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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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black> 삼번의 난 三藩之亂 | ||
기간 | 1673년 ~ 1681년 | |
장소 | 중국 대륙 | |
교전 세력 | 청나라 | 운남성 광동성 복건성 오주 동녕 왕국 막 왕조 |
지휘관 | 강희제 걸서[1] 라포 악락[2] 상가희[3] 늑이금 상선 창태 부라탑 도해 망의도 뇌탑 상지효 장용[4] 조양동 왕진보 희복 목점 서서 손사극 채육영 본홍렬 | 삼번 수장 오삼계→오세번 경정충 상지신 동녕 왕국 정경 막 왕조 막경우 삼번 각군 지휘관 손연령 왕포신 포이니 오응기 오세종 오국귀 하국상 호국주 곽장도 마보 왕병번 고대절 마구옥 강원훈 백현충 증앙성 유진충 유국헌 |
병력 | 15만 또는 40만 | 오주: 20만 복건: 20만 광동: 10만 왕포신: 4만 손연령: 1만 명정: 1만 차하르: 1만 막 왕조: 불명[5] |
피해규모 | 불명 | 불명 |
결과 | 반란 진압 | |
영향 | 청나라의 기반 견고화와 중국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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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三藩之乱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1673년 ~ 1681년 운남의 오삼계, 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 등의 삼번(三藩)이 대만 동녕 왕국의 정경 등과 연합해 대청국과 성조 강희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대규모의 반란이었다. 이 전쟁이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됨으로서, 청나라는 진정한 의미의 중국 통일과 중화제국으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명청전쟁으로 중원을 확보한 이후 청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2. 배경
2.1. 한족 항장
만주족은 기본적으로 인구가 매우 적었다. 청나라의 입관 후 강희제 치세의 인구조사에서 만주족의 인구가 겨우 100만 명이었으니 그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총병력도 100,000명이 안되었으며, 산해관을 넘을 때도 전선에 전개한 총병력은 60,000명 정도였는데 이것도 홍타이지(청태종) 시대에 병합한 몽골계 병사들을 합한 수치였다.당연히 당시 인구가 1억 명을 넘는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만주족만으로는 어림도 없었으므로, 청나라는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등의 명나라 출신 항장들을 적극 활용했고, 이러한 한족 항장들은 각자의 이유로 이민족인 만주족 측에 투항하여 청나라의 중원 제패를 돕는데 크게 일조했다.
가장 대표적인 항장인 오삼계는 명나라 말엽 제16대 의종 숭정제의 지시로 요충지인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자 산해관의 문을 열고, 청나라의 섭정 도르곤과 동맹을 맺어 이자성군을 일편석 대전에서 격파했다.[6] 이후 오삼계는 청나라의 화남 정벌에도 앞장서서 남명의 세력을 모조리 격파하고, 운남까지 진격해서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과 명나라 황족들의 씨를 말렸다.[7] 그는 이 공로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의 번왕이 되었다.
경중명은 본래 가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모문룡의 부하로, 상관인 모문룡이 원숭환에 의해 도망 및 뇌물 수수죄로 처형되자 이에 반감을 품고 공유덕[8]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이끌고 있었던 수군 및 화포 등을 갖고 공유덕과 함께 후금에 귀순한 사람이었다.[9] 귀순 당시 청태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총병관의 자리에 올랐고, 병자호란 때 도르곤 밑에서 강화도 공략을 맡았으며 입관 이후에도 화남에서 저항 세력 정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정남왕(靖南王)이 되어 복건의 번왕이 되었으나 휘하의 관리가 지은 죄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아들 경계무가 정남왕의 작위를 세습했으며, 다시 경계무의 아들인 경정충이 이 자리를 세습했다.
상가희 역시 모문룡의 부하 출신으로 경중명과 달리 모문룡 처형 이후에도 명나라군에 잔류했으나 원숭환에 대한 반감은 마찬가지였고, 경중명의 반란이 실패한 뒤 반란군이 후금에 귀순할 때 동참했다. 역시 청태종에게 중용되어 병자호란과 북경 공략에 종군했고, 이후에는 광주 지역 공략에 기여하여 평남왕(平南王)에 봉해졌으며, 광주의 번왕이 되었다.
전술한 항장 3인과 그들의 세력은 청나라의 중국 통일 과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에 이들은 제3대 세조 순치제의 치세 동안에는 청 조정의 우대를 받았다. 이들이 다스리는 세 개의 번(藩)은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경제적/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특권을 누렸으며, 제2대 정남왕 경계무의 경우처럼 작위의 세습도 가능했다.
청나라 조정은 오삼계의 장자인 오응웅을 화석건녕공주와 혼인시키는 등 삼번왕의 아들들을 청 황실의 공주들과 혼인시켜 우대하는 한편, 북경에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는 일종의 봉건식 견제 체제를 유지했다.
2.2. 남명과 번국
기본적으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장강 이남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이들이 중원을 지배한 것은 약 600년 전 금나라 시절 화북 지역에 한해서였으며, 회하 이남으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강 이남은 화북 지역과 달리 강과 산악 지형이 많아서 청군의 최대 전력인 기병을 활용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와 같은 청나라 지도층도 화북을 지배했던 금나라의 재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중국 전체를 제패하는 것까지는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고, 순식간에 장강 이북을 차지했음에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추격하지 않은채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청나라의 실세였던 도르곤 역시 이러한 이유들로 남진을 주저했다.한편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나라가 망했지만 남은 명나라의 주씨 황족과 유신들은 남경과 광동에서 각각 칭제한 후 명나라의 계승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본래 명나라는 남방에서 시작한 왕조였기에 정강의 변으로 급히 쫓겨온 남송보다 비교적 나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화북에만 머무른다면 다시금 남북조시대 또는 남송 시절처럼 회하를 경계로 장기간 양국이 대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청나라에 귀순한 홍승주가 남명을 놔두면 커다란 후환이 될 것이라고 도르곤과 순치제에게 계속 상주했고, 결국 청나라는 남명을 정벌하기로 했다.
