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次 剿共作戰 |
Fifth Encirclement Campaigns |
1. 개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5번째 대규모 토벌작전. 제5차 위초작전, 제5차 소공작전, 제5차 초비작전이라고도 한다.실패로 끝난 이전의 4차례 토벌작전과는 달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중국 공산당을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했다. 원래 섬서성까지 퇴각한 공산당에 대한 제6차 초공작전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서안 사건의 발생으로 초공작전은 이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2. 배경
제4차 초공작전은 지금까지 진행된 초공작전 중에서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열하사변으로 인해 중단되면서 강서의 중앙 소비에트를 소멸시킨다는 최종목표를 달성하진 못했다. 홍군은 입으로는 항일을 위해 정부와 협력하겠다고 주장했으나 국민정부가 일본을 막는데 힘을 쏟는 틈을 타서 1933년 5월 주더와 저우언라이의 지휘 아래에 병력을 모아 소비에트를 확장하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강력한 탄압 때문에 상하이 임시당중앙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으로 이전한 상태였는데 임시 당중앙은 국민당 거점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문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선제공격에 회의적이라 반대했으나 임시당중앙의 압력 때문에 실각하여 홍군의 지휘계통에서 물러나 명목상 국가주석만을 맡고 있었다.홍군은 내부 분열을 겪고 있는 반면에 장제스와 국민혁명군은 내부개혁을 거듭하면서 더욱 강력해지고 있었다. 장제스는 5월 21일 난창행영을 소공전 최고사령부로 발족시켜 광동, 강서, 복건, 호남, 호북 등 5개 성에 군정을 실시했다. 그리고 6월 8일 초비군사회의를 개최, 봉쇄작전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군사에 3할, 정치에 7할을 주력하고 도로와 진지를 구축하며 마오쩌둥의 유인작전을 무력화하자는, 지금까지의 전훈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토벌작전을 구상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무장한 홍군에 대항한 정치공작도 준비하게 했다. 이를 위해 산서성 노산에 노산군관훈련단을 설치하여 천청을 단장으로 임명하고 3기 7500명의 정예장교들을 배출했다. 이들 장교들은 초비독본, 초비부대 훈련요지, 민중조직, 전시정치공작 등을 교육받으며 홍군이 장악한 농촌에 대한 정치공작의 중요성을 배웠으며 토치카 전술을 비롯한 새로운 군사전략을 습득했다.
이 즈음 신생활운동이 시작되어 농촌생활에 대한 개선과 악습 퇴치 등이 시도되었다. 오토 브라운은 이를 두고 봉건질서 회복과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권리를 합법화하는 시도일 뿐이라고 폄하하면서도 이것이 대단한 실효를 거두어 국민당군의 도망병이나 포로들이 극히 적었다고 지적했다.
3. 전개
3.1. 준비단계
7월 23일 장제스는 쑨원을 기념하면서 <현대 군인이 알아야 할 점>이라는 강연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벌을 엄정, 공평하게 할 것.
- 2. '군인의 최대목적은 삼민주의를 위해,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죽는 데 있다'고 부하에게 분명히 가르칠 것.
- 3. 개인의 생명은 민족 전체의 역사적 생명을 바꾸고 합일시킴으로써 영원히 발양된다고 하는 '생명의 진의'를 부하에게 확실히 가르칠 것.
- 4. '군인의 책임은 국가를 보호하고 민족을 발전시키며 주의를 실현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라는 점과 '현재 가장 가까이 있으며 강력한 적이야말로 강서의 공산주의자들'임을 부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킬 것.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조직되어 작전 수행에 장애를 주었던 부대 편성도 개편하였다. 기존의 여단을 폐지하여 2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던 기존의 1개 사단을 3개 연대로 구성하게 했고 연대 이상의 부대에는 척후부대와 수송부대를 별도 편성하여 산악작전을 원조하게 했다. 또한 직계군의 소대장 이상의 간부 7500명에게 레인저부대식 훈련을 시켰으며 전선 경계와 후방 원호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러한 군제 개혁은 8월 말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5천만 달러를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에서 차관을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했다.
