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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23:06:04

미토 고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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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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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 표시: 생전 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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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720년 11월 27일
724년
737년 8월 25일
(화력 서위일 불명)
요로 4년 10월 23일
진키 원년
덴표 9년 7월 25일
(고세노 도코타) 후지와라노 후히토 🎎후지와라노 미야코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737년 11월 3일
749년 5월 4일
760년 9월 20일
762년 2월 28일
덴표 9년 10월 7일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덴표호지 4년 8월 7일
덴표호지 6년 2월 1일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타치바나노 모로에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770년 10월 23일
785년 6월 14일
785년 10월 31일
788년 6월 21일
호키 원년 10월 1일
엔랴쿠 4년 5월 3일
엔랴쿠 4년 9월 24일
엔랴쿠 7년 5월 13일
🎎후지와라노 나가테 기노 모로히토 후지와라노 다네츠구 후지와라노 다비코
791년 1월
791년 1월
806년 6월
806년 6월
엔랴쿠 9년 12월
엔랴쿠 9년 12월
다이도 원년 6월
다이도 원년 6월
야마토노 오토츠구 하지노 마이모 후지와라노 요시츠구 아베노 고미나
819년 1월 18일
823년 6월 17일
823년 6월 17일
826년 9월 1일
고닌 9년 12월 19일
고닌 14년 5월 6일
고닌 14년 5월 6일
덴초 3년 7월 26일
후지와라노 소노히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후지와라노 모로아네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833년
833년
847년 11월 16일
848년 1월 28일
덴초 10년
덴초 10년
조와 14년 10월 5일
조와 14년 12월 19일
다치바나노 기요토모 다구치노 미치히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다치바나노 우지키미
850년 9월
854년 10월 28일
858년
867년 11월 9일
가쇼(嘉祥) 3년 8월
닌주 4년 10월 4일
덴난 2년
조간 9년 10월 10일
후지와라노 미츠코 미나모토노 도키와 미나모토노 기요히메 후지와라노 요시미
869년 4월
872년 10월 9일
877년 1월
877년 1월
조간 11년 3월
조간 14년 9월 4일
조간 19년 1월
조간 19년 1월
미나모토노 마코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후지와라노 나가라 후지와라노 오토하루
884년 3월 23일
884년 3월 23일
891년 2월 24일
895년 9월 20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표 3년 1월 13일
간표 7년 8월 28일
후지와라노 후사츠구 후지와라노 가즈코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미나모토노 토오루
897년 7월 19일
898년 1월 3일
900년 4월 15일
906년 6월 24일
간표 9년 6월 16일
간표 9년 12월 7일
쇼타이 3년 3월 14일
엔기 6년 5월 30일
미나모토노 요시아리 소시 여왕 후지와라노 다카후지 후지와라노 슈쿠시
907년
909년 4월 27일
913년 4월 27일
937년 11월
엔기 7년
엔기 9년 4월 5일
엔기 13년 3월 18일
조헤이 7년 10월
미야지노 렛시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미나모토노 히카루 후지와라노 미츠코
949년 9월 13일
949년 9월 13일
962년 11월 17일
967년
덴랴쿠 3년 8월 18일
덴랴쿠 3년 8월 18일
오와 2년 10월 18일
고호 4년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미나모토노 쇼시 후지와라노 기시 후지와라노 세이시
969년 12월 2일
970년 6월 26일
972년 12월 13일
978년 1월 1일
안나 2년 10월 20일
덴로쿠 원년 5월 20일