전술했듯이 청나라의 만주족과 몽골족들은 남방의 지리에 무지했기에 오삼계를 비롯한 한족 항장들과 그 휘하의 한족 병사들이 남방 정벌군을 이끌게 되었다. 청나라 측은 이들을 아예 자치권을 가진 번국의 임금인 번왕(평서왕 오삼계, 평남왕 상가희, 정남왕 경중명)으로 봉했는데 중국사에서 한고조 유방 이래 공신이라도 황족이 아닌 신하를 "왕"으로 봉한 예가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10]
이렇게 엄청난 대우를 해줄 만큼, 이들은 만주족의 중국 대륙 장악에 있어 최고의 공신들이었다. 경중명과 상가희가 청나라에 망명하면서 데려온 수군과 홍이포 전력 덕분에 청나라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쉽게 점령하고, 명나라군의 강력한 화력에 같은 화력으로 맞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며,[11] 심지어 오삼계는 청나라에게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의 문을 열어준 그야말로 1등 공신이었다.
만주족은 지리에도 어둡고,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풍토병이 많은[12] 장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예 병력인 만주병과 몽골병이 아닌 한족 출신 번왕들과 그 휘하 세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항장 출신 번왕들은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남명을 철저히 공략했고, 이들의 손에 남명이 멸망하면서 그나마 남은 주씨 황족들과 명나라 잔당들은 모조리 소멸했다. 청나라는 해당 번왕들이 정벌한 지역들을 영지로 하사했고, 이에 운남성은 오삼계에게, 광동성은 상가희에게, 복건성은 경중명에게 귀속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이이제이를 역이용한 셈이었다. 이렇게 만주족은 한족 출신 항장들과 그 세력들을 이용하여 손쉽게 남명을 포함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제압했고, 차후 재발할 수 있는 한족들의 저항과 외부 세력의 침공에 대비하면서도 청나라 편에서 공을 세운 한족 인사들을 후대할 겸 그들에게 번왕의 직위를 내려, 남방 지역의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족 중심인 청나라에게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강대한 한족 세력들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 예로 삼번은 청 조정의 허가없이 임의로 자신들의 직할 병력을 증강하거나 세수 지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상행위로 부를 축적했고,[13] 번 내부의 인사 뿐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각 성들의 인사권에도 줄곧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오삼계는 그 정도가 심했는데 운남 일대의 소수민족들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평시에도 경정충이나 상가희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고,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운남과 귀주에서는 청 조정의 인사권보다 오삼계의 인사권이 중시되었다.[14]
여기에 남송시대부터 급격히 발전한 장강 이남의 경제력이 장강 이북의 그것을 능가함에 따라[15], 삼번의 경제력도 청나라에 위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삼번의 한 곳인 광동성의 마카오는 명나라가 무너지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개항되어 있어서 서양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더욱이 장강 이남은 명나라 시절 농민 반란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기에 명청교체기 당시 피폐해진 화북에 비해서 경제가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청나라로서는 삼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통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함부로 번을 폐지할 수 없었다. 전술했듯이 해당 번왕과 그 세력들은 명청교체기때 청나라를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기에 명분상 하루아침에 박대할 수 없었고, 만주족 중심의 청나라 중앙군은 장강 이남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당시 삼번의 군대는 대다수가 한족으로, 소수인 만주족의 병력보다 규모가 더 컸을 뿐 아니라 남명과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얻은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16]
게다가 당시 장강 이남은 반청 감정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그나마 남방 지역의 통제력을 구축한 번을 폐지하려다가 되려 반청복명 세력[17]들이 겉잡을 수 없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로 청나라 조정은 남명이 완전 진압된 지 한참 지난 1664년에도 남명 토벌을 위해 설치한 삼번을 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2.3. 강희제의 등장과 철번, 오삼계의 궐기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제4대 황제로 즉위한 성조 강희제의 재위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것 뿐이었고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게 있었다.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었다.[18]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작을 장남인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상가희의 귀향은 넙죽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나라의 개국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을 못 일으킬 것이며, 설사 일으킨다 해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나라가 멸망시킨 명나라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3. 전개
3.1. 전반기(1673년 ~ 1675년)
삼번의 난 전반기 형세도. 붉은 선은 오삼계군의 진격로, 초록색 점선은 경정충군의 진격로이다. |
"운남과 귀주의 토벌은 8월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큰소리를 쳤다.[20]한편, 철번을 위해 내려왔다가 간신히 반란군의 손길을 피한 관료들이 반란 11일 만에 중국 남쪽 곤명에서 수도 북경까지 밤낮없이 내달리는 처절한 레이스 끝에 반란 사실을 보고하자 청 조정은 멘붕에 빠져 철번을 주장한 관료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철번을 물린 후 오삼계에게 화해를 청하자고 주장했다. 강희제 본인도 설마 오삼계가 진짜 실력 행사로 나올줄은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으나 이내 곧 침착을 되찾고, 조정 내 화의파를 닥치게 한 다음 반란 토벌을 선언하고 격문을 띄웠는데 그 내용은
"오삼계 네놈은 명나라 부흥을 대의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애초에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앞장선 놈이 네놈 아니었냐? 네놈은 명나라에게도 반란군, 우리 청나라에게도 반란군이며 아무런 대의도 없다."
그러나 전쟁은 말 싸움으로 되는 것이 아닌 법이다. 1674년 초, 오삼계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호남과 호북[21]으로 진격하여 총병관 체세록을 생포하고, 정부군을 격파하며 순식간에 장사를 점령하고, 호남을 휩쓸며 강서성으로 가는 길목을 열고, 북쪽으로는 무창에 이르렀다. 뒤이어 사천성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사천마저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에 강희제는 내응을 우려하여 북경에 있었던 오응웅[22]을 교수형에 처하고, 군을 재정비한 뒤, 경정충과 상가희에게도 급히 사신을 보내
"내가 어리고 우둔하여 조금 경솔했다. 철번은 취소하니 너희들이 계속 다스려라."
