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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20:03

마잔산

파일:마점산.jpg
중화민국 헤이룽장성 정부주석
정체 馬占山
간체 马占山
한국식 독음 마점산
영문 Ma Zhanshan
수방(秀芳)
출생 1885년 11월 30일
청나라 봉천성 회덕현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궁주링시)
사망 1950년 11월 29일[1] (향년 64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만주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봉천강무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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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봉천군벌의 원로로 만주사변 이후 항일 게릴라 운동을 지휘하였다.

2. 생애

1885년, 현재의 봉천성 회덕현(현 지린성 궁주링(公主嶺)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원적은 허베이성 펑룬(豊潤)현[2]인데, 청나라 가경연간에 그의 조부 마완롱(馬萬龍)이 대기근을 피해 틈관동으로 고향 허베이성을 떠났으며, 회덕현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가 허베이성 출신이라는 설은 아마 원적지가 허베이성인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래 마적 출신이었으나 우쥔성의 눈에 띄어 장쭤린의 막하로 들어간 이후 마적 토벌에 앞장서 장쭤린의 신임을 샀다. 궈쑹링이 만든 동북 무비학당에 다니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익혔으며 이후 영장을 거쳐 흑룡강 진수사 겸 흑하 경비사령에 임명되었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만주족, 후이족, 한족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출생연도에 대해서도 1885년 출생설과 1887년 출생설이 있고, 출생지 역시 허베이성 출신설과 랴오닝성 출신설, 그리고 지린성 출신설 등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본 문서는 널리 알려진 1885년 지린성 출신설을 채택하도록 하겠다. 마잔산은 이후 우쥔성 밑에서, 다시 장쭤린 밑에서 승진가도를 거쳤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헤이룽장성장 완푸린이 도주하자 그는 장쉐량으로부터 헤이룽장성 대리성장에 임명되어 치치하얼 수비를 명령받았다. 1931년 11월, 마잔산은 넌장강 철교 전투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격퇴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치치하얼을 도로 내주었다. 마잔산은 국경의 산악지대로 물러나 저항을 계속하다가 관동군의 봉천군벌 포섭 정책에 따라 일본군의 회유를 받았다.

1932년 1월, 마잔산은 장징후이와 일본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이타가키 세이시로의 설득에 저항을 포기하고 협력을 약속, 1932년 1월 임시 흑룡강성 정부를 조직하였다. 마잔산은 1932년 2월 16일, 봉천에서 열린 건국회의에 참여하여 장징후이, 짱스이, 탕위린,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 만몽의 유력자들과 함께 동북 행정위원회의 조직을 선포, 동북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었다. 이후 2월 18일, 동북행정위원회는 국민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3월 1일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하지만 장징후이가 과격하게 만주 독립을 주장한데에 반해 마잔산은 장쭤샹, 완푸린 등 독립반대파에 속하였다. 여튼 만주국 건국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되자 대리인인 자오종런을 파견하여 공화국의 건설을 주장하였으나 관동군이 군주정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이 역시 무산되었다. 이후 일본로부터 장징후이, 짱스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장하이펑, 위즈샨 등과 함께 만주국 건국원훈에 서훈되었고 흑룡강성장이 되었으며, 그해 3월에는 만주국 초대 군정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잔산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매국적인 문서에는 최대한 서명하려 하지 않았고, 어쩔 때는 글자를 모른다고 발뺌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당연히 불신을 품을 수 밖에 없었고 마잔산에 대한 통제 또한 엄격해졌다. 이에 마잔산은 회의감이 들게 되었고, 헤이룽장성장의 신분을 이용해 만주국 화폐 약 2천만 위안 및 300필의 군마, 10여 대의 트럭 등의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비밀리에 헤이허 등지에 항일운동을 재개할 목적으로 보내었다. 그해 3월 말, 마잔산은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동삼성에 오려는 기회를 틈타, 일본의 침략상을 조사하고 폭로하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행동을 실시하여 결국 그해 4월 1일 2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만주국 치하의 치치하얼을 떠나면서 다시금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1932년 4월 7일, 마잔산은 근거지를 헤이허로 옮기고 항일운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일본은 마잔산을 토벌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준비, 8월에 항공대를 동원하여 마잔산의 근거지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었으며 10월에 홍성여단과 기병여단을 내지에서 소환하여 다롄을 통해 상륙시키는 등 만주사변 이전 1만 명에 불과했던 관동군을 20만 명 규모로 증강시켰다. 일본군의 금주 공격이 시작되자 치치하얼에 주둔한 일본군 2사단 예하 2대대의 견제를 받았다. 마잔산은 한때 일본군의 최대 두통거리로 자리잡아 하얼빈을 공격하는 등 중국 전역의 항일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에 난타를 당하다가 결국 수만명의 부하가 800명으로 줄어드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마잔산 부대는 극심한 군수품 부족과 패전에 해륜으로 퇴각, 휘하의 참모 이범석을 파견하여 하이라얼(海拉爾)의 소병문(蘇炳文)과의 합작을 타진했으나 일본의 공격이 거세짐에 따라 포기했다. 일본군은 해륜하에서 마잔산을 습격하여 죽였다고 주장하였고 그를 사살했다고 주장하는 자리를 <장렬 전사지>라고 명명하고 유해 매장식까지 거행하는 쌩쑈를 벌였으나 마잔산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그해 12월 7일 소련 국경 안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하였고 1933년 봄, 언론에 다시 등장하여 일본군을 개망신시켰다.

소련 영내로 피신한 마잔산은 소련 영사의 지휘를 받아 무장해제와 인원등록 작업을 끝내고 바이칼호 북쪽의 톰스크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국민정부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성사시키고 옌후이칭을 주소 공사로 파견하자 옌후이칭의 송환교섭에 힘입어 1933년 1월 20일, 석방되었다. 국민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변화한 유럽의 군사시설과 시책을 알아보기 위해 마잔산을 구라파 군사사절단장으로 임명하여 유럽 외유를 지시했다. 1933년 4월 18일, 모스크바에서 특별열차에 탑승한 마잔산은 폴란드를 경유, 베를린에 도착했고 이후 52일 동안 유럽시찰을 실시한 후 1933년 6월 5일, 이탈리아 기선을 타고 상하이를 통해 귀국하였다. 이후 장제스를 찾아가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톈진으로 떠나버렸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동북전진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 참여하여 주사오량이 지휘한 8전구 산하에서 수원성과 차하얼성의 몽강군을 공격하였다. 전쟁 중에 중국공산당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1939년 옌안을 비밀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동북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만주에 파견되었으나 병환이 심해져서 공직에서 사퇴해서 베이핑에서 요양하였다. 이때 공산군의 공격을 받아 9월 11일, 3천명의 부하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국공내전이 격화된 후 베이핑 시장 푸쭤이에게 공산군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하였고 이 공을 인정받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정협위원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도 못하고 사망하였다.

3. 참고문헌


[1] 65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사망했다.[2] 현 허베이성 탕산시 펑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