덴로쿠 3년 11월 5일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후지와라노 모로타다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후지와라노 고레타다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987년 3월
989년 8월 23일
992년 7월 18일
993년 6월 12일
간나 3년 2월
에이엔 3년 7월 20일
쇼랴쿠 3년 6월 16일
쇼랴쿠 4년 5월 20일
후지와라노 도키히메 후지와라노 요리타다 후지와라노 다메미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993년 8월 19일
995년 6월 25일
995년 6월 25일
1025년 9월 23일
쇼랴쿠 4년 7월 29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만주 2년 8월 29일
미나모토노 마사자네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후지와라노 기시
1029년 11월 25일
1073년 6월
1073년 6월
1075년 11월 16일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엔큐 5년 5월
엔큐 5년 5월
조호 2년 10월 6일
후지와라노 긴스에 후지와라노 요시노부 후지와라노 시시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1094년
1107년
1146년 11월 9일
(화력 서위일 불명)
가호 원년
가쇼(嘉承) 2년
규안 2년 10월 4일
후지와라노 요시나가 후지와라노 아키후사 후지와라노 사네스에 후지와라노 나가자네
1146년 11월 9일
1166년 9월 8일
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에이만 2년 8월 12일
닌난 3년 6월
닌난 3년 6월
🎎미나모토노 마사코 고노에 모토자네 다이라노 도키노부 후지와라노 유시
1177년 8월 28일
1190년 5월
1220년
1242년
지쇼 원년 8월 3일
겐큐 원년 4월
조큐 2년
닌지 3년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후지와라노 규시 다이라노 지카노리 미나모토노 미치무네
1617년 4월 14일
1628년 7월
1632년 3월 30일
1651년 7월 4일
겐나 3년 3월 9일
간에이 5년 7월
간에이 9년 2월 10일
게이안 4년 5월 1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고노츠보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1680년 6월 17일
1709년 3월 4일
1709년 10월 9일
1712년 12월 1일
엔호 8년 5월 21일
호에이 6년 1월 23일
호에이 6년 9월 7일
쇼토쿠 2년 11월 3일
도쿠가와 이에츠나 도쿠가와 츠나요시 도쿠가와 츠나시게 도쿠가와 이에노부
1716년 7월 1일
1752년 7월 20일
1761년 8월 24일
1786년 10월 13일
쇼토쿠 6년 5월 12일
호레키 2년 6월 10일
호레키 11년 7월 24일
덴메이 6년 9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츠구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하루
1841년 4월 8일
1848년 8월 7일
1853년 9월 23일
1858년 8월 29일
덴포 12년 2월 17일
가에이 원년 7월 9일
가에이 6년 8월 21일
안세이 5년 7월 21일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이에모토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1866년 8월 29일
1880년 7월 20일
1882년 8월 7일
1885년 7월 20일
게이오 2년 7월 20일
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도쿠가와 이에모치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이와쿠라 도모미
1891년 2월 18일
1898년 3월 18일
1899년 9월 26일
1900년 11월 16일
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1년 동월 동일
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산조 사네토미 와케노 기요마로 산조 사네츠무 도쿠가와 미츠쿠니
1901년 5월 16일
1901년 5월 16일
1903년 6월 27일
1904년 3월 17일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6년 동월 동일
메이지 37년 동월 동일
시마즈 나리아키라 모리 다카치카 도쿠가와 나리아키 고노에 다다히로
1908년 4월 2일
1908년 9월 9일
1915년 8월 18일
1917년 11월 17일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다이쇼 4년 동월 동일
다이쇼 6년 동월 동일
모리 모토나리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