또한 공군의 3개년 건설계획이 책정되어 5차 초공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3개의 비행장이 건설되었고 국민혁명군 공군은 중앙 소비에트 지역에 대해 공중사진을 촬영하면서 홍군의 기관총 기지를 수색하는 한편 태평천국을 토벌했던 증국번과 위구르를 토벌한 좌종당의 전술을 연구하며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거기에 1933년 5월 22일 장제스의 초청을 받은 한스 폰 젝트 장군이 중국을 방문하여 장제스를 예방하고 중국군을 시찰했다. 젝트 장군은 6월에 중국을 떠나면서 비망록을 장제스에게 넘겨주어 중국군 개혁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에 따라 자체적인 무기 조달을 위해 독일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100여명에 달하는 독일 군사고문단을 받아들였다. 이들 독일군사고문단은 여러 정예부대를 독일식 무기로 중무장시킴으로써 공산당 토벌에 협조했다.
10월 2일 장제스는 난창행영에서 초공작전에 투입될 사단장, 참모장들을 모아 초비회의를 개최하여 제5차 초공계획을 입안했다. 이때 장제스는 소비에트 지구에 한 톨의 쌀, 한 줌의 소금, 한 방울의 물도 보급되지 못하게 하는 '엄밀봉쇄 전략',[1] 적의 교통을 차단하고 아군 교통을 정비하는 '교통전략', 정부군이 전진하는 모든 지역에 토치카를 구축하여 봉쇄선을 펼친다는 '토치카 전략'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토치카는 2~5km마다 설치되어 강서성 전역에 3천여개에 달했으며 기관총이 배치되어 홍군의 공격에도 대처할 수 있어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용이하였다.[2]
장제스는 난창행영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난창행영에 4개 종대를 편성하였다. 북로군은 구주퉁이 지휘하는 38개 사단으로 주공을 맡았고 남로군은 천지탕이 지휘하는 광동군 9개 사단으로 남쪽 방어를 맡았으며 서로군은 허젠이 지휘하는 14개 사단으로 공강 서안의 홍6군단을 견제하며 홍군의 서쪽 탈출을 방지하고 동로군은 차이팅카이가 지휘하며 6개 사단으로 복건의 홍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60만에 달하는 중앙군 육군에 공군, 포병, 통신병, 수송대까지 합쳐 75만명의 중앙군이 동원되었고 여기에 각 지방부대, 경위대를 합쳐 100만명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1933년 9월 25일 북로군 8종대 소속 5사단, 6사단, 56사단이 홍군이 복건 침공에 매달리는 틈을 타서 홍군 7군단이 수비하던 강서성 이천현을 기습공격으로 점령하는데 성공함으로 국민혁명군의 전략이 주효함이 입증되었다. 이천을 수비하던 홍군 지휘관 소경광은 도주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천의 함락에 크게 동요하였다.
3.2. 토벌의 시작
장제스는 5차 초공작전을 위해 65개 사단, 80만 대군을 소집했다. 장제스는 강서 외에 호남, 호북, 광동에서 3로군을 추가 편성하여 허젠, 구주퉁, 천지탕을 각각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구주퉁의 북로군을 주공으로 하여 중앙 소비에트 북부의 남성, 남풍, 임천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별도로 복건성에서 차이팅카이의 19로군이 상하이로부터 전속되어 복건 방면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봉쇄했다. 홍군과의 전력비는 10대 1의 압도적인 상황이었고 500대의 비행기를 앞세운 공군이 가세하면서 홍군은 화력 면에서 국민혁명군과는 이미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3]10월 16일 초공작전이 발동되었다. 장제스는 구주퉁에게 출격을 명령했고 동군 제3로군 천청에게도 진격을 명령했다. 3로군 선두부대가 17일 초석에서 홍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자계교를 점령했다. 19일 장제스가 직접 임천으로 달려와 독전했다. 홍군은 '5차 위초 분쇄 긴급동원령'을 발표하고 명령을 적극적으로 집행하지 않는 자는 즉석에서 엄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필사적으로 반격했다. 군사위원회는 '모든 것을 전선으로!', '한치의 땅일 망정 포기하지 마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농업생산을 높이고 수입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등 사기를 높이려고 시도하며 대중동원에 박차를 가했다.
