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89년 조선에서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발표한 방곡령.2. 상세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은 전근대적인 물품 화폐 경제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농촌에서 쌀 ·콩 등을 매점하고 이를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렇잖아도 지방관과 아전들의 수탈과 높은 조세 비율[1]로 인해 곤궁했던 당시의 농촌 상황에서 이런 막대한 반출이 누적되면서 곡물의 비축량이 부족해지자 식량난은 가중됐고 결정적으로 1888년 흉년이 들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이에 따라 일본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주요 항구 중 하나인 원산을 관할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9년 9월 조일통상장정 제37관을 근거로 방곡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예고 기간[2]이 부족[3]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독판 교섭 통상 사무를 맡고 있던 민종묵은 일본에게 1년간 곡물 수출 금지를 허용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일본은 한일 수호조약에 위배된다면서 고자세로 일관했고 할 수 없이 조정은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해제할 것을 명령했으나 조병식은 굴하지 않고 방곡령을 밀고 나갔다.[4] 이에 일본은 조병식의 처벌 및 일본인 상인들이 입은 손해 배상을 요구했고 조정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시키는 한편 함경도 지방의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나빴던지라 새로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장석도 원산항의 방곡령을 다시 시행하였고 이어서 황해도에서도 방곡령이 선포되었다. 방곡령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 1월 조정의 방곡령 금령(防穀令 禁令)으로 전면 해제되었다. 한편 조선은 1893년 4월 일본 측에 배상금 11만환을 지불하면서 이전 방곡령 선포에 따른 피해를 배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