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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06:38:24

이시모토 사건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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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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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이시모토의 납치3.2. 장쉐량의 사직3.3. 베이핑 군분회의 설치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이시모토가 한무리의 게릴라들에게 연행되어간 사건을 말한다. 일본 제국은 이를 구실로 열하 병탄을 노렸으나 만주 내부가 안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물러섰다.

2. 배경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급진파인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은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병탄했다. 당시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쉐량은 일본군의 모략으로 촉진된 화북의 불안정을 정리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관내로 출병한 사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국지도발인 것으로 오해하여 부저항주의로 일관하다가 만주를 통째로 잃고 열하성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국제적인 관심을 상하이로 돌린 일본은 1932년 3월 선통제를 집정으로 추대하여 만주국을 선포하고 열하성이 만주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허나 봉천군벌의 원로이며 흑룡강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잔산은 흑룡강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광할한 만주 전역에 마적단을 포함하여 반일 군사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아직 열하성으로 진출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1932년 8월, 관동군 사령관이 혼조 시게루에서 무토 요시노부 대장으로 교체되었는데 무토는 전임 혼조와 달리 관동주 장관 겸 만주주재 전권대사를 겸하는 등 훨씬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2년 9월 15일, 무토는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와 일만의정서를 조인하여 일본군의 만주 영구주둔권을 인정받고 9월에 마잔산을 격퇴하여 소련으로 쫓아냈지만 여전히 20만을 헤아리는 반일 게릴라들이 만주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몽 영유가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주장하던 관동군은 열하성으로의 진출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마약 중독으로 이미 판단력을 잃어버린 장쉐량과 부패하고 무능한 탕위린은 일본군에 맞서 열하를 방어할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3. 전개

3.1. 이시모토의 납치

그러던 중 1932년 7월 17일 열하성 북표에서 요령성 금주로 향하던 열차가 남령-조양사 사이에서 한무리의 항일 게릴라[1]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은 열차를 멈추고 일본군의 연락책이었던 관동군 촉탁 이시모토를 연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열하군 109여 소속 3영이 조양사로 출동하였고 관동군 8사단도 이를 핑계로 장갑열차를 몰고 조양사로 몰려왔다. 열하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대화를 요청했지만 일본군은 즉각 발포로 응답했고 결국 3영은 2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영장까지 부상당한 상태에서 탄약이 부족하여 남령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즉각 조양사에 폭격을 가하고 31연대를 출동시켜 조양사를 점령했다. 열하군은 사절을 보내 이시모토 연행사건은 열하군과 무관하며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일본군은 7일 이내에 이시모토를 찾아내고 109여 여장 동복정이 금주로 와서 일본군에게 사죄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군사행동을 속행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열하에 증원군을 보내 일본군에 맞서라고 지시했고 열하성 주석 탕위린에게도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일본군은 만주 곳곳의 항일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이 분산된 상태라서 열하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장제스는 이때에 중국군이 단호히 맞선다면 일본군이 물러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게릴라는 22만명에 달하였고 일본군은 진압작전이 마무리되는 33년 2월까지는 열하를 상대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본군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점령했던 조양사에서 곧 철수하였고 관동군 참모장 하시모토도 육군 참모차장 우에다에게 극비지급전문을 통해 병력 여유의 부족으로 열하에 대한 군사작전을 행할 수 없음을 보고하며 보병 1개 사단과 기병 1개 여단의 증파를 요청했다. 우에다는 "현 시점에서 내외 제반정세를 감안할 때 열하 방면에 대한 무력 해결은 후일로 미룰 것."을 지시했다.

