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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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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에 대한 내용은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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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
2.1. 선정 기준2.2. 업무2.3. 암행어사에 대한 오해2.4. 극한 직업인 암행어사
3. 암행어사 역임자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1. 개요

암행어사 출두요(출도야)!
암행어사{[1], Amhaeng-eosa, Royal Secret Agent(왕실 비밀 요원), Royal Agent(왕실 요원)[2] 혹은 black action soldier[3] Secret royal inspector. (왕실 직속 비밀 감찰관)[4][5]조선의 관직으로, 민심 시찰을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부패하거나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고을 수령이나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는 임무를 맡은 관직이다. 현대로 치면 대한민국 감사원(어사대와 비슷)에 있는 공직감찰본부, 그 중에서도 기동감찰을 맡는 특별조사국이나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예하 공직기강비서관과 반부패비서관이 지휘하는 특별감찰반 그리고 국무총리 보좌기관인 국무조정실의 공직복무관리관이 운영하는 공직기강조사팀 등이 있다.[6]

'암행'(暗行)이라는 말 그대로 정규 관직이 아니다. 원래 어사라는 관직 자체는 존재하지만 암행어사는 임시 관직이며, 조선에서 모델로 삼은 중국(명나라)의 제도에도 일반적인 어사는 있으나 암행어사는 없었다. 대신 이쪽은 훨씬 악질적인 동창, 서창 등의 비밀 감찰 기구가 존재했지만. 명나라보다 1,000년이나 전에 있었던 수나라에서는 수문제 시절에 암행어사 비슷한 비밀감찰반을 운용한 적이 있다. 수양제가 집권한 뒤로 비밀감찰반을 폐지했다.[7][8]

2. 특징

2.1. 선정 기준

일반적으로 파견하는 어사는 지방에 변고가 있을 때 왕명으로 보내기 때문에 전부 알려지지만, 암행어사는 모두 비밀에 부쳐져서 은밀하게 시찰하기 때문에 며느리도 모른다. 당연히 아무나 뽑히는 게 아니고, 대개 당하관에 젊은 시종신(侍從臣)[9]들 중 대체로 왕이 평소에 눈여겨 보고 있던 충직한 신하들이 암행어사로 발탁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꼭 법적으로 정해진건 아니라서 나이가 꽤 있는 신하들이 가기도 하고 상황마다 다 다르게 적용되었다. 대체로 적당한 나이대의 시종신들이 갔다고 이해하면 된다.

암행어사라는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성종 10년이다.[10] 하지만 워낙 반발이 심해서 주로 시행되지는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틀이 잡히고 파견이 잦아지는 것은 인조 시기부터다.

2.2. 업무

암행어사는 왕이 직접 임명하며, 임명시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나무 상자에 담아서 하사한다.등 여러가지 도구가 담겨있다. 이 상자에 담겨진 물건을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파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봉서》를 아무데서나 뜯었다가 적발되어도 파직되는데, 암행이라는 철칙을 어겼다는 사유다.

본디 암행어사란, 일본의 닌자와 똑같은 특징의 직업이라서 둘 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수행하는 방자 등 꼭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해당 암행어사는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인을 파견하면 대리인에게 자신이 암행어사인 것을 알린 사유로 파직당한다.

보통 암행어사는 과거에서 탈락한 선비나 장사꾼 등으로 위장하며 특히 방자가 많을 경우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그 방자들은 짐꾼으로 위장한다.
파일:/image/020/2005/12/19/200512190124.jpg
영화 〈춘향뎐〉 스틸컷
암행어사의 상징하면 마패(馬牌)인데, 마패는 길 중간 중간에 있는 에서 을 빌려서 탈 수 있다는 증표이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에 따라서 역에서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달라진다. 1마리~10마리가 새겨져 있었으며[13] 암행어사가 출도할 때에도 증표로 사용했다. 또한 병력으로 쓰인 역졸도 역의 관리인들인지라[14] 역과 밀접한 관계다.

