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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몬 의거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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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사쿠라다몬 의거
櫻田門義擧
파일:사쿠라다몬 의거.jpg
<colbgcolor=#bc002d> 발생 일시 1932년 1월 8일
발생 위치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카스미키세키2가 1
유형 독립운동
당사자 이봉창 (남, 1900년생 / 당시 31세)
혐의 황실에 대한 죄[1] (구 일본 형법 제73조)
피해 부상 2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영향5. 매체에서6. 연관된 사건

[clearfix]

1. 개요

櫻田門
일본어: [ruby(桜田門事件, ruby=さくらだもんじけん)](사쿠라다몬 사건)

1932년 1월 8일 일본 제국 도쿄 경시청에서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쇼와 덴노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 한국에서는 '이봉창 의거'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2]

사쿠라다몬(桜田門, 앵전문)은 고쿄 가이엔(황거 외원)에 있는 문으로 구 에도성의 문이기도 했는데, 현재는 도쿄메트로 유라쿠초선이 이 쪽으로 지나가며 사쿠라다몬역이 있다. 다만 실제 이봉창의 의거는 사쿠라다몬이 아니라 거기서 90미터 떨어진 도쿄 경시청 청사 앞에서 일어났는데,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은 황궁 바로 맞은 편이자 수도의 치안을 맡은 경시청 청사 앞에서 천황 암살 시도가 벌어졌으며 사건이 벌어지기 얼마 전인 1931년에 경시청 구 청사가 완공된 상태였기 때문에[3] 일본 제국 경찰에서 책임추궁을 우려해서 사건을 축소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010년 10월 10일 기사 “이봉창 의거장소 ‘앵전문’ 아니다”를 봐도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2. 배경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자금과 인력의 부족, 내부 분열 등으로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비단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만주의 한국 무장 독립운동 세력 전반이 서서히 일본에 진압당하고 있었고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도 러시아 내전이 종식되면서 끝났고 식민지가 된 조선 본토에서는 조선 총독부의 문화 통치로 인해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있었다. 이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파괴와 같은 비밀공작(사보타주)을 수행할 단체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한인애국단을 창설했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중국의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매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장제스중국국민당국민혁명군은 1928년부터 북벌을 단행하여 이념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고 있었고 일본 제국은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당할 위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일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던 만주의 봉천군벌마저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가담하며 중국의 통일이 완수되자, 일본 관동군의 모험주의적 장교들은 독단적으로 불법 침공을 감행해 만주를 식민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전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국제 사회를 경악시켰으며 전 세계적으로 규탄 성명이 쏟아지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중국과 단단한 항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중국의 여론은 당장 중일전쟁을 일으켜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과 막후에서 접촉하던 중국 국민혁명군 상하이 군수공장 주임 김홍일[4] 상교는 무기 생산 현황을 보고할 겸 난징으로 올라가 국민혁명군 최고사령부의 분위기를 알아보고자 했다. 만일 전쟁이 결의되고 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혁명군의 공동 전선도 구성할 수 있을 터였지만 중국의 여론과는 달리 장제스와 국부군 사령부는 일본과의 현대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고 냉정하게 판단했으며 대신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국부군 군사회의 내의 동료 장교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김홍일과 김구는 매우 실망했다.

그런데 이때 홀연히 김구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처음에는 매우 일본인스러운 인상을 풍겨서 김구 외에는 모두가 그를 밀정으로 의심했으나 김구는 그를 계속해서 믿어 주었다.[5] 이봉창은 놀랍게도 일본 제국의 천황을 암살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술자리였고 반대도 많았지만 이봉창은 매우 진지했고 김구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킨 후 거사를 진행시켰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이 계획이 실행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천황을 암살함으로써 만세일계의 천황 신앙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타격을 입히고 세계와 조선에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침체되던 한국 독립운동에 새 활력을 강하게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부가적으로는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되던 중국의 대 한국 인식을 쇄신하여 동맹으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노릴 수도 있을 것이었으며 잘만 하면 천황의 복수를 부르짖을 일본 제국과 영토 수복을 원하는 중국의 전면 전쟁을 유도함으로써 항일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작전의 핵심 인물들
파일:김구.jpg 파일:이봉창.jpg 파일:khidiploma.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한인애국단
이봉창
국민혁명군[6]
김홍일
주요 인사들의 역할은 다음과 같았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작전과 동선 전반을 직접 설계했으며 국민혁명군 김홍일 상교는 김구 주석이 짠 작전의 세부 사항을 조정하고 폭탄을 조달했다. 그는 상하이 군수공장 주임이었기 때문에 폭탄 한두 개쯤 빼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폭탄 투척 거리가 생각보다 매우 길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홍일은 폭발력이 좀 작으나 신뢰성이 높고 가벼운 마미 수류탄을 준비했다. 동시에 그는 상하이에 주둔하여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과 대치했던 국부군 19로군 후방정보국장직을 역임하며 일본군 동향을 살피는 업무에 종사했기에 일본의 내부 사정에도 밝았다.

