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6:55:07

태평천국

중국의 역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92em; letter-spacing: -.4px"
황하 문명
하(夏)
상(商)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전국시대 ( 춘추 | 전국 )
춘추오패 | 전국칠웅
초한쟁패기
후초(後楚) | 서초(西楚) | 십팔제후국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삼국 위(魏) 촉(蜀) 오(吳)
서진(西晉)
동진(東晉)
환초(桓楚)
오호십육국
전진(前秦)
남북조 송(宋) 북위(北魏)
제(齊)
양(梁)
후량(後梁)
수(隋)
당(唐)
무주(武周) | 위연(僞燕) | 황제(黃齊)
오대십국 여러 민족들
요(遼)
서요(西遼)
북송(北宋)
남송
(南宋)
금(金)
몽골 제국
원(元)
북원(北元)
명(明)
순(順) | 남명(南明) | 후금(後金)
오주(吳周) | 동녕(東寧)
청(淸)
태평천국(太平天國)
중화민국
(中華民國)

군벌세력
청황실 소조정 |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 호법정부(護法政府)
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


태평천국
太平天國
파일:태평천국의 기.svg 파일:태평천국 국새.svg
국기 국새
파일:태평천국 운동.png
1851년 ~ 186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위치중국 남부
수도천경(天京)
정치 체제신권정치 군주제
국가원수천왕
주요 사건1851년 건국
1853년 천경 천도
1856년 천경사변
1864년 멸망
언어한어(관화, 광둥어)
문자한자
민족한족, 좡족, 묘족
종교배상제회(拜上帝會)(국교)[1]
통화천국통보(天國通寶)[2] → 성보(聖寶)[3]

1. 개요2. 역사
2.1.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2.2. 쇠퇴2.3. 멸망 이후
3. 경제 정책4. 사회5. 외교
5.1. 서양 열강5.2. 청나라
6. 주요 적들7. 군사력8. 직위 체계
8.1. 권력 다툼
9. 매체에서10. 역대 천왕과 지도자

[clearfix]

1. 개요

청나라 말기 홍수전이 창시한 종교 비밀 결사 '배상제회(拜上帝會)'에서 비롯한 봉기로 건국된 한국사의 태봉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드물었던 신정 국가.[4]

2. 역사

2.1.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

1851년 광시성 구이핑현(桂平縣)에서 건국하였으나 사실상 그 지역 근방을 중심으로 세를 키워나가기 시작한 것뿐이었고 실제로는 1853년 3월 남경을 점령한 후 남경을 '천경(天京)'으로 개명하고 수도로 지정해 본격적인 신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자세한 경과는 태평천국 운동 문서로.

봉기의 주축이었던 배상제회는 주로 계속된 기근, 비적의 약탈,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압박에 시달리던 광시성 산촌 농민과 일부 소지주·광부·실업자층에 기반하여 조직을 넓혀갔다. 주요 세력을 살펴보자면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지역인 광시성의 빈민과 객가인, 그리고 좡족과 천지회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사회의 혼란과 모순 속에서 비참하게 살던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천지회는 조직으로 현재 삼합회의 기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

2.2. 쇠퇴

이처럼 초기엔 급속히 세를 불리면서 청의 진압군을 격퇴할 정도로 강성했다. 1855년에 당시 산둥성의 남쪽으로 흐르던 황하 하류의 둑이 무너지면서 하도가 제수와 합쳐져 오늘날처럼 산둥성 북부로 흐르게 변경되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강줄기가 안정될 때까지 수년간 지속적인 범람이 일어나면서 직례 부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한 진압 차질은 당연지사.[5]

초기의 급성장도 시간이 지나면서 쇠락했는데 내부 분열과 남부 지역에 퍼진 흑사병[6], 열강의 견제로 약화되었다. 종국에는 신사[7] 출신인 이홍장의 회군(북양군의 전신)에게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면서 패퇴했다.

태평천국의 이념은 폐쇄적이었던 중국사회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것은 분명했지만, 하지만 만민평등과 기존 위계질서 타파, 전통적인 제사의 부정 같은 목표들은 향촌의 기득권 세력인 한족 유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공맹사상을 믿었던 이들은 태평천국에 협력하여 만주족 왕조를 몰아내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청조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다.