암행어사는 지방 관리가 부패해서 백성들이 도탄을 겪고 있다고 판단되면 '출도'(출두)를 통해 정체를 밝히고 관리를 왕명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보통 암행어사하면 흔히 생각하는 게 출도인데, 왠지 보통 출도할 때는 마패를 번쩍 들고 "암행어사 출도야!""암행어사 출도요!" 를 외치고 육모방망이를 장비한 역졸들이 관아로 몰려들어 관아 휘하의 관졸들과 이방, 사또 등을 포박하고 암행어사는 윗자리에 자리를 잡고 재판을 하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오후에 일제히 길을 떠나 그대로 황혼에 순안현[15] 관아 문 앞에 도달했다. 본관 수령 이문용은 마침 산사로 놀러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관속들은 그를 마중하려고 모두 관문 밖에 모여 있었다. 역졸들이 빠른 소리로 암행어사 출도를 한번 외치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놀라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지듯 했다.(중략) 암행어사의 위엄과 서슬은 과연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참 있자 차차 모여들더니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펴며 책상에 촛불을 밝혀 점차 위엄과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5월 13일자.[16]
물론 암행어사가 비리만 잡는 관직은 아니고, 애초에 완벽한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일단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 죄질에 따라서 관인을 빼앗고 봉고[17]한 다음에, 임시로 지역의 형벌을 심리하고 백성들 민원도 좀 들었다. 임무가 완전히 끝나면 수령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민정과 효자, 열녀 등에 대한 미담도 적어서 효자문이나 열녀문이 건립되는 계기도 되었다. 봉고당한 수령은 보통 관할 감영에 끌려가 수감 뒤 왕명을 기다린다.
(전략) "나는 해주에 사는 사람으로 묏자리 송사를 벌이다 자산에 귀양 갔는데, 다행히 용서는 받았지만 돌아갈 길의 양식을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함경도로 들어가 잘 아는 수령에게 구걸할 계획이며, 마침 붓과 먹을 얻었으므로 그것을 팔아서 여행 밑천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한편으로는 믿어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의심도 하였다. 기생들 여럿이 앞에 앉아 있다가 쌍륙을 놀기에 내가 말을 놓아 주었다. 기생 하나가 살짝 웃으며 말하였다. "손님 손놀림이 꽤나 익숙하고 말씀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니, 결코 곤궁하여 구걸하러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후략)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14일자.
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에 업무 조사가 끝났으므로 공개 행차를 하며 성천으로 향했다. 밤에 유선관에 들어가 묵었다. 본관 수령은 서희순(徐熹淳)이 새로 부임했다. 기생들과 도장 관리를 맡은 자들이 서로들 가만가만 하는 말이 "어사또의 용모가 접때 구걸하러 관아에 들어왔던 길손과 흡사하다"라고 하여 웃음이 나왔다. 이날 50리를 갔다.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6월 19일자.
춘향전이나 박문수 설화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암행어사들은 신분을 감추고 정보가 많이 오가는 기생집이나 주막 등에서 물정을 알아보곤 했는데, 근본이 과거 급제자들이다보니 평민이나 천민으로 행세하면 너무 어색해서 들킬 위험이 컸으므로 적당히 몰락 양반 정도로 꾸미고 다녔다.[18]

2.3. 암행어사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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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tvN 렛츠고 시간탐험대라는 예능에서 "조선 시대 암행어사의 생존율이 30% 미만"이라는 내용을 방영했는데, 이는 역사적 기록이나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소설이다. 산술적으로 생각해봐도 만약 암행어사의 생존률이 정말 30% 미만이었다면,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존 모델인 성이성은 암행어사를 세 번 지냈는데 이는 최대 2.7%의 극악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전투종족이라는 말이 된다.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19]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했다.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 4월 9일 병신 4번째 기사 1763년 건륭(乾隆) 28년
또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이 태인에 이르러서 죽었다고 하니, 규례대로 담군을 지급하고, 모든 일도 각별하게 거행하도록 각 해당 도신에게 일체로 엄히 신칙하고 분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1217책 (탈초본 68책) 영조 39년 4월 9일 병신 18/28 기사 1763년 건륭(乾隆) 28년
평안 감사 김이교(金履喬)가 청북[20] 암행어사 임준상(任俊常)이 강계부(江界府)에 이르러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죽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지금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놀라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겠다. 평소 그 사람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명하기를 기다려 발탁해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혹하고도 참혹하다. 소중하기로 말하면 이목(耳目)의 구실을 맡겼고, 공로로 말하면 사신이 들판과 늪 지대를 알리는 것보다 더했는데, 그 죽음 또한 국사 때문이었다. 별도로 돌보아주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고 청북 어사 임준상을 특별히 동부승지로 증직하고 널을 싣고 돌아오는 것과 장사를 치르는 절차에 대하여 각도로 하여금 특별히 돌보아 주게 하라.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있으면, 나이가 성년(成年)이 되지 않았더라도 복을 벗기를 기다려 채용하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했다.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6월 26일 무진 1번째 기사 1822년 도광(道光) 2년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가, ‘우도 어사(右道御史) 조병로(趙秉老)가 죽었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평소에 쓸 만한 인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복명한 뒤에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이런 소식이 올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이다. 귀와 눈 같은 중요한 직책에서 3년 동안 애써 수고했으며 국가에 봉직하다가 죽었으니, 조정(朝廷)에서 우휼지전(優恤之典)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고 영남우도 암행어사(故嶺南右道暗行御史) 조병로에게 특별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는 동시에, 원래의 치부(致賻) 외에 후하게 더 지급하라. 반구(返柩)와 귀장(歸葬) 등의 절차는 특별히 해도에 신칙하여 규례를 벗어나서 각별히 비호하며, 그의 아들은 나이에 구애 받지 말고 상을 마친 뒤에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했다.
고종실록》 23권, 고종 23년 5월 17일 기유 1번째 기사 1886년 조선 개국(開國) 495년

