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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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櫻,ruby=さくら)][ruby(田,ruby=だ)][ruby(門,ruby=もん)][ruby(外,ruby=そと)]の[ruby(變,ruby=へん)][1]1860년 3월 24일, 일본 에도 성 사쿠라다 문 밖에서 막부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사건.
2. 배경
안세이 5년(1858) 오오쿠의 난키(南紀) 파의 지지로 다이로에 취임한 히코네(彦根) 번[2] 번주 이이 나오스케는 두 가지의 중요한 현안을 처리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에도 막부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 문제였다.후계자 문제를 놓고 히토츠바시(一橋) 파는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고 난키 파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는데 이이 나오스케는 이에사다의 의중이 자신과 혈연이 가까운 이에모치에게 있음을 알고 이에모치를 밀어서 14대 쇼군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 안세이 5개국 조약은 미국 총영사 해리스의 압박과 막부 내 개국파의 주장에 밀려서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비준했다. 이를 두고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3]나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4] 등은 이이 나오스케를 맹비난했지만 오히려 이이 나오스케는 무단 등성이라는 명목으로 이들을 처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히토츠바시 파는 천황의 권위를 빌어 이이 나오스케를 밀어내려고 했다. 고메이 천황에게 상황을 알리자 고메이 천황은 이이가 자기 마음대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격노했다. 그리하여 천황은 정치 쇄신과 다이묘들의 결속을 명하는 무오의 밀칙(戊午の密勅)을 미토 번에 내리고 세력이 큰 다이묘들에게 사본을 보냈으며 관백 구조 히사타다를 멀리했다.
비밀 칙서였음에도 불과하고 이이 나오스케에게도 알려져 큰 문제가 되었는데 천황이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막부를 무시하고 다이묘에게 직접 칙서를 내림은 막부 체제를 흔드는 전대미문의 사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대대적으로 조사와 심문을 시작했다. 고메이 천황이 내린 칙서의 배후에 미토 번이 있다고 측근이 진언하자 배후 의심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에 따라 안세이의 대옥이 일어나 히토츠바시 가 당주인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 우와지마 번주 타테 무네나리,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등이 근신이나 은거 처분을 받고 하시모토 사나이, 요시다 쇼인 같은 존황양이 지사들이 투옥되거나 참수당했다.
이 일로 양이론자였던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번주 자리를 내놓고 칩거하는 형을 받았고 미토 번의 가신들은 낭인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리되자 미토 번의 가신 타카하시 다이치로, 카네코 마고지로 등은 이게 다 이이 나오스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이 나오스케를 죽일 것을 결의했다.
당초 미토 번은 존황양이파들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지만 사츠마 번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사츠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거병 직후 콜레라로 급사한 후 뒤를 이은 시마즈 타다요시의 친부로 섭정을 맡은 시마즈 히사미츠[5]는 '니들 하는 일은 눈감아 주겠는데 우리 도움은 기대하지 마' 정도로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이리되자 미토 번 가신들은 사츠마 번과 연계하길 포기하고 단독으로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3. 사건 발생
3월 24일 아침[6] 이들은 토카이도 시나가와에 있던 숙소를 출발해 사쿠라다 문 쪽으로 집결했다.이이 나오스케도 에도에 있는 히코네 번 저택을 출발해서 500미터 떨어진 에도 성으로 입성하는 중이었다. 그날 아침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로 경비를 강화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이 나오스케는 경비를 강화하지 않았다. 히코네 번의 가마 행렬은 약 60명 정도였지만 경호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때마침 그날은 봄철인데도 폭설이 내려 시야가 나빴고 사람들은 비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습격하는 쪽에서는 칼을 비옷 속에 숨길 수 있어 습격하기에 용이했다.