라며 철번을 취소하여 두 번의 반란 가담을 막고자 했다. 동시에 명나라에서 투항한 항장들 다수가 각 지방의 총독 및 순무를 맡고 있어 오삼계의 반란에 줄줄이 합류할 가능성이 보이자 역시 칙령을 내려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청 조정에 충성하여 반란군 토벌에만 전념하라고 격려했다. 이렇게 젊은 강희제는 오삼계의 반란이 삼번의 반란이나 반청복명 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다.그러나 1674년 3월, 결국 정남왕 경정충이 근거지인 복건에서 반란에 가담하여, 절강과 강소 두 성까지 휩쓸고 동녕 왕국의 지원까지 받기로 하면서 상황은 강희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서남과 촉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화남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전란으로 발전했다. 아울러 사천 지방이 오삼계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오삼계는 사천에서 한중을 거쳐 중원으로 나아가는 북벌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섬서총독 왕보신이 반란을 막기 위해 온 조정 중신과의 반목과 불화로 인해 반란에 가담하면서 섬서성 대부분이 오삼계군에 떨어지고, 고도 서안만이 외로이 남아 있게 되었다.
한편 광동의 평남왕 상가희의 경우 상황이 복잡했다. 전략적, 지리적 측면에서 상가희의 광동은 서쪽으로는 오삼계의 운•귀 지역, 동쪽으로는 경정충의 복건, 북쪽으로는 오삼계가 점령한 호남에 둘러싸여 청나라 중앙군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또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가희는 철번 명령을 수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강희제에 대한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때문에 철번을 진행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던 호부상서 양청표 등의 조정 인사들은 상가희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상가희가 조정 인사들과 만나자, 양청표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서 위의 철번 취소령을 말해주고, 강희제가 상가희를 깊이 신뢰한다고 말했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반란 자체에도 회의를 가졌던 상가희는 이를 계기로 조정 편을 들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상가희는 결국 강희제와 청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는 상주를 올려 강희제를 기쁘게 했다. 상가희가 청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삼번 전체가 반란에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과 동시에, 평남왕과 광동군의 군사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백전노장 오삼계에 맞서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어 연전연패 중인 무능한 지휘관들과 달리 군력에서 오삼계와 맞먹는 상가희를 맞수로 투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주변 지역의 인사권, 군사권, 단독 작전권을 모조리 보장해주고, 상가희가 원하는대로 차남 상지효를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광동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상가희는 본래 장남 상지신을 후계자로 하려고 상주를 올렸다가 전란의 와중에 상지신에게 실망하여[23] 차남 상지효를 새 후계자로 삼고 강희제의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상지신은 마침 상가희가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이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동의 전권을 장악하고, 오삼계와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상가희는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자결 자체는 가족들이 발견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의 유언도
'황제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죽으니 큰 허물이 남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엔 혼백이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
라며 강희제에게 충성한다는 내용을 남겼다.이로서 강희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삼번의 동시 반란이 현실화하는 것 같았지만...
3.2. 후반기(1676년 ~ 1681년)
삼번의 난 후반기 형세도 |
동시에 강희제는 복건의 경정충을 이탈시키기 위해 1676년에 절강성을 향한 집중 공세를 개시하며 항복을 제안했다. 이때 경정충은 같은 편인 대만 동녕 왕국을 공격했다가 역으로 당해 영토의 일부를 뺏기기도 하는 등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청군의 집중타를 맞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강희제는 이 날을 위해 오삼계의 아들은 처형시켰음에도 경정충의 아들들은 나중에 죽일 생각으로 억류만 하고 있었고, 한치 앞을 못 보던 경정충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뒤이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광주의 상지신도 1677년 5월에 항복했다. 애초에 상지신은 양쪽 사이에서 간을 보는 처지였기에 오삼계군의 광동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오삼계의 병력 지원 요청을 무시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복건의 경정충이 항복하자 즉시 오삼계 편에서 이탈하면서, 자신의 왕위와 번의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을 한 것이다. 그래도 상지신은 이 덕택에 일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본인도 곱게 죽긴 했다. 상지신은 반란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지위의 보전이 목적이었기에 강희제는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었고, 연좌도 하지 않았다. 결국 반란은 다시 삼번 중에 오삼계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삼번 가운데 2개 번을 이탈시킨 청나라는 중원 - 한중 - 사천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산악 험로를 포기하고, 대신 오삼계가 점령하고 있었던 호남과 호북으로 공세를 집중했으나 동정호 전투와 창사 전투 등에서 크게 패배하여 막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삼계군의 초반 기세가 사라진 것은 명백했고, 이제 주도권은 청나라가 쥐고 있었다.[24]
오삼계는 이러한 상황을 정치적으로 뒤집기 위해 호북성의 형주를 창천부라 개칭하고, 수도로 삼아 국호를 주(周, 오주), 연호를 소무(昭武)로 하고 1678년 3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8월, 5개월 동안 제위에 있다가 노환으로 죽었다. 이후 손자인 오세번(吳世藩)이 오삼계를 이어 주나라의 제2대 황제에 올랐지만 카리스마있는 지도자 오삼계가 죽으면서 막강한 오삼계군의 유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각지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다시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세번은 불리함을 깨닫고 본거지인 곤명으로 후퇴하며 방어전으로 전환했고, 1678년 말엽이면 청나라는 마침내 호남성과 호북성을 완전히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681년 마지막 총공세가 펼쳐지면서 사천 지방이 청나라에게 넘어가고, 근거지인 곤명까지 청군이 밀려오자 오세번은 자살했다. 곤명이 청군에게 함락되고 오삼계 일족이 멸족되면서[25] 삼번의 난은 종결되었다.