실제로 348년간 총 613회의 암행어사가 파견되었으나 그 중 실제로 사망한 암행어사의 기록은 단 3건에 불과하며, 암행어사의 제도 운영상 극히 일부분이었고 희귀한 사례였기 때문에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 심지어 사초에 실리는 데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지방 수령이 어사의 비보를 듣고 공연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즉각적으로 조정에 보고를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역시 동시대 기준으로는 매우 정교한 관료제 국가이기도[21] 했으며, 신하들 역시 "국가 인재의 손실이 막심하니 암행어사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참소가 아닌, "어사를 보낸 지 오래되었으니 보낼 때가 되었다"고 주청하는 등 '어사는 정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 외의 세간에 퍼진 오해들은 다음과 같다.

2.4. 극한 직업인 암행어사


오히려 암행어사들은 무사히 임무를 완료하고 난 뒤에, 정치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암행어사 시절 파면한 서용보에게, 추사 김정희는 김우명에게 미움을 사 훗날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고종조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이건창[32]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하고 여러 활동을 했는데, 애먼 선비를 장살했다는 까닭으로 결국 평안도벽동에서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추사나 다산처럼 벼슬길 포기하는 루트를 타지는 않았다.[33] 암행어사와 수령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면 어사가 깨갱이 된 경우도 많았다.[34]

다만 저런 근거없는 낭설이나, 사망 사례들, 정치 보복 사례 등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일단 암행어사가 엄청나게 고생스러운 보직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를테면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 되는데, 너무 자주 쓴다, 너무 안 쓴다, 너무 악필이다, 문맥에 안 맞는다 등등 갖은 이유로 징계를 받기도 했으며,[35] 활동비는 심각하게 낮아서 사실상 그 돈으로는 활동할 수가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식량 등을 조달하는 것은 또 뇌물로 봤기 때문에, 그 상황을 견디다 못해 부패한 지방관리와 오히려 결탁해버린 사례도 있었다.

좀 심한 경우는 인근 고을에 암행어사가 나타나면 주변 고을 수령이 미리 알아채고 성문을 닫고 농성하거나[36], 반대로 아예 관아를 비워버리거나, 군사를 풀어 어사를 잡아다가 협박하는 경우나 어사출두할 때 튀어나오는 병사들은 평소에는 역(驛)에서 일하는 역졸이나 다른 관청의 병사들인데, 여기서 병력차출하면 인근 고을 수령들의 귀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응할 시간을 주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춘향전》의 예를 들자면, 변학도가 사또로 있는 지방의 인근 지역인 익산 현감은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로 대응할 시간을 엄청 벌어놓은 셈이다.
(전략)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말과 마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다가왔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또 가짜 어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37]
이 지경에 이르러 재앙의 징조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할 따름이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자빠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나는 마패를 들어 다시 가슴 속에 넣은 뒤 밑으로 내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했다.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일을 하는 사람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을 해 가자." 이어서 먼저 자리를 떠서 고개를 넘어갔다.(후략)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22일자.
위 기록처럼 진짜 암행어사가 잠복한 포졸에게 가짜 암행어사로 오해받아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고, 심지어 전라우도 무안 현감으로 부임한 성수묵이라는 관리는 주막에서 괴한들에게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2년 전 성수묵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왔을 시절 곤장을 쳐서 죽인 부패한 아전들의 자식들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38]