水戸黄門(みと こうもん)
1628년 ~ 1701년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a67936c8-s.jpg
도쿠가와 미츠쿠니 초상.

1. 개요2. 미토 고몬 이야기의 내용3. 실제
3.1. 미토 고몬에 대한 역사 이야기
4. 미디어 믹스에 등장하는 미토 고몬
4.1. 드라마판 미토 고몬4.2. 기타

1. 개요

본명은 도쿠가와 미츠쿠니(德川光圀).[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며 초대 미토 번주(藩主) 요리후사(賴房)의 아들이니 당시 나라 안에서 무서울 것 없는 높으신 분이었다.

2. 미토 고몬 이야기의 내용

일본을 유랑하는 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미토 코몬이 충성스럽고 무예실력이 뛰어난 두 가신 사사키 스케사부로(통칭 스케상), 아츠미 카쿠노신(통칭 카쿠상)을 거느리고 일본 전국을 떠돌며 악을 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이야기다.

다소의 변형은 있지만, 매 시리즈/매 회의 기본적인 패턴은 동일하다.
미토 고몬이 미복 차림으로 천하를 주유하다가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접함. 이때 미토 고몬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미토 고몬은 가신들로부터 ご隠居(고인쿄)[2]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백성들도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 바람개비 야시치 등이 정보를 수집하여 사건의 진상을 캐 냄
→ 악당의 소굴에 고몬과 카쿠상, 스케상이 난입
→ 악당은 고몬을 알아보지 못하고 때거지로 덤비고 미토 고몬이 "스케상, 카쿠상. 혼쭐을 내주시지요!"가라 피카츄라고 지시를 내리면 카쿠상과 스케상이 악당 무리를 무력제압
→ 어느정도 싸우고 나서 미토 고몬이 "스케상, 카쿠상. 그만하면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스케상과 카쿠상이 "물럿거라!!" "물럿거라!"를 외치고
→ 카쿠상이 악당의 면전에 지니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가문(家紋)인 세잎 접시꽃(三葉葵)이 새겨진 인롱(印籠)[3]을 내보이며 "이 문장이 네놈들 눈에 보이지 않느냐!" 하며 신분을 드러냄. 이때 인롱을 클로즈업하며 장엄한 음악이 깔리고, 악당들은 문장만 봐도 새파랗게 질린다.
→ 카쿠상이 "여기 계신 분이 뉘신줄 아느냐! 황송하옵게도 선대 부쇼군, 미토 미츠쿠니 공이시다!"라고 외치며 정체를 밝힘
→ 스케상이 "네놈들! 부쇼군의 면전이다! 머리를 숙이지 못할까!"라고 외치면 악당들은 벌벌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일반적으로 미토 고몬이 악행을 꾸짖으며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만, 매우 드물게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칼을 들고 덤비는 악당도 있다. 그 경우는 스케상이나 카쿠상 등이 악당을 베어버린다.

이 패턴은 우리네 암행어사마패를 내보이며 탐관오리를 내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에도 시대박문수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다.

한국에 어사 박문수가 있다면 일본에 미토 고몬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권선징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일본 사극에서 오랫동안 우려먹어온 사골같은 존재. 한국암행어사 이야기나 중국포청천 이야기와 비슷한 위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소재다. 실제로 60~70년대에 일본 TBS의 드라마가 힛트하자 한국에서도 박문수를 모티브로 한 암행어사 드라마가 기획되었고, 이것이 MBC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방영하던 "암행어사"이다. 이 드라마는 배우 이정길을 그 당시 국민배우로 올려놓았다.

3. 실제

실제로 암행어사 짓을 하긴 했지만, 일화와 달리 전국 탐방을 하진 못했다. 애초에 미토 번의 번주였던 중임인 만큼, 현역 시절은 물론이고 은퇴하고 나서도 워낙 중요인물이다보니 멀리 가봤자 자신에게 배정된 미토(水戸, 오늘날의 이바라키현)까지가 전부였고,[4] 그 미토조차 한국으로 비유하면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나간 격이었다. 그 외 현들은 당연히 못가고 주로 부하들이나 감찰역으로 보냈다.