허나 전력 열세가 너무 명백하여 10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공산군 5군단 2개 사단이 자계교에서 반격을 감행했으나 국민정부군의 토치카에 막혀 참패했다. 11월 1일 린뱌오의 1군단과 펑더화이의 3군단이 남성 동남쪽의 정부군 거점들을 공격하여 여천의 정부군을 고립하려 했으나 토치카에 가로막혀 또 다시 참패하고 6일에 패퇴했다.
2차례나 패배한 홍군은 11월 10일 3군단과 샤오징광의 7군단의 주력부대를 빼내 남성 북쪽의 호만의 국민혁명군을 공격했다. 호만에는 고작 3개 중대에 불과한 국민혁명군이 있었으나 토치카를 바탕으로 견고하게 맞섰고 임천에서 형진남의 2로군 4사단이 증원에 나서고 공군이 가세하자 홍군은 3천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 이어 국민혁명군은 개운산과 대웅관에서 잇달아 공산군을 격퇴함으로써 전에 없던 유리한 전황을 이끌었다. 토벌작전 개시 첫 1개월 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은 홍군은 전선을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하며 재정비에 들어갔다. 국민혁명군은 즉각 공산군을 추적하며 토치카를 건설하며 포위망을 좁혔다.
3.3. 복건사변
그러던 중 차이팅카이의 19로군과 광동파 천밍수, 리지선 등이 장제스에 불만을 품고 복건에서 중화공화국을 선포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산군과 협조하여 장제스에 맞섰고 공산당은 이들에 대해 초보협정을 맺는 등 협조하였으나 장제스가 중화공화국을 토벌하는 것을 방관하며 패퇴하는 차이팅카이 등을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제3의 길을 쫓는 바보들이라고 비웃었다.하지만 전략적으로 복건의 중화공화국을 방치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중화공화국이 멸망하자 장제스는 그동안 토벌에 가장 미온적이던 복건마저 장악함으로 토벌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소극적이던 광동파 천지탕, 광서파 바이충시, 리쭝런 등도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됨으로써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 대한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4] 중국혁명사를 서술한 서진영 교수는 당시 복건사변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당시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복건정부를 회색정권이라고 백안시하고, 본질적으로 국민당 정권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매도함으로써 장개석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복건정부를 진압하고 총력을 경주하여 중국공산당의 거점지역에 대한 제5차 포위공격을 감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184페이지 |
복건사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조.
3.4. 마오쩌둥의 실각과 소비에트의 급진화
"법은 혁명에 이익이 되어야 한다. 혁명에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법률적 절차는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다. 법적 절차 때문에 혁명의 이익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1934년 3월 1일, 사법인민위원 양백태.
-1934년 3월 1일, 사법인민위원 양백태.
복건사변을 진압한 장제스는 복건에서 난징으로 돌아와 국민당 제4회 사중전회에 참석하여 린썬의 국민정부 주석 연임에 참석하고 다시 초공작전에 박차를 가했다.
천청의 3로군이 여천에서 남하하기 시작했고 다른 부대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1월 27일 국민혁명군은 구가애와 새두애로 병력을 진격시켰다. 홍군 9군단과 1군단 2사단이 저항했으나 국민혁명군은 횡촌, 새두애, 구가애를 연결하는 토치카 선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홍군은 1천명을 잃고 퇴각했다. 2월 9일에는 장제스가 난창행영으로 복귀하여 다시 초공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장제스는 행정원장 왕징웨이에게 천청을 북로군 전선 총사령관에, 복건을 토벌한 2로군 총사령관 장정문을 동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초공전을 실시할 것을 타전했다.