게다가 가짜 어사로 오인받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낮선 사람이 나타나 고을의 사정이나 수령의 행적 등을 물으면 대번에 가짜 어사인지 진짜 어사인지 관심거리가 되곤 했다. 심지어 엄한 심마니가 가짜 어사로 오인받는 소동도 일어났다. 가짜 어사는 왕명을 위조한 것이니,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심신장애를 인정받을 수 있는 희귀한 경우[39]가 아닌 이상 당연히 사형당했다.

이렇게 보기와는 달리 애달픈 직책이다 보니, 암행어사에 임명되자 "제가 전하에게 뭐 잘못한게 있길래 저한테 이러십니까?"라고 끄적거려 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 뒤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 33년(1896년)에 나이 74세의 정2품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암행어사의 마지막 기록이다.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99년 윤현섭을 충청남도 어사에 임명했다는 봉서가 존재한다. 봉서가 진품이라면 실질적으로는 윤현섭이 마지막 어사인 셈이다.

이 시기는 고종조차도 어사에 대해서 한탄했을 정도로, 어사 제도가 심하게 타락했던 시기였다. 겉으로는 진짜 선량한 암행어사인 척 하면서 실상은 관가랑 한통속인 질 나쁜 쓰레기들도 몇년 전부터 꽤 있었으며, 한 번은 단속을 하러 갔는데 오히려 접대를 받고 부패한 관리들과 결탁한 뒤 똑같이 물든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수백년동안 조선의 버팀목이 되어 준 어사 제도도 결국 그 기능을 다한 것이다.

3. 암행어사 역임자

4. 대중매체에서

창작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정의로운 존재로 묘사될 때가 많다. 이는 군/현 거주민 입장에서 수령, 아전 같이 자주 접하다 보니 단점이 더 잘보이는 이보다는 환상적인 존재인 암행어사를 마치 신이 보낸 사자인것 처럼 여기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1981년에 배우 이정길이 나온 MBC 드라마 <암행어사>가 유명했다. 이 작품은 유길촌과 김종학 PD 등이 연출을 맡고 유열 등이 각본을 썼는데, 여기서 호위 무사로 상도가 나왔는데,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였다. 만화 신암행어사에서 나온 산도는 바로 이 상도를 변형한 것이다.[44]

앞서 말한 암행어사가 온다니까 사또들이 대비하는 설정을 비틀어서, 1971년에 진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최무룡이 주연한 <마패없는 어사>라는 작품도 나왔다. 암행어사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암행어사가 아닌 최무룡이 전염병으로 가족이 몰살돼 도적질을 하는 남자를 구해서 그를 하인으로 삼아 데리고 어느 탐관오리 고을에 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행색을 보고 어사 일행인 줄 알고 한바탕 촌극을 벌인다. 나중에 어사가 아닌 걸로 밝혀져서 곤욕을 치르[45]…다가 알고 보니 폐서인된 왕자인데, 이제 사면 복권되어서 한양으로 소환된다는 이야기.[46]

1992년 KBS2에서 방영한 <비가비>라는 사극이 있는데, 극본은 지상학과 영상작가모임 '윤회'가, 연출은 김재형과 박수동 PD가 공동으로 각각 맡았다. 암행어사가 마패와 노잣돈을 도둑맞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방영 기간 : 1992년 11월 13일 ~ 1993년 4월 23일) 위에 언급대로 마패를 잃어버리면 바로 파직이지만, 드라마 진행상 어사는 파직되지 않고, 일단 노잣돈이 없어서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밭일을 하다가 임시 신분증을 얻어 활동한다. 마패를 훔친 도둑과 그 일당들은 어사 행세를 하면서 어사 대신 탐관오리와 나쁜 양반들을 혼줄을 내주는데, 그 뒤 마지막회에 진짜 어사 일행과 마주쳐서 잡혔다. 그래도 마패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기에 방면되었다는[47] 훈훈한 마무리로 끝난다. 극중 시대적 배경이 홍경래의 난이 있은 뒤였는데 이 시기쯤이면 조선의 망조가 슬슬 보이던 때다. 암행어사 파견 정도가 그다지 해결책이 되지 못하던 시기.

