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학(國學, こくがく)은 에도 시대 중반인 17세기 말에 생겨난 불교나 유학과 같은 외래 종교와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찾으려는 학문이다. 이들은 일본 고유의 것으로 신토와 천황에 주목했고 이것이 발전해서 현대의 신토와 천황의 모습을 만들어내었다.[1]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고 주변 국가들을 폄하하여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2. 배경
일본의 중세 시대 가가쿠(歌學[2])의 형식적 규범주의와 에도 막부의 봉건체제의 유교적 합리주의에 대항한 가가쿠 혁신운동으로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당대 일본의 학문들 중 공자, 맹자 시대의 유교의 본질을 되찾고자 한 이토 진사이 등의 고의학파나, 고의학파에 대항해 공자 및 과거의 고문(주로 중국의)을 찾고 이를 중점으로 탐구하려는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중국의 문장이나 학문에 기준을 두는 것 자체를 비판하고 일본의 고문과 역사, 문화를 기준으로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임진왜란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고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쇄국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의 대외 정보를 얻는 통로는 조선통신사와 네덜란드의 상인들로 막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막부는 통치를 위해 충성을 강조하는 유학을 진흥하였고, 네덜란드(화란)에서 들어오는 학문(난학/蘭學)은 실용적인 분야로 국한하였다. 유학과 난학의 발달은 이에 대응하는 일본적인 것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고 일본 고전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3. 발전
에도시대 중기의 승려였던 게이추(契沖)는 학문적으로 도덕적 규범에 제약받지 않는 자연스런 인간상을 고전 속에서 탐구했다. 비정치적인 주정주의(主情主義)와 낭만주의를 본질로 하는 그의 학풍은 크게 볼 때 문학적 주정주의, 문헌학적 방법론, 비합리적 신도론을 기초로 삼았다. 미토 코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의뢰를 받아 '만엽집(萬葉集)'에 주석을 달은 해석본 '만엽대장기(萬葉代匠記)'를 저술하여 기존의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을 비판하고 사료에 근거한 고증적 해석방법을 제시한 것과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도입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후 국학은 일본인의 옛 정신세계와 사유체계, 즉 고도(古道)를 찾아내려는 고도학파와 실증과 문헌에 근거해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의 문헌고증을 시도한 실증학파로 나뉜다. 두 학파 사이의 차이라면 전자는 일본의 고대정산을 규명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끝내 국수주의와 황국사관에 빠지게 된 반면, 후자는 실증을 우선시해 고도학파에서 신성시한 고사기의 진본 여부를 의심하거나 동국통감의 영향으로 일본서기의 기록을 비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는 것 정도가 있다.[3] 다만 두 학파가 칼로 무자르듯 나뉘는건 아니라서,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두 경향성 모두 중시했다.국학이 발전하는 기초를 다진 이는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이다. 신관 출신으로 에도에서 활동하면서 유학에 대항해서 국학을 적극적으로 막부 체제에 도입했다. 특히 신토에 중심을 두면서 복고신토(復古神道)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가다노는 만엽집, 일본서기 등 고전·고어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고유의 정신을 규명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말의 뜻을 해석하는 것을 국학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중시하면서도 문학 자체에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신토를 전면에 부상시켜 국학의 도의 학문으로서 규범성을 부여했다. 즉 신토가 고전의 실증적 연구로부터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신토 관념이 선행하고 이를 통해 고전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는 만엽고(万葉考) 등 만엽집 연구를 통해 고대 정신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이를 통해 고도론을 전개하였다. 그도 가다노와 같이 몰락한 신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정치적·사회적 지향성이 강했지만 복고신토에는 부정적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시적·문학적 성격이 농후했기 때문에 신도를 불교나 유교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일본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천지의 질서에 따른 순수한 단순함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국학의 학문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을 통일시키는 데 기여했다.
가모노 마부치의 문하에 있었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스승의 도교 지향적 해석을 거부하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신세칠대(神世七代)의 창조적인 힘인 '무스비'(産靈 : 만물을 창조하고 성장시키는 신비로운 힘)라는 개념을 재발견하고 중시했다. 무스비는 근대 신도의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지녔기 때문에 고사기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고 이는 근대에 신토가 중흥할 적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고사기 연구를 통해 게이추의 고어 연구를 기반으로 가모노의 만엽집 연구를 계승하면서 복고주의적 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그의 연구는 고전주석·고도론·문학론·어학 등 다방면에 걸쳤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고사기전(古事記傳)과 같은 저술에서 유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일본정신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또 겐지모노가타리를 연구하여 그 본질이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もののあわれ:적막하고 쓸쓸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동)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학을 도덕적 해석의 틀에서 해방시켰다.[4][5]
자칭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제자를 자처한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는 국학에서도 신토에 중심을 두고 연구했으며 복고신토와 황국 우월론을 주장했다. 초기에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제자를 자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유교와 불교의 교리를 절충한 신도를 비판했지만, 모토오리 학파의 실증주의에서 벗어나 신비주의로 흘러들어갔다. 모토오리가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진정한 일본 정신을 추구했다면 그는 사회적·정치적 행동의 기준이 되는 원칙을 신도 신학체계에서 찾으려 했다. 이는 신과 세계, 영혼(사후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영혼의 구제 등)에 관한 것을 연구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유불선 삼교에 난학, 기독교 등 다양한 교리를 연구분석하여 팔가학(八家の学)이라고도 불렸다. 한편 신대문자가 실존했다는 주장을 집대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쓰타네의 학설은 미토학과 함께 에도 막부 말기 존왕양이 운동의 지주가 되었다. 그의 황국 우월론은 팔가학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방식의 학문을 융합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주장에 비해 현격히 달랐다. 또한 아쓰타네는 학자와 지식인뿐 아니라 서민 대중도 겨냥해 국학 사상을 크게 보급했다. 서민들이 그의 학설을 받아들였던 것은 그의 주장이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을 후대 민속학자들은 높이 평했다. 아쓰타네의 복고 신토는 히라타 신토라고 불렸으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막부 붕괴 이후 메이지 유신기에 히라타 신도가들은 큰 영향력을 가졌지만, 신토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국가신토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히라타 신토는 배제되어 영향력을 잃어갔다.
[1]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저서 "어융개언"에서 진구 황후의 행적을 긍정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화회담 중 명나라 국서를 찢었다는 이야기를 최초로 창작하였다.[2] 雅楽가 아니다.[3] 편견과는 달리 모든 국학자들이 일본제국시대마냥 기기에 대한 절대적인 맹종을 외친건 아니다. 심지어 일본제국 초기까지만 해도 기기를 비판하는 흐름이 대세였고, 그 모토오리 노리나가조차 기기 기록에 대한 맹종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4] 도덕적 해석을 씌우고 보면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는 그저 허구한날 이여자 저여자 건드리며 심지어 패륜까지 저지르는 경악스런 인간말종이지만 도덕적 해석을 벗기고 보면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남녀 가릴거 없이 주변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멋지게 풍류를 즐기는 멋쟁이다.[5] 사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의 소설은 권선징악이 필수요소급이었기에 주인공은 선하고 착하며 악인은 철저히 악하게 나온다. 여기다가 조선에서는 대부분 해피엔딩이 첨가되는데 만일 베드엔딩으로 끝나면 소설 속 인물이 원한을 가진다는 미신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래서 금오신화나 황새결송 등 일부를 빼면 해피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