결국 점차 왕조적인 체제에 의한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기울고 지도부의 내분과 부정부패 속에 빠르게 와해되기 시작해 1864년에 구심점인 홍수전이 사망(자살 또는 병사)한 직후 2대 천왕 즉위 2달여 만인 개국 13년 만에 수도 천경(남경)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개국한 직후부터 줄곧 구호와는 동떨어진 행태를 보여 왔으며 뭔가 정책적인 방향이 바뀔 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홍장은 청 조정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얻었다.

태평천국이 패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초반의 상승세를 수뇌부 스스로가 꺾어 버렸기 때문이다. 홍수전은 남경을 점령하자 그 안에 틀어박혀 수천 명의 궁녀들과 음탕한 짓을 벌이거나 다른 수뇌부와 권력 다툼을 하는 데만 골몰했고 승리한 여세를 몰아 주력 부대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청나라 정권을 타도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이를 두고 천지회의 수적 출신이자 태평천국의 전략가인 나대강(羅大綱, 뤄다강)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곳(남경)에 안주한단 말인가. 그래서 오래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겠구나."라고 한탄했으며 얼마 후 결국 세력을 회복한 청나라에 패망하였다.

2.3. 멸망 이후

준왕(遵王) 뇌문광(賴文光, 라이원광), 수왕(首王) 범여증(範汝增, 판루정)은 태평천국의 잔당들을 이끌고 염군 지도자 장종우에게 합류했다. 뇌문광과 범여증은 장종우와 함께 청나라와 투쟁을 지속했으나 범여증은 1866년 12월 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뇌문광은 1868년 1월 청군에게 항복했으나 처형당했다.

태평군 최후의 세력을 이끌던 이문채(李文彩)는 후난, 구이저우, 광시성 일대에서 청나라에 저항했으나 1872년 구이저우에서 전시하면서 태평천국 세력은 괴멸되었다.

3. 경제 정책

태평천국 정부는 '평등'에 의거한 국가적 이상향을 천조전무 제도(天朝田畝制度)로 구체화하여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논을 품질에 따라 아홉 단계로 나누고, 질에 따라 남녀불문하고 논을 분배한다. 생산물은 개개인의 소비분 이외는 국고에 보관하며, 사유(재산)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결혼이나 장례식 같은 의례 비용, 고아, 노인 부양에 대해서는 국고에서 지출하며 25가구당 양사마(兩司馬)라는 관리와 예배당을 두어 관리시킨다는 것이다. 양사마는 군수(軍帥)에게 공동 창고에 저축된 양을 보고하며 군수는 지출과 분배, 토지 분할을 담당했다.

왕망신나라와 함께 "공산주의적 색채를 띠는 나라"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허나 소련을 위시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폐지한 사유 재산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재산이 아니라 자산이었다. 1848년에 출간된 공산당 선언에서도 언급되었을 정도로 "개인이 재산을 가질 권리를 박탈한다"는 얘기는 공산주의에 관한 가장 뼈대 있는 오해 중 하나다. 게다가 현실사회주의는 토지를 자본의 일종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균등 분배에 의한 소자영농 사회가 아니라 집단 농장으로 대표하는 토지 집단 소유를 지향했다. 오히려 태평천국 운동의 특성들은 여타 종교 집단에서 생각보다 흔히 찾아 볼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사유 재산에 대해 이런 입장을 가졌다.

게다가 상단에서 언급된 이념들은 실제로는 민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시행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 지역에서는 토지를 많이 보유한 유력자를 ‘향관’(郷官)이라는 직에 앉혀 소작료를 징수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지배의 안정과 식량 확보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 사회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만큼 향관들에 대해서 관대히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태평군이 보급을 위해서 향관이 가진 땅의 수확을 상당히 가져갔다고 한다.