1999년 KBS2에서 배우 안재모가 박문수 역을 했던 <어사출두>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연출은 이재우와 양기선 PD가 맡았으며 극본은 초기에 코미디 전문 작가 고혜정이 맡았다. 정흥채안정훈이 어사를 돕는 충직한 방자로 나왔고, 송기윤과 금보라, 박경림, 김형자, 강성연, 우희진, 이시내, 이영자 등도 감초같은 연기를 선보였다. 특이하게 암행어사가 한 마을에 머물면서 일종의 경찰이나 보안관처럼 그 마을에 벌어지는 각종 부정부패를 뿌리뽑는 구조였고, 원조교제, 농협 비리, 주가조작 등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은유적으로 풍자하려 했다. 그러나 시청자 중엔 억지라는 비판이 있었고, 고정 출연진 중 이영자(춘몽각 주인 역)가 내용상 분위기가 안 맞자 6회를 끝으로 홧병으로 사망한다는 식으로 하차시켰다. 또 작가를 정경아로 바꿔가며 박문수가 여러 고을을 돌며 사건을 해결한다는 식으로 바꾸고자 했으나 이걸로도 반전시킬 순 없었다.

그 밖에 2002년작 MBC 드라마 <어사 박문수>, 2020년작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2021년작 tvN 드라마 <어사와 조이> 등이 있다.

춘향전의 영향인지 주로 수행원으로 방자를 하나 데리고 다닌다. 하지만 방자는 '고을 원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하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는 재현 오류다. 춘향전에서도 이몽룡이 방자를 데리고 다닌 것은 도령이었을 때지, 어사가 된 뒤에는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48]

피를 마시는 새에선 사자패주란 이름으로 패러디. 마패 대신 '사자패'를 드는데, 오등작 개념을 쓰는 피마새에서 신분이 백작 취급이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미토 고몬(水戶 黃門) 문서로.

KBS 전설의 고향에도 드라마 제목에 맞게 각종 암행어사 설화가 자주 나왔다. 이 작품에서 암행어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귀신을 봐도 놀라지 않고 침착히 얘기를 들어주며,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원한을 대신 풀어주고 모든 일을 해결해주는 선한 조력자 역할이다. 주로 이민우와 박진성이 어사 역을 도맡았다.

2002년작 영화 YMCA 야구단에선 주인공인 호창이 원래 과거시험으로 암행어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여주인공인 정림과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정림이 '저의 외삼촌이신 이면상 님이 마지막 암행어사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정림이 호창에게 마패를 선물하는데, 이게 후반부의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했다.

윤승운이 그렸던 조선 시대 배경의 명랑 만화에는 소년 시절에 급제하는 천재들이 몇 나오는데, 이들은 백이면 백 암행어사를 제수받는다. 즉 소년 어사가 되어 자신을 시중들던 하인을 종자로 데리고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슈퍼히어로나 탐정처럼 약자인 민초들의 억울한 사건을 해결하며, 가끔 출도도 한다. 재현 오류이긴 하지만 만화적 재미를 위한 과장이라고 보아야 할 듯. 다만 윤승운 작가는 21세기보다 자료 구하기 훨씬 어렵던 1980년대 작품에서도 '암행어사 사망률 70%' 같은 뻥은 치지 않았다. 암행어사 일이 고달프고 위험하다는 묘사를 하면서도 정말 암행어사가 죽거나 실종되는 건 그 자체로 매우 희귀한 일이라는 묘사도 집어넣었다. 어떤 소년 암행어사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과거 호환을 당해 뼈만 남은 암행어사 유골을 찾아낸 뒤 시신을 수습하고 조정에 알려 신원을 파악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이 암행어사 실종 사건은 신임하던 젊은 신하가 실종된 사태에 국왕이 크게 놀란 뒤 상심하여 1년 이상 실종자 찾으라고 신하들을 들볶은 대형 사건으로 묘사된다. 한편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맹꽁이 서당에도 암행어사가 가끔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대부분 청장년층이다. 등장하는 암행어사 가운데 한 명은 훈장의 과거 제자인 윤병구다. 맹꽁이 서당이 생기고 30년동안 과거 급제자가 안 나왔다고 하는데 설정 오류인 듯.[49]

스메라기 나츠키의 작품으로 암행어사가 주인공인 단권 만화 <이조암행기>가 있다. 주인공이 너무 젊고 수행원이 적은 게 흠이지만 일본 만화치고는 조선에 대한 묘사가 괜찮은 편. 재야인재 천거라든가, 고응 수령을 파직하진 못해 사직을 권하는 등, 은근히 재현을 잘 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츠바사 크로니클에서 암행어사 삼총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CLAMP신 춘향전에서는 마패의 포지션을 태극팔괘가 그려진 마법 아이템이 대신한다.