가장 중요한, 행동을 맡은 이봉창은 자신의 넓은 일본인 인맥을 바탕으로 안전을 보장받은 뒤 일본 도쿄에 직접 잠입해 암살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그는 상하이 일본 조계의 경찰부장과 친분이 깊었기 때문에 경찰부장이 써 준 추천서를 바탕으로 별 탈 없이 일본에 잠입할 수 있었다. 물론 해당 경찰부장은 사건의 여파로 인해 본토 송환되어 면직되었고, 이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3. 전개

1931년 12월 13일 선서식을 마친 이봉창은 1931년 12월 17일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잠입했는데 도쿄에서 숙박했다가 거사 바로 전날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에서 숙박했다. 일부러 숙박처를 도쿄에서 외곽으로 변경한 까닭은 천황의 행차 전날 밤부터 치안 기관에서 도쿄 관내에 있는 음식점, 여관, 유곽, 절 등 공공장소는 당연하고 빈 집까지 샅샅이 검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거 이후 일본 경찰이 조사하여 이를 알게 되자 이봉창의 치밀함에 놀랐다고 한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지만 마차 여러 대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2번째 마차에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명중했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그가 지나보낸 1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고[7]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말에 탄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8] 폭탄 투척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이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앞에 있던 다른 일본인을 범인으로 여겨 구타하자 이봉창은 이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자수했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 가지고 온 폭탄 2개 중 던지지 않은 것은 일본 경찰에게 주었다.
파일:/image/028/2010/01/28/7000394347_20100125.jpg
1932년 1월 8일 의거 직후 체포된 이봉창.

이봉창에 대한 공식 취조는 1932년 1월 8일 오후 3시 50분 시작되었다. 경시청 형사부장 자리에서 외부와 통하는 연락이 일체 차단된 상태에서 진행했으며 검사가 직접 취조했다. 아래의 글은 검사가 직접 작성한 본문을 그대로 번역해 옮긴 것이다.
범인은 언어가 명석하여 일본인과 다름이 없고,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띠었으며,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 1928년(쇼와 3년) 11월에 거행된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교토로 갔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10일간이나 유치된 것에 분개하여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고[9] 1930년 11월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코드회사 영창공사에서 근무하고, 백정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1931년 12월 23일에 도쿄에 왔고, 1932년 1월 4일에 백정선으로부터 은행을 통해 다시 100원의 송금을 받고, 7일 아사히 여관을 떠나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의 유곽에서 묵고, 8일 오전 8시에 전차로 하라주쿠에 도착하고, 검색이 심해 거사에 불리함을 알고 전차로 요쓰야역으로 가고, 다시 경시청 앞으로 가서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4. 영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1932%EB%85%84_1%EC%9B%94_10%EC%9D%BC%EC%9E%90_%EC%A4%91%EC%95%99%EC%9D%BC%EB%B3%B4_%EC%9D%B4%EB%B4%89%EC%B0%BD.jpg
1932년 1월 10일 조선중앙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1932%EB%85%84_1%EC%9B%94_10%EC%9D%BC%EC%9E%90_%EB%8F%99%EC%95%84%EC%9D%BC%EB%B3%B4_%EC%9D%B4%EB%B4%89%EC%B0%BD.jpg
1932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위의 두 신문을 비롯해 당시 조선에서는 아래 언급된 '일본의 검열'로 인해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비난하는 어조로 보도했다(일본 사법성 발표 인용).# 이 부분에 대해 원로 언론인인 이혜복(1923년생)은 "당시 신문을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신문이 못 나간다. 조선총독부로부터 검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되려 사건을 보도한 것 자체가 쾌거라는 의미이고 검열 시대에는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10][11]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신문사들을 압박해서 독립운동가들을 '강도' 등의 표현으로 쓰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반면 해외에 소재해 조선총독부의 검열 대상에서 벗어난 한인 신문사[12]들은 '통쾌한 의거였다'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중국의 신문사인 <민국일보>는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봉창이라는 한인이 일본의 황제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不幸不中)"고 적었는데 이 '불행'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눈이 뒤집힌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3] 일본은 기사를 실었던 신문사와 지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는데 결국 일본은 상하이에서 중국과 전쟁을 치렀다. 이후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행사[14] 벌였는데 이때 윤봉길이 행사에 참가한 일본군 및 일제 관련 인물들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졌다.