다이묘들의 입성 행사는 당시 일본에서 구경거리였기 때문에 길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전 9시. 가마가 가까워지자 미토번사 모리 나오나가[ruby(森,ruby=もり)][ruby(直,ruby=なほ)][ruby(長,ruby=なが)][7]가 뛰쳐나와 가마행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를 저지하려고 히코네 번의 쿠사카베 요시타츠[ruby(日下,ruby=くさか)][ruby(部,ruby=べ)][ruby(令,ruby=よし)][ruby(立,ruby=たつ)][8]가 다가가자 갑자기 그가 칼을 빼들어 쿠사카베 요시타츠를 베어 버렸다. 이는 가마 앞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게 하려는 미끼였다. 놀란 경호원들이 가마 앞쪽으로 달려나가자 경호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쿠로사와 마사카즈[ruby(黑,ruby=くろ)][ruby(澤,ruby=さわ)][ruby(勝,ruby=まさ)][ruby(算,ruby=かず)][9]가 가마를 향해 권총[10]을 발사했다. 이것을 신호로 남은 이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어 검투가 벌어졌다.
가마에 탄 이이 나오스케는 총에 맞아 대퇴부(허벅지)에서 허리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습격에 놀란 주변 사람들과 가마꾼들, 히코네 번의 가신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가신들 몇 명만 남아 어떻게든 가마를 끌고 이이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려고 애썼지만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 가마를 어찌 끌고 갈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가마는 눈밭에 방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히코네번의 호위무사들은 칼에 습기가 차는 것을 막으려고 손잡이에 자루를 씌워놓았기에 대응이 늦었다.
그럼에도 히코네번 최고 검객이라고 불리던 카사이 요시유키[ruby(河,ruby=か)][ruby(西,ruby=さい)][ruby(良,ruby=よし)][ruby(敬,ruby=ゆき)][11]는 침착하게 비옷을 벗고 칼을 빼서 가마 곁으로 다가오는 이나다 마사타츠[ruby(稻,ruby=いな)][ruby(田,ruby=だ)][ruby(正,ruby=まさ)][ruby(辰,ruby=たつ)][12]를 쓰러뜨려서 자객들을 놀래켰지만 중과부적으로 죽었다. 젊은 검객 나가타 마사나리[ruby(永,ruby=なが)][ruby(田,ruby=た)][ruby(正,ruby=まさ)][ruby(備,ruby=なり)][13]도 열심히 맞서 싸웠지만 총상이 심해 결국 죽고 말았다. 이때 쓰인 가사이 요시유키의 검과 나가타 마사나리의 검, 투구, 갑옷이 현재 히코네 성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결국 호위들마저 죄다 죽자 미토 가신들이 중상을 입은 이이 나오스케를 가마에서 거칠게 끌어냈다. 나오스케가 무의식적으로 땅을 걸으려고 했지만 곧 사쓰마 탈번 낭인 아리무라 카네키요[ruby(有,ruby=あり)][ruby(村,ruby=むら)][ruby(兼,ruby=かね)][ruby(淸,ruby=きよ)][14]의 칼에 목이 잘렸다. 이들은 나오스케의 목을 칼 끝에 꽂아 돌아오려 했지만 쓰러진 히코네번의 코가와라 무네치카[ruby(小,ruby=こ)][ruby(河原,ruby=かはら)][ruby(宗,ruby=むね)][ruby(親,ruby=ちか)][15]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었다. 히데노조는 아리무라의 뒤통수를 베어 중상을 입혔으나 히로오카 노리노부[ruby(廣,ruby=ひろ)][ruby(岡,ruby=をか)][ruby(則,ruby=のり)][ruby(順,ruby=のぶ)][16]에게 베여 쓰러졌다.
히코네 번 저택에서 사태를 알고 가문의 병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사건은 끝난 뒤였다. 이들은 사건 현장을 보고 경악하였으나 수습에 나섰는데 철저하게 잘린 손가락 하나까지 회수했다. 뺏긴 이이 나오스케의 목은 그와 체격이 비슷한 가타 구로타의 목으로 속여서 바꿔치기해 겨우 회수하였다.