또 천조전무 제도는 땅의 분배를 논했으나 그러한 용도의 땅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해서는 조항이 없었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엄격히 사유가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땅의 환수 과정도 없었고 생산물의 향유권이 신분에 따라 나뉘었기 때문에 제도는 유명무실했고 실제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기존의 지주층은 어느 정도[8] 유지됐고 심지어 소작농의 투쟁을 엄히 금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물론 이는 앞서 말한 대로 거둬들일 세금이 있어야 군대의 유지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태평천국의 정책은 소작농들의 생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도 했다. 태평천국도 기존 지배자보다 소작농들을 더 착취하면 즉각 민중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양수청, 위창휘, 석달개 등 태평천국 실권자들도 국사를 운영하는 동시에 지주와 소작농을 조율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소작농들이 땅을 받지는 못해도 기존 지주나 정부, 혹은 양 쪽에 내야 할 총 세금은 덜 내는 식으로 세금이 운영되어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았다. 또한, 기존의 지주가 만주족이거나 태평천국에 밉보이는 등의 이유로 땅을 몰수하는 일도 많았는데, 이후 그 땅이 어떻게 관리되든 기존 소작농의 부담은 유의미하게 줄기도 했다.

4. 사회

정통적인 요소 외에도 엄격한 우상 숭배 부정, 유교와 공자에 대한 날 선 비판, 유일신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라는 평가를 듣는다. 처음에는 홍수전이 고향에서 우상 숭배를 막는답시고 사당을 부수는 등 과격히 행동했지만 나중에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기도 했다. 태평천국에서 간행한 성경만 인정하고 보급했고, 기존의 육경 등도 적당히 기독교적 색채를 넣어서 인정하는 등 인심 장악에도 노력했다. 다만 전족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었다. 거병 초창기에 전체 2만 정도인 태평군의 3할 정도만이 성인 남자였기 때문에 보급, 운송 등에는 여성의 참여가 필수였으므로 전족은 엄금됐다. 게다가 태평군의 주 병력들은 객가, 좡족 등의 밑바닥 출신이라 전족을 따르는 자도 그다지 없었다.

또 태평천국이 반포한 교리서 등을 보면 다른 종교의 이론을 취합한 것도 많았다. 홍수전은 과거 시험을 치러 가던 중 유학자 주차기(朱次琦)를 만나 예기의 예운(禮運)과 대동(大同)에 대해서 배웠고 태평천국의 교리에도 상당히 흡수됐으며 성경 역시 어느 정도 조정했는데 대표적으로 과 딸들의 근친상간 같은 요소는 당시 중국 윤리상 도저히 용납될 것이 아니여서 태평천국의 성경에는 빠져 있었다.

태평천국의 특징 중의 하나는 병농 일치 및 군사 위주의 사회 분위기였다. 우선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단위를 편성하여 표식과 깃발을 통해 각 부대를 구분했다. 오장(伍長)이 4명을 통솔하고 양사마(兩司馬)가 오장 5명 및 그 휘하의 부하들을 합쳐 25명을 통솔하며 양사마는 가로세로 75cm의 깃발을 들고 있다. 양사마 4명 및 그 부하를 합친 104명은 조금 더 큰 깃발을 가진 졸장(卒長)의 명령을 받고 이러한 등급은 여수(旅帥), 사수(師帥), 군수(軍帥)에까지 이르게 되어, 군수는 휘하에 총 1만 3,155명을 이끈다.

남경을 점령한 후에는 사상을 발전시켜 군에서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천경'에서도 네 집의 가족이 오장의 가족과 연결되어야 하고 25개의 가족 단위가 양사마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도록 했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공동의 곡물 창고를 건설하고 예배를 위한 예배당도 세워야 하며 양사마는 이 예배당에 거주했다. 안식일이 되면 오장은 자기 가족과 나머지 네 가족을 예배당으로 인솔해 와서 예배를 보게 했다. 남녀는 따로 떨어져 앉아 양사마의 설교를 듣고 천부(天父)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했으며 일곱 번째 안식일마다 모든 고위급 장수들은 자기 휘하 양사마의 교회들 중 한 곳을 방문하여 신도들에게 설교해야 했다.

또 태평천국의 군율은 거병 초기부터 매우 엄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반란 진압에 종군한 청나라 장수들의 회고에서도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우선 민가에 함부로 침임하거나 약탈하는 자는 예외 없이 처형이었고 민가에 발을 들이면 발을 자른다는 군령이 있었다. 심지어 사소히 군사의 일을 논하거나 함부로 모여서 떠드는 일도 엄하게 다스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군율로 인해서 웬만한 태평군 부대는 전투 시에 유대가 강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들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태평군 수뇌부에서는 부부가 함께 병사로 들어와도 서로 만나거나 성관계도 못 하게 막을만큼 남녀 간의 연애를 엄격히 금지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모든 병사들을 남자만 있는 남영(男営)과 여자만 있는 여영(女営)으로 나눠서 관리했다. 나중에는 결혼한 남녀 병사들끼리 만나거나 부부 관계를 할 수 있도록 약간 완화시켰으며 1855년부터는 새로운 점령지에서만 위의 규칙을 적용시켰으나 태평천국 병사들 중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성관계를 가지다가 적발되면 모두 처형당했다.

