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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9:13:43

녹영(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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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편제4. 운영
4.1. 제독아문(提督衙門)4.2. 총병아문(總兵衙門)4.3. 부장아문(副將衙門)4.4. 기타 아문(衙門)
5. 시작과 몰락
5.1. 활약5.2. 몰락
5.2.1. 한계5.2.2. 해체

1. 개요

녹영(綠營)은 팔기군과 함께 청나라정규군 편제에 속한 부대다.

2. 기원

본래 기원은 명나라의 거점 수비대였던 한족 출신의 위소군(衛所軍)이었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건국 전에 항복한 위소군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군대로 편제했다. 명나라 출신인만큼 한족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녹색 깃발을 표식으로 사용해서 녹영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 전성기에는 총 병력 80만 중 60만을 차지하는 대규모 부대였다.

3. 편제

우선 작전단위를 보자면 제(提), 진(鎮), 협(協), 영(營), 신(汛)으로 구성됐다. 제(提)는 제독(提督)이 지휘했고, 그 다음으로 높은 진(鎮)은 총병(總兵)이, 협(協)은 부장(副將)이,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단위인 영(營)은 참장(參將), 유격(游擊), 도사(都司)가 지휘했으며 수비(守備)는 지방의 영(營)을 지휘했다. 천총(天總)과 파총(把總)은 신(汛)을 지휘했는데 천총이 주로 주요 거점의 신을 담당했다. 또한 총독, 순무, 제독, 총병은 예하의 각 단위 외에는 직할부대인 표(標)를 거느리고 있었다.

녹영병의 기본 단위인 영은 1000명 이하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부대마다 그 규모는 천차만별이었다. 또한 신(汛)은 영 아래의 단위였는데 이는 한족의 통제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주류 민족인 만주족은 숫자가 한족에 비하면 적어서 한족의 무장과 단결에 민감했고 반란을 막기 위해서 신(汛)이라는 단위로 수십 명씩 녹영을 흩어지게 배치했다.

녹영의 대부분은 보병이었지만 수병기병도 존재했으며 대체로 기병과 보병이 3:7의 비율을 유지했다. 대우는 기병, 보병, 수병의 순으로 차등이 있었다.

위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명칭은 녹영의 출신인 명나라에서 기원했다.

4. 운영

녹영의 운영을 위해 전국에 11개의 군사구(軍事區)가 설치되었고, 구의 최고장관은 총독이었으며, 총독이 없는 구에는 영제독(領提督)을 겸한 순무가 최고장관이었다. 모든 군사구는 1~3개의 행정성을 관할하였고, 성의 최고군사장관은 제독 혹은 영제독을 겸한 순무가 맡았다.

그러나 총독과 순무는 통수권을 가졌지만 무관 출신이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군령권을 가지며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제독이었다.

전략은 진(鎮)을 기본단위로 하여 수행하였고 기본 편제는 영(營)을 바탕으로 구성돼 있었다. 또한 영 이상의 단위에는 아문(衙門)을 각자 설치하여 유지 및 관리를 했다.

4.1. 제독아문(提督衙門)

제독은 각 성의 녹영의 실질적 최고지휘권자로 무관 종 1품으로서 같은 무관인 순무에 비해 한 등급이 높았다. 제독아문을 통해 제독들은 성에 있는 각 진의 총병을 통제하였다. 또한 제독은 각 성의 육군을 지휘하는 육로제독(陸路提督)과 수군을 지휘하는 수사제독(水師提督)이 있었다.

육로제독아문이 설치된 성은 12곳(직예, 강북, 복건, 호북, 섬서, 감숙, 신강, 사천, 광동, 광서, 운남, 귀주)으로 이 중 산동, 산서, 하남, 안휘, 강서의 제독은 순무가 겸임하였다. 수사제독아문은 복건, 광동, 장강 등 세 지역이였으며 수륙제독을 겸임한 곳은 강남, 호남, 절강 등 세 지역이었고, 순무를 겸임한 경우를 제외한 제독아문은 총 18개였다.

제독의 직할부대인 표(標)는 일반적으로 중, 좌, 우, 전, 후의 5영(營)이었으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으며 병력은 보통 5~8천명 수준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최고 12,000명이 있는 곳과 최저수준인 1,200명이 있는 곳도 있었다.

4.2. 총병아문(總兵衙門)

총병은 무관 정2품관으로 본표(本標) 및 소속 각 협(協)이나 영, 진수본진(鎭守本鎭)이나 소속 지구를 관할하며, 각 성의 총독과 제독에 의해서 이중 통제를 받았다. 총병아문은 전국에 설치됐고 수(水), 육(陸) 총병은 모두 83명으로서 19개의 성 및 지역에 분포됐다.

수륙총병에서 관할하는 진표(鎭標)는 2~5개의 영이었고, 개별 진은 하나의 영이 됐다. 병력수는 일정하지 않아서 최소 1~2천명에서 최대 4~5천명 수준이었다.