4. 반란은 왜 실패했는가?
1~2년 동안 오삼계군은 화남을 휩쓸고, 서안까지 넘볼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으나 이러한 전성기는 몇 년 가지 못하고 너무 쉽게 패망했다. 청나라의 베테랑 장수들이 모두 죽거나 일선에서 은퇴하고, 도르곤과 오보이에게 줄섰다가 죽은 사람도 많아서 군사 작전면에서 오삼계군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오삼계군에 내재된 문제가 너무 심각했다.[26]4.1. 오삼계 본인의 문제점
어찌 보면 오삼계의 발목을 잡아 버린 제일 큰 문제였다. 원래 한 나라의 지배자가 되려면 단지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명분을 갖춰야 하는데 오삼계에게는 그 명분이 전혀 없었다. 실제 오삼계는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대명국의 부흥과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내걸었으나, 애초에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산해관을 활짝 열어 청나라군을 맞이한 것도, 그나마 남아있었던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인 소종 영력제 주유랑과 그 일가를 버마까지 추격해 직접 교살한 인간도 오삼계였다.'나는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청군을 끌어들였는데, 그 상황이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멸망이라는 결과에 이르렀다.'
라는 오삼계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후에라도 (받아들여질지 여부와는 별개로) 남명의 저항세력에 합류하려는 시늉은 했어야 했지만, 그는 남명에 합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철저히 격파했으며 그 최후의 망명 황제이던 영력제까지 직접 살해했다. 즉 단지 동조하고 참여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적대했고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삼계 본인도 이를 모를 리 없기에 영력제의 능을 참배하고 사죄하며 눈물을 흘리는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불과 15년 전에 자기 손으로 죽여 놓고 그 앞에서 눈물 흘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기에 당대에나 지금이나 가식으로 취급당한다.게다가 오삼계는 이 배신의 결과로 청나라의 번왕 지위에 올라 엄청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이기도 했다. 당대가 유교적인 명분론을 아무리 중시하던 시대였다고 해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융통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산해관을 지키던 당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려 청나라(만주족)에 투항한 것 자체는 (욕을 전혀 안 먹기는 무리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받을 여지가 분명 있었던 것이다. 오삼계 문서의 평가 문단에서도 거론된 것처럼, 산해관을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오삼계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배신자의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었고, 녹봉을 받는 만큼은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도저히 더 싸울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자 도르곤에게 항복한 것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자신이 앞장서서 명나라의 잔당을 소탕하고 그 대가로 본인과 가문의 영달을 얻었으니 배신의 시작은 피치 못한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졌을지언정 그 후의 행보는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누릴 건 다 누리고 이제와서 자기 권세가 없어질려니까 대명의 부흥과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외치는 것이니 명나라의 유신과 다른 장수들,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은 그 진정성을 전혀 믿지 않고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명나라 황족 출신을 허수아비로나마 황제로 추대하는 제스처조차 취하지 않고[27] 본인이 직접 주나라의 황제에 올랐으니 반란에 명분이 부족하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 때문에 오삼계 및 그 군대와 이해나 유대 관계가 얽힌 경우를 제외하면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의 항장이나 유신들이 반란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한족 백성들 또한 지지하지 않았다. 특히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재야에 묻힌 명나라의 유신들도 오삼계군의 초빙에 한결같이 역적에게 충성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거절했을 정도였다.
다른 항장들도 오삼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웠다면 같은 항장 출신들이 몇 명 정도는 합류했거나, 최소한 "나도 오삼계 같은 항장 출신이니 의심받을지 모른다"라는 생각으로 오삼계와 청나라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겠지만, 강희제가 "지위를 보장해줄테니 걱정 말고 반란 진압이나 해라"라고 하자 누구도 오삼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5대 10국시대 때 석경당이 후당의 적이었던 거란의 힘을 빌려 후당을 무너뜨리고 건국한 후진도 오주와 비슷하게 제2대 황제의 치세 때 멸망했는데, 명나라 잔존 세력들의 입장에서 오삼계는 한족판 석경당이었고, 오주는 한족 왕조판 후진이었던 셈이다. 외세의 힘을 빌려 출세하고, 더 나아가 창업군주가 되기까지 한 매국노가 중화문명의 수호자 코스프레를 했다는 점에서 석경당과 오삼계의 행보는 각각 후당과 명나라의 유신들에게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28]
설령 삼번의 난이 성공했다 해도 상술한 이유로 오삼계가 한족의 배신자였던 점이 계속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고, 명나라의 유신들 및 한족 백성들은 오주 황실을 배신자의 후손으로 보며 철저히 불신했을 것이다. 이것이 다른 문제점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경우 결국 오주는 실제 역사보다 좀 더 오래가고 덜 비참하게 망할 뿐, 실제 역사의 명나라나 청나라처럼 완전히 자리잡아 200년 이상 이어지지는 못하고 허무하게 단명했을 것이며[29], 설사 오래 이어진다고 해도 매우 불안하게 유지되었을 것이다.[30]
4.2. 삼번의 문제점
