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 사건이 실린 신문 기사.2003년 6월 20일 오후 후쿠오카 하카타항 하코자키 부두 근처 바다에서 일가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의 주인은 후쿠오카시 히가시구에 살던 M씨(41세)와 그의 아내 C씨(40세), 초등학교 6학년인 장남 K군(11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장녀 H양(8세)이었다. 경찰은 살인사건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유학생이었던 왕량(王亮, 당시 21세), 양닝(杨宁, 당시 23세), 웨이웨이(魏巍, 당시 23세) 세 명의 중국인이 범인으로 지목됐고 웨이웨이는 일본에서, 나머지 두 명은 중국에서 체포되었다.
2. 경과
2.1. 셋이 함께 한탕 해 보자
2003년 5월 초 세 유학생은 양닝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의 한 라면집 주인을 살해하기로 계획했지만 '면식이 있으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단념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살해한 뒤 돈을 뺏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2.2. 피해자 가족은?
살해된 M씨 가족은 M씨(41세)와 아내 C씨(40세), 장남 K군(11세), 장녀 H양(8세)으로 구성된 4인 가족이었다.M씨는 1962년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고 사립 하카타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나카스의 한 클럽에서 일했으며 상경한 후 도쿄 아자부주반 상점가의 고기집에서 경험을 쌓고 1988년에 후쿠오카시 주오구에 한국 요리점을 오픈했는데 이 가게는 유명인들이 자주 찾고 TV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가게였다. 이후 히가시구에도 고기집을 오픈했고 매상도 꽤 좋았다.
아내 C씨도 후쿠오카 출신이었는데 규슈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94년까지 화장품 회사의 미용부원으로, 후쿠오카 공항의 국제선 터미널에서 근무했다.
M씨와 C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교제했으며 1990년 5월에 결혼했으며 K군과 H양이 태어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2001년 9월 광우병 소동이 일어나며 경영하던 두 식당이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M씨는 아내의 친척과 함께 여성의류 판매 회사를 열었지만 매상은 별로였고 히가시구의 고기집을 열기 위해 집을 담보로 빌린 4000만 엔의 빚도 갚아야만 했다.
2003년 3월 부부는 의류 판매업이 뜻대로 되지 않자 동업하던 친척으로부터 독립해 의류 등을 백화점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고 두 달 후에는 지인으로부터 휴면 중이던 회사 'W'를 계승받아 성공적으로 부활시키기도 했다. 여기에 탄력을 받아 C씨가 사장을 맡고 의류 판매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한편 M씨는 식당들이 문을 닫은 후 경제난을 이기지 못해 안 좋은 일에 손을 대기도 했다. 사건 이후 경찰이 M씨의 집을 수색하다가 대마초를 발견했다. 대마초를 재배해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M씨 일가는 1994년에서 1996년에 걸쳐 외국계 생명보험회사를 통해, 1999년에는 일본 생명보험회사를 통해 전원이 생명보험에 들었다. 보험액은 M씨가 1억 2000만 엔, C씨가 2500만 엔, K군과 H양이 각각 2100만 엔으로 총액 1억 8700만 엔이었고 매달 내는 보험료는 14만 엔 정도였다. 덧붙여 M씨 일가는 세 중국인 유학생과 면식이 없었다.