그래서 태평천국 병사들은 모두 자신들이 직접 옷가지를 빨래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태평천국의 남성 병사들과 여성 병사들이 서로 만나서 연애를 하거나 성관계를 하기 위해 옷가지를 여성 병사들한테 맡겨서 빨래를 부탁한다는 옷을 빠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빠는 핑계를 댔는데, 이걸 태평천국 지도부가 알아차리면서 "남성과 여성 병사들끼리 서로 빨래를 한다고 만난다면 모두 처형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태평천국 병사들 중에는 성욕을 참지 못해 남자들끼리 동성애를 벌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성관념에서 태평천국군의 수뇌부는 예외였다. 홍수전의 아들인 홍천귀복의 증언에 따르면 홍수전의 부인은 모두 88명이나 됐으며 양수청 같은 고위 지도부들은 아예 어린 소녀들을 좋아하여 으로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5. 외교

5.1. 서양 열강

상당히 특이한 외교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평천국 스스로는 상하이 등의 조계에 주둔하는 열강을 우호적으로 여겼다. 이유는 당연히도 그들이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었으며 서양 형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태평천국에 가담하는 서양인들도 드물지만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린들리였다.

처음에 태평천국은 서양으로부터 사절단을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인 일이 1853년 4월, 영국 공사 본햄이 난징에 방문하여 석달개, 위창휘와 접견한 일이었다. 중국 최초의 명함 전달이 이때라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서양이 중립적으로 태평천국과 청나라 모두에게 무기를 팔았지만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은 베이징 조약 이후론 태도를 바꿨다. 우선 태평천국이 주장했던 "홍수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예수는 그의 형이다."라는 괴상한 기독교 교리는 범상한(?) 이단 수준조차 한참 벗어난 것으로, 결코 용납될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교리를 접한 영국인들은 "만약 로마 교황홍수전을 다스릴 권한이 있었다면 그를 화형시켜 버렸을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여겼다.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던 프랑스는 아예 태평천국을 이단으로 여겼고, 상대적으로 북쪽에 있던 러시아의 경우 청나라의 주장을 그대로 믿으며 청나라 편을 들었다.

또 당대의 자본주의적 마인드로 봤을 때도 태평천국은 서양 열강들이 동맹으로 삼기에 수지타산이 맞는 국가가 아니었다. 태평천국은 아편 사용을 금지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약 태평천국이 득세하여 대등한 외교를 바랄 경우 경우 열강이 기존 청나라와 체결한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 등의 사항이 무효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연히 계산기를 두들겨 본 열강들은 태평천국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갈수록 적대하게 됐다.

태평천국 수뇌부 2기인 이수성항저우, 상하이 공략에서 서양 열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양창대와 상승군에게 물을 먹은 후에는 서양을 적대하게 됐다. 다만 서양인 용병들의 전투력 하나만큼은 인정하며 태평천국 측에서도 이들을 고용하고자 했다. 실제로도 천경에는 수백여명의 서양인 용병들이 거주했다.

5.2. 청나라

홍수전이 떠들고 다닌 말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청나라는 싫어하다 못해 혐오의 대상이었다. 특히 기독교를 믿어도 점령지에서 만주족에 대한 학살은 일반적이었다. 남경을 점령하자 홍수전은 "백성은 단 한 명도 해치지 말고, 관병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여기서 홍수전이 언급한 백성은 한족이고 관병은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팔기군이었다. 물론 태평천국 역시 이런 행동의 결과상 잡힐 경우 끔살당하는 걸 알고 있었고 당연히 죽기 살기로 싸웠다.

6. 주요 적들

우선 태평천국이 처음에 상대한 청나라군은 대다수가 녹영인데 이들은 한족이 주류가 된 일종의 보조병이다. 처음에는 팔기군을 보조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던 군대였으나 청나라 말기에 가면 세습된 군직으로 인한 기강 해이, 아편의 복용 등으로 전투력은 급강하한 상태였다. 특히 백련교도의 난에서 녹영은 반란군에 고전했고 전투력은 유명무실한 상태였음이 드러났다.

