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제2대 궁내부 대신 | ||
정체 | <colbgcolor=#ffffff,#191919>愛新覺羅 熙洽 | |
간체 | 爱新觉罗 熙洽 | |
한국식 독음 | 애신각라 희흡 | |
영문 | Aisin-Gioro Xiqia | |
출생 | 1884년 10월 18일 | |
청나라 봉천부 | ||
사망 | 1952년 10월 29일 (향년 68세) | |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전범수용소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만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민족 | 만주족 | |
학력 | 일본육군사관학교 | |
직업 | 정치가, 군인 | |
재정부대신 임기 | 총장 1932년 3월 9일 ~ 1934년 3월 1일 부장 1934년 3월 1일 ~ 1936년 5월 21일 | |
궁내부대신 임기 | 제2대 1936년 5월 21일 ~ 1945년 8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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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방계 황족, 봉천군벌. 중화민국 수립이후 봉천군벌 중 하나였고,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재정부 대신,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청나라 황족들을 부를 때 으레 그렇듯이, 희흡 혹은 시치아라고 이름만 읽는 일이 대부분이다. 洽자가 合자와 비슷하기 때문에 희합으로 잘못 표기한 경우도 간혹 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84년 10월 18일, 청나라 봉천부에서 태어났다. 원래 팔기군 중 정람기(正藍旗) 출신으로 청태조 누르하치의 첫째 남동생 무르하치(穆爾哈齊, 1561 ~ 1620)의 후손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진무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2.2. 중화민국 수립, 봉천군벌에 합류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종사당의 거두로서 청나라 복벽을 주장했다. 이후 봉천군벌에 합류하여 동북육군강무당 교육장에 취임하여 휘하에 장쉐량을 가르쳤다.일찍이 길림독판공서 참모장을 지내며 길림성 먼로주의를 주장하며 지역독립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관동군의 주목을 받았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총영사 이시이 이타로와 만나 관련 문제를 협의했으며 중국에서 보복운동, 배일운동을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발생 이후 9월 21일, 일본군에게 무조건 투항하였으며 길림성 주석대리로 질서 통제에 나섰다. 9월 22일, 이시이 총영사를 방문하여 길림성 정부가 자체적으로 무장해제를 실시하겠다고 제안했으며 9월 23일, 일본군 2사단장 다몬 지로과 회담하였는데 다몬과 그 참모들이 총을 겨누며 독립하라고 위협하자 길림성이 곧 독립할 것을 약속하였다.
2.3. 만주국에 합류
9월 21일, 시치차는 자발적으로 일본군을 맞아들이고 일본에 투항했다. 1931년 9월 22일, 일본의 <만몽문제 해결채안>에서 장징후이, 탕위린, 장하이펑, 위즈산 등과 함께 일본군이 만주의 질서를 통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9월 26일, 시치아는 기림성의 군과 정부 기관을 통합하여 길림성 장관공서를 구성하고 길림성 장관 겸 길림성 재정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제일 먼저 9월 28일, 장쉐량과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길림성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장하이펑과 함께 뤄전위를 비롯한 청나라의 훈신들을 만주로 초청하여 선통제 옹립을 위한 건국공작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군과 결탁하여 짱스이, 장징후이와 함께 연성자치와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만몽영유론을 주장하는 이시와라 간지와 대립하였다. 결국 이시와라도 만주국 건국에 찬성하게 되었다.1932년 2월 16일, 봉천에서 장징후이, 짱스이, 마잔산, 치무트셈필, 링성 등 만몽의 유력자들과 함께 건국최고회의를 개최하여 최고회의 중앙정무위원회 위원, 간사장을 겸임했고 동북 행정위원회를 조직했다. 2월 18일, 국민정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3월 1일, 만주국 건국을 선언했다. 이후 청나라의 복고를 기도하며 관동군과 긴밀히 협력했지만 일본군으로부터 "우리 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를 만들었지만 끝까지 함께 간다는 각오가 결여되어 있고 실각자는 물론, 일반 사람들의 인심은 재빨리 신정부로부터 이반하고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조 복고를 통해 자신도 떡고물을 얻어먹고자 관동군의 선통제 옹립 계획에 찬성했으며 선통제게 편지를 보내서 만주로 올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선통제는 천진사변을 계기로 만주로 이주한다. 이후 만주국 건국식에서 창춘역두에서 황룡기를 들고 만주 구신 영란단을 이끌었으며 만주국 건국 후에 재정총장 겸 길림성장에 임명되어 만주국의 주요 파벌인 길림파벌을 이끌었으며 만주군의 초기 4지역 경비대 중 길림경비대의 지휘를 맡았다.
만주국 건국 후 민족간의 일률평등을 주장하며 일본이 만주국의 친선국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민족평등에 솔선수범을 하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의 간섭과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멸시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일본측의 총무청 주계처 급여과장 후루미 다다유키는 각 민족의 능력은 평등하지 않으며 일본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백미를 먹었기 때문에 만주사람들처럼 잡곡을 먹을 수 없다, 진정한 일만 친선은 만주국이 일본에게 더 바치는 것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1934년 10월, 만주국의 4성제를 10성제로 개편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시치아는 길림성장에서 해임되어 재정부장으로 이동했고 권력기반도 상실하였다. 또한 1936년, 명예직인 궁내부 대신으로 전임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정샤오쉬가 총리에서 퇴임하면서 짱스이와 더불어 차기 총리대신감으로 주목되었으나 일본은 영향력이 변변찮은 예스맨 장징후이를 선택했다. 1945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만주국이 사실상 멸망하자 선통제는 만주국 해산식을 가졌는데 이때 장징후이가 선통제의 손을 잡고 일본의 패망을 슬퍼하자 미친듯이 웃어대면서 그를 비웃었다고 한다.
2.4. 말년
만주국 해산 이후 살길 찾아 달아났지만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인도되어 하얼빈 전범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52년 사망했다.3. 매체에서
Hearts of Iron IV에서 만주국 장성으로 등장한다. 공방계획능력치가 괜찮게 배정되었고 직업장교 트레잇으로 진급 비용이 낮아 원수로 진급시켜 쓰기에 좋다.4. 주요경력
만주국 역대 궁내부 대신 | |||||||
초대 | → | 2대 | → | 만주국 멸망 | |||
심서린 | → |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1936년 5월 21일 ~ 1945년 8월 18일) |
만주국 역대 재정부 대신 | |||||||
만주국 건국 | → | 1대 | → | 2대 | |||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1932년 3월 9일 ~ 1936년 5월 21일) | → | 손기창 |
5. 참고문헌
-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소명출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한석정, 동아대학교 출판부.
- 만주국, 윤휘탁, 혜안.
- 만주국과 천주교회, 신의식, 교회사연구 49호, 한국교회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