신암행어사에서는 신 춘향전처럼 마법적 요소가 추가되어서 3마패 이상은 팬텀솔저라는 군대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추가되었다. 2마패 이하는 그런 것 없이 실존했던 마패와 역할이 같다. 그리고 호위 무사 산도와 수행원 방자와 팀을 이루고 다니는 기본이다. 다만 주인공 문수는 정식 암행어사가 아니라 한동안 혼자 다녔다.

김삼의 작품 칠삭동이의 주인공 칠삭동이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팔도를 모험하였다.

문피아 소설 '유물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조지서가 최초의 암행어사로 나온다. 당연히 실제로는 아니다.

소울 칼리버 6의 캐릭터인 황성경 또한 암행어사로 활동하는데, 단순한 암행어사라기 보다는 부적을 사용한 도술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승인 원수현도 전직 암행어사.

5. 관련 문서



[1] 주로 이렇게 표기하나, 어쩌다 당상관을 임명하면 暗行御使로 표기했다.[2] 지금으로 치자면 우리나라의 국정원이나 미국 CIA 같은 정보국 요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어차피 Agent의 라틴어 어원인 Agere라는 단어가 '행하다'라는 뜻의 한자의 다닐 '행'(行) 자와 모든 의미가 같다. '행동하다'의 뜻과 '가다'의 뜻이 다 있는 것까지 Agere에서 온 만큼 의외로 적절한 번역인 셈이다.[3] 무한도전 39회 어학연수 특집의 모의 연극에서 암행어사로 나온 이몽룡 역할을 맡은 노홍철이 암행어사를 뜻하는 영단어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사용한 엉터리 표현이다.[4] 위키피디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5]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의 영제와 소울 칼리버 6황성경 스토리모드에선 이 명칭을 사용한다.자주 쓰이는 에이전트보다 인스펙터가 뭔가 간지나서[6] 감사원의 경우 공개적으로 신분이 드러나 있기에 명행어사라고 보는게 정확하고, 현대의 암행감찰은 대통령 비서실과 국무 조정실의 감사 조직들이 수행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몰카로 감시한다고 한다.[7] 현대의 미국 CIA나 한국 국가정보원의 직원들도 비밀리에 사건을 처리하며 대통령 직하 산하 정보국이다.[8] 그나마 중국의 삼국시대 때에는 암행어사와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는 관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어사중승 및 그 밑의 속관인 시어사이다. 차이점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부패 수령을 폭로하고 잡아들이던 암행어사에 비해 시어사나 어사중승은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 그것을 상서에게 알려 황제가 직접 관직에서 파면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이 미세한 차이가 있다.[9] 나이가 조금 있는 신하들은 이미 인맥이 있기 때문에 뽑지 않았고, 아예 새파란 젊은이는 경험이 없어 혼자 판단해야 하는 암행어사같은 자리를 맡기기 어려우므로 실무 경험은 있으나 아직 이름이 널려지지 않고 인맥이 넓지 않으며 비리의 우려가 없는 젊은 시종신들 중에서 선발했다. 그래서 평균 30대~40대 초반 나이에 암행어사로 나갔다.[10]성종실록》 권111 10년 11월 23일 갑진 두 번째 기사. #[11] 《봉서》는 대개 한양 안에서 뜯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당시의 개념으로는 4대문 안이 한성이었고, 그 밖 10리까지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한성부 관할의 한양으로 취급했으며, 그 밖을 경기도로 취급했다.[12] 이 직접 특정 지역을 찍어서 살펴보라는 《봉서》를 내렸다는 건 이미 해당 지역의 첩보가 사헌부 등을 통해 입수되어 왕에게 보고가 올라갔다는 의미다. 암행어사가 출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거나 처벌받은 이유가 이미 첩보가 궁궐까지 다 들어왔는데 직접 가서 봤다는 어사가 그걸 못 잡았느냐는, 일종의 직무 태만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13] 10마리는 왕 전용, 영의정은 7마리까지, 암행어사는 보통 2마리~5마리 정도.