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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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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7년 6월 2일 |
한성부 남부 낙산방 회동계 회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1] | |
사망 | 1905년 12월 1일 (향년 78세) |
한성부 | |
본관 | 양주 조씨 |
자 / 호 | 치현(穉顯) / 산재(山齊)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 |
종교 | 유교 (성리학) |
상훈 | 대훈위 금척대수장 (1905)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
부모 | 부친 - 조유순(趙有淳, 1803 ~ ?) 모친 - 대구 서씨 서직수(徐稷修, 1760 ~ 1823)의 차녀 |
형제자매 | 남동생 - 조병창(趙秉昌) |
부인 | 광산 김씨 - 김준현(金準鉉, 1793 ~ ?)의 딸 |
자녀 | 장남 - 조태희(趙台熙, 1857 ~ ?) 장녀 - 한산 이씨 이용직(李容稙, 1852 ~ 1932)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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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이용직이 그의 사위이며, 한진그룹 조중훈의 조부 조병규(趙秉圭)는 그의 8촌이다.2. 생애
양주 조씨로 음서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32살의 조금 늦은 나이에 1859년(철종 1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864년(고종 1년) 실록청 도청 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조씨가 본격적으로 기용될 때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판서, 1889년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내고 그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정계를 떠나 경기도 가평에 은거하였다.[3]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대신(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때 독립협회의 주된 표적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이후 78세의 노구[4]를 이끌고 상소를 올리고 고종을 알현하려 했으나 저지당한다. 이후 민영환 등의 관리들과 함께 백관을 이끌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를 했으나 강제 해산, 연금당했고 다시 풀려나자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했으며 다시 쫓겨났다.
11월 28일 시종부 무관장 민영환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소두(疏頭; 상소의 대표)로서 상소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자 이날 다시 상소하였는데 역시 윤허되지 않았다.
11월 29일 소두(疏頭)[5] 이하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철회되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11월 30일 민영환이 비분강개하여 칼로 자살하였다. 이날 민영환에게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이 추증되었고 시호도 내려졌다. 같은 날 영돈녕사사 심순택 등이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등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월 1일 조병세가 최후의 유서를 남기고 마지막 상경을 하여 일본군이 쫓아내자 가마에서 음독 자결했다. 이날 민영환에게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이 내려졌다.
다음날인 12월 2일 고종은 "졸(卒)한 특진관 조병세는 나라를 근심하여 절개를 지켜 죽었다."라고 하면서,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내리도록 하였다.
12월 3일 충정공 조병세, 충정공 민영환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과 절개가 매우 가상하다고 하여 치제(致祭)하는 의식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1962년 조병세, 민영환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