2.3. 범행 제안
M씨 일가족 살해는 최초에 왕량이 양닝에게 제안했으며 양닝은 사건 전후에 몇 번이고 웨이웨이와 휴대폰을 통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2.4. 범행 당시
2003년 6월 19일 밤 11시 쯤 세 중국인은 M씨 집 옆에 있는 맨션의 담을 넘어 부엌에 나 있는 문을 통해 집으로 침입했다. 먼저 2층을 둘러보고 어른들이 없는걸 확인한 후 침대에서 자고 있던 두 아이의 목을 졸랐다. H양은 거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얼굴을 두세 차례 가격한 뒤 가볍게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K군은 잠에서 깨 큰 소리를 내면서 저항했기 때문에 얼굴과 머리를 마구 폭행한 후 두 명이 달려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목을 졸라 살해했다. K군의 사체는 얼굴이 부어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이어서 목욕 중이던 C씨를 덮쳤는데 C씨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범인들은 얼굴과 상체 등을 마구 폭행하고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뒤 몇 번이나 벽과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C씨는 곧 기절해 주저앉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폭행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포장용 비닐끈으로 목을 조른 후 물이 찬 욕조에 얼굴을 담궈 살해했다. C씨의 사인은 익사였지만 얼굴이 많이 망가지고 후두부가 함몰될 정도로 폭행을 당했으며 상체는 멍투성이였다.날짜가 바뀌고 새벽 1시 40분 쯤 M씨가 귀가했는데 애차인 벤츠 C200을 타고 자택 차고 앞에 도착했을 때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지금 집에 도착했어. 이제 주차시킬 거니깐 나중에 다시 걸게" 라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 친구에게 다시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범인들은 현관에서 M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M씨가 집으로 들어오자 공사현장에서 훔쳐온 쇠파이프로 머리 뒤를 가격한 뒤 앞에 서서 옆머리를 가격하고 얼굴을 때렸으며 전신을 발로 차기 시작했고 2층에 기절해 있던 H양을 데려와 M씨 앞에서 학대하고 구타하면서 M씨에게 무언가 대답을 듣기를 원했다. 하지만 M씨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하자 "이제 용무가 없다"며 H양을 교살시키려 하였다. M씨는 무릎을 꿇고 딸 만은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그들은 그런 M씨를 비웃으며 H양을 죽여 버렸고 M씨를 하얀 비닐끈으로 목 졸라 기절시킨 뒤 욕조로 데려가 익사시켰다.
2.5. 범행 후 시신 유기
범인들은 일가족의 시신을 벤츠에 실은 뒤 차에 올랐다. 하카타항 하코자키 부두 안벽에 도착한 범인들은 시신을 바다에 수장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추를 하나씩 달기 시작했다. M씨의 팔과 H양의 다리를 수갑으로 이은 뒤 그 수갑의 체인 부분에 다른 수갑을 채우고 쇠아령을 다는 등 만전을 기했다. C씨와 K군은 각각 두 손에 수갑을 채워 쇠아령을 달았다. 시신을 유기한 뒤 M씨의 벤츠를 운전해 쿠루메시로 향했다. 이들의 행방은 N 시스템[1]으로도 확인됐다. 벤츠는 '브리지스톤 구루메 공장' 클럽하우스의 전용 주차장에 버려졌다. 범인들은 차를 버린 뒤, JR그룹 구루메역에서 전차에 올라 후쿠오카시로 돌아갔다. 20일 오후 하카타항 하코자키 부두 근처 바다 속에서 일가족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됐다. 범인들은 아마 이렇게 빨리 시신이 발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사건 당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세 명의 진술을 바탕으로 서술했지만 범인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거나 진술 내용 자체를 바꾸기도 했기 때문에 불확실한 점이 많다.
사건에 이용된 수갑은 대만제로서 레버 조작을 하면 간단히 풀 수 있는 금속제 장난감이었다. 쇠아령은 20kg 제품이었으며 각각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대형 소매점에서 팔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게의 방범 카메라에 이 물건들을 산 인물이 찍혀 있었는데 그 영상을 바탕으로 범인의 몽타주가 그려져 배포되자 한 일본어 학교의 학생이 "동급생(왕량)과 많이 닮았다"고 증언했고 여기서 왕량과 그의 교우관계가 밝혀지게 되었다. 곧 양닝의 존재도 부상하고 양닝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조사한 끝에 웨이웨이의 존재도 밝혀졌다. 시신에 달려 있던 직육면체의 철제 추(30kg)는 웨이웨이가 과거 자주 드나들었던 여성의 맨션에 있던 것인데 맨션 소유회사가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철제문을 열어 놓기 위해 특별주문한 것이었다.