[14] 이웃 고을의 정규군이나 포졸 따위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면 이 지역에 암행어사가 왔다고 광고한 셈이니 출도까지 정보가 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중앙 정부 직속기관이라 지방 수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역참에서 역졸들을 동원하는 것이다.[15] 지금의 평양시 순안구역[16] 순안 현감 이문용은 박내겸에게 결국 봉고 조치를 당하고, 조정에 봉고 조치가 보고되자마자 관례대로 파직당했다. 주인의 파직으로 끈떨어진 신세가 된 이문용의 하녀가 서낭당에 가서 "내 밥줄을 끊은 암행어사에게 천벌을 내려주세요" 하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박내겸이 듣고 씁쓸해하는 내용도 일기 뒤쪽에 나온다.[17] 관가의 창고 문을 닫고 수령을 직무정지시킴. 암행어사에게는 수령의 직무 정지 명령에 해당하는 봉고 권한만 있고, 파직 등의 처리는 어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임금이 할 일이다.[18] 뚱딴지 시리즈의 하나인 뚱딴지 조선시대 3권을 보면 암행어사가 방랑 거지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것도 그리 자연스러운 설정은 아닌 셈이다.[19]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20] 청천강 이북지방을 뜻하는 말로 이북5도 기준 오늘날 평안북도를 가르킨다.[21] 지방 구석구석까지 수령을 파견했다. 비록 17세기에 들어서야 완성이 되었다지만 이미 15세기 중반, 세조 기간에 이 시도를 할 정도로 빨랐다. 다만 최소 비용으로 대규모 관료제를 굴리려다 보니 나온 폐단도 무시할 수 없는데, 당시 재정구조로는 무리할 정도로 큰 정부를 운영하다 보니,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아전은 사실상 무보수 세습직으로 묶어놓고, 중앙관리는 겸직으로 비용을 절감하려 한 것이다. 현대 정부에서 유니폼, 숙소, 출장, 교통비 등 부대 비용은 국가가 책임지지만 이마저도 조선시대에는 개인이 충당해야 했다.[22]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어서 그렇지 원칙적, 이론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도 군사 쿠데타 같은 것을 시도했다가 까딱 잘못하면 주동자들과 관련자들은 전부 다 총살이다.[23] 조선 왕조 역사상 반정이 겨우 두 번이었던 것과 안동 김씨파평 윤씨의 집안과 같은 세도가들이 실권만 장악할 뿐, 자신이 왕 대신 즉위하며 왕조 자체를 갈아버리려고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사에서 큰 임팩트를 가진 사화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24] 심지어 동양에서 법의학이 등장한 것이 남송대이다. 조선에서도 무원록이나 증수무원록 같은 법의학 서적이 있어서 이를 사용해 수사를 했는데, 왠만한 사건은 이걸로 다 잡았다.[25] 오늘날의 한국으로 치자면 대통령이랑 국회가 한마음 한뜻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는 비리사건에 대해 특검팀을 꾸렸는데, 압수수색을 보낸 날 특별검사가 시체로 발견된 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매스컴이 발칵 뒤집히고 공권력이 총동원되어 관련자들을 이잡듯이 뒤져서 모조리 잡아다 족칠 것이 뻔하다. 좀더 왕조국가에 가까운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으로 대입하면 더 극명해지는데, 김정은보위부 1부부장이나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의 고위 간부를 직접 명령으로 지방으로 출장 보내는 셈이니, 그 자가 살해 당하면 김정은이 격노하여 피의 숙청을 할것이다.[26] 무관도 이런 비슷한 일을 하는 직책인 선전관이 있긴 했다. 선전관도 왕명을 받아 민심이나 각지 형편을 시찰하는 업무를 맡는 경우가 있지만, 민간인으로 위장하는 암행어사와 달리 공개적으로 행동했다. 또한 내관들도 왕명을 받아 바깥에 나가 지시받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어차피 어사라는 표현 자체가 왕명을 받아 행동하는 이를 뜻하다 보니, 암행이 아니어도 공식적으로 어사 호칭을 달고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27]영조실록》 권9 2년 5월 6일 정유 4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11023_002[28] 뚱딴지 조선시대의 3권에서 나온 암행어사도 1개월 전부터 고을에 숨어들어서 수령의 비리를 다 조사해왔다며 문서를 제시하는 장면이 잠시 나온다.