말이 삼번의 난이었지, 사실상 '오삼계의 난'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삼번 사이의 협력이 부족했다. 광동의 상씨 부자(상가희-상지신)는 사실상 청나라 편이었으며[31], 복건의 경정충은 상지신보단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으나, 멍청하게도 대만 섬의 동녕 왕국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역으로 두들겨맞기도 하는 등 오삼계가 일으킨 반란에 딱히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못하고 결국 제일 먼저 청나라에 항복했다.[32] 차라리 이들이 합심해서 적극적으로 연계를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으나 서로 제대로 연계가 되지 않았고, 반란의 주동자였던 오삼계를 제외하면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내부에서 서로 뻘짓만 하다가 지리멸렬하게 무너져 내렸다.게다가 난의 중심이었던 운남과 귀주, 양광(광동과 광서), 복건 지역은 북경에서 너무나 멀 뿐만 아니라 대체로 궁핍한 지역이었다.[33] 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었고, 그 인구조차도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 포함된 숫자였다. 비록 초반에 매서운 기세를 보였지만, 타이밍 좋게 사천과 섬서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곳까지 진출이 가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3. 시기의 부적절함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다른 인물도 아닌 강희제였다. 물론 당시 강희제는 군사적 경험도 없는 풋내기였고, 반란의 초기 기세가 매우 거셌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젊은 황제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과거 원혜종 토곤테무르 칸처럼 본거지인 만주로 달아났다면 오삼계의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강희제는 절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오삼계군은 더 남쪽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강역은 거의 1,500여년 전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할 적에 그렸던 모양새와 비슷했고, 점령지만 보면 오삼계군은 제갈량의 북벌보다 성공했다. 반란군의 주력은 사천성(제갈량 당시의 촉한 전역)을 석권했고, 동오가 촉한을 물리치고 수복했던 형주 지역도 거의 점령했다. 즉, 제갈량이 원래 천하삼분지계를 그릴 때 생각했던 조건을 거의 갖추었던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 오삼계군이 점령한 평량은 제갈량이 조위와 티격태격하던 천수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는 지역이었으며, 운양은 형주 양양의 북쪽에 있었으니[34], 오삼계군은 남서의 협공으로 장안(서안)을 함락시키기 매우 유리한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었다.하지만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북경)은 조위의 수도였던 낙양보다 훨씬 동북쪽[35]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흔들리지 않았고, 설령 서안이 오삼계군에게 함락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심각한 타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위•촉•오의 삼파전 구도로 따졌을 때, 동오에 해당하는 유사시에 도움이 되어줄 동맹이 없었다. 상지신과 경정충의 세력을 위치상 동오에 비유할 수 있지만, 상지신은 애초에 지위의 보전이 목적이어서 적극적이지 않았고, 경정충은 동녕 왕국과 싸우다가 도리어 공격을 당하는 등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적어도 이 두 명 중 한 명이 오삼계만큼의 역량을 발휘해 삼국시대로 치면 교주와 양주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점령했다면 천하삼분지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조위의 국력은 촉한과 동오를 합친 것보다 강력했지만 북쪽의 여러 이민족들을 경계해야 했고, 또 어느 한쪽도 쉽게 제압당할 만큼은 아니었기에 삼국시대가 40~50년 동안 이어졌듯이 삼번들도 '동오'에 비견되는 세력이 있었다면 청나라 입장에서도 병력이 제대로 분산되어서 쉽게 진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36]
청나라의 군사력, 즉 팔기군 및 만주족 장수들이 당시 건재했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그 중 핵심인 몽골-만주 기병은 당연히 한족이 중심이 된 반란과는 무관했다. 19세기 초에 가면 만주족들이 중국 대륙의 풍요와 사치에 취해 야성을 잃어서 팔기군이 몰락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민족 전원이 전사인 만주족 특유의 집단의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며, 전투력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청나라의 세력권하에 있는 광활한 영역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오삼계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명장이었어도, 변방에서 모은 군대를 가지고 청나라군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5. 결과
주동자였던 오삼계는 무덤이 파여져 시신이 꺼내진 후 부관참시를 당했고, 오씨 일가는 전원 멸족되었으며 평서왕부는 철번되었다. 특히 강희제는 애당초 번을 존속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다른 번들의 말로도 마찬가지였다.먼저 평남왕 상지신이 북경에 압송되어 명령을 받고 자살했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혐의 외에, 항복 이후에도 황명을 씹고 반란 토벌에 가담하지 않은 죄가 걸려있어서 얄짤없었다. 다만, 아버지 상가희가 죽을 때까지 청나라에 충성했으며 반역 자체를 장남 상지신 혼자서 주도한 것, 그리고 상지신이 처음부터 자기 지위의 보전이 목적이라서 전면적으로 반역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바로 항복한 것이 참작되었다. 그래서 상지신에겐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는 한편 나머지 가족의 죄는 묻지 않았다. 상가희의 차남 상지효가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북경에 오자 강희제가 직접 맞아줬으며, 상가희에게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러 주도록 했다.
죄가 오삼계와 동급이었던 정남왕 경정충은 당연히 처형당했다. 그러나 동생인 경취충 등의 경씨 일가는 죽지 않았고, 한군 정황기에 소속되어 한군기의 명문가로 대접받았다.
이로서 강희제는 목표로 한 삼번의 철폐를 큰 희생 끝에 이뤄내고 중국 전토에 대한 직접 지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정경 사후 내분에 휩싸인 동녕 왕국의 대만 또한 정벌하면서 대청제국은 명말·청초의 대란을 이겨내고 중원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다.
이 내전의 여파로 경덕진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탓에 도자기 수입이 힘들어진 서양 상인들이 일본으로 눈을 돌려 일본의 요업이 성장했다는 말이 있으나 낭설이다. 삼번의 난과 관계없이 경덕진은 청대 내내 융성했다. 쑥대밭이 되어버렸다는 경덕진에 독도관(督陶官)이 파견되어 관요의 자기 생산을 감독하고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 및 개발하고 있었으며 옹정과 건륭 연간까지 경덕진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특히 옹정 연간에는 서양과 중국의 기법을 융화시킨 채색 기법이 개발되어 유럽에 수출까지 했다. 그리하여 중국 도자기는 아편 무역이 주류가 될 때까지 차와 함께 청나라의 엄청난 대서방 무역흑자의 1등 공신이었다.