3.2. 장쉐량의 사직

하지만 장쉐량과 탕위린 모두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중앙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만주사변 이후 장쉐량은 만푸린과 탕위린이 지휘하는 2개 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열하성에 진주하여 일본에 맞서라는 중앙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군비 부족을 이유로 이에 따르지 않으며 장성선에서 평진지역 수비에만 매진했다. 탕위린의 경우에는 아예 만주국 건국에 기웃거리는 등 일본 편인지 중국 편인지도 알 수 없는 박쥐짓을 하면서 골동품 밀매와 아편장사에만 골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장제스는 8월 5일 소련과의 복교를 위해 베이핑에 파견되어 있던 장췬을 통해 장쉐량의 태도를 바꾸게 할 것을 촉구했다.
"한경 형[2]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만약 열하에 군사를 보낼 결심이 서 있다면 속히 출병함이 좋겠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 시기를 놓치고 패배할 것이다. 본인은 열하출병이 지연되고 있는데 대해 초조함과 염려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어쨌든 한경 형은 기회가 왔을 때 신속히 결단을 내리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적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8월 6일 행정원장 왕징웨이는 아예 장쉐량에게 사퇴를 요구하였다.
"상하이 방어전은 확실히 엄청난 공적이다. 따라서 형에게는 합리적으로 기대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만주사변이 일어난지 한해가 지났는데도 형은 형의 명성과 어울리는 업적을 전혀 이뤄내지 못했다. (...) 현재 중앙의 군대는 소공에 종사하여 더위 속에서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작전을 계속하고 있는 바, 내지의 안정을 도모하고 후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를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군용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소란을 피우는 지역은 사실 형의 방위담당지역이다. 실력으로 보든 지리상의 이점으로 보든 적군에게 저항하는 것은 형이 그 직에 있는 한 다른 사람이 맡을 일이 아니다. 현재 형은 군사 한명도 내지 않고 화살 하나도 쏘지 않으며 저항이라는 이름을 빌어 중앙에 군비만 요청할 뿐이다. 형은 마땅히 사직하여 4억 국민에게 사죄하라."

왕징웨이는 이 전보를 보낸 후 장쉐량의 재정적 요구를 도무지 들어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당뇨병 치료를 이유로 휴가를 내고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의 대행으로는 쑹쯔원이 임명되었다.

마약 중독이 너무 심해져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장쉐량 역시 저항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변명하면서도 베이핑 수정공서 주임을 사직한다고 회전을 보내고 자금성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탈리아, 터키, 독일을 거쳐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후 프랑스로 이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3.3. 베이핑 군분회의 설치

8월 16일 국민정부는 장쉐량의 사직을 수리한 다음에 17일 베이핑 수정공서를 폐지하고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를 설치하여 군사위원장 장제스가 겸임하게 했다. 하지만 장쉐량의 사퇴에 북방에선 왕징웨이가 장쉐량을 제거하려 든 것이라고 반발했고 쑹저위안 등이 자신들은 장쉐량과 진퇴를 같이 하겠다고 타전했다. 이에 8월 20일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대리인으로 장쉐량을 임명하여 북방의 불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후에도 장쉐량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항일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고 방관함으로 일본군이 이들을 진압하고 만주를 안정시킬 시간을 주고 만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의 코가 석자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 장제스는 장쉐량의 지원요청에 6개 사단의 파병을 약속했으나 제4차 초공작전 때문에 4개 사단의 파병에 그쳤다. 하지만 그 중에서 3개 사단이 장제스의 정예부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장제스로서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이에 장쉐량도 러허에 5개 여단을 보내어 총 23만 5천명의 중국군이 러허에 집결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장상태가 더 좋은데다가 일본군은 만리장성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장쉐량은 그제서야 일본군의 가시화된 위협을 인지하고 장제스에게 직접 북상하여 일본군에 맞설 것을 요구했으나 장제스는 초공작전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응할 수 없는 요구였다. 또한 장제스는 1933년 1월 7일 일본군은 최소한 5개 사단을 본토에서 차출해오지 않는 이상 열하를 감히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일본군의 폭주는 장제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편 문제의 이시모토는 1933년 2월 23일에야 시체로 발견되었다.

4. 결과

이시모토 사건은 관동군의 열하 진공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덕에 더 큰 무력분쟁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열하를 방비하는 동북군이 전혀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결국 만주 내부를 어느 정도 정리한 관동군은 1933년 1월 산해관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을 침탈하기에 이른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혹은 비적떼.[2] 장쉐량은 장제스에 비해 한참 어린 사람이었지만 당시 중국에선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중하는 의미로 형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었다. 장제스보다 나이가 많은 왕징웨이도 장제스에게 형이라고 존칭하는 편지를 쓴 바가 있다. 왕징웨이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