심경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영상을 보고 나면 2008년에 코노 스미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심경이었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3.2. 이 사건에서 특기할 만한 점
첫 번째는 본래 옴진리교가 테러를 저지를 때 사린 가스를 쓸 예정이 없었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이 사건을 통해 차후 저지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에 쓸 사린 가스의 성능을 실험했다는 사실이며, 세 번째는 이 사건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터지기 앞서 터진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학물질을 이용한 대형도시권역에서의 대규모 화학 테러 사건이라는 사실이다.옴진리교는 본래 사린 가스가 아닌 탄저균을 배양·살포하는 생물테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쿄도 고토구(江東区) 카메이도 지역에서의 탄저균 사멸과 카메이도 악취 사건으로 생물 테러를 포기하고 사린 가스와 같은 화학 테러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한다.[9] 그리고 처음 만든 사린 가스의 성능을 실험하고자 1994년 6월 27일에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서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10]
한국어 위키백과의 마츠모토 사린 사건 문서에 이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 터지자 한 경찰서장이 익명으로 "마츠모토 사린 사건은 명확히 하나의 실험이다. 열린 공간에서의 실험 성격의 테러사건 결과 8명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만약 사린 가스가 밀폐된 공간, 이를 테면 혼잡한 지하철 같은 곳에서 살포된다면, 엄청난 재앙이 발생할 것임은 안 봐도 비디오다"라고 제보한 바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옴진리교는 지하철 독가스 테러를 위해 애꿎은 중소도시를 희생양으로 삼은 셈.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문서 초반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화학물질을 이용한 대형도시권역에서의 대규모 지하철 화학 테러 사건이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진짜 인류 역사상 최초의 화학물질을 이용한 대형도시권역에서의 대규모 화학 테러 사건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는 사건은 바로 이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다. 이는 전시도 아니고 평시에 전시에도 사용에 제약이 많은 화학물질로 나가노현 마츠모토시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옴진리교는 일본 정부 체제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몄고 이를 위한 테스트 등의 목적으로 사린 가스를 사용하여 나가노현 마츠모토시를 공격했다.
여기에 더해 일련의 사건들에 격분한 일본 시민들과 옴진리교가 서로 충돌하던 시점에서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 살인미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옴진리교가 조용하게 지내던 과거와 달리 일본 시민 전체를 다 몰살시킬 음모를 꾸밀 계획을 세웠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카메이도 악취 사건과 함께 차후 터지게 되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의 전조로 볼 수 있기에 이 사건은 앞서도 기술했듯이 옴진리교 관련 사건 사고들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 사고라고 할 수 있다.
4. 사건 이후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포함한 사건의 범인들은 대부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고, 2018년 7월 6일에 교주를 포함한 7명, 그리고 26일에 실행범들과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의 실행범 등 6명의 사형이 집행되면서 옴진리교 관련 사건들이 모두 마무리되었다.이 사건은 2022년 12월 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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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들 및 관련자들의 인터뷰 모음집. 인터뷰어는 바로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다.[2] 일본어를 읽을 줄 안다면 '사린'과 '살인'을 구분할 수 있다. 일본어로 '사린'은 영어 표기 Sarin을 그대로 일본어 카타카나로 옮겨 '사린(サリン)'이라 쓰고 읽고, '살인'은 '사츠진(さつじん - 殺人)'이라 읽기 때문이다.[3] 당시에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실종이었다.[4] 극우 성향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맞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고바야시 요시노리 문서도 참고해 볼 것. 링크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가족 몰살사건 문서이며, 해당 문서 하단에 코바야시가 암살 위기에 몰린 이력이 서술되어 있다.[5] 만일 이때 이 재판들이 모두 그대로 진행됐으면 1994년 6월 27일은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 터진 날이 아니라 옴진리교가 일본 전체에서 목이 날아간 날이 됐을 수도 있다. 그 정도로 마츠모토 사린 사건은 옴진리교 관련 사건 사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6] 옴진리교에 있다가 탈퇴한 前 신자의 수기에서도 나온다.[7] 일반적인 탑차로 보일 수 있지만 화물칸에 두 개의 환풍기가 있는 트럭이었다. 화물칸 내에 탑재한 3개의 탱크에 저장된 사린액을 히터로 기화시켜 환풍구를 통해 먼 거리의 목표물까지 보내 위험과 수고를 덜어내는 방식이었다.[8] 이 문단은 스즈키 노부모토의 〈가해자 가족〉을 참고하였다.[9] 일본어 위키백과의 카메이도 악취 사건 문서, 1995년 3월 22일 MBC 뉴스데스크.[10] 옴진리교는 이 사건에 앞서 이케다 다이사쿠 암살 미수 사건때 사린가스를 사용하였으나 큰 소득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하여 데이터를 수집한뒤 본격적으로 생화학 테러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