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臘之亂
1. 개요
북송 말기인 1120년 목주의 농민 방랍이 일으킨 난.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강남(중국) 일대를 뒤흔든 대규모 민란으로, 북송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힌다.중국에서는 방랍기의(方腊起义)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며, 한국, 일본에서는 방랍의 난이라고 한다.
2. 배경
1100년 2월 즉위한 이래, 송휘종은 예술에 심취한 나머지 예술품 수집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명금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국의 진귀한 예술품들을 수집하게 했다. 관리들은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을 억지로 끌고 가게 했다. 심지어 가는 동안 집이 있으면 박살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여 개봉으로 옮기도록 했는데, 워낙 기석들을 싣고 가는 배가 많아 '화석강(花石綱)'이라 하였다.또한 휘종은 도교에 깊이 빠져 절강성 온주 출신의 도사 임영소를 크게 신임해 '통진달영선생'이라는 칭호를 주고 도교의 교리를 궁중에서 강론케 했으며, 도교 의식인 천도회(天道會)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렇듯 휘종이 예술에 과하게 심취하고 도교에 흠뻑 빠지면서 국고가 텅 비자, 휘종의 비위를 잘 맞춰서 최고 권력자가 된 채경은 국고를 채운다는 명목으로 차와 소금의 전매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화하면서, 차, 소금의 전매 증서를 마음대로 조작해 사복을 채웠다. 또한 당십전(當十錢)이라는 질 낮은 화폐를 유통시켜 자기의 재산을 불리는 데 활용했으며, 공전법(公田法)을 도입해 토지 1무가 넘는 것을 공전으로 몰수하여, 영세 지주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렇듯 조정과 관리들의 착취가 갈수록 심해지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그러던 1120년 10월, 목주 노숙현 칠현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방랍(方臘)이 무리를 모아 자기 뜻을 알렸다.
"현재 부역이 극도로 심하고, 관리의 침탈로 뽕나무가 부족하다. 그들은 대나무를 베고 꼼꼼하게 따져서 하찮은 것까지도 조금도 남기지 않는다. 또한 성색(聲色)[1], 개와 말, 토목, 도사, 갑병, 화석 외에 은과 비단 백만을 바치니, 모두 우리 동남인의 고혈이라! 우리는 1년 내내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아내와 자식들은 추위에 떨고 하루라도 배불리 먹을 수 없으니, 제군은 언제까지 참으려는가? 우리가 의를 믿고 일어선다면 사방이 소문을 듣고 호응할 것이며, 수일 내에 만인이 모일 것이다."
청계현 농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방랍에게 가담하니, 그 숫자가 수만에 이르렀다. 그들은 방랍을 성공(聖公)이라 불렀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했다. 이리하여 방랍의 난이 발발했다.
3. 반란 전개
방랍은 반란을 일으킨 뒤 관리와 장수를 두고 수건으로 등급을 달리해 6등분하였다. 당시 태평한 세월을 보내며 군대를 인솔하는 일에는 아무런 재능도, 의욕도 없던 관리들은 반란을 진압할 엄두도 못내고 도주하기 일쑤였다. 이리하여 반란은 초기에 진압되지 않고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조정은 이 소식을 듣고 담진(譚稹)에게 토벌을 명했으나, 담진은 반란 토벌에 실패했다. 11월 기미일 양전의 도감 채준(蔡遵)과 안탄(顏坦)이 식갱(息坑)에서 반란군과 맞붙었으나 크게 패하고 두 장수 모두 전사했다.방랍은 여세를 몰아 11월에 청계성을 함락하고, 12월에 목주와 흠주 2주를 함락하고 동남의 장수 곽사중을 죽였다. 또한 남으로 구주를 함락하고 군수 팽여방을 죽였으며, 북으로 신성과 동려 및 부양의 각 현을 약탈하고 항주를 약탈했다. 항주의 군수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니, 항주는 곧 함락되었고, 체치사 진건(陳建)과 조약(趙約)이 피살되었다. 방랍이 항주성을 6일 동안 방화하니, 죽은 자를 셀 수 없었다. 방랍의 무리는 관리를 사로잡으면 반드시 팔과 다리를 끊어 고기로 만들고, 허파와 창자를 꺼내거나 고깃기름으로 삶거나, 화살촉을 모아 난사하는 등, 온갖 방식으로 해쳤다. 이는 그들이 관리들을 뼈저리게 증오했기 때문이다. 또한 채경의 조상 무덤을 도굴하여 해골을 부관참시하기도 했다.
