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초대 민정부 대신 참의부 2대 의장''' | ||
이름 | 정체: 臧式毅 | |
한국식 독음: 장식의 | ||
영문: Zang Shiyi | ||
자 | 봉구(奉久) | |
출생 | 1885년 10월 | |
청나라 성경장군부 봉천부 승덕현 소가둔 사하포 앞 삼도강자촌 (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쑤자툰구 사허푸진 산다오강쯔촌) | ||
사망 | 1956년 11월 13일 (향년 71세) | |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전범수용소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만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 |
직업 | 정치가, 군인 | |
민정부대신 임기 | 총장 1932년 3월 9일 ~ 1934년 3월 1일 부장 1934년 3월 1일 ~ 1935년 5월 21일 | |
참의부의장 임기 | 2대 1935년 5월 21일 ~ 1945년 8월 18일 |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과 결탁하여 만주국 민정대신을 지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85년 10월 청나라 성경장군부 봉천부 승덕현(承德縣) 소가둔(蘇家屯) 사하포(沙河鋪) 앞 삼도강자촌(三道崗子村)[1]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적지는 산동성 청주부(靑州府) 제성현(諸城縣) 고밀현성(高密縣城) 남쪽 왕오장(王吳莊)[2]이다.1911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동삼성 병기공장 감독을 지냈다. 일찍이 손열신의 부하였으나 곧 장쭤린과 장쉐량의 부하가 되어 장씨 부자를 섬기게 되었다. 이후 독군서 참모장, 동삼성 보안총사령부 중장 참모장, 요녕성 정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1928년 황고둔 사건 발생 후 장쭤린의 죽음을 숨기고 사태 수습을 맡았으며 장쉐량을 불러와 봉천군벌의 수장 자리를 승계하게 했다. 봉천군벌의 실력자로 장쭤샹, 장쉐량과 함께 동삼성의 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1931년 초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요녕성 정부주석 자격으로 일본 측과 교섭하였다. 하야시 총영사는 장쭤샹에게 조선인들이 지주들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하는 조건으로 조선인들의 경작권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고 또한 짱스이에게도 조선인들의 논농사 권한을 줄 것을 요구했다. 7월에도 장쭤샹과 함께 하야시 총영사를 만나 중일양국의 공존공영 문제에 대한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는 난징의 외교부가 동북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일본의 술수였다. 1931년 8월 27일, 나카무라 사건의 발생으로 주 봉천 일본총영사 하야시 규지로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짱스이는 나카무라 사건의 존재에 대해 부인했다. 하야시 영사가 재차 경고하자 짱스이는 사람을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는 한편 주둔군 지휘관을 압송하여 철저히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참모장 영진과 함께 일본 측에 사과하고 손해배상 지불에 합의하였다.
2.2. 만주사변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자택에서 왕이철 등 휘하 군장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지만 장쉐량으로부터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온 상황이라 결국 저항을 포기하였고 9월 19일, 29연대가 봉천성을 점령하면서 관동군의 포로가 되어 3개월 동안 연금되었다. 하지만 초기 일본의 주목을 받았던 위안진카이가 장쉐량과 내통하며 성정부 건설을 통한 독립에 회피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 측은 짱스이를 기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짱스이를 석방하고 동삼성 정권을 조직할 것, 동삼성에 일본군을 주재시켜 국방을 위임하고 군사비를 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만주를 사실상 식민지로 두겠다는 무리한 요구였으나 짱스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이 내미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짱스이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아들에게 일본인들에게 굴복하지 말고 자결하라는 의미로 아편을 밥그릇에 숨겨 반입시켰으나 짱스이가 일본에 투항하자 절망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1931년 12월 16일, 짱스이를 주석 겸 성장으로 하는 봉천성 정부 위원회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관동군은 성명을 발표하여 봉천, 길림 두 성이 자립의 형태를 갖추어 구정권과 관계를 끊었으며 흑룡강성도 진용을 바꾸었으며 열하성, 내몽골도 호응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이왕 일본에 협력하게 된 짱스이는 장징후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와 함께 연성자치론을 주장하며 만주국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 건국최고위원회 중앙정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2월 16일, 장징후이, 마잔산, 탕위린,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과 함께 동북 행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에 앉았다. 2월 18일,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동북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3월 1일, 장징후이의 자택에서 만주국 건국을 선포했다. 봉천군벌 중에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만주국의 수령으로 추천받았으나 관동군은 선통제 옹립을 주장하며 짱스이안을 기각하였다. 짱스이도 줄곧 공화국 건설을 주장하였으나 일본군의 고집에 결국 선통제를 집정이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월 9일, 선통제가 취임한 후 민정총장에 임명되었으며 봉천파벌을 이끌며 장징후이, 마잔산, 시치아와 함께 만주국의 4대 요인으로 불렸다.
초대 민정부 대신으로 재임하면서 1932년 6월 훈령을 발표, 모든 지방 부서에 공동묘지, 도로, 위생, 전염병 예방, 초등학교 교과서, 종교, 교사, 사당 등 수십개 항목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어 사회교육 시설, 도서관, 박물관, 극장, 클럽, 여타 사회오락 시설, 식량보급 상태 등을 조사할 것을 지시하는 등 만주국 통치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민정부에 각 대도시와 소도시가 주기적으로 가구수를 보고하도록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매년 100개의 훈령을 하달해 지방관청을 감독하고 고과점수를 매겼다.
2.3. 말년
1934년 만주국이 제정으로 거듭나면서 민정총장에서 민정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1934년 10월, 동북4성이 10성으로 개편되면서 봉천성을 기반으로 하던 권력기반이 뿌리뽑혀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게 되었다. 1935년 정샤오쉬가 총리에서 사퇴하였을 때 강덕제로부터 새 총리후보로 추천받았으나 관동군은 장징후이를 새 총리 후보로 선정하였다. 짱스이는 참의부 의장으로 이동하였다.1945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일본과 만주국이 덩달아 패망하자 중신회의를 개최하여 유지회를 비밀리에 구성한 후 봉천성을 중심으로 소련군과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했으나 8월 30일,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측에 인도되었으며 1956년 무순 전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
3. 주요경력
만주국 역대 참의부 의장 | |||||||
초대 | → | 2대 | → | 만주국 멸망 | |||
장징후이 | → | 짱스이 (1935년 5월 21일 ~ 1945년 8월 18일) |
만주국 역대 민정부 대신 | |||||||
만주국 건국 | → | 1대 | → | 2대 | |||
짱스이 (1932년 3월 9일 ~ 1935년 5월 21일) | → | 여영환 |
4.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소명출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한석정, 동아대학교 출판부.
- 만주국, 윤휘탁, 혜안.
- 만주국과 천주교회, 신의식, 교회사연구 49호, 한국교회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