이봉창의 의거 당시 그를 비난했던 신문 기사를 실은 중앙일보사 사장이 여운형이라는 뜬소문이 있으나 이는 거짓으로 이 무렵 여운형은 감옥에 있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 출옥한 후 지인들의 도움[15]을 받아 1933년 2월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고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쳐서 창간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에도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봉창 의거는 1932년 1월에 있었으므로 저 사건은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맡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보도라는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1932년 9월 16일 대심원[16]은 사건에 대해 제1차 공판을 열었다.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이봉창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17] 당시 이봉창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5. 매체에서

6. 연관된 사건



[1] 제73조 천황,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 대해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고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2] 안중근 의거라고만 해도 하얼빈 의거를 의미하듯이 이봉창의 가장 유명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행적이자 이봉창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의거이기 때문에 이봉창 사건이라고만 해도 이걸 의미한다.[3] 구 청사는 1977년 철거되어 1980년 그 자리에 현재의 경시청 청사가 들어섰다.[4] 독립운동가. 20년대에는 무장독립운동, 30년대에는 국민혁명, 40년대에는 대일 항전과 한국군 건군에 참여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군단을 이끌고 북한군의 침략을 지연시켰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집권기에 외무부장관으로 영전했다.[5] 다만 김구조차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해서 이봉창에게 자신의 이름을 '백정선'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주었고 이봉창은 죽을 때까지 김구를 백정선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6] 중국국민당의 당군[7] 흔히 대통령이 이동할 때 대통령이 탑승한 것과 똑같은 자동차가 5대씩 이동하는데, 당시에도 그런 보안책을 사용했던 것. 이 보안책의 원조는 진시황이었으며 그 보안책 덕에 진시황도 장량창해 역사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8] 수류탄의 화력이 약해 제대로 폭발하지 못했고 37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이 말이 몸빵한 덕에 상으로 당근 1상자를 받았다고 한다.[9] 이봉창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거 이전의 이봉창은 다른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특이하게도 진심으로 일본을 동경하고 지배에 순응하던 식민지 국민이였다. 그러나 2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직 조선 출생이란 이유만으로 일본인들에게 심한 인종차별을 당했고, 그마저도 꾹 참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천황의 얼굴을 보러 갔다가 한글 편지를 지녔단 이유만으로 즉위식은커녕 유치장에 구금되는 등 험한 꼴만 당해야 해야 했다고. 이 때문에 제대로 분노하여 일본에 대한 환상이 깨져 결국 독립투사로 전향하게 되었다는 파란만장한 뒷이야기가 숨어있다. 일본의 적을 일본 스스로가 만든 케이스이자 일본의 식민 통치의 모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10] 이는 군사독재 시기인 1980년대까지 이어져서 당대 사람들은 신문 기사를 보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속뜻을 추론하면서 읽는 경우가 많았다.[11] 비슷하게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도 검열 때문에 "폭도"가 국경을 넘어서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나쁜 어조로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그 속뜻을 이해했다고 한다.[12] 대표적으로 미주에 있던 한인 신문사 <신한민보>.[13] 다만 단순히 사쿠라다몬 의거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야기한 것은 아니고 뒤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14] 쇼와 덴노의 생일. 현재 쇼와의 날.[15] 대표적으로 조동호가 여운형을 도와주었다.[16] 일본 제국의 최고 사법 기관. 현 최고재판소.[17] 당시 일본에서 천황을 비롯해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죄는 대역죄라고 하여 대법원 격인 대심원에서만 공판이 진행되는 단심제였고 사형만이 선고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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