청나라의 주력은 전통적으로 기병이 주축이 된 팔기군이었는데 이들 역시 당시에는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팔기군들은 녹영처럼 군적이 세습됐고 한족과 영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철저히 격리하여 주둔했는데 이것은 팔기군의 전투력 하락을 불러왔고 훗날 상대하는 승격림심의 팔기몽고를 제외하면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태평천국을 가장 위협하는 군대는 증국번이 조직한 상군과 이홍장이 이끄는 회군이었다. 이들은 풍운산을 전사시킨 강충원이 이끄는 초용(楚勇)과 같은 향용(鄕勇)에서 시작된 무리였는데 각 지역의 유력자가 지역민을 동원하여 만든 민병대에서 기원한다. 대다수는 같은 지역 출신이라 유대 의식이 컸고 아편에 쩔어있는 녹영 등과는 달리 주로 시골 출신의 청년을 위주로 징집해 전투력이 상당히 높았다.

이외에도 태평천국에 위협이 된 군대는 외국인 용병이 주축된 상승군(常勝軍) 및 상첩군(常捷軍)이었다. 이들 중 상승군 같은 경우 처음에는 양창대(洋槍隊)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상하이 및 남부 대도시 거상들의 자본을 지원받아 화력과 사기가 높았고 인간 말종이었던 헨리 안드레스 버제빈이 지휘관으로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 찰스 조지 고든 등의 미군, 영국군 출신의 우수한 지휘관들을 갖추고 있어서 태평천국의 호적수가 됐다.

또 의외로 반청 조직인 소도회(小刀會), 천지회(天地会) 등의 조직과도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조직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워 명나라의 부활을 이야기했는데 태평천국은 새로운 질서를 갖춘 새 국가를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사상적 대립이 있었다. 또한 상당한 반청 조직 구성원들은 아편을 복용하했고, 태평천국의 군령과 교리를 이질적이며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 대립했기 때문에 맞서는 경우가 잦았다.

7. 군사력

태평천국은 과거의 황건적과 같은 무리와는 상궤를 달리하는 군사력을 보유했는데 이것은 태평천국 특유의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우선 홍수전은 처음 금전촌(金田村)에 단영(團營)이라는 군사 조직을 설치해서 남녀를 분리하고 모두 입대시켜 군사 훈련을 강행했다. 이들은 고향인 광서성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와 포위를 뚫고 호남성, 호북성 등지를 전전하면서 자연히 실력은 상승했다. 거기에 반란 초기 합류한 나대강 등이 이끄는 천지회는 수전보급의 지식을 더했다. 이런 요소들에 힘입어서 태평천국은 병법에 구애받지 않는 변칙적인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부교를 설치한 후 대포를 방열하여 폭격을 가하는 전술이었다. 또 난민을 성에 잠입시키거나 주로 광서와 호남 출신의 광부를 동원하여 땅굴을 만들고 화약으로 성벽을 파괴하거나 참호를 통해서 저항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거기에 태평천국의 난 당시 상하이와 같은 조계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은 무기를 청나라 말고 태평천국에도 팔아서 태평천국군은 총기와 같은 무기를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무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데도 신경을 썼는데, 청나라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총기보다 태평천국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총기의 품질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또 태평천국군에는 빈민이 많았는데, 이런 이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에 심취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당대 청나라 장수들의 보고나 기록에 포로가 된 태평천국 하급 병졸도 배신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경우가 적었다고 적혀 있으며 얼치기 반란과는 달리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여 태평천국군은 사기가 높았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했는데 군을 통솔하고 지도할 최고 사령부총사령관이라고 할 만할 존재가 없었다. 거병 초기에는 홍수전풍운산이 중심을, 위창휘의 자본을 바탕을 기반으로 하여 양수청소조귀가 정치, 행정을 통제했지만 천경사변 이후 양수청, 위창휘, 진일강이 죽고 석달개가 이탈하면서 확실한 구심점이 사라졌다. 이에 태평군은 후기 지도자인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 등의 지도력 및 군재로 버텼지만 확실하게 양수청처럼 통수권을 쥔 지휘관이 없어서 작전의 전개는 각 사령관들이 회합하여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태평천국군은 확실히 평범한 농민반란군보다 조직적이었고 군사적 시스템을 갖추었으나 고작 이것만으로는 청나라를 완전히 압도하진 못했다. 또한 앞서 말한 태평천국군의 창의적인 전술들도 결국 전근대적 병법 틀에 갇힌 것들이었다. 그리고 팔기군의 뻘짓을 본 한족들이 민병대를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밀리기 시작했다.