[29]정조실록》 권42 19년 5월 22일 임신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905022_001[30] 마흔두 살에야 급제하여 환갑이 다 된 쉰여덟 살 때(정조 11년, 1787년) 호서(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1792년에는 반대로 심환지가 평택안행어사로 있던 김희채의 탄핵으로 귀양살이를 한다.[31] 조선에서 일개 도적이 관원을 살해하면 바로 반역으로 간주되어 정규군에게 토벌된다. 현대로 비유하면 일개 조직폭력배들이 검사나 감사원 공무차량을 테러, 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32] 병인양요 당시 순절한 이시원의 손자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도들은 나라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진압하되, 무고한 백성들까지 해를 입히는 탐관오리들은 더욱 엄중히 벌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서재필이 국내 입국했던 시절에 그의 무례함과 위선을 비판한 적이 있다.[33] 애당초 이건창의 집안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유공자 급이었다.[34] 다만 이건창이든 정약용이든 너무 거물급을 건드렸다는 게 문제였다. 일반적인 수령이라면 암행어사 파워로 찍어누를 수 있었겠지만 이들이 건드린 건 관찰사(오늘날의 도지사급)였다. 관찰사는 종2품이라 사실상 외직 중 최고위이라 암행어사보다도 높은 직위인 만큼 파워 싸음에서 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35] 사실 이건 암행어사뿐 아니라 모든 조선 관료들이 겪은 고충이다. 정조 시기에는 보고서를 일곱 번이나 써서 올렸는데도 형식에 맞지 않으며 내용도 정돈이 안 된 채 뒤죽박죽이라 파직당하고 보고서가 개판이니 활동도 개판으로 했다고 오인받은 암행어사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보고서만 엉망이고 활동은 성실히 했다는 점이 드러나 다시 복직했다.[36] 중종 20년 1월 황해도 어사로 간 조종경이 실제로 강령현(現 강령군)에서 겪은 일이다. 이에 조종경은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폐단을 발견해내 중종에게 보고했고 당연히 중종은 바로 강령현의 수령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37] 당시의 붉은 쇠줄은 관아에 소속된 정식 포졸만이 사용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공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즉 수갑을 내밀며 "(경찰서로) 가시죠."라고 말한 것과 같다.[38] 주모자는 효수되고 나머지 2명은 감형받아 노비가 되었다. 성수묵 또한 당시의 책임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무안 현감에서 파직되었다. 《순조실록》 권32 31년 4월 5일 정해 2번째 기사. 관련 내용.[39] 예를 들면 동네 지적장애인, 아니면 허깨비를 보는 명백한 조현병 환자 정도다.[40] 고모의 아들. 박문수가 1살 위 형.[41] 4대손.[42] 平安道淸南暗行御史. 청남(淸南)은 청천강 이남 지역을 말한다.[43] 외숙부 이태좌(李台佐)의 아들. 이종성이 1살 아래 동생.[44] 그런데 막상 드라마 본편에서 상도는 큰 비중이 없고, 암행어사의 종(임현식 분)이 더 비중이 크다. 사실 상도 역의 배우가 전문 배우가 아닌 무술인을 섭외했기에 대사가 적다.[45] 결국 참수형을 당하게 되는데, 망나니막걸리 몇 번 뿜은 뒤에 칼로 목을 내리치기 직전에 저 멀리서 "멈추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46] 소매 사이로 보이는 장식용 술을 보고 그게 마패인 줄 알고 모두들 암행어사로 착각했는데… 그건 그냥 장식용일 뿐, 그것도 검도 아닌 웬 (대금으로 보이는) 피리였다.[47] 실제 조선이었다면 이는 왕의 대리인을 사칭한 짓으로 처리해서 아주 무거운 벌을 내렸을 것이다.[48] 오히려 기밀이 누설될까 봐 이몽룡이 꾀를 써서 방자를 옥에 가두는 판본도 있다. 방자 지못미.[49] 당시 연재했던 명랑만화의 다수는 설정 오류가 빈번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아버지의 성함이 그때그때 바뀌거나 주인공의 친구 이름이나 집안 배경이 바뀌는 일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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