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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 16주의 위치 |
연도에 오타가 있는데 서기 1936년 아니라 서기 936년이다. 모주라고 표시된 부분도 막주라고 표기해야 한다. 후대인 명나라 시절의 만리장성이 표시된 이유는 지역을 알아보기 쉽게 편의성으로 넣은 것이며 당시에는 장성은 없고 거용관같은 관문만 존재했다. |
1936년 직후에 일본군이 일대를 점령하긴 한다. |
1. 개요
燕雲十六州오대십국시대 후진의 건국자인 석경당이 936년 요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해서 지원군을 받은 후 후당을 멸망시키고 그 대가로 바친 화북의 16개 주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2. 구성
연운 16주라는 명칭은 이 16개 주 중 대표 지역인 연주(燕州, 지금의 베이징)과 운주(雲州, 지금의 산시성 다퉁)에서 따온 것으로 16개 주의 위치는 아래 표와 같다. 유연(幽燕) 16주, 연유(燕幽) 16주라고도 한다.명칭 | 현재의 지역 |
유주(幽州) 연주(燕州) | 베이징시 시청구 |
순주(順州) | 베이징시 순이구 |
단주(檀州) | 베이징시 미윈구 |
유주(儒州) | 베이징시 옌칭구 |
계주(薊州) | 톈진시 지저우구 |
영주(瀛州) | 허베이성 창저우시 허젠시 |
막주(莫州) | 허베이성 창저우시 런추시 |
탁주(涿州) |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
신주(新州) |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줘루현 |
규주(媯州) |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화이라이현 |
무주(武州) |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쉬안화구 |
울주(蔚州) |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위현 |
운주(雲州) | 산시성 다퉁시 청구 |
응주(應州) | 산시성 숴저우시 잉현 |
환주(寰州) | 산시성 숴저우시 동 |
삭주(朔州) | 산시성 숴저우시 숴청구 |
3. 배경
후당의 황제, 이종가(李從珂)는 하동절도사였던 석경당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종가가 석경당을 좌천시키고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석경당은 본거지인 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이종가는 수만의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 들었다. 다급해진 석경당은 거란 황제에게 원군을 요청하자는 상유한(桑維翰)의 간언을 채택했다. 그런데 석경당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였다."거란 황제를 어버이로 섬기고 북방의 16주를 할양할 테니 군사원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사신을 보내려 하자 측근인 유지원마저 극구 만류했지만 석경당은 끝내 연운 16주를 바치고 거란 원군 5만의 힘으로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건국했다.
4.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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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 16주의 면적 자체는 한반도에 존재한 백제 강역보다 조금 큰 수준이라 중국 본토에 비하면 그리 거대한 땅덩이는 아니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 국가와 중국 사이에 놓인 연산 산맥의 사이사이에 형성된 도시들이 많아, 만리장성 이남에서는 극도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시에는 진한시대의 고대 만리장성은 더 북쪽에 있었으나 폐허상태였고 아직 만리장성이 새롭게 건설되지는 않았으나 연산 산맥에 있는 거용관 같은 관문만으로도 충분한 방어력을 보여주던 상태였고 후대인 명나라 시기에 연운 16주 지역에 실제로 만리장성을 새롭게 건설할 정도로 튼튼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연운 16주 지역의 방어력이 얼마나 높았는가 하면 중원을 지배한 거란, 여진, 몽골도 연운 16주의 경계선에 있는 관문을 정면에서 공격하기보다는 샛길로 우회하여 포위한 후에 협공으로 무너뜨릴 정도였다.