참고로 미토 번(藩)이라 하면 기이(紀伊, 오늘날 와카야마현), 오와리(尾張, 오늘날의 아이치현)와 함께 고산케(御三家)를 이루는 친번(親藩)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엄청 높으신 분이었다. 실제로 법적으로 쇼군 계승권까지 가진 가문이며, 미토 고몬또한 쇼군 계승권자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고산케 3가 중에선 서열 3위인데다가 이에야스부터가 '보좌역에 충실해라' 정도의 유언을 남긴 탓에 계승 서열이 밀려 이 가문에서 쇼군이 나올거라 예상한 인물은 없었으나, 의외로 제일 건실하게 버틴 가문도 미토 가였다. 정작 에도 막부가 종식될 때까지 고산케 중 쇼군을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서열 1위였던 오와리 도쿠가와 쪽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 세대도 남아가 끊긴적이 없었다고 하며, 오히려 남아 복이 넘쳐서 남아를 낳지 못한 다른 가문에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양해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상술했듯 본명은 도쿠가와 미츠쿠니이며, 미토 고몬은 일종의 관직명에 가깝다. '미토'는 미토 번주라는 의미고, 고몬(黃門)은 중납언(츄나곤: 中納言) 관직을 가진 사람을 중국식으로 부른 명칭으로 중국의 '황문시랑(黄門侍郎)'이라는 관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풀어쓰자면 '미토 번의 번주이자 츄나곤(水戸中納言)'을 지낸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미토 번 번주중 이런 '미토 고몬'이었던 인물은 미쓰쿠니 외에도 미쓰쿠니의 아버지이자 초대 미토 번주인 도쿠가와 요리후사부터 시작해서 도쿠가와 쓰나에다(3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6대), 도쿠가와 나리노부(8대), 도쿠가와 나리아키(9대)[5], 도쿠가와 요시아츠(10대) 등등 6명은 더 있었다. 즉 '미토 고몬'은 총 7명이 있는 셈. 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태합(타이코: 太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는 것처럼 미토 고몬이란 단어 역시 '도쿠가와 미츠쿠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한국으로 치면 '충무공'하면 흔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거나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예다.

부쇼군이라 칭해진 것은 실제로 그가 부쇼군이란 직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며 이는 미토 번주의 별칭이다. 미토 번은 에도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미토 번주는 에도에 상주하며 쇼군을 보좌해야 했다. 때문에 미토 번주는 막부 정계에서 위상이 대단했었고 그 때문에 부쇼군이란 별칭이 붙었다.

3.1. 미토 고몬에 대한 역사 이야기

4. 미디어 믹스에 등장하는 미토 고몬

주로 패러디 되는 요소는 2명의 요짐보(스케상&가쿠상)와 문장. 이 문장에 경우 매체에 따라 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나온다.

4.1. 드라마판 미토 고몬

미토 고몬(드라마)