또한, 서양 상인들의 도자기 수입처는 경덕진이 아니라 중국 남부에 산재한 무수히 많은 관요와 민요였으며, 그들은 마카오와 광저우에서 이를 구매했다. 북쪽에서는 캬흐타, 네르친스크, 알탄불라크에서 교류가 이뤄졌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은 삼번의 난이 아니라 명청교체기의 대혼란으로 인한 중국 도자기 생산량의 급감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이로서 만주족이 산해관 입관 이후 약 30년 동안 반항하던 한족 세력을 일소하고, 광활한 대륙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승자가 된 강희제는 대륙을 확고히 장악하게 되며, 북경에서 중국 남해안까지 이르는 지역에 청나라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게 되었다.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약 100여 년 동안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최전성기, 즉 강건성세가 개막되었다. 이 때문에 의미있는 한족의 반란은 100년 후인 18세기 말이 되어서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기 전까지 전무하게 되었다.
6. 조선의 북벌론과의 관련
삼번의 난은 조선의 윤휴가 북벌론을 주장하던 시기와 맞물리는데, 윤휴가 북벌을 주장한 까닭 중 하나가"오랑캐들을 봐라. 지금 삼번이 저 난리를 친다. 우리도 협력해서 치욕을 씻자!"
이것이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도 삼번의 난을 이용해서 대만의 동녕 왕국이나 삼번과 호응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결국 흐지부지되었다.사실 조선은 군사를 내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는데,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인구가 격감했는데, 여기에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1670~1671)[37]까지 닥친 뒤라 군사를 낼 힘이 있으면 당장 백성부터 먹여 살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사신들은 매년 북경을 다녀와서 청나라의 강대함을 조정에 보고하고 있었다. 조선은 청나라를 칠 역량이 있기는 커녕 삼번의 난이 마무리된 이후에 다시 을병대기근이 닥치자, 오히려 식량을 원조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에 강희제는 50,000석의 식량을 조선에 보냈다.
더구나 조선을 지배하는 성리학자들이 명나라의 유신들과 마찬가지로 배신자들인 삼번을 좋게 봤을리 없다. 특히 삼번의 우두머리였던 상가희와 경중명은 모문룡의 부하들로써 가도에 주둔했을 때, 조선에서 해적질을 하여 큰 피해를 끼쳤고, 위에서 말했듯이 오삼계는 청나라군에게 산해관을 열어줘 만주족의 대륙 지배를 도운 1등 공신인데다가,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 주유랑을 직접 체포해 처형한 자였다.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어도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자들이 지배층인 조선이 이런 배신자들과 호응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장강 이남은 반만주족 감정이 극심한데다가, 원래부터 한족 항장 출신의 번왕들이 적극적으로 정복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부 주민들의 지지가 있어서 오삼계군이 쉽게 공략할 수 있었지만, 이와는 달리 조선이 국경을 맞댄 만주는 만주족의 본거지였고, 화북 지역은 청나라에 대한 지지세가 확고했기 때문에 조선이 쳐들어가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를 냈다가 청나라측의 역공을 당하게 되면, 병자호란 때 겪은 삼전도의 치욕 저리가라 할 만큼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고 조선이 멸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번의 난 이후 70년이 지났을 때, 서몽골계 준가르부가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38] 아예 민족이 말살당한 것이 좋은 예이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다수인 한족 등을 지배해야하는 청나라로서는 그 특성상 이런 반란이나 군신 관계의 파기에 대해 굉장히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삼번의 난만 보더라도 진압 때 학살당한 백성들의 수가 잘 기록되지 않았지만, 1억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조선 제19대 숙종 시기, 삼번의 난이 마무리된 직후인 168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우의정 김석주는 숙종에게
"삼번의 반란군은 모두 타도되었고, 반란의 수괴들은 모두 북경에 끌려와 참형을 당했으며, 명나라 유신들의 자손들이 지금 모두 청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고, (일본측에서 전해온 바에 의하면) 정성공의 세력도 이미 타도되었으니 이미 대세는 청나라에 기울었고, 천하는 명나라를 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 이것으로 제17대 효종의 즉위 이후인 1650년부터 시작해서 숙종의 치세때인 1670년대까지 계속 이어져 오던 조선 조정 차원의 북벌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7. 미디어 믹스
중국의 소설가 얼웨허(二月河)[39]가 200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인 《강희대제》[40]에서 초반부의 중요 내용이 바로 이 삼번의 난이 벌어지는 배경과 그 과정이다. 삼번의 난 초반에 한때 궁지에 몰렸던 강희제였지만, 믿음직한 신하들과 그 자신이 가진 불굴의 의지와 행운으로 인해 끝내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8. 여담
이후 세월이 흐른 뒤 위구르나 준가르 등이 청나라의 통치하에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에, 이 삼번의 난이 어느 정도 원인 제공을 했다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만일 청 황실에서 새로운 피정복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할 의사가 있었다면 이들이 현실 역사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일인데, 이미 삼번의 난으로 크게 곤혹을 치렀던 청나라가 무조건적인 중앙집권에 집착하게 되면서 일이 나쁘게 흘러갔다는 것이다.다만 이를 반박하는 측에서는 청 황실의 경우는 다른 정복왕조들과는 달리 이미 태종 숭덕제 때부터 중앙집권에 대한 의욕을 강하게 드러냈다는 점을 지적하며, 따라서 삼번의 난이 없었더라도 청 황실은 여전히 중앙집권을 국시로 삼았을 것이라고 본다.[41]
서방의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기원전 448년 아테네-페르시아 평화조약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아나톨리아 패권은 재확립되었는데, 76년이 지난 기원전 372년 카파도키아 사트라프 다타메스가 이집트 토벌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기원전 366년 프리기아-헬레스폰트의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헬레스폰트 (미시아) 영지의 반납을 거부하며 반란에 동참했다. 다만 다타메스는 사위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고, 아리오바르자네스는 아들에게 배신당해 샤한샤에게 보내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 무렵인 기원전 362년, 아르메니아의 사트라프 오론테스가 미시아 영지로 이관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다른 반란 세력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항복했다. 이에 샤한샤는 그를 사면한 후 반란을 일으켰던 사트라프들의 영지 일부를 하사했다.