태평천국군의 기본전략은 성을 점령한 뒤 만주족 같은 기득권 세력을 제거한 뒤 민중들에게서 병력을 모집하여 세력을 불린 뒤 다음 목표를 공격하는 식의 매우 단순무식한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난세를 구원한다는 태평천국의 교리를 믿은 민중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저 권력에 취한 사이비 종교집단임이 알려지면서 저항도 심해졌다. 결국 태평천국군은 점령한 도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 인종청소 수준의 학살을 해야만 했다. 이는 태평천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탈환한 청나라군도 마찬가지였다. 북경 공략 실패 이후 태평천국군은 더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 채 장강을 사이에 두고 청군과 일진일퇴의 막대한 소모전을 벌였는데, 청나라는 태평천국보다 압도적인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태평천국군은 점점 불리해질 수 밖에 없었다.

8. 직위 체계

태평천국 4왕
북왕(北王)
위창휘
서왕(西王)
소조귀
천왕(天王)
홍수전
동왕(東王)
양수청
남왕(南王)
풍운산

우선 홍수전, 양수청, 소조귀 , 풍운산, 위창휘, 석달개는 거병 초기의 간부로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자의 위계는 이름이 나열된 순서와 같았고 모두 야훼의 가족이라고 인식된 특권층이었다. 그중 위창휘까지는 군사(軍師)라는 작위를 가져서 좀 더 높았다. 위의 6인은 초기의 공헌도와 교단 내의 입지가 탄탄한 자들이었다. 홍수전의 형인 홍인발(洪仁發, 홍런파), 홍인달(洪仁達, 홍런다)이나 사촌 형제인 홍인간(洪仁玕, 홍런간), 처남인 뇌한영(賴漢英, 라이한잉) 및 그의 일족도 초반에는 왕 자리를 달지 못했다.

그 밑으로는 후(侯)를 봉했는데 처음에는 후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승상(丞相)이었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 승상은 아닌데 이는 당시 태평천국의 행정 체계를 봐야 한다. 태평천국은 육방관속의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에 대응하도록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부서를 설치했다. 또 우정승상(又正丞相), 부승상(副丞相), 우부승상(又副丞相)의 자리를 매 부서마다 설치하여 모두 24명의 승상이 존재했다. 모든 관직의 경우 기존의 자리에 우정(又正), 부(副), 우부(又副)의 명칭이 붙은 자리가 따로 존재했다.

최초의 승상은 영안을 점령한 시기에 임명한 천관정승상(天官正丞相) 진일강과 춘관정승상(春官正丞相) 호이황(胡以晃, 후이황)이었다. 처음에는 귀한 자리였건만 나중에는 계급을 퍼주다시피 하다 보니 500명이 머무는 병영에 승상만 10명이 나올 정도였다.

그 밑으로는 검점(檢點), 지휘(指揮), 장군(將軍), 총제(總制), 감군(監軍), 군수(軍帥), 사수(師帥), 여수(旅帥), 졸장(卒長)과 양사마(兩司馬)의 자리가 존재했는데 검점의 자리 정도면 중요한 성의 책임자를 할 수 있었다.

왕(王)의 자리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는데 1855년 경에는 간부 기준으로 홍수전부터 석달개까지의 주요 간부와 진일강, 호이황, 나대강, 양립태(梁立泰, 량리타이), 주석곤(朱錫琨, 주시쿤)만 가진 자리였다. 왕들 중 풍운산, 소조귀는 왕 자리에 오른 후 전사했고 양립태, 나대강, 주석곤은 전사하여 사후 추증됐으며 호이황은 진일강과 함께 초반에 왕에 올렀지만 이전에 병사했다. 하지만 천경사변을 계기로 홍수전의 두 형인 홍인발을 안왕(安王)으로, 홍인달을 복왕(福王)에 임명하고 사촌 동생인 홍인간이 간왕(干王)에 오르는 등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홍인발, 홍인달의 왕 자리가 떨어진 다음에는 홍수전이 주요 장수에게 다시 왕 자리를 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왕의 자리는 각 방면군을 이끌 수 있는 주요한 사령관의 위치라고 보면 된다.