4.2. 기타

파일:水戸光圀.jpg 파일:水戸黄門.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 圀는 四안에 方자가 들어간 모양으로 당나라 측천무후만든 글자다. 달리 쓰인 예는 거의 없다 한다. 미츠(光)는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서 딴 것으로 미츠쿠니가 7살 때 에도로 상경하자 하사받아 쓴 것이다.[2] 어르신, 일선에서 은퇴해서 조용히 살고 있는 노인을 칭하는 말이다.[3] 약 등을 넣고 다니는 휴대용 케이스. 미토 고몬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템이다.[4] 미토 번은 그 애매하게 높은 이름값탓에 수도인 에도에 상시 머물러야 해서 대리인을 통해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5]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친아버지다. 정치적으로는 번정개혁을 성공시킨 명군이자 막부 말 히토츠바시파를 주도하여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한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론 호색한으로도 유명해서 선대 번주였던 형의 정실부인의 시녀나 자기 며느리를 건드렸다는 괴담이 일본 전국에 떠돌 정도로 악명높았으며 오오쿠의 낭비를 비난하는 한편 오오쿠 여성들에게 성희롱적인 발언을 일삼았던 탓에 오오쿠 여성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아 이후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경쟁에 악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시노부 외에도 자식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그 덕분에 요시노부의 이복 형제들의 상당수는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번주직을 계승했는데, 그 중에는 히토츠바시와 함께 고산쿄의 일원이었던 시미즈가도 포함되어 있었다.[6] 아래쪽에서도 언급되는 미츠쿠니의 동복형 도쿠가와 요리시게의 후손이다. 쇼군가 및 다른 고산케가 혈통단절로 인해 다른 분가에서 양자를 들이는 사례가 굉장히 잦았던 것에 비해 미토 도쿠가와가는 요리시게의 친자식인 3대 번주 이래로 요리후사-요리시게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은 채 메이지 유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그 가계를 유지하고 있다.[7] 유키츠구의 부인 무사는 요리후사의 첫 유모였던 오카자키씨의 언니였는데, 요리후사가 5살이 되던 해 죽은 오카자키씨를 대신해 요리후사의 유모가 되었고 이때의 인연으로 유키츠구도 요리후사의 가신으로서 미토 번에서 봉직하게 되었다.[8] 요리후사 입장에서는 3남, 장남 요리시게와 미츠쿠니 사이에는 일찍 요절한 차남 카메마루를 포함해 5명의 이복남매가 있었다.[9] 다만 명목상으로는 차남취급이었지만 이후 쇼군을 대리하여 덴노를 알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다른 고산케의 지번이 약 3~5만석 전후 규모였던 것에 비해 교통의 요지였던 시코쿠 사누키 지방의 타카마츠번 12만석을 영지로 수여받는 등 실질적으로는 거의 장남에 준하는 후한 대우를 받았다.[10] 심지어 이 시기엔 이미 자신의 친아들이 멀쩡히 있었다. 즉 그 아이를 뒤로 두고 형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것.[11] 사실 아무리 후계자로 확정되었다곤 해도 미토 번주가 멀쩡히 있는 시점에서 후계자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긴 힘들었을테니 현실적으로 보자면 권력을 계승받고 완전히 안정시킨 2년후가 오히려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기도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이를 보면 하루아침에 나온 이야기도 아닐테니 실제로 비슷한 시점에 맹약을 나누긴 했고, 권력을 안정화시킨 뒤 그를 실천했다고 하면 야사와도 어느정도 말이 맞는다.[12] 생뚱맞게 왜 갑자기 명나라 인물이 나오나 싶겠지만, 당시 남명은 실시간으로 청나라에게 당하던 시점이었고, 주지유는 남명의 구원요청을 위한 사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온 것이었다. 다만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에 의해 전토가 통일된 지 40년도 채 안된 시기라서 내부 수습에 아직 집중해야할 시기라 지원을 보내지 못했고 조선은 병자호란 직후라, 서양 각국은 거리와 청나라의 위세탓에 쉽사리 도우려 할 수 없었고 결국 사절을 보낸 나라중 그 어느 곳도 지원을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 주지유는 남명의 미래가 끝났음을 느끼고 그대로 일본에 망명했다.[13] 특히 위에 TBS판이 대표작이다. 그리고 아래 주제곡도 대표적이다.[14] 보통은 악덕 상인이다.[15] 흔히 나오는 전형적인 아쿠다이칸[16] 원문 越後屋、おぬしも悪よのう / いえいえ、お代官様ほどでは...[17] 여행의 막바지에 모닥불 피워놓고 과거 이야기를 각자 할때 무겐이 이야기를한다. 대사만 들은 후우와 진은 설마하지만, 무겐이 당시를 회상하는 화면을 보면 100%[18] 다만, 상술했지만 원작인 미토 고몬에서도 매우 드물게 미토 고몬의 정체를 알고도 악당이 덤비는 경우도 있었다.[19] G1 스프링어의 일본명이 스프렁이다. 그런데 스프링어라는 캐릭터가 여러 작품에 등장했던 것도 아니고, G1 이후 십수년만에 나온 같은 이름의 캐릭터이다. 사실 신 시리즈에서 전작 오마쥬가 나온건 슈퍼 링크의 전전작 트랜스포머 카로봇부터다. 슈퍼 링크에는 트랜스포머 더 무비오마주가 많은데 스프렁도 그 중 하나인듯.[20] 마지막화에서 이에야스한테 이걸로 덜미가 잡혀서 가독을 못 물려받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