루이진의 중앙 소비에트는 1월 15일 공산당 6기 오중전회를, 22일에 제2차 전국 소비에트 대표대회를 개최했다. 임조함이 경제보고를 하던 중 마오쩌둥이 돌연히 '긴급보고'를 제출하여 국민혁명군이 이미 복건사변을 평정하고 복건성 사현에서 명계, 청류, 천상을 공략하여 석성과 루이진을 목표로 진격 중이고 중로에서 복로군 3로군을 주력으로 한 토벌군이 여천, 광창, 영도를 노리고 있으며 영풍에서 사계를 거쳐 흥국으로 또 토벌군이 진군하고 있다고 알렸다. 복건사변의 실패와 정부군의 토벌 재개를 알게 된 693명의 대표와 83명의 후보대표들을 경악을 금치 못했고 대회는 일정이 단축되어 2월 1일 폐막했다. 이 회의에서 소련 유학파이자 상하이 임시당중앙을 이끌었던 보구(박고=진방헌)는 마오쩌둥이 토지개혁에서 우익 기회주의자로써 부농노선의 과오를 저질렀고 그가 지금껏 거둔 군사적 성과도 오로지 퇴각과 도망만 반복한 삼국지적 전술에 불과했다고 마구 비난했다. 이는 도시를 점령하여 소비에트 지구를 확장하는 노선을 신봉하던 소련 유학파의 특성+과거 유격전으로 명망을 얻은 마오쩌둥에 대한 견제가 혼합된 결과였다. 당중앙은 제3차 초공작전이 만주사변이 발생한 덕에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긴 했으나 수도 루이진의 목전까지 국민혁명군이 접근했던 것에 주목하면서 마오쩌둥의 유격전 전술의 오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4차 초공작전에서 더욱 거세졌고 당중앙이 루이진으로 이동한 이후에 폭발했던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이 홍군의 지휘계통에서 제외된 이후의 4차 초공작전에서 홍군이 승리함에 따라 당중앙의 자신감은 더욱 높아졌다.
마오쩌둥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재선임되었으나 대회가 끝나자마자 인민위원회 주석에서는 쫓겨났고[5] 그 뒷자리는 뤄푸(낙보=장문천)가 차지했다. 이는 소련에 대한 통보 없이 현지에서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크게 낙심했다. 마오쩌둥은 칭병하여 업무에서 손을 뗐다. 권력을 차지한 소련 유학파[6]는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는데 오토 브라운이 추구한 전술은 '단촉돌격'이라고 하여 지지점과 보루를 구축하여 비행기와 대포의 공격을 막은 다음에 정부군이 토치카에서 나와 출격하길 기다렸다가 습격하고 야음, 안개, 우천, 산림을 이용하여 백병전을 강요한다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홍군은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슬로건 아래 반격에 나섰으나 대실패로 끝났다.
"제2군단만 폭격으로 4700명을 잃었다. 이미 보루 내 병사는 고정목표가 되었다. 병사가 3, 4명 부상을 입어도 사관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보루를 지켰다. 장교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어 싸운 곳도 적지 않다. 사관이 전원 전사하여 일반병이 보루의 지휘를 맡는 경우도 비일비재였다.
-린뱌오
-린뱌오
2월 24일 탕언보가 지휘하는 10종대 4사단이 복건성의 사현을 함락시키고 홍군 4백명을 사살했다. 이어 장락, 태령, 명계를 잇달아 탈환하고 3월 말에 북로 3로군과 덕승관에서 합류함으로써 복건성의 홍군을 모두 격퇴했다. 4월 9일 천청은 광창 공략에 나섰다.
계속되는 패전과 강압적인 공출 때문에 동요한 주민들이 자유와 토지를 위해 정권을 사수하자는 선전에도 듣지 않고 소비에트를 이탈하고 홍군 내부에서도 탈영병이 속출하자 당중앙은 사실상 법치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를 반혁명주의자들의 변명거리로 간주하여 통치수단을 적색테러로 전환하였다. 신임 인민위원회 주석 뤄푸는 1934년 5월 22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적색테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전구에서 직접적이고 가장 신속하게 모든 종류의 반혁명 활동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호신과 모든 지주, 부농, 상인, 자본가, 상점주인, 혹은 부랑자 가운데 반혁명 활동을 수행하는 이는 모두 즉각적으로 체포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모자가 있는지 밝혀내기 위하여 철저한 조사를 필요로 하는 중요인물에 대해서는 예외이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세심한 심문은 불필요하며 호송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현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 특히 그들 중에서 반혁명분자라는 혐의가 있는 자들은 지체없이 체포해야 한다. 사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현장에서 사살하고 경미한 경우에는 후방으로 호송하여 금고에 처한다. 노동자, 농민, 빈민 가운데 반혁명활동에 참가한 배경을 갖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지도자인 경우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총살형에 처한다. 그들이 추종자이거나 미심쩍인 사람인 경우에는 후방으로 호송하여 처벌하거나 조사한다."