4. 사건의 결과
이 사건은 에도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히코네 번 무사들이 결사항전하여 습격자들도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다른 다이묘들의 저택으로 들어가 자수한 뒤에 막부의 명령으로 할복했다. 습격의 지휘자 세키 토오루는 도망다니다가 1862년 에치젠의 유노사와 온천에서 막부 병사들에게 체포되었고 에도로 끌려와 처형되었다.히코네 번에서는 미토 번에 복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가로 오카모토 반카이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사망한 무사들의 자손들에게는 상속권을 인정해 주었지만 생존자들은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가문을 단절하고 참수형에 처했으며 심지어 도망간 가마꾼들도 끌려와 처형되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생전에 로주 아베 마사히로의 노선이었던 세력이 큰 다이묘들과의 협력정치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막부 주도의 정국운영과 조정의 정치개입 거부라는 노선을 취했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이 노선은 사라졌다. 이이 나오스케 사후 실권자가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덴노 및 조정과의 협력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가는 노선을 택했다.
미토 번주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를 대표하는 어삼가의 일원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부 쇼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가 높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히코네 번은 미토 번을 필생의 숙적으로 규정했다. 이는 막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막부 말기의 대혼란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토 번은 1861년부터 1864년까지 갖가지 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제1차 토젠지 사건(東禪寺事件, 1861 ~ 1862)[17], 사카시타 문 밖의 변(坂下門外の變, 1862), 텐쿠도의 난(天狗黨の亂, 1864 ~ 1865) 등이 바로 그것이다. 텐쿠도의 난에서는 히코네 번에서 적극적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복수를 한다면서 미토 번 무사들을 쥐 잡듯이 때려잡았다. 히코네 번에서는 이때 붙잡은 미토 번 무사 352명을 츠루가에서 처형했다.
에도 막부와 히코네 번은 각각 이이 나오스케가 부상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막부로서는 권위가 실추됨을 막기 위해서였고 히코네 번은 번주 암살을 막지 못함은 무사 실격으로 가문이 단절되고 엄벌에 처해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기 전[18]에 나오스케가 암살당했는데 후계자를 미리 세웠다면 감봉으로 끝날 사건인데 후계자를 안 세우는 바람에 이이 가문이 개역될 위기에 처했다. 막부 입장에서도 이이 가문을 개역시키면 또 다시 낭인들이 생기는 게 부담스러우니[19] 말기 양자를 세웠다는 명분으로 감봉시키고 나오스케의 암살은 부상으로 공표하고 한 달 뒤에 죽었다고 처리했다.
전술한 것처럼 히코네 번은 나오스케의 목을 필사적으로 수습했는데 이후 목하고 몸통을 봉합해서 나오스케가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고메이 천황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그의 정실이자 황족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 및 이에사다 정실 텐쇼인(天璋院)이 이이 나오스케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위문사절과 설탕과자 같은 귀한 물건부터 간단한 각종 물품들을 위문품으로 보냈다. 이 소식에 사츠마 번부터 시작해서 여러 다이묘들도 따라서 위문품과 위문사절을 보냈는데 저간의 상황을 몰랐던 미토 번에서도 이를 따라했다가 히코네 번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는데 명절 백주대낮에 에도 한복판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죽는 광경을 볼 사람은 다 봤기 때문이었다. 에도 사람들은 도망친 히코네번 무사들을 좋은 오리를 그물로 안 잡고 가마로 잡았냐며 비꼬았다고 한다.
1861년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 1817년 ~ 1887년)가 에도 성으로 참근교대할 때 조정의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大原重德, 1801 ~ 1879)[20]와 함께 정치개혁(분큐의 개혁)을 주도했다. 이이 나오스케 사후에 막부 각료들을 정리하던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1820년 ~ 1871년)는 미토 번 무사들의 습격으로 일어난 사가시타 문 밖의 변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분큐의 개혁 때문에 노중에서 물러나야 했다. 히코네 번은 이이 나오스케의 실정을 이유로 35만 석에서 25만 석으로 감봉되었고 교토 수호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이로 인해 히코네 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쪽에서 멀어져 거리를 두었다.