대표적으로 진옥성은 영왕(英王)에 봉해지고, 이수성은 충왕(忠王)에 봉해진다. 양보청은 보왕(輔王)이 되고 이세현은 시왕(侍王)이 된다. 왕들끼리도 서열은 존재했고 주요한 왕들은 다른 왕을 부장으로 삼아서 전장을 누비고 했다. 이런 왕의 제도는 태평천국 중반기까지는 전공이 있는 자만 왕으로 삼는 등 체면을 유지했지만 나중에는 열왕(列王)이라 하여 수십 명에게 왕작을 뿌렸으니 말기 태평천국에는 왕만 2700여 명이 존재했다.

또 이수성 등이 왕에 오르기 직전부터 태평천국의 왕의 아래에 6등급의 작위가 생겼는데 의, 안, 복, 연, 예, 후가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책봉할 때 기본적으로 중간에 천(天) 자를 넣는다. 앞에는 다시 길상(吉祥)의 의미가 담긴 글자를 넣는다. 예를 들어, 진옥성이 전군주장(前軍主將)이므로 성천의(成天義)가 되고 이수성은 후군주장으로 합천의(合天義)가 된다.

왕들의 수가 많아진 다음에는 천장(天將), 조장(朝將), 주장(主將)등의 자리도 왕 아래 천의 위로 설치됐는데 워낙 작위가 많고 종교성이 섞여 있어서 상당히 복잡하고 계급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

8.1. 권력 다툼

초반에는 종교 운동의 성격이 강했지만 본격적인 반란을 계획한 후부터는 지도부 내에서 정치성 및 권력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우선 태평천국이 발행한 다양한 교리 및 행적을 말하는 서적을 보면 초반에는 홍수전풍운산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 훗날 체포되어 처형된 홍인간의 진술에 따르면 홍수전은 종교의 절대적 상징으로 어디를 가나 환대받고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인식됐다. 또한 풍운산은 교리의 전파 및 선전을 담당하여 2인자 노릇을 했다. 실질적인 권력은 풍운산이 좀 더 높았지만 풍운산이 홍수전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둘의 조합이 잘 맞았기에 그럭저럭 돌아가는 형편이었다. 물론 이때에도 간부들의 휘하에는 각 세력이 있었지만 통제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풍운산이 잠시 체포된 후 홍수전이 금전촌의 본부 자리를 비우자 권력의 중심은 급격히 소조귀, 양수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둘은 무당신내림을 모티브로 삼아서 천형하범과 천부하범을 시전했고 교단 내에서 지위는 급격히 상승했다. 특히 소조귀와 양수청이 풍운산 석방과 흔들리는 교단의 정비에 공을 세웠고 종교라는 특성상 신의 말씀을 전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려워서 홍수전도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소조귀와 양수청의 권위에 밀린 홍수전과 풍운산은 당시 태평천국이 마련한 근거지 중 본영인 금전촌에 머물지 못하고 산인촌에 머무는 등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파편적이지만 소조귀의 권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조귀는 홍수전의 계모 집안인 왕씨 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홍수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사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소조귀가 교단에서 키워 준 위창휘의 입지가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추에 도달했다. 처음 위창휘를 포섭한 것은 풍운산이지만 소조귀가 그의 권위를 키웠다.

하지만 이런 양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변했는데 영안을 점령한 후 청군과의 전투에서 소조귀가 부상을 입으면서 천형하범이 끊기게 된 것이었다. 심각한 부상 혹은 양수청의 압박으로 소조귀의 천형하범이 끊기고 양수청은 독보적인 천부하범을 통해서 권력을 차지했는데 홍수전도 양수청을 정군사(正軍師)에 임명하고 각 왕들의 감독권을 주면서 양수청은 천경사변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종교, 정치에서 절대적 권력을 차지했다.