이에 호응하여 강서 소비에트 전역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고 고문하는 일이 속출하였고 적색테러를 호소하던 뤄푸조차도 <마구 체포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비판했으며 6월 24일에는 사법기관을 무력화하고 학살에 나서는 극좌분자들을 비판했으나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어 뤄푸에 표현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좋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3.5. 광창 공방전
4월 9일 천청은 나탁영의 제5종대를 하서종대로, 번숭보의 제3종대를 하동종대로 편성하여 광창으로 흘러가는 우강(旴江)의 기슭을 따라 남진시켰다. 복로군 우익 부대도 공격을 개시하여 이날 선화, 초휴의 홍군을 격파했다. 공산군은 단촉돌격으로 이에 맞섰고 하동종대는 대라산에 거점을 두고 저항하는 펑더화이의 4사단과 5사단의 저항에 부딪혔다. 봄장마 속에서 양군은 21일 아침까지 3일 동안 대라산을 두고 5, 6회나 뺏고 빼앗기기를 거듭하며 격전을 치렀고 펑더화이는 광창으로 패주했다. 당황한 공산당 군 수뇌부는 광창방위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전지의 당과 소비에트 보내는 지시'를 발표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무장시켜 게릴라전을 확대한다. 적색공포를 실행한다."라고 지시했다. 4월 27일 뤄푸는 기관지인 홍색중화에서 <우리는 어떠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4월 27일 하동종대와 하서종대가 일제히 광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공산군은 토치카를 건설하고 험준한 지형지물을 바탕으로 국민혁명군을 기다렸다. 하서종대가 홍군 3군단 소속 2개 영이 주둔한 파장산을 공격했다. 공군과 포병대가 가세하여 파장산의 홍군 토치카 10여개가 돌파되었고 파장산은 국민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서종대는 이 기세를 몰아 서화산, 요람채 등을 공격해 여러 고지를 손에 넣었다. 서화산에선 펑더화이가 공산당 보병학교 생도들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으나 참패하여 생도 대부분이 전사했다. 국민혁명군은 청수당, 연화산 등을 차례로 점령했고 광창 주변의 홍군 진지 대부분이 국민혁명군에게 장악되었다.
4월 28일 천청은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광창성에 대한 진격명령을 내렸다. 홍군은 토치카에서 저항했으나 산포와 박격포를 운용하는 정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차례로 돌파되었다. 28일 아침, 237여단이 광창성에 돌입했고 모든 사단이 진격하여 광창 동남쪽과 서남쪽의 요지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광창은 완전히 수복되었고 국민혁명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5월 1일 북로군이 용강을 함락시켰고 5월 16일 동로군 탕언보의 부대가 태령을 거쳐 북로군 8종대와 함께 건녕을 함락시켰다. 이 시점에서 중앙 소비에트는 기존에 장악하던 70개 현 중에서 영도, 흥국, 석성, 루이진, 금도, 장정 등 6개 현만을 겨우 사수하고 있었다.
3.6. 철수계획의 수립
"끊임없는 전투와 전리품 부족으로 인해 우리 군대의 보급 문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리의 손실은 엄청났다. 이탈자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코민테른 요원 아더 에베르트.
코민테른 요원 아더 에베르트.