이렇듯 반란이 갈수록 거세졌지만, 왕보(王黼)가 책임추궁을 두려워하여 급보를 숨기고 송휘종에게 아뢰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반란 진압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난계령의 산적 주언(朱言)과 오방(吳邦), 섬현의 구도인(仇道人), 선거의 여사낭(呂師囊), 방암산의 진십사(陳十四), 소주의 석생(石生), 귀안의 육행아(陸行兒)가 방랍에 가담하니, 방랍의 세력이 양쯔강 하류 일대에 위세를 떨쳤다. 송휘종은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급히 동관에게 강과 회 및 형과 절의 선무사로 삼아서 방랍을 토벌하게 했으며, 양절 백성들의 괴로움에 관해 조사하게 했다.
송휘종은 곧 '화석강'이 강남(중국) 백성들의 반란 가담에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즉시 기석을 바치는 걸 중단하게 했다. 하지만 반란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1121년 1월 반군이 무주와 구주를 함락하고, 수령 팽여방(彭汝方)을 죽였다. 이후 방랍의 장수 방칠불(方七佛)이 무리 6만을 인솔하여 수주를 공격했다. 수주의 통군 왕자무(王子武)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구원군이 이르자 왕자무는 구원군과 함께 반군을 협공하여 9천 명을 죽이고 경관(京觀)[2] 5곳을 만드니, 반란군이 거항으로 돌아갔다.
그해 2월 동관과 담진의 관군 15만 대군이 항주와 섭주로 진격했다. 관군 선봉대가 청하의 독에 이르러 강과 육지에서 동시에 진격하자, 방랍이 관사와 부고 및 민가를 불사르고 야밤을 틈타 달아났다. 이후 유연경(劉延慶), 왕품(王稟), 왕환(王渙), 양유충(楊惟忠), 신흥종(辛興宗)이 잇따라 진격하여 모든 잃어버린 성을 회복했다. 그해 4월, 방랍의 무리는 거듭된 패전 끝에 청계현으로 후퇴한 뒤 다시 방원동(幇源洞)에 숨었다. 토벌군이 방원동을 포위하자, 반란군은 동굴 속에 숨었다.
이에 비장 한세충이 동굴의 침투 경로를 찾아낸 뒤 숨어있는 반란군을 공격하여 방랍과 아내 소(邵), 아들 호이태자(毫二太子), 재상 방비(方肥) 등 52인을 체포하였으며, 반란군 7만 명을 죽였다. 이후 방랍은 아내와 아들, 동료 52명과 함께 개봉으로 압송된 뒤 8월 병진일에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반란은 종결되었다.
4. 결과
송사 동관 열전에 따르면, 방랍의 난에 휘말린 지역이 6주 52현에 이르렀고, 피살된 평민은 200만에 달했다고 한다. 방랍의 반란군이 죽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는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정부군에 의해 발생했다. 당시 정황을 묘사한 기록들에 의하면 진압군인 서군[3]을 이끈 군벌들은 서하를 상대로 저질렀던 불태우고 살해하고 약탈하는 짓을 강남(중국)의 백성들한테 그대로 저질러서 '수만 명의 여성들이 벌거벗은 채 85마일을 달아나서는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고, 그들의 몸이 계곡 건너편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나무에 매달렸다.'라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조정은 이절과 강동이 도적에게 피해를 당한 점을 고려해 3년간 부역을 면제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 진압 후 2달도 안 되어 '화석강'을 다시 실시하게 하였다. 이에 진과정(陳過庭)과 장여림(張汝霖)이 송휘종에게 중지할 것을 간청하자, 휘종은 왕보(王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여 모두 벼슬을 빼앗고 멀리 귀양보냈다.
휘종은 이후에도 예술과 도교에 심취해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고, 송나라는 이로 인해 국운이 쇠미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을 돌이켜보지 않고 마침 눈부시게 성장하던 금나라와 연합하여 쇠약해지는 요나라를 협공해 멸망시키고 연운 16주를 되찾으려 들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요나라의 마지막 군주 천조제와 손잡고 금나라를 협공하려 하다 발각되었고, 금태종이 분노하여 개봉으로 쳐들어갔다. 결국 정강의 변이 일어나 북송이 멸망하였고, 송휘종은 아들 송흠종과 함께 만주로 끌려가서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