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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3:15:04

코다이라 요시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범행 일지3. 범인4. 매체에서

1. 개요

"이렇게 평온하고 평화로운 날에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코다이라 사건(小平事件)은 1945~46년, 즉 태평양 전쟁 말기~패전 직후의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연쇄 강간살인 사건이다.

2. 범행 일지

첫 번째 살인은 1945년 5월 25일 근무하던 해군 의량창의 여자 기숙사에 잠입해 21세 여자 대원을 강간 후 살해한 것이었다. 헌병대 수사에서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된 틈에 코다이라 요시오는 퇴직 후 유유히 빠져나왔다.

두 번째 살인은 1945년 6월 도부선 신토치기역에서 31세 여성에게 농가에 안내하겠다며 데려가 3차례 강간 후 교살한 것이다. 여성은 현금 70엔과 손목 시계를 빼앗긴 채 9월 10일 발견되었다.

1945년 7월 12일 시부야역에서 두 번째 살인과 같은 방법으로 22세 여성을 끌어들였는데 여성이 가지고 있던 을 가지고 저항했지만 요시오가 빼앗아 버리고 그대로 강간, 교살했다. 이번에도 현금 40엔과 손목시계를 빼앗았다.

7월 15일 이케부쿠로역에서 또 같은 방식으로 21세 여성을 끌어내 강간, 교살함으로 네번째 살인을 했는데 이번에는 현금 60엔과 나막신을 빼앗았다. 피해자의 시신은 같은 해 11월 1일에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

9월 28일도쿄역에서 농가 안내로 다섯번째 희생자인 21세 여성을 강간 후 교살했는데 현금 300엔과 물물교환용으로 들고 온 크레이프 옷을 가져가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시신은 마찬가지로 11월 1일에 발견되었다.

12월 29일에는 아사쿠사 카미나리몬역에서 21세 여성에게 농가에 안내하겠다며 도치기현의 산촌에서 강간, 교살하였으며 피해자한테서 현금 130엔과 지갑을 빼앗았다.

스스로 산림으로 끌려간 여성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패전 직후의 식량난 때문에 식량 지원과 취업 알선을 해주겠다는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악마의 제안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인 7번째 살인은 1946년 8월 6일 취직 알선을 핑계로 6월 18일 말을 건 17세 여성을 강간 살인한 사건으로, 8월 17일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7번째 피해자는 스모 선수 24대 키무라 쇼노스케의 딸이었다.

경찰이 6월 대화한 피해 여성이 요시오와 주소를 교환한 사실을 8월 4일 그의 자택에 방문한 피해자의 어머니가 알아냈기 때문에 범인이 체포되었다.

코다이라 요시오는 이 7건의 살인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기소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은 살인이 3건 더 있다. 즉 여죄가 더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

3. 범인

파일:Screenshot_20200814-123146_Chrome.jpg

범인 코다이라 요시오([ruby(小平義雄, ruby=こだいらよしお)])는 1905년 1월 28일 일본 제국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태어났다. 말더듬증을 약간 앓은 것 외에는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고 1923년 6월 군에 입대하여 요코즈카 해병단에 들어갔다. 1928년 제남 사건에 해군 육전대원으로 참전했고 1929년 전역했으며 훈장도 받았다. 이 시기 민간인 살해, 강간 등의 전쟁범죄를 여러 번 저질렀다고 본인 스스로 밝혔다.[1]
상하이 사변 당시 타이누키[2]에서 강간을 했습니다. 동료 4, 5명과 함께 지나인[3]의 민가에 가서 아버지를 묶어두고 딸을 윤간했습니다. 강도, 강간은 일본군과 항상 붙어 있었습니다. 임신한 여자를 총검으로 찔러 아이를 꺼낸적도 있습니다. 저도 5, 6명은 찔렀습니다. 상당히 잔인한 일을 저질렀죠.
- 당시 예심조서에서 나온 코다이라의 증언
이후 결혼했지만 두집살림으로 혼외자를 두었고 이 사실을 안 아내가 친정으로 가출하자 1932년 7월 아내의 친정을 습격해 쇠몽둥이로 장인을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두 번의 사면으로 1940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체포 후 공판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나보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평화로운 때에 나만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사형 판결 직후에도 난폭함을 잃지 않아 경찰과 교도관들에게 제압당하지만 면회 온 아내가 자책감에 울며 고백한 것이나 종교를 통해 점차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1949년 10월 5일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위치한 센다이형무소에서 사행이 집행되기 전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차분한 날에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저는 장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죽습니다. 오랫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가족들은 부디 천명을 완수하시길.
그의 유서에는 '저 때문에 돌아가신 모든 분들, 용서하실 수 없는 과거의 죄를, 오늘에서야 깊게 뉘우쳐 끝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4. 매체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사카구치 안고가 쓴 소설 '전쟁과 한 여자'가 있으며 201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2013년에 개봉되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수위가 대단히 높다.

코다이라를 모티브로 한 사디스트 귀환병과 불감증을 가지고 있는 매춘부, 그녀의 기둥서방인 알코올중독 소설가 이 3명이 주인공으로 나오며 이들의 행태를 통해 반전주의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강간살인을 저지르다가 붙잡힌 귀환병이 취조실에서 형사와 나누는 대화[4]나 우익 발언을 쏟아내는 소설가에 대한 반동으로 반드시 미군 사이에서 혼혈아를 낳겠다고 말한 매춘부가 정작 귀환병에게 사디즘적인 강간을 당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며 불감증이 치유되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는 부분에서 전후 일본의 우경화를 암시하고 있다.


[1] 원래 범죄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 살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 연쇄살인범으로 각성했다는 추측과 시대적 환경 속에서 강간과 살인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면서 각성했다는 추측이 병존한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완벽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범인과 피해자들의 개인적 특성부터 범행 상황의 특수성까지 모두 그렇다.[2] 太沽. 중국 톈진의 지역 이름.[3] 支那人. 본래 지나는 중국을 지칭하는 지리적 개념이었으나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이 말을 중국을 경멸적으로 부를 때 사용하면서 정치적 개념으로 바뀌었다.[4] 귀환병이 자신은 군대에서 배운대로 했을 뿐이라며 왜 히로히토 천황은 전범이 아니냐고 묻는 장면에서 형사는 "전쟁에서 우리가 이겼다면 지금쯤 니미츠맥아더가 전범이었을 거다."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성즉군왕 패즉역적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