9. 관련 문서
[1] 강친왕 걸서. 예친왕 대선의 손자였다.[2] 1625~1689. 태조 천명제의 7남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의 아들이었다. 경취충의 처인 화석유가공주의 친부이다. 순치제, 허서리 가문과 함께 삼번 유지론자였으나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3] 오삼계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던 초상화의 실제 주인공이다.[4] 장용, 조양동, 왕진보, 손사극은 김용의 역사무협소설 《녹정기》에 등장하는 장수들이기도 하다. 주인공 위소보의 의형제들이며,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삼번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이 출세하는데는 전부 위소보의 비호가 있었다.[5] 오삼계의 소무 연호 채용, 보급품 지원.[6] 원래 오삼계는 같은 한족인 이자성 측에 투항하려 했지만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군이 오삼계의 본가를 약탈하고, 더 이상 청나라를 상대하면서 이자성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청나라에 귀순했다.[7] 이때 남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소종 영력제 주유랑이 죽었는데, 그는 살아남기 위해 따웅우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던 버마의 국경을 넘었지만 오삼계 또한 버마의 국경을 넘었다. 청군의 위세가 두려웠던 버마 왕 페 민이 직접 영력제를 오삼계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오삼계는 영력제와 그 일족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이 소식은 동녕 왕국을 세운 정성공의 귀에도 들어가 이때 크게 슬퍼하다가 1개월 만에 죽었다.[8] 경중명, 상가희의 동료로써 역시 원숭환이 처형된후 청나라에 투신하여 병자호란, 입관, 화남 정벌 때 공을 세우고, 정남왕(定南王)으로써 광서의 번왕에 봉해졌지만 남명 정권의 손가망과 싸우다가 패배해 자결했다. 공유덕이 살아있었더라면 사번의 난인가? 공유덕의 사위였던 손연령이 광서를 지배하며 오삼계에게 붙었다가 나중에 다시 청나라에 투신하려 하여 살해되었다.[9] 이 때의 반란 때문에 명나라로부터 반란 토벌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조선이 공동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 때문에 조선은 후금에게 밉보이게 되었고,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우린 너희랑 원수진 것도 없는데 너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근거로 이를 언급했다.[10] 비황족인 조조가 위왕, 사마소가 진왕, 이연이 당왕에 등극한 예가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나라가 이미 찬탈 과정에 있었거나, 망해가고 있는 플래그였다.[11] 이래서인지 강희제 시기에 벌어진 문자의 옥인 '《명사집략》 사건'에서 명나라를 따르던 이들은 경중명과 상가희를 나라 팔아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난했다.[12] 당시만 해도 만주족이 천연두에 별로 면역이 없었는지 입관 전후 천연두의 유행으로 수많은 만주족이 사망했고, 심지어 순치제조차 천연두로 23세에 요절했다. 일설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인조의 항복만 받고 서둘러 물러난 이유도 본거지인 만주의 천연두 유행 때문이었다고 한다.[13] 경정충은 복건의 소금과 생선 무역, 광산업 등으로 부를 축적했고, 오삼계는 운남과 몽골에 대한 차, 말에 대한 무역은 물론 고향인 요동 지방과 연계한 약재 작사로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14] 이에 병부에서 '운남과 귀주에 결원이 발생하면 병부가 새로운 인사를 내려보내는데 오삼계가 이미 다른 인사를 임명하여 번거롭게 다시 올라오는 경우가 많으니 오삼계가 적임자를 보내달라고 할 때만 내려보내죠.'라고 상소를 올릴 지경이었다.[15] 사실 장강 이남 지역이 중국 경제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남송 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당나라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기반이 될 인프라는 이미 오나라의 초대 황제인 손권(삼국지연의의 그 손권이다.)의 치세때부터 서서히 갖춰지고 있었던 터라, 명나라 시기에 강남 지역의 경제력이 강북을 압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6] 애당초 오삼계의 직속부대는 산해관에서 청나라의 입관을 저지하던 명나라의 정예병들이었다.[17] 대표적으로 대만의 정성공 세력이 있었다.[18] 보정대신들인 허서리 소닌과 나라 숙사하는 삼번 유지론자였으나 이미 죽어 삼번 철폐론자들이 조정에서 가장 목소리가 컸다.[19] 중국 위키백과에 따르면, 감문혼이 자결할 때 4남 감국성(甘國城)이 먼저 스스로 죽었고, 감문혼은 "이 아이가 나보다 더 용감하구나!"라고 한탄했다. 이후 난이 평정되자 귀주순무(貴州巡撫) 양옹건(楊雍建)이 감문혼의 업적을 강희제에게 보고했고, 강희제는 그를 병부상서에 추증하면서 '충과'(忠果)라는 시호를 내렸다.[20] 늑이금은 후에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했다.#[21] 《삼국지연의》에서 유표가 다스리던 그 형주다. 호북은 형주 북부, 호남은 형주 남부 4군이었다.[22] 오응웅은 오삼계의 장남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지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했고,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오세번이었고, 차남은 오세림이었다.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했으나, 오세림은 아버지 오응웅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어린 아들들은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었다. 내가 고자라니[23] 상가희는 위에 언급한 양청표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연회를 열고, 자식들과 휘하 장수들이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하도록 했다. 그런데 상지신은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려 들지 않았고, 이에 상가희는 크게 화가 난 나머지, 상지신의 손을 깨물어 버리고 '소인은 폐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라며 사죄한 일이 있었다.[24] 오랜 기간 동안에 연결된 루트에서 오삼계의 기반이 되는 운남의 중심지역을 타격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산악 험로이기는 했지만 한중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옛날 전국시대에 진(秦)나라가 연결했던 길로 이 길을 통하여 사천 분지를 점령하고, 운남 지역까지 내려갔다. 