2.6. 검거
사건 이후 웨이웨이는 출국 2시간 전에 공항으로 향하던 중, 노상에서 다른 폭행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었으나 왕량과 양닝은 이미 후쿠오카 공항을 통해 상하이로 출국한 상태였다. 비행기 티켓은 범행 3일 전에 양닝이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명은 일본에서 이미 국제 지명수배된 상태였고 양닝과 왕량 두 사람은 상하이 공항에 입국하자마자 중국 경찰 당국에 체포되어 곧바로[2] 구치소로 압송되었다.2.7. 수사[3]
중국의 형법 10조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외범에 대한 규정이 있어 기소가 가능하다.[4] 원래 중국의 재판은 한국처럼 장소주의[5]라서 범행 현장은 일본이기 때문에 두 용의자는 일본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하지만 중국도 자국민 불인도의 원칙을 지지하기 때문에 일본으로 인도할 수 없었고 자국민 국외범 전용 재판소인 랴오닝성[6]에서 재판해야만 했다.9월 , 후쿠오카현 경찰과 경찰청의 수사관이 베이징을 찾아 중국 경찰당국과 수사 방법을 협의했다. 두 달 후에는 중국 경찰당국의 수사원이 일본을 찾아 세 용의자의 진술 내용을 대조 조사했다. 이 때 '금품을 뺏을 목적으로 세 명 만이 범행에 임했다. 누구에게도 의뢰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나라 수사 당국의 의견이 일치했다.
2.7.1. 범인
2.7.1.1. 왕량
1982년~ 현재 [age(1982-01-01)]세지린성 출신. 부친은 토목회사를 경영했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2002년 봄 일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일본어 학교에 입학해 학교 기숙사에서 살기 시작했다. 초반 학교 출석률은 96%로 높은 편이었다.[7] 하지만 그 해 9월, 동급생과 함께 문제를 일으켰고 그 때 학교의 대응에 불만과 불신을 안게 된다. 그 후로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동급생의 말에 따르면 그 때부터 왕량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3년 4월 시점에서 M씨의 집과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월세 2만엔짜리 아파트에서 양닝과 함께 살고 있었다. 5월 15일에는 일본어 학교로부터 제적될 것이란 통보를 받았다. 유학생이 제적 처분을 받게 되면 취학 비자 자격이 사라져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다. 일단 중국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재편입을 위한 수업료를 요구했지만 수업료는 납부되지 않았고 제적당했다.
2.7.1.2. 양닝
1980년~2005년 7월 17일, 향년 24~25세
지린성 출신. 부친은 창춘시의 중일우호협회에서 일했고, 모친은 제지공장에서 근무했다. 왕량과 양닝의 부모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왕량과 양닝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2001년 10월 취학 비자를 받고 일본에 입국해 일본어 학교를 졸업한 뒤 사립대학 국제상학부에 입학해 아시아 무역경제에 대해 공부했지만 2002년에는 한 과목만을 이수하고 놀기에 바빴고 2학기가 되자 건강 악화를 이유로 휴학했지만 실제로는 후쿠오카 시내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2003년 4월에 일단 복학했지만 연간 50만 엔이 넘는 학비를 내지 못해 납입 기한이 끝나가는 6월 말 "부모님에게 학비를 받기 위해 일단 귀국하겠다"고 대학측에 설명한 뒤 출국했으나 집에는 가지 않았다.
2.7.1.3. 웨이웨이
1980년~2019년 12월 26일, 향년 38~39세
허난성 출신. 부친은 공장을 경영하는 자산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반장을 맡았다. 이후 다롄의 외국어 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 유학 후 첨단 기술에 대해 공부하겠다는 꿈을 품고 2001년 4월에 후쿠오카의 한 일본어 학교에 입학했으며 2002년 4월에는 계획대로 컴퓨터 전문학교에 입학했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생 후보에까지 올랐다.
고향에는 여자친구도 있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2003년이 되자 학교를 자주 결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파트에는 중국인 여성들이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4월에는 유학생 동료와 함께 중국인이 사는 집에 들어가 26만 엔을 훔치기도 했다. 4월 9일에는 전에 살던 아파트를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였으며 타인 명의로 휴대전화를 계약하는 사기를 치기도 했고 6월에는 지인의 여성에게 폭력을 휘둘러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쯤에 PC방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왕량, 양닝과 알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던 그였지만 2003년 봄부터 갑자기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2003년 4월 15일 밤, 왕량과 양닝, 웨이웨이는 후쿠오카시 주오구의 한 일본어 학교에 침입해 현금 5만 엔[8]을 훔쳤는데 그 곳은 왕량이 다니던 학교였다.