감봉은 메이지 유신 이후 히코네 번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이 가문은 25만 석으로 감봉된 탓에 백작으로 봉해져서 불만스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래 35만 석 규모라면 후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는 신정부가 안세이의 대옥사로 생긴 원한으로 백작에 봉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감봉 후 실제 수확량이 9만 석으로 감봉 전을 기준으로 해도 후작의 기준인 15만 석에 못 미쳤기 때문에 안세이의 대옥사와는 무관함이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히코네 번은 토바 후시미 전투부터 천황 편에 섰고 곤도 이사미를 붙잡는 등 공을 세워서 천황으로부터 대우받았다고 한다.
5. 화해
사건 이후 미토와 히코네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부터 텐쿠도의 난까지 양측의 앙금은 계속돼서 현대로 넘어와서도 으르렁대지는 않았어도 사이가 좋다고도 하기 어려웠다.결국
6. 번외
- 이후 사가시타 문 밖의 변 때 안도 노부마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호위를 강화하여 존황양이지사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무사하였다. 하지만 이때 입은 부상으로 무사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명목으로 실각하고 만다.
- 사건으로부터 5개월 후인 8월 15일에 생전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했던 미토 번주 나리아키도 사망했는데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한때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는 히코네 번사에게 암살당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지만 당시 히코네 번에서는 암살을 부정했으며 기록에 의하면 사망 전후로 협심증 징후를 보였던 것 때문에 오늘날에는 심근경색으로 인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72년 뒤 바로 그 자리 근처에서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발생했다.
- 츠츠이 야스타카의 SF 단편집인 '최후의 끽연자'에 이 사건을 다룬 단편소설인 '만엔 원년의 럭비[22]'가 수록되어 있다. 초반까지만 해도 이 사건을 묘사하는 것 같더니[23] SF와 미스터리 덕후인 츠츠이의 작품답게 후반부에는 닌자들과 타임슬립한 영국의 럭비 선수들이 이이의 목을 가지고 럭비를 한다.
- 이 사건으로 인해 고메이 천황은 안세이(安政)에서 만엔(萬延)으로 개원(改元)한다.
- 이이 나오스케는 상당한 검술의 달인이었지만 전술한 대로 양이파(외세 배적)들의 신식 리볼버에 당해서 별 힘을 못 쓰고 죽었다. 앞서 가마에서 입은 총상만 없었어도 검술로 위기를 타파하고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7. 사쿠라다 문 18사
- 이나다 마사타츠(稻田正辰, 1814~1860): 통칭 쥬조(重藏). 본래 농민으로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한다. 사건 당시 나오스케를 습격했지만 전투 중 사망.
- 세키 토오루(關遠, 1824~1862): 통칭 테츠노스케(鐵之介). 미토번사.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함여 사건을 지휘하였다. 이후 에도에서 처형.
- 오카베 타다요시(岡部忠吉, 1818~1861): 통칭 산쥬로(三十郞). 미토번사. 사건에 가담한 이후 오사카로 도망쳐 그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 미토로 귀환한다. 이후 처형.
- 히로오카 노리노부(廣岡則順, 1840~1860): 미토 번사. 무오의 비밀칙서 사건 때 미토 번이 이를 반납하려 하자 반대하였다. 사건 당시 부상을 입고 자살.
- 야마구치 마사시(山口正, 1832~1860): 통칭 타츠노스케(辰之介). 미토번사. 무오의 비밀칙서 사건때 미토 번이 이를 반납하려 하자 반대하였다. 사건 당시 중상을 입어 자살.
- 코이부치 스즈노부(鯉淵鈴陳, 1810~1860): 통칭 카나메(要人). 스와 신사 신직. 사건 당시 중상을 입어 자살.
- 사노 미츠아키라(佐野光明, 1839~1860): 통칭 타케노스케(竹之介). 미토번사. 사건 당시 중상을 입어 로슈 와키자카 야스오리 저택에서 자살.
- 쿠로자와 마사카즈(黑澤勝算, 1830~1860): 통칭 츄사부로(忠三郞). 미토번사.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근신처분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사건 당시 이이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이후 병사.