그에 비하여 호북에서 호남을 거쳐서 가는 길은 처음에는 평지이지만, 호남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큰 길이 없는 밀림 지역이었고, 중간 점령지인 귀주는 가난하기로 지금도 몇 손가락 안에 뽑히는 곳이었다. 우회해서 광서까지 간다고 해도 광서도 귀주와 마찬가지로 빈약한 지역이었고, 도로도 없었으며,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다만 호남까지 진출한 오삼계군을 격퇴하여 적의 경제적인 이익을 제거하는 단기적인 전투 목적으로 보여진다. 또한 청군이 패배하긴 했지만, 동정호나 창사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호북 일대가 청나라의 완벽한 관할로 돌아섰음을 보여준다.[25] 다만 오삼계의 다른 아들 한 명이 도망치는데 성공하여 후손을 남기긴 했다.[26] 자잘하게 제법 괜찮은 장수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사망하면서 약화되었다. 또한 아이신기오로씨들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탁월했다.[27] 그 무도하기로 유명한 서초패왕 항우조차 나중에 자기 손으로 죽였을지언정 일단은 초회왕을 섬긴 바 있었다.[28] 그나마 석경당은 오삼계처럼 뻔뻔하게 자기가 죽인 상대의 복수를 자기가 해주겠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니 좀 낫지 않느냐고 보기도 하지만, 대신 석경당은 좀 더 구차하고 굴욕적인 행보를 보인 면이 있다. 일단 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싸워보다가 도저히 다른 길이 없는 상황에 몰려서 항복하는 것으로 배신자의 행보를 시작한 오삼계에 비해 석경당은 처음부터 권력을 탐내 배신했고, 독립 왕조의 '황제'이면서도 북방 이민족인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도 모자라 '부자의 예'(물론 석경당이 아들이었다...)까지 맺고 거란의 의복까지 받아입는 희대의 굴욕까지 받아들이면서 권력을 탐했다. 게다가 석경당의 배신자 행보에서 심복 역할을 하던 유지원조차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로 충분한데, 굳이 땅까지 떼어줄 필요가 있느냐"라며 만류하는 것을 듣지 않고 굳이 연운 16주를 할양함으로써 이후 400년 동안 한족계 국가가 북방 유목민 국가에 대해 열세에 놓이게 된 첫 단추를 꿰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재평가가 가능한 오삼계에 비해 석경당은 그냥 개노답 멍청이라는 것이 대중적인 평가이다.[29] 현실의 한자문화권에도 이 가정에서의 오주와 비슷한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가 있다. 초대 황제인 자롱 황제를 오삼계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힘들지언정, 태국이나 캄보디아, 프랑스 등 외세의 힘을 빌려 승승장구했다는 한계가 있었던 점이 비슷하며, 이것이 계속 걸림돌이 되면서 결국 응우옌 왕조는 세워진 지 약 150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가 자주적이었던 시절은 제4대 황제인 뜨득 황제가 마지막이었고, 그 후로 마지막 제13대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까지는 모두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허수아비 황제였으므로, 응우옌 왕조는 사실상 150년은 커녕 100년도 못 채우고 멸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마도 응우옌 왕조가 세워질 당시 유럽은 대혼돈 상태였기에 다들 극동에 관심을 둘 수 없어서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이었으니 경우에 따라선 더 빨리 멸망할 수도 있었다.[30] 게다가 반란을 일으킨 시점에서는 오삼계가 너무 늙었기에, 설령 성공했다고 쳐도 나라의 기틀을 다질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31] 상가희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고, 상지신도 지위에 대한 보장만 받자 바로 청나라에 항복했다.[3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복건 자체는 그다지 풍요롭지 않은 변두리였으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복건을 지나 절강 일대까지 동녕 왕국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정충에게 복건을 준 것이었으니, 원래부터가 동녕 왕국과는 라이벌이었다. 또한 서북방이 산지인 복건에서 중심지역은 동남방의 해안가였는데, 이 앞에 대만이 있었으니 경정충에게는 자신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동녕 왕국이었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대로 명나라의 충신을 자처하는 동녕 왕국이 배신자인 경씨를 도울 리도, 연합할 리도 없었다.[33] 강남이 화북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지만 강남에서 제일 부유한 지역은 북쪽의 장강 유역이었고 남쪽 변방인 이들 지역은 농업생산력도 떨어졌고 외부와의 무역 없이는 부를 일구기가 어려운 동네였다.[34] (익주→)형주 서성군 운양현. 현 호북성 십언시 운양구[35] 서안과 낙양 사이의 거리는 약 300-400km이지만, 서안과 북경 사이의 거리는 1,000km가 훨씬 넘는다.[36] 더군다나 청나라 역시 적대관계인 외몽골 할하족과 준가르, 그리고 조공국이지만 적개감이 상당했던 조선이 배후에 있었기에 난을 빠르게 진압하지 못하고 위촉오와 같은 판세가 만들어졌다면 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37] 얼마나 최악이었냐면 조선 8도 전체가 흉년이었고, 지배층까지 사망했을 정도의 대기근이었다.[38] 준가르와 그 전신인 오이라트는 명나라 시절부터 계속 중국의 서북쪽을 약탈했다. 청나라의 성립 이후에도 여러번 청나라의 신경을 긁어서 청나라는 세 차례나 원정했고, 그때마다 패배한 준가르부는 일단 청나라에 충성을 서약했으나, 계속 배신했다. 결과적으로 제4차 원정에 나선 건륭제는 준가르부 전원을 학살해서 아예 씨를 말려버렸다. 그리고 그 공백지에 위구르족과 한족을 데려와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성립된 것이다.[39] 청나라의 세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다룬 대하소설인 이른바 제왕삼부곡 시리즈(전 42권)를 발표하여 중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2018년 12월 15일 향년 73세로 별세했다.[40] 2005년 7월 《건국군주 강희대제》로 다시 번역 출간되었다.[41] 실제로 상술했듯이 삼번의 난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은 강희제가 먼저 철번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