4.3. 부장아문(副將衙門)

무관 종2품관으로 직책상 2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장군, 총독, 순무, 제독, 총병, 하독, 조독 아래에서 군사를 이끄는 것으로 중군(中軍)이라 칭했고, 다른 하나는 독, 무, 표, 진을 단위로 하여 요충지를 수비하는 협표(協標) 통솔하는 것이었다.

전국 녹영의 부장은 모두 137명(19명은 수사부장)이었다.

4.4. 기타 아문(衙門)

참장은 무관 정3품관으로 소속은 영으로 순표중군, 제표중군으로 직접 병력을 통솔할 수 있었다. 전국에 순표중군은 16명이 었었고, 제표중군 역시 16명이 있었다.

전국 녹영참장은 모두 177명으로 그 중 5명은 경사순포영의 참장이었고, 22명은 수사참장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육로참장이었다.

유격은 무관 종3품으로 직위는 참장보다 낮았으나, 임무는 참장과 동일했다. 총병의 중군관(中軍官)으로 총 370명으로 그 중 49명은 수사유격이었다.

도사는 무관 정4품으로 직무는 참장, 유격과 유사하였고, 표도사라고 불리었다. 인원은 498명으로서 이 중 82명은 수사도사였다.

수비는 무관 정5품으로 각 영무나 군량을 관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유격의 중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인원은 총 887명으로 이 중 121명은 수사수비였고, 위수비(衛守備) 40명은 조운총독(漕運總督)[1]의 관할에 속했다.

이 외에 수비 아래로 천총(정6품), 파총(정7품), 보위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신(迅)에 소속됐다.
천총은 육로에 1,543명, 수사에 324명이었으며, 파총은 육로 4.193명이었으며, 이 중 수사가 72명이었다.

5. 시작과 몰락

5.1. 활약

청나라에서 거점 수비병 및 팔기군의 보조병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삼번의 난에서는 호왈 40만이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는 등 만만찮은 전투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냉병기 및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조총, 대포, 함선 등도 다뤘으며 주로 총알받이 선봉에 서서 후방에서 돌격하는 팔기군을 지원했다.

하지만 녹영은 그 실력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떡상 잠재력이 보인다 싶으면 만주 기득권층에게 탄핵을 당하여 좌천되기 일쑤였다. 삼번 정벌에 크게 공헌한 한족 명장 중 하나인 주배공이 그 예로, 전쟁이 정리되자마자 최전선과 거리가 먼 성경제독으로 좌천당했다가 순행을 온 강희제가 위독한 모습을 보고서야 후회하여 만주 관료들을 달래려 했다는 변명과 사과를 했다. 주배공이 위독한 몸으로 천거한 요계성과 대만 정복의 선봉장이었던 시랑, 그리고 민인으로서 천섬총독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용장 악종기 모두가 만주족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기에 만주족이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크고 작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5.2. 몰락

5.2.1. 한계

이들은 전쟁이 날 경우에만 차출돼서 지원했으며 평시 주 업무는 치안 유지[2]였는데 지나치게 작은 단위의 배치와 중국이라는 넓은 면적, 강건성세 이래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해서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각지에 넓게 흩어져서 치안 유지를 해야 하다보니 큰 전투가 벌어져도 이들의 상당수는 현재 위치에 둬야 했고 오히려 정세가 혼란할수록 백성을 감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수를 원래 거점에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혼란한 곳의 지원을 위해서 각 성의 병력을 조금씩 모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병력의 한계가 뚜렸했다. 또한 서로 다른 지방 출신들이 모이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작전의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아편전쟁 때 여실히 드러나는데 광둥성이 받은 녹영 지원군 17000여명은 근처 7개 성에서 모인 것이며 푸젠성으로 온 2만의 지원군은 무려 12개 성에서 차출된 것이었다.

5.2.2. 해체

녹영의 전투력 역시 팔기군처럼 갈수록 쇠하기 시작했는데 문제의 시발점은 병역의 세습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군적을 물려받는 체제였는데 외부의 유입 없이 세습만 되다보니[3] 자연스레 전투력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청나라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아편이 보급되면서 바닥의 정점을 찍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아편에 취한 자가 많았으며 주둔지에서 기율이 엉망이 되고 장사판을 벌이는 등 고인물은 썩는다는 것을 여지 없이 보이고 말았다.

이들은 백련교도의 난에서 크게 고전하면서 부실한 전투력을 그대로 드러냈고 태평천국의 난, 아편전쟁에서 패배를 연달아 당하면서 조정의 신뢰를 잃었다.

결국 광서제무술변법을 계기로 서양식 군대의 도입을 선언했고 녹영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1] 장강, 회수대운하를 통한 세금의 운납 및 물류의 출입을 관리하는 자리[2] 오늘날의 중국 경찰무경의 업무를 모두 수행한 셈이다![3] 무과가 실시되어 능력주의적 인재 등용이 이뤄지긴 했으나 무과에 붙어봤자 팔기군에 비하면 택도 없는 콩고물 때문에 인재풀의 질이 딱히 좋지가 않았다. 수십년 과거공부를 견뎌낼만한 명문가 금수저 자제들은 다들 유학을 공부해서 수재, 거인만 되어도 지역사회에서는 유지 행세하면서 잘 살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