광창마저 함락되자 공산당은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에서 공산당은 광창전투의 패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1. 홍군의 전략과 전술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적의 병력과 화력 면에서 홍군보다 월등히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 2. 인근 소비에트 지구의 홍군, 즉 복건과 절강 및 강서, 호남과 호북 및 강서, 그리고 호남과 강서의 홍10군, 홍16군, 홍8군이 적시에 중앙 소비에트 지구를 공격하는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3. 적의 전후방과 원거리에 있는 홍군 유격부대가 적을 견제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못해 홍군의 주력부대가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 4. 백색지구에서의 당의 활동이 미약하여 홍군의 작전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 5. 새로운 전략전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잘못 이해함으로써 전장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다.
즉 당중앙은 잘못 없고 국민당이 존나 세서 이길 수 없으며 주변의 홍군이 잘못했다는 뜻 정도 되겠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홍군 주력부대를 넷으로 나누어 복건, 절강, 강서, 호남으로 진출시키고 국민혁명군을 분산유도한 다음에 홍군을 재편하여 루이진의 중앙근거지를 회복할 것을 제의했으나 오토 브라운과 항영은 이 제안이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크며 강소와 절강은 국민정부의 지역이기 때문에 유격건설지의 건설이 용이하지 않으므로 마오쩌둥의 제안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고 나머지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후 중앙 근거지를 사수하느냐 포기하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회의에서 저우언라이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석성 이북의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루이진을 방어하면서 국민혁명군의 공격 강도를 둔화시킨 다음에 홍군의 전력을 집중하여 포위망을 돌파하자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정리하여 보구가 받아들인 방안은 다음과 같다.
- 1. 오토 브라운과 항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석성 이북에 방어공사를 튼튼히 하고 홍군의 정예를 배치하며 운동전 위주의 방어전과 빠른 시간 내의 기습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중국 국민당 정부군의 공격을 지연시킨다.
- 2. 마오쩌둥이 주장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킨다는 전략방침을 받아들이되, 주력홍군에게는 그 임무를 맡기지 않는다. 홍7군단과 강서 동북의 홍10군을 복건과 절강의 심장부에 침투시키며, 호남과 강서 변계의 홍6군단을 호남에 침투시켜 허룽의 홍2군단과 합류시킴으로써 동서 양쪽으로부터의 중국 국민당 정부군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 3. 최악의 경우에는 중앙 소비에트 지구를 포기해야 하며,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하지만 군수품의 부족과 장기간 봉쇄로 쇠약해진 홍군은 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이는 주력홍군의 철수를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결정에 따라 보구, 뤄푸, 저우언라이로 구성된 3인단이 작전 지도부가 되어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모스크바에 긴급전문을 보내 "우리의 주력군을 다른 방향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준비함과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누구를 남겨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약품과 군복을 구입하기 위해 100만 멕시코 달러의 원조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비서처는 중국 공산당의 제안이 일시적이며 '국민당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함'이라는 조건으로 멕시코 달러 15만 달러에 해당하는 20만 루블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한편 3인단이 수립한 철수 기본계획은 다음과 같다.
- 1. 항영을 중국 공산당 중앙, 인민정부 중앙, 그리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전권대표로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소비에트 지구에 남아 강서, 복건 서부, 복건과 강서 변계, 복건과 절강 및 강서, 호남과 강서, 그리고 호남과 호북 및 강서 변계를 포함한 중앙 소비에트 지구의 당정군에 관한 모든 사업을 지휘하게 한다.
- 2. 소비에트 중앙 분국을 설치하고 항영을 분국 서기로 임명하며, 하창과 천이 등을 분국 위원으로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소비에트 지구당의 조직과 사업을 책임지게 한다.
- 3. 중앙 소비에트 군구를 설치하여 각 군구의 군사행동과 유격전쟁을 지휘하도록 하며, 천이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항영이 정치위원을 겸임하도록 한다.
