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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3:35:40

조병식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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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부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副議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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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조병식
趙秉式
이명 자 공훈(公訓), 시호 문정(文靖)
본관 양주 조씨
출생 1823년[2][3][4]
사망 1907년 (향년 84세)
직업 관료

1. 개요2. 약력3. 1889년 방곡령4. 이후5. 탐관오리

[clearfix]

1. 개요

조병식은 조선의 관료로 대표적인 탐관오리이며 본관은 양주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과는 사촌지간이다.

조병갑보다 훨씬 더한 탐관오리였는데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자세히 나와 있지도 않고 오히려 방곡령 하나 때문에 까방권을 두둑이 얻은 상태다. 일반인들에게 아니 심지어 일부 국사 교사에게도 조병식도 탐관오리였다고 하면 조병갑이랑 헛갈린 것 아니냐고 할 정도다. 분명히 말하지만 조병식은 그저 군수에 불과했던 조병갑과 달리 오늘날 도지사 격인 관찰사를 지냈고 중앙 정부의 고위직에 있던 자라 스케일부터가 달랐고, 그가 국가와 백성들에게 저지른 해악은 조병갑보다 몇 배나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2. 약력

1858년(철종 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860년 검열(檢閱)이 되고, 1862년(철종 13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1874년(고종 11년) 강화유수(江華留守), 1876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암행어사였던 이건창이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쳐냈지만 조병식이 어찌나 인맥을 잘 닦아 놓았는지 이건창이 도리어 역풍을 맞아 평안도 벽동군으로 1년 간 유배를 했다.

그러나 조병식도 끝은 좋지 못했고 결국 1878년 탐학(貪虐)하다는 죄로 전남 지도(智島)에 귀양간 뒤 이듬해 풀려나왔다. 탐학하다는 말은 성품이 모질고 부패했다는 뜻인데 그 죄목으로 1년 간 유배를 간 점을 보면 얼마나 그가 부패한 작자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조병식이 유배를 간 시기는 조선 정치의 부패가 극에 달한 시점이라 청렴한 관료를 찾는 게 드문 때였다. 즉, 모두가 썩어있는 시대에 썩었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갔으니 당시 조선 조정에서도 조병식이 탐관오리라는 걸 인정한 셈이다.

1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83년에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죄인을 함부로 형살(刑殺)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유배를 갔다. 석방된 후 1885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대원군의 석방을 주청하였고 귀국 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예조 ·형조 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1888년 조선국 대표로 러시아 대표 베베르와 한로육로통상장정(韓露陸路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열국의 이목을 끌었다.

3. 1889년 방곡령

1876년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일본인 상인들은 아직까지 전근대적 물품 화폐 경제 쳬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농촌에서 쌀·콩 등을 매점해서 이를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안그래도 지방관과 아전들의 수탈과 높은 조세 비율로 인해 곤궁했던 당시의 농촌 상황에서, 이런 막대한 반출이 누적되면서 곡물의 비축량이 부족해지자 식량난은 가중됐고 결정적으로 1888년 흉년이 들면서 농민들에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따라 일본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주요 항구중 하나였던 원산을 관할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9년 9월 한일 통상 장정 제37항을 근거로 방곡령을 발포한다. 그러나 예고 기간이 부족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독판 교섭 통상 사무를 맡고 있던 민종묵은 일본에게 1년간 곡물 수출 금지를 허용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일본은 한일 수호 조약에 위배된다 하면서 고자세를 요구했고 할 수 없이 조정은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조병식은 굴하지 않고 방곡령을 밀고 나갔다. 이에 일본은 조병식의 처벌 및 일본인 상인들이 입은 손해 배상을 요구했고 조정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시키는 한편 함경도 지방의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이것만 보면 조병식은 일본으로 곡식이 유출되어 곤궁을 겪는 조선 농민들을 위해 이 같은 조치를 단행한 애국자로 보이기 쉽다. 그것 때문에 사실 많은 교과서에서 그에게 까방권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건 전혀 사실과 먼 얘기로 방곡령 이전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도 암행어사 이건창에 의해 탐관오리로 고발당해 결국 그 죄목으로 유배를 간 적이 있으며 방곡령 이후에도 충청도 관찰사 재직 시에 장오(贓汚) 즉, 비리를 저지른 혐의가 드러나 면천군으로 쫓겨난 전례가 있었다. 박정양이 당시 왕이었던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통령 중심제를 시행하려 한다는 박정양 대통령 음모론(공화제 음모론)을 주도한 주동자이며, 그 이후에도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의 간부가 되어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 데 앞장 선 인물이다. 즉, 평생을 탐관오리로 산 사람이란 말인데 그런 자가 백성들을 위해 방곡령을 선포했을 리가 없다. 백성들을 위한 마음 혹은 애국심의 발로로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뺏어먹어야 할 쌀을 일본 놈들에게 못 준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5]