2.7.2. 범인들의 진술
"절도 목적으로 침입했다. 배후는 없다." (왕량, 양닝)"고급차를 타고 다녀서, 부자 같아 보이길래 노렸다.", "5월 말쯤 왕량이「너 싸움 좀 하지? 조금 힘들긴 해도, 돈 되는 일이 있는데」라며 범행을 권유했고, 양닝까지 합류해 세 명이 M씨 일가를 습격했다. 네 가족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사체를 M씨의 벤츠로 바다까지 나른 뒤 던져 버리고, 타고 온 자동차도 멀리까지 가서 버리고 왔다. 왕량은 누군가에게 살인을 의뢰받은 듯 했다. 나는 성공보수로 약 만 엔[9] 정도를 받았을 뿐이다. 남은 보수는 아직 받지 못했다." (웨이웨이)
2.8. 재판 및 판결
2004년 10월 19일 왕량과 양닝의 첫 공판이 랴오닝성 랴오양시 중급 인민법원[10]에서 열렸고[11] 두 피고인 모두 기소사실을 인정했다. 웨이웨이에 대한 재판은 후쿠오카 지방법원에서 열렸는대 웨이웨이는 범행 사실을 인정했다.2005년 1월 24일 랴오닝성의 랴오양시 중급 인민법원은 양닝에게 사형, 왕량에게 무기징역[12]을 선고한다. 이후 양닝은 고급 인민법원[13]에 항소했으나 항소가 기각되었고 최고인민법원의 사형 집행 심사를 거쳐서 2005년 5월 20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2005년 5월 19일 후쿠오카 지방법원은 웨이웨이에게 양닝과 같은 혐의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웨이웨이는 1심에서 범행 사실을 인정한 후 내내 침묵을 이어가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2심에서는 범행 동기와 범행 과정, 세 명의 역할 등을 자세히 증언하고 유족에게 사죄도 했지만 항소는 기각됐고 상고했지만 2011년 10월 20일 최고재판소 제1소 법정은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2.9. 형 집행
2005년 7월 17일 2심 항소 기각에 따라 양닝의 사형이 약물주사형[14]으로 집행되었다. 왕량은 사형을 면한 뒤 고급인민법원에 항소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중국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웨이웨이는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고 사형 확정 이후 8년 1개월의 복역 끝에 2019년 12월 26일 아침에 후쿠오카 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관련 기사, 현지 뉴스
2.10. 여담
- 중국에서 수사 당시 일본 기자들이 취재비자를 발급받아서 중국에 몰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중국 정부가 이들의 재판을 일본에 공개하는 등 이 사건과 관련해서 일본에 매우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은 중국인이 외국에서 죄 없는 일가족을 살해한 흉악범죄임이 명백하므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주권침해로도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1] 자동차 넘버 자동 인식장치[2] 사전에 왕량이 자수했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 경찰 당국의 수사에 최대한 협력한 점은 사실이나 입국하자마자 공항에서(푸둥 공항인지 훙챠오 공항인지는 불명.) 대기하고 있던 중국 경찰 당국에 검거되어 구속된 마당에 자수할 시간조차도 없었다.[3] 범죄인 인도조약 - 대부분의 대륙법계와 샤리아(이슬람교 법계) 국가에서는 자국민 불인도의 원칙을 지지한다. 속인주의 규정 때문에 자국민의 경우에는 범죄인의 소속국에서 재판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일어난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은 용의자가 프랑스인이고 피해자도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범인인 베로니크 크루조는 프랑스에서 중죄 재판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고 징역 8년이 선고되었다. 반대로 영국, 미국, 호주, 마카오, 홍콩, 캐나다, 뉴질랜드 등을 비롯한 영미법을 따르는 국가는 자국민 불인도의 원칙을 지지하지 않는다. 즉 속인주의 예외를 규정하기 때문에 자국민이라고 하더라도 예외적인 케이스가 아닌 한 해외에 인도한다. 일본은 미국(1980년)과 한국(2002년) 두 나라와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도망 범죄인 인도법은 외국으로부터 인도 요청이 들어온 용의자가 일본인인 경우 자국민 보호를 위해 인도를 금하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에 한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그 외의 나라가 인도를 요청해 올 경우는 외교 루트 등을 통해 교섭한다.