3.7. 중앙소비에트지구의 포기, 그리고 대장정의 시작
한편 장제스는 홍군이 이제 끝나감을 알고 6월까지 루이진을 함락시키기 위해 5월 하순 천청의 3로군을 광창에서 석성으로, 쉐웨의 6로군을 용강에서 고룡강으로, 장정문의 동로군을 장정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세 방향에서 루이진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7월 9일 6로군은 천부산을 점령하고 홍군의 방어거점인 역전에 도달했다. 홍군은 1군단과 3군단에서 차출한 부대와 7군단을 내보내 천부산을 탈환하려 했다. 천부산을 방어하던 14사단은 잠시 후퇴했다가 증원군을 대거 거느려 천부산을 탈환했고 홍군은 패퇴했다. 홍군은 역전 북쪽 대령격에서 20리에 걸친 토치카 진지와 참호를 건설하고 국민혁명군에 저항하려 했다. 8월 14일 국민혁명군 67사단이 포병대와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정면공격을 시도했으나 홍군의 맹렬한 저항에 2개 대대를 잃었다. 이에 정부군은 진격을 중지하고 12문의 신식 산포를 증원받으며 대기했다. 8월 28일 산포를 지원받은 정부군은 다시 대령격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31일에 역전을 함락시켰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홍군은 전매특허인 항일을 들먹이면서 7월 15일 '노농홍군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여 장제스가 항일 대신에 공산당을 잡는데 혈안이 됐다고 비난하고 7군 19사단 소속 7천명의 병력으로 소위 항일선발대라는 부대를 편성하여 복건 남서부에서 포위망을 뚫어보려 했다. 이들은 복건 방면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방지민의 10방면군과 합류, 전략배후지를 위협하여 루이진의 숨통을 트여주려 했다.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국민혁명군이 분산되어 주력홍군이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주게 되었다.[7] 8월 상공근거지의 소극이 지휘하는 6군단도 혁명군사회의의 명령에 따라 항일전쟁의 구호를 내걸고 포위망을 뚫고 호북, 호남, 사천의 접경지역에 머물고 있는 허룽의 2군단과 10월에 합류하여 2방면군을 편성했다. 이 와중에도 홍군 16사단이 국민당에 투항해버렸다.
8월이 되면 1930년에 평균 26그램 정도였던 일일 소금 섭취량이 1.6그램으로 떨어지는 등 국민당의 경제봉쇄의 여파가 심각하였다. 소금의 극심한 부족으로 홍군은 시체에 소금을 숨겨서 관짝을 통해 밀수하고 소변을 졸여서 소금을 보충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9월 말, 중앙병기창, 피복공장, 인쇄공장 내부의 반출 가능한 기계가 모두 철거되었고 이동이 불가능한 대형기계들은 모두 파괴했다. 중요 서류, 재봉틀, 인쇄기 등도 반출되는 등 루이진 내부에선 탈출 준비가 한창이었다.
10월 4일 북로군이 남진하여 석성을 함락시켰고 13사단을 지휘하던 공하총, 4사단을 지휘하던 장익이 잇달아 국민혁명군에 투항했다. 10월 14일 홍군은 루이진을 포기하고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저우언라이는 그제야 마오쩌둥에게 루이진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계획을 통보했다. 위두에서 홍 제1군과 함께 거주하며 말라리아로 투병하던 마오쩌둥은 아내 허쯔전은 데려갈 수 있으나 두살된 아들인 마오안훙은 두고 가야 한다고 통보받았다. 마오쩌둥과 허쯔전은 마오안훙을 처제인 허이에게 맡겼지만 다시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홍군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허겁지겁 중앙 소비에트를 탈출해야 했다.[8]
10월 10일 중앙홍군은 전략방침을 변경했다. 10월 15일 공산당 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가 모두 루이진을 필사적으로 탈출하였고 10월 16일 각 부대는 강서 우도하의 집결지로 모였다. 홍 1군, 3군, 5군, 9군으로 구성된 5개 군단 8만 6천명의 병력과 기관이 탈출을 시작했고 이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항영과 천이가 지휘하는 1만 6천명의 잔존부대가 저항했다.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이진을 다시 탈환할 것이라 믿었지만 나와보니 상황이 별 수 없는지라 공산당은 끝없는 서천의 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결과
중국의 공산세력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11월 10일 루이진은 국민혁명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그 명목만 남고 국체가 파괴되면서 멸망했다. 한때 15만[9]에 이르는 군세와 126개현[10]에 이르는 영토, 1,200여만에 이르는 국민을 자랑했던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은 이 단 한 번의 작전으로 7만에 못 미치는 병력만을 거느린 군소규모 군벌 수준으로 떨어졌다.반면 국민혁명군은 이후 3년간 단 한 번도 공산군의 유효한 저항을 받지 않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지배가 미치던 지역을 접수했다. 또한 독일식 훈련을 받은 군사의 강력한 위력을 실감한 후, 독일식 사단을 40개로, 그에 준하는 상당한 훈련을 받은 직업군인 전력을 40개로 확충하여 도합 80개 사단 80만 대군을 갖추고자 했다. 여기에 보조병과 보급역량을 합쳐 중국의 전력을 모두 최고로 끌어올린 뒤,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일본 제국이 장악한 만주를 수복하고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10년에 걸친 군제개혁이 입안되었고, 장제스는 독일에게 물자를 대주며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