- 사이토 카즈요시(齋藤一德, 1822~1860): 통칭 켄모츠(監物). 시즈노야시로(靜神社)신관. 안세이의 대옥사 때 신관 61명을 이끌고 옥사를 끝낼 것을 건의한다. 사건 당시 중상을 입어 이후 사망.
- 오제키 마스요시(大關增美, 1836~1861): 통칭 와시치로(和七郞). 미토번사. 쿠로자와 마사카즈의 아우로 형과 함께 사건에 가담. 이후 쿠마모토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모리 나오나가(森直長, 1838~1861): 통칭 고로쿠로(五六郞). 미토번사. 사건에 가담, 이이 나오스케를 권총으로 저격한 인물. 그전에도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었다. 중상을 입어 구마모토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하스다 마사요시(蓮田正美, 1833~1861): 통칭 이치고로(一五郞). 미토번사. 사건에 가담, 중상을 입어 로주 와키자카 야스오리 저택에 자수한다. 이후 에도에서 처형.
- 모리야마 마사노리(森山政德, 1835~1861): 통칭 시게노스케(繁之介). 미토번사. 다카하시 다이치로를 섬긴다. 사건에 가담. 이후 구마모토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카이고 무네치카(海後宗親, 1828~1903): 통칭 사키노스케(磋磯之介). 미토에서 검술과 포술을 배웠다. 사건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아이즈와 에치고에 은신하여 살아남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경시청과 현청에서 근무.
- 스기야마 마사토(杉山當人, 1824~1861): 통칭 야이치로(彌一郞). 미토번사. 사건에 가담하여 중상을 입는다. 이후 구마모토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히로키 아리요시(廣木有良, 1838~1862): 통칭 마츠노스케(松之介). 미토번사. 사건에 가담 후 카가, 에치고에서 은신하나 다수의 동지들이 죽었음을 알자 자살.
- 마시코 마코토(增子誠, 1823~1881): 통칭 킨파치(金八). 미토번사. 사건에 가담 후 히타치에서 은신하여 살아남았다.
- 아리무라 카네키요(有村兼淸, 1839~1860): 통칭 지자에몬(次左衛門). 사쓰마번사. 사쓰마번사이자 뒷날 나라현지사를 역임하는 카에다 노부요시[24]의 친동생.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 형 유스케와 함께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한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때 나오스케의 수급을 들어올렸다. 이후 중상을 입은 채로 도주하다 형과 함께 붙잡혀 사쓰마에서 자살.
8. 음모론
일각에서는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인 아츠히메가 관여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바로 가담자 중의 한 명인 아리무라 지사에몬의 존재 때문이다. 아리무라 지사에몬은 사쿠라다 문 18사 중에 유일한 사츠마 번사다.문제는 아리무라 지사에몬이 사츠마 번의 일개 하급무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리무라 정도의 무사가 과연 독단적으로 미토 번사들과 함께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시마즈 히사마츠가 암살 참여를 거부한 상황에서 아리무라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쇼군의 정실부인이자 선대 주군의 양녀인 아츠히메밖에는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확실히 아리무라 지사에몬은 의문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비밀결사인 정충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리무라의 뒤에는 정충조가 있고 그 배후에는 아츠히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아츠히메가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관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이 나오스케가 그녀의 양부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독살했기 때문이라는 견해[25]가 있다.