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자국민을 인도하지 않는다.[4] 중국의 범인 인도법에는「중국 국적을 가진 범죄자는 외국으로부터 인도 요청이 들어와도 거부해야만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법 때문에 중국은 외국의 자국민 인도 요청에 응하지 않고 '대리 처벌'이라는 형식으로 국내에서 재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외국에 범죄인을 인도하는 범죄인 인도 심사 재판과 마찬가지로 자국민 국외범도 전용 법원인 랴오닝성 중급, 고급 인민법원에서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재판이 열리고 결정에 따라 외국인 범죄인의 외국으로 인도 여부가 결정되거나 자국민 국외범의 형량이 결정되게 된다.[5] 장소주의: 일이 일어난 장소에서만 일을 해결하는 것. 즉 한국과 중국은 국외범을 제외하고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만 재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베이징에서 사건이 일어난 경우에는 베이징에서 재판을 하는 그런 식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범죄가 저질러진 장소의 관할서에서 수사하고 관할 법정에서 재판을 하게 된다.[6] 랴오닝성은 외국으로 인도되는 외국인 범죄인 인도 재판도 이루어진다.(대표적인 사례로 프랭크 오비하 친두가 있는데 이 자는 한국인 여성을 마약운반책으로 삼아 마약을 팔다가 중국에서 검거되어 랴오닝성에서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고 한국으로 압송되어 무기징역 및 벌금 1억원을 선고받았다.) 자국민의 국외범 재판도 랴오닝성에서 진행된다. 즉,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다른 지역에서 재판하는 것 자체가 일절 불가능하다.[7] 출석률이 95% 이하가 되면 입국 관리국에 보고되고 더 낮아지면 강제송환될 수도 있다. 보통 70-75%가 마지노선이라 일부 불성실한 학생들은 딱 그 정도 출석률만 아슬아슬하게 지킨다. 하지만 그 선만 지키는 경우 나중에 출석률 관해서 질문이 들어오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비자 갱신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어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못해도 90%는 넘기는 것을 추천한다.[8] 약 55만원~60만원[9] 한화로 환산하면 약 10~15만원 정도다.[10] 지방 법원이다.[11] 위 주석에서 서술했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중국의 모든 외국에 대한 사건은 랴오닝성 중급(한국의 지방 법원에 해당한다), 고급 인민법원(한국의 고등 법원에 해당한다) 관할이다. 중국인 범죄자 중 국외범은 랴오닝성에서 재판하도록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범죄인 인도 재판도 랴오닝성에서 재판하도록 되어 있다. 중국에서 붙잡힌 프랭크 오비하 친두도 중국에서 마약을 팔다가 잡혔고 중국 법상 사형인데 한국 정부에서 중국 정부에 신병 인도 요청을 해서 랴오닝성에서 범죄인 인도 재판을 거쳐서 중국 국무부의 비준 하에 한국에 인도되었으며,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죄를 짓고 중국으로 도주한 성범죄자 정명석도 랴오닝성에서 범죄인 인도 재판을 거쳐서 한국으로 인도되었다.[12] 중국 경찰 당국의 수사에 최대한 협조한 것 때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다음에 항소를 포기했으며 인민참심원에 의해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중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13] 대한민국의 고등법원, 일본의 고등재판소의 위치에 해당하는 상급 법원이다.[14] 중국 형법상 2004년(후진타오 정권) 이후 민간인의 사형은 약물주사형으로만 집행하고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군인에게는 군형법을 적용받아 군인의 전통적인 사형 방법이자 군인다운 총살형을 집행한다.[15] 중국은 2005년 부터 2022년까지 일본인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