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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2:44:43

오규 소라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Ogyuh_Sorai.jpg
[ruby(荻,ruby=おぎ)][ruby(生,ruby=ふ)][ruby(徂,ruby=ツ)][ruby(徠,ruby=ライ)]
1666년 3월 21일 ~ 1728년 2월 28일 (향년 61세)
1. 개요2. 생애3. 사상4. 한국과의 관계

1. 개요

"사람 됨됨이가 좋은 사람도 학문을 하게 되어 그 됨됨이가 나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모두 주자(朱子)류의 이학(理學)의 폐단 때문이다. 『통감강목(通鑑綱目)』[1]을 보게 되면,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됨됨이가 나쁘게 된다."
ㅡ『답문서(答問書)』[2] 상(上)

"송나라 유학자들의 경학(經學)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 사악함과 바름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고, 모든 사물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해서, 결국에는 자만심만 높아지고 걸핏하면 화를 내곤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만다."
ㅡ『답문서』 하(下)[3]
일본 에도 막부 시대의 유학자, 사상가. 본명은 오규 나베마츠([ruby(荻,ruby=おぎ)][ruby(生,ruby=ふ)][ruby(雙,ruby=なべ)][ruby(松,ruby=まつ)])지만 실명은 모노노베노아소미 시게노리([ruby(物,ruby=ものノ)][ruby(部,ruby=べ)][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茂,ruby=しげ)][ruby(卿,ruby=のり)])고[4] 는 시케이(茂卿)고[5] 호가 소라이다. 호로 더 많이 불린다.

주자학파(성리학파)로 대표되는 신유학 계열 엄격주의 도덕이나 오묘하고 복잡다단한 형이상학을 매우 혐오하여, 공자와 고대 경전, 성군들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반주자학적 해석, 실용적인 현실정치적 해석을 추구하였다.

그는 주자왕양명은 물론 맹자, 순자까지도 공자와 옛 성군들의 상대적인 해석자로 여겨 맹종하지 않는[6] 한편, 굳이 극력 배격하는 바도 없어서, 맹자 등의 말을 필요에 따라 즐겨 인용하거나, 불교 인사 등과도 허물 없이 교류하고 좋은 말이 있으면 취하곤 하였다. 주자학파들의 말 역시 100%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기본 입장은 오직 공자와 유교 6경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었으며, 이는 그의 파격적 해석과 교우관계와는 긴장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실용성과 구체성을 중시한 소라이는,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이것은 좋고, 저것도 좋은데, 그것은 안 좋다' 식으로 기본적 태도가 개방적이면서도 일단 결단을 내리면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었고, 추상적으로 질질 끄는 담론이 아닌 현실에 즉각 밀고 붙일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원했는데, 그런 그가 낙점한 기준이 공자와 6경이었던 것이다.

훗날 이를 두고 곰곰이 생각하던 일본 국학파의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은 그렇다면 굳이 기준이 공자일 필요가 있겠냐며 탈주자학을 넘어 아예 탈유교 사상 조류를 밀고 나가게 된다.

2. 생애

1666년 3월 21일 에도에서 태어났다. 하야시 슈우사이와 하야시 호코에게 학문을 배웠지만 아버지가 그만 쇼군이 되기 직전의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에도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아버지가 에도에서 추방되자 할 수 없이 가족들은 에도를 떠나 카즈사국(오늘날의 치바현 중남부)의 혼노 마을(오늘날의 모바라시)로 이주해야 했다. 이곳에서 오규는 불경과 유교경전, 일본 고전들을 탐독했고 스스로도 이곳에서 자신의 학문적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692년, 아버지가 사면을 받고 에도 추방령이 풀리자 다시 에도로 돌아왔다. 조죠지(増上寺) 근처에 학당을 열었지만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가난한 생활을 했고 근처 두부가게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먹을 것을 주어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던 중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그를 발탁해 그의 측근으로 정치 고문 겸 야나기사와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를 통해 쇼군 츠나요시와도 만나게 되었고 츠나요시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츠나요시가 죽고 야나기사와도 실각하면서 그도 중앙 정계에서 멀어졌고 야나기사와 저택을 나와서 니혼바시 가야바쵸에 거처와 학당을 열었다. 이때에는 많은 제자들이 와서 소라이파라는 학파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노년인 1722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다시 그를 쇼군의 정치자문으로 삼았고 오규는 요시무네에게 추방령이 가혹하니 다른 관대한 형벌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해 받아들여졌다. 1728년 6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3. 사상

오규 사상의 특징은 반주자학으로 볼 수 있다. 현실론적 성격이 강했던 오규가 보기에는 주자학은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학설에 불과해보였던 것. 오규는 특히 주자학의 도덕, 윤리에 입각한 정치를 강하게 반대했고 정치는 도덕, 윤리와 분리되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런 오규의 사상이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추신구라 사건이다. 아코호번의 낭인 46인의 기라가 참살에 대해서 막부내에서는 이들의 처분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규의 스승인 하야시 호코를 비롯해 무로 큐소, 아사미 케이사이 등은 주자학적인 관점과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 정서를 감안해서 주군에 충성을 다한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며 관대한 처분을 주장했다.