[1] 신자체로는 桜田門外の変, 영어로는 'Sakuradamon Incident'라고 한다.[2] 오늘날 시가현 지역이다. 당시 고쿠다카는 30만 석으로 후다이 번 중 1위였다.[3] 양이론자이자 히토츠바시 파를 이끈 인물로 실은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의 친아버지. 미토 고몬이 편찬하기 시작한 《대일본사》에도 관여해 학문 발전에도 공헌했다.[4] 후쿠이 번주이자 히토츠바시파 원년 멤버로 메이지 유신 이후까지 요시노부와 교류를 이어간 막부 말기의 주요 정치인.[5] 히사미츠는 오유라 소동 때 히토츠바시파와의 외교전에 패배해 번주 자리를 이복형 나리아키라에게 빼앗긴 인물이었다. 안세이 대옥 때 (자신의 번주 즉위에 반대했던) 히토츠바시파 인사들이 대거 몰락하자 이들과 사츠마 번의 관계에 선을 그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참고로 히사미츠가 대원군 자격으로 국주에 올라 제일 먼저 한 일은 안세이 대옥을 핑계로 시마즈 가문 내 반대파(나리아키라파) 행동대장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아마미 군도 오오시마 섬으로 유배형에 처한 것이었다.[6] 음력으로 3월 3일, 히나마쓰리 날 이었다. '복숭아의 절구'라 해서 에도 성에서 연례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다이묘와 가신들이 입성한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7] 통칭은 고로쿠로(五六郞) 출처[8] 통칭은 사부로우에몬(三郞右衛門) 출처[9] 통칭은 츄사부로(忠三郞) 출처[10] 현대 연구에 따르면 Colt M1851 'navy'의 복제품으로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암살을 위해 하사한 것이었다.[11] 통칭은 츄자에몬(忠左衛門) 출처[12] 통칭은 쥬조(重藏) 출처[13] 통칭은 타로베에(太郞兵衛) 출처 통칭과 달리 이름은 한자로 쓰되 일본어로 훈독하지만 거의 후리가나가 안 달려서 어떻게 읽는지 불확실해서 몇몇 이름은 틀릴 수 있으니 주의[14] 통칭은 지자에몬(次左衛門) 출처[15] 통칭은 히데노죠(秀之丞) 출처 宗과 親은 일본 이름에서 훈독이면 후리가나가 다른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건 확실하다.[16] 이름이 마사노리(政則)라는 설도 있다. 통칭은 네노지로(子之次郞)고 하야시 요시부미(林以文)의 둘째 아들이며 히로오카 노리타카廣岡則孝의 양자다. 출처[17] 한국 한자음으로는 동선사 사건이다. 동선사는 도쿄 미나토에 있는 임제종 소속 사찰이며 1609년에 이토 스케노리(伊東祐慶, 1589 ~ 1636)가 세웠지만 19세기 말에는 영국 공사관으로 잠시나마 사용되었고 여기에서 제1차 사건은 미토 번을 탈번하여 떠돌던 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 등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18] 아들들이 모두 서자였고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았던(장남은 태어난 날 사망) 나오노리는 만 12세도 되지 않았다.[19] 이이 가문이 개역되면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이 가문의 낭인들이 미토 번과 같은 식으로 암살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이이 가문을 개역하면 미토 번에 사건의 책임을 묻고 추가로 가중처벌해야 하는데 이러면 미토 번이 막부에 직접 칼을 들이댈 수 있었다.[20] 후지와라노아소미 37세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내손 타다치카(忠親)가 우지를 버리고 나카야마(中山)씨를 일컬었고 28세손 시게치카(重親)가 니와다(庭田)씨의 양자가 되었으며 33세손 노부유키(宣慶)가 쿠즈오카(葛岡)씨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노부유키(宣之)로 바꾸고 노부유키의 아들이 노부요시(宣易)고 노부요시의 아들로 추정되는 시게타비(重度)가 노부요시의 다른 아들인 히데아츠(榮顯)의 양자가 되어 아들 시게타다(重尹)를 낳고 시게타다의 아들이 시게토미다.[21] 물론 이게 우연일 리는 없다. 일본 시골 지역에서는 옛날 번주들의 자손들이 정치계에 입문하여 여전히 그 지역의 유지로 행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22] 제목 자체는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을 패러디한 것이다.[23] 사건이 벌어진 발단이 '이이가 소의 도살을 금해 쇠고기를 못 먹게 되어서 원한을 품은 이들이 벌였다'고 왜곡되어 묘사된다(…)[24] 海江田信義. 본명은 아리무라 노부요시(有村信義). 사츠마·영국 전쟁의 원인이 되는 나마무기 사건의 범인중 하나로 카에다는 장인의 성씨로 그가 사위 겸 양자기 때문이다.[25] 나리아키라는 콜레라로 사망했지만 독을 이용한 암살 의혹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