그리고 나중에 명나라가 연운 16주 지역에 만리장성을 새롭게 건설한 후에는 샛길 공략법도 막히는 바람에 근대 이전까지 절대 뚫리지 않은 난공불락의 방벽이었다. 따라서 만주족은 타이위안시 방면으로 아주 멀리 우회해서 공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그나마도 경로가 너무 험준하면서도 길게 늘어나는 탓에 약탈 수준의 타격만 가능하며 제대로 된 성곽도시를 함락시키지도 못했다. 결국 청나라는 만리장성을 넘기는 넘었으되 공격하여 뚫은 것이 아니라 이자성의 난 당시 혼란 중에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줘서 들어간 것이다. 만리장성이 정말 무력으로 뚫린 사례로는 열하사변 당시 일본군이 유일하고, 이마저도 현대전, 그것도 폭격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뚫을 수 있었다. 항공대의 지원이 없었던 회봉구 전선은 일본군이 역으로 털렸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방어력이 강한 연운 16주가 모두 요나라에게 넘어가면서 중국 본토를 공격하기 딱 좋게 대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당장 연운 16주를 차지하면, 큰 산맥이나 하천 같은 지리적 장애물은 사라지고, 바로 화북 평야지대로 진입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한족 입장에서 석경당은 사실상 이민족의 중원 관광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석경당이 아무리 출신이 사타족이라고 하더라도 엄연하게 중원을 지배했던 후진을 건국한 창업군주이므로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연운 16주는 이미 개발이 수백 년 동안 진행된 도시들로 경제력과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일례로 탁주는 삼국시대부터 이민족을 막는 거점이었으며,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대운하의 북방 종점인 물류도시로 중시되었다. 수양제 양광이 고구려와 전쟁하기 위해 물자를 쌓은 곳도 이 탁주였다. 그러므로 이곳을 차지하면 수백만 명의 인구와, 농업생산력 및 기타 산업기반을 새로이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요나라가 이 16주에 서경과 남경[1]을 둘 정도였으니 말은 다한 셈이다. 그래서 결국 기존의 소규모 농업, 수렵, 목축에 기반했던 요나라와 금나라는 이곳을 기반으로 국력을 키워서 중앙집권체제의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이 여파가 고려에도 미쳤다.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아직 불안정한 와중에도 여세를 몰아 발해 유민세력을 흡수하면서 요동을 되찾기 위해 북진을 시도했다. 그런데 연운 16주를 획득해 세력을 크게 키운 요나라가 정안국을 비롯한 발해 잔존세력과 여진족을 쳐부수며 고려가 압록강에 다다르기도 전에 급격하게 동진하는 바람에 평안북도 일대의 청천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 기가 막히게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때도 936년,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획득한 때도 하필 딱 936년이다. 이후 고려는 서희의 담판 덕에 강동 6주까진 획득해서 어찌어찌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2, 3차 여요전쟁에서 요나라는 원래 있던 유목민족의 기병전력에다 연운 16주에서 비롯된 막강한 물량을 쏟아내었기에 고려는 북진은커녕 항상 수세에 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강동 6주가 고려 입장에서는 연운 16주 역할을 해주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즉, 만리장성의 문을 열어준 연운 16주와는 반대로 강동 6주는 고려의 문을 잠그는 대문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요나라 군대가 설령 고려를 처들어와서 깽판을 치더라도 이 곳을 꽉 쥐고 있는 한은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탈환의 노력
당연하지만 연운 16주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한족계 중원 왕조 역시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959년 요나라 원정에 나선 후주 세종이 요나라 군을 격파하고 최남단 막주와 영주, 2개 주를 되찾았고 여세를 몰아 유주(연주) 공략에 나섰으나 병이 깊어져 병사했다.후주의 뒤를 이은 북송은 중원을 통일하고 연운 16주 중에서 탈환한 지역인 영주에 하간부(河間府)를 두어 대요전선의 최전방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 14개 주 수복을 위해 요나라와 수 차례의 전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희생만 많았다. 이렇게 연운 16주를 탈환하려고 송나라가 노력한 이유는 앞서 설명한 전략적인 이유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연운 16주에 속한 탁주가 바로 창업군주인 태조 조광윤의 본관이었다. 때문에 연운 16주는 조씨 황실 입장에서도 반드시 수복해야 할 지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송의 힘이 부족해서 연운 16주의 탈환은 불가능했고 차선책으로 연운 16주의 경계선 근방의 송나라 국경지대에 수로를 파고 나무를 빽빽하게 심으며 목책도 마련해서 유사시에 요나라의 침공이 있더라도 요나라 주력부대인 기마대의 진격속도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북송이 여진족의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4주 중의 연주 5주를 잠시나마 돌려받아 연산부(燕山府)를 설치했으나, 전적으로 금나라의 군사력에 의지한 바였기에 얼마 못 가서 다시 금나라의 침공으로 빼앗겼다. 이 때 앞서 언급한 송나라의 임시 방어선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너짐으로서 연운 16주의 군사적 가치와 지형적 중요성을 반증해주었다.
결국 연운 16주는 (한족계 중원 국가 기준으로) 400년 뒤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우면세 되찾게 되었으며 새롭게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연운 16주의 방어력을 더 늘린다. 하지만 이후 한족 기준으로 본다면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무너지면서 다시 빼앗겼다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면서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6. 기타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밀려서 망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운 16주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오랜 요나라의 통치로 연운 16주의 한인들은 정체성이 달라져 북송을 한족의 본거지로서 본국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로 간주했다고 한다.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바로 연운 16주로 올라온 동관이 이끄는 북송 군대가 연경에서 패하자 연운 16주의 한인들과 북요 정권은 북송 사람들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