그러나 오규는 막부에 글을 올려서[7] 이 사건을 충성과 의리를 다했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으면 천하의 법도는 서지 않게 된다. 이들이 법에서 금지하는 사적 복수를 한 만큼 그 죄를 물어 처형시켜야 하지만, 그것이 충의에서 비롯된 일이니 명예롭게 사형이 아니라 할복을 명하는 것이 맞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아코호번 낭인들의 처분을 고심하던 쇼군 츠나요시는 오규의 주장에 따라 할복을 명령하게 된다.

세간에선 오규의 어려웠던 젊은 시절과 아코호번 무사들을 할복시킨 일을 바탕으로 "소라이 두부"라는 만담이 에도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오규가 젊은 시절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두부가게에서 돈도 내지 않고 두부를 훔쳐먹다가 두부장수에게 걸렸지만, 두부장수는 그런 오규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후 겐로쿠 화재로 오규를 도와주었던 두부장수가 가게를 잃고 어려운 처지가 되자 오규가 두부장수를 불러서 돈과 새 가게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두부장수는 오규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아코호번 낭인들을 할복하게 한 것 때문에 오규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오규는 "두부장수는 내가 두부를 훔쳐먹은 걸 관가에 넘기지 않고 출세 후에 갚으라며 정으로 내가 도둑이 되는 걸 막아주어 오늘날 학자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무사들에게 할복하라고 한 것은 학자로서 나도 최대한의 정을 그들에게 베푼 것이다. 그것은 두부장수가 내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법의 도리를 말한뒤 "무사가 화려하게 피어난 이상 아름답게 지게 해주는 것이 정이다. 무사의 큰 칼은 적을 향해 쓰는 것이고 작은 칼은 자신을 위해 있는 것[8]"이라면서 무사의 도리를 설명하자 두부장수가 납득하면서 오규의 선의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 두부장수가 여러모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오규 소라이를 일본의 마키아벨리로 규정했다. 고대 중세의 정치가 정치와 종교, 도덕, 윤리가 결합된 형태였다면 근대는 이것이 분리되는데 니콜로 마키아벨리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면서 정치의 분리를 강조한 것처럼 오규도 주자를 비판하면서 정치 분리를 강조한 것이 동일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4. 한국과의 관계

현실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태도를 견지한 오규의 사상은 소라이학으로 불리며 조선에까지 전파되었는데 오규의 대표저서인 "논어징"은 1763년, 일본 통신사로 간 조엄이 가지고 와서 전래되었고 아예 서기 원중엄은 "오규 소라이 문집"을 가지고 들어왔다.

다산 정약용은 오규의 제자인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소라이학을 접했다. 정약용은 처음에는 소라이학을 괴이한 논설로 생각했지만 소라이학을 깊이 탐독한 후 오규의 문체가 매우 찬란하다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논어 해설서인 "논어고금주"에 오규의 논어해석의 많은 부분을 수용했다. 정약용은 오규를 평가하면서 이제 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조선을 훨씬 초월했으니 심히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오규가 소개되었지만 그의 저서는 나오지 않다가 2011년 1월에 오규의 대표적 저서인 "논어징"이 번역 발간되었다.


[1] 북송사마광 등이 지은 역사서 『자치통감』을 남송의 주자와 그 학파가 공자의 『춘추』를 본받아 도덕 사관에 입각하여 편집한 책.[2] 오늘날 일본 야마가타 현 해안 지방에 해당하는, 에도 시대 쇼나이(庄内) 번의 가로(家老)였던 미즈노 겐로(水野元朗)가 제기한 질문에 소라이가 답한 글을 모은 상, 중, 하로 된 책. 소라이가 질문 서한 자체에 빨간 먹으로 답해 돌려준 것이 남아있는데, 이를 포함해 가리키기도 함.[3] 이상 두 인용문은 마루야마 마사오 저, 김석근 역, 『일본정치사상사연구』, 서울: 통나무, 1995, pp.226-227에서 재인용. 단, 한자 병기를 가감하고 일부 표기 방식을 다듬어 인용함.[4] 일본에서는 우지를 쓴 이름이 실명이다.[5] 이름과 자가 한자가 같으나 이름은 훈독하고 자는 음독한다.[6] 특히 그는 성선설, 성악설 등 인간본성론을 맹자, 순자 등이 당대 논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임기응변적으로 내놓은 것으로 보아 절대적 진리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그에 따르면 그런 보편 성론들은 결국 주자학 등의 획일적 교육방침을 낳아 해롭기도 한 것이다. 쌀은 쌀이고 보리면 보리인 것이며 각자 특수한 성질에 맞게 길러 각 역할을 다하게 하면 되는 것인데, 보리를 굳이 쌀로 만들려고 어거지를 부리다가 망치고 세상사람들 보리밥도 못 먹게 만드는 어리석은 처사란 것이었다.[7] 오규가 막부에 올린 글들을 묶은 것이 소라이 의률서(徂徠擬律書)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가 의심되고 있기도 하다.[8] 무사들은 항상 길이가 다른 칼 두 자루를 차고 다니는데, 그 가운데 장도는 적을 벨 용기의 상징, 단도는 스스로 할복할 각오의 상징이며, 이 두 가지는 무사의 마음가짐이고 명예로움이라는 것. ... ...다만 실상을 까보면 그냥 둘 다 억척같이 적이나 쑤시자고 있는 것이지만 대충 넘어가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