1935년 국민당은 법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어 중화민국의 화폐를 정리하고 재정을 확충했으며, 1936년 제2차 양광사변으로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에 반발하는 마지막 거물이었던 계계군벌과 염계군벌을 멸망시켰다. 1936년 중화민국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래 최대의 국민총생산(GNP)을 달성했고, 1937년 초에는 독일식 훈련과 무기배치를 끝낸 20개 사단이 공식적으로 정규군의 일부가 되었다. 국민혁명군의 힘은 이 시기 최고조에 달했고 공산당은 곧 토벌될 것 같았으며, 국민당에서 생각했던 10년의 시간이 지나고 중국군의 전력이 확충되면 만주와 요동을 포함한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것도 눈앞에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10년을 기다려 줄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1937년 7월 7일 새벽, 베이징의 노구교에서 10여 발의 총성이 일면서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5. 여담
이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보여준 면모를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려한 교조주의적 발상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이 있다.공산당을 토벌하는 주요 전술인 포위를 위한 주요 진지 점령 후 토치카를 이용한 버티기와 조이기는 나치 독일에서 파견나온 군사고문인 한스 폰 젝트가 고안하였다.
6.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삼화.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소비에트 운동사, T.뢰트바이트, 고려원.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전략연구소.
- 중일전쟁시기(1937~1945) 국민정부군의 대일군사전략 변화 연구, 기세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국공비사 5, 최경식, 군사논단, 한국군사학회.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
[1]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이는 중국 근대사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던 장제스가 건륭제의 대금천과 소금천 정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2]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사용한 중대전술기지와 근본적인 목적은 같다. 게릴라전을 구사하는 적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길목마다 화력 진지를 설치하고, 지역 주민들과의 접촉을 끊어버림으로써 게릴라들이 보급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3] 특히 공습에 대해서 홍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효과적 대응은 위장 뿐이었다.[4] 여기에는 호남 정부 주석 허젠의 영향이 컸다. 지금껏 초공작전에 소극적이었던 허젠은 복건사변으로 복건성이 완전히 장제스에게 장악되고 광동파 천지탕도 초공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자 자신만이 초공에 소극적인 상태로 남게 되어 장제스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과 궁지에 몰린 홍군이 호남으로 쳐들어 올 두가지 가능성을 염려하게 되었다. 이에 허젠은 장제스를 찾아가 호남, 하서, 광동 등지에 10개의 비행장을 건설하고 홍군의 퇴로를 단절할 것을 건의했고 장제스는 광동과 광서가 동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1934년 6월 허젠은 중국 서남부로 남하하여 리쭝런, 바이충시, 황소횡, 천지탕 등을 대상으로 로비를 하였고 광동파 등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그의 제안은 채택되었다.[5] 인민위원회=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의미였으니 이는 마오쩌둥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국가주석 자리에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6] 일명 28인의 볼셰비키.[7] 방지민의 이 항일선발대는 1935년 초에 완전히 소탕되었고 방지민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머리는 참수되어 광주리에 넣어져 전시되었다고 한다.[8] 장정이라는 이름도 이땐 없고 서정이라고 부르는 정도였다.[9] 명목상 30만[10] 명목상 300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