천경점령 후 천경사변으로 양수청, 위창휘, 진일강이 죽고 사태를 수습한 석달개가 이탈하면서 다시 권력은 변동했다. 홍수전은 그간 양수청, 소조귀에 시달려 왔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권력 개편을 시도했고 이에 자신의 형인 홍인발, 홍인달을 왕으로 삼고 사촌 동생 홍인간 역시 왕으로 삼는 등의 시도를 했으며 몽득은, 임소장을 고위 관료에 임명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전공이 없는 홍수전의 형제 및 친척들의 왕 등극과 그들의 석달개에 대한 견제는 석달개의 이탈을 불러왔고 자연스럽게 홍수전은 다른 자를 불러와 석달개의 자리와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또한 전공 없는 자들이 왕에 오르니 각 방면군의 주장들은 반발했고 그들을 달랠 필요가 있으니 그리하여 임명된 왕들이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이다. 이들은 거병 초기에 10대 중반의 나이로 참전해 온 짬밥이 있었고 군재도 상당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왕들의 입장에서는 별 경력도 없는 홍씨 일가의 권력 영위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홍씨 일가의 대립도 심화됐다. 특히 인척 관계인 이수성, 이세현은 홍인간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인간의 개혁안이 성급하고 현실성이 없는 것 역시 반발을 불러왔다.

또 왕들 역시 상호 간의 대립이 심했다.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이 왕에 오른 후 태평천국은 왕의 작위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막판에는 왕들의 수가 약 2700여 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왕들은 허울뿐이었으나 부장급이나 사령관 정도의 왕들은 어느 정도 권력이 있었고 작위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상호 간의 협조를 잘하지 않고 합의된 계획 등에 대해서도 절대적 가치는 두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이수성과 진옥성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안경(安慶)이 훗날 점령될 때 이수성은 양보청진옥성의 지원군을 잘 돕지 않았다.

9. 매체에서

영화 명장에 주인공들이 토벌하고자 하는 적성 세력이 바로 이들이다.

이 외에도 동명의 드라마도 있는데 TVB에서 제작한 1988년도 드라마와 CCTV에서 제작한 2000년 드라마도 있다.

게임 Victoria의 1861년 시나리오에서는 반란군으로만 등장했지만 Victoria II부터 플레이 가능한 국가로 구현되었다. 대체로 청나라가 진압하지만 가끔 태평천국이 승리하기도 한다. 후속작 Victoria 3에도 등장하는데 원래 대부분 진압되었으나 최신 버전에서 패치로 청나라가 너프되며 태평천국이 승리하고 중국 전역을 장악하거나 휴전을 맺고 중국을 남북으로 갈라먹는 상황이 자주 보인다. 게임상에서는 배상제회가 따로 종교로 구현이 안 되어있어 정상적인 개신교 국가인 것으로 나온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4부에서 등장하는데, 배상제회가 기독교의 이단이 아닌 작중의 3부에서 창시된 종교인 덕성도의 이단으로 나온다. 홍수전의 유능함이 엄청나게 버프되어서 거의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버티다가 휴전협정을 맺고 중원 국가 중 하나로 살아남는다.

10. 역대 천왕과 지도자

파일:태평천국 국기.svg
태평천국 천왕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홍수전 홍천귀복
청 시기 반란 수괴 · 태평천국 지도자 }}}}}}}}}

파일:태평천국 국기.svg
태평천국의 지도자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기
천왕 홍수전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후기
천왕 홍수전 충왕 이수성 영왕 진옥성
시왕 이세현 보왕 양보청 예천왕 홍천귀복
태평천국 천왕 }}}}}}}}}



[1] 홍수전이 창시한 종교 집단 겸 비밀 결사. 배상제회는 대외적으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정작 서구 열강들한테는 사이비 종교, 이단으로 찍혔다.[2] 관련 링크. 1853~1855년 발행[3] 천국성보, 태평성보 등. 1856년부터 발행[4] 태봉은 건국 초기에는 신정 국가가 아니었다.[5] 참고로 1938년 국민혁명군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고 황하의 둑을 무너뜨려 황하를 수년간 남쪽으로 흐르게 만들었을 때 발생한 이재민이 약 1250만 명이었다.[6] 청나라에게 패배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다.[7] 중국 , 조에 사회의 지배층을 담당했던 계층. 이후 영국 상류 사회 남성인 '젠틀맨(Gentleman)'의 역어로 쓰이면서 현재의 뜻을 갖게 된다.[8] 만주족 지주는 목이 달아나거나 목숨만 간신히 건지고 땅은 버리고 달아나는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