4. 이후

방곡령 사건으로 인해 함경도 관찰사에서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된 조병식은 이후 내직에 돌아와 이조 판서, 공조 판서를 지냈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당시 동학 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청원서(伸寃請願書)를 보내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조병식은 이 요청을 모조리 묵살했고[6] 오히려 더욱 탄압을 가해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을 제공했다. 정부는 그 책임을 물어 1893년 1월에 조병식을 파면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판의금부사로 다시 복직했는데 1894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에 장오(贓汚) 행적이 드러나 결국 면천군으로 쫓겨났다. 장오란 뇌물을 받는 등의 비리 행위를 의미하는데 15년 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에 탐학하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갔으면서도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후에도 또 뇌물 받아 처먹다 걸려서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1896년에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되고 이어 법부 대신, 비서원경(秘書院卿), 외부 대신을 거쳐 1898년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이 되었다. 그가 복직했을 무렵 조선의 정세는 말이 아니었는데 을미사변의 충격으로 고종아관파천을 단행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이에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이 독립협회를 조직해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벌였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조직해 민중 계몽에 나섰다.

이에 조병식은 보부상들로 구성된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를 선동하여 독립 협회를 때려 부수기에 앞장섰고 더 나아가 독립 협회 인사들을 마치 반역 도당인 양 고종에게 무고하여 수많은 개화당 요인을 투옥시켰다. 뒤에 의정부 참찬(參贊) ·법부 대신 서리를 지내다가, 만민공동회의 규탄을 받고, 독립 협회를 무고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령이 내리자 외국인 집에 피신하였다. 1890년 주일 특명 전권 공사를 지내고, 1902년 궁내부 특진관 ·외부 대신, 1905년 참정 대신과 돈령부판사를 지낸 후 1907년에 죽었다.

5. 탐관오리

조병식의 일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전형적인 수구 인사였고 조선을 개혁시킬 의지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직 방곡령 하나 때문에 영구 까방권을 얻어 애국자로 둔갑되었다. 이름이 비슷한 조병갑의 부패도 심했지만, 조병식은 그 조병갑보다 훨씬 더 지독한 탐관오리에 간신배였는데 말이다. 이는 한편으로 단편적 사건을 암기하는데에 그치고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다는 국사 교과서에 대한 비판 및 지적 사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병식은 조병갑과는 스케일부터가 다른 인물로 어떻게 보면 조선 말기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은 대부분 이 작자 한 사람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병갑 항목 말미에 있는 조병식에 대한 서술이 부정적으로 된 것도 달리 그런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조병식은 절대 애국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에만 관심을 뒀던 탐관오리였다. 거기다 조선 정치의 혁신을 외면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전제 군주정을 공고히 하는데 앞장선 수구 꼴통에 간신이었다.

그와 대비되게도, 황해도에서 방곡령을 실시하다가 실패한 조병철(1826년 ~ 1890)[7]이라는 분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다. 이 분이야말로 '조병식과 이름은 비슷한데 하는 행동이 완전히 달랐다'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민자영 시절 국정을 농단했던 무당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기도 했다. 진령군에 연줄을 놓으려 했다는 점에서 빼박 탐관오리에 간신배 인증해버렸다.


[1] 이 사진이 인터넷 상에서 친척인 조병갑의 사진으로 잘못 기재된 경우가 있는데, 조병식의 사진이 맞다. #[2] "조병식(趙秉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 "방곡령-조병식의 방곡령에 대한 건의", 국사편찬위원회[4] 배한철,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도둑2]배신한 아전 살해한 탐관오리 관찰사", 「매일경제」, 2020.7.22.[5] 방곡은 미곡의 가격과도 관련이 있다. 곡물 유출로 관내 곡가가 상승하는 것을 막기위해 지방관은 방곡을 실시하였다. 이를 악용하여 방곡을 실행후 곡가가 떨어지면 미곡을 대량 매입한 후 방곡을 풀어 그 차익을 노리는 목적으로 방곡을 실행한 지방관도 있었다.[6] 근데 자기 관할의 수령들에게는 동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없애라고 했다고 한다.[7] 이 인물은 양주 조씨가 아니라 풍양 조씨 회양공파-한산군파-풍안군파로, 당시 양주 조씨와 풍양 조씨 풍안군파 두 문중 모두 병(秉)자 항렬에 속한 사람이 많아서 이름만 언뜻 보아선 같은 집안으로 혼동할 수 있어서 잘 확인해야 한다. 여담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세도가와 가까운 촌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