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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43:49

진령군

<colbgcolor=#29176e> 조선의 무녀
진령군
眞靈君
봉호 진령군(眞靈君) 또는 진령군(臻靈君)
이름 불명
시호 없음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성별 여성
직업 무속인

1. 개요2. 역사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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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무녀.

진령군이라는 봉호와 여성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출생 연도나 출생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군(君)으로 봉해지는게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데다가 조선 초기도 아닌 말기를 살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야사에 따르면 본명이 이성녀 또는 박창렬이라 하고 원래 이씨 성이었지만 이름을 버린 무당이라 하기도 하는 등 이름에 대하여 몇 가지 추측이 있지만 어느 것도 분명한 근거는 없다.

2. 역사

1882년 임오군란 때 성난 군사들에게 죽을 뻔한 명성황후충주 장호원까지 도망갔다 50여 일만에 환궁하였다. 이때 왕비는 한 무녀를 데리고 왔고 고종은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의 진령군이란 작호를 내렸다.

진령군이 이토록 파격적인 출세를 한 계기는 왕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지낼 때 점을 쳐 주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숨어 지내기 하도 갑갑하여 민응식이 불러온 무당이 진령군이었는데 자칭 관우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이때 진령군은 왕비가 자신과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라며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줬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가 예언한 그 날짜에 환궁하게 되자 왕비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후 궁중의 무녀가 되어 왕실을 위해 산천 기도, 굿제사를 맡았다. 이렇게 신분상승을 한 그녀는 양반을 벼슬에 임명하고 내쫓는 것도 마음대로일 만큼 권세를 휘둘렀다. 진령군에게는 김창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다니며 실세 노릇을 하자 조정의 고위 관료들 중 몇몇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거나 의자(義子)가 되기까지 했다[1].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하였다.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지도 어느덧 11년.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사간원 정언 안효제였다. 고종은 대노하여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한 후 낙향했다. 이후로 강직한 선비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승지가 감히 고종에게 올리지 못하고 쌓아 두고 있었다.

고종 31년(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 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진령군이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 주었다. 그녀는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쫒겨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이듬해 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강력한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따라 죽었다...는 것이 맹꽁이 서당의 서술이다. 왕비 사후 모든 권력과 재물을 잃게 되었고, 도승지가 그 동안 쌓아 두고 있었던 상소문들이 한꺼번에 올라감과 동시에 지석영이 진령군을 주륙하여 머리를 도성에 매달 것을 청한 상소문[2]까지 올라가 신변의 안위마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는데,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 진령군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정확하게 기록된 바가 없다. 진령군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마지막 기사는 엉뚱하게도 고종 41년에 당시 법부대신 이하영이 이유인 등을 처벌할 것을 아뢰면서 안효제의 예를 든 것이다. 야사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지석영의 탄핵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야사를 채택했으나 이는 근거 부족으로 진작에 탈락된 카더라이고, 대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방의 벽촌으로 숨어들어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고 있다. 사망연도가 1896년이라고 알려진 것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채택한 사형설의 영향이 큰데, 해당 연도는 단지 행방불명된 날짜를 가지고 작가가 임의로 추정한 날짜일 뿐, 사형설과 직접 연관된 것도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생몰년도 미상'으로 본다.

3. 매체에서


[1] 그런데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 의자들 중에서는 무려 진령군과 불륜(!)을 저지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2] 해당 상소문은 지석영이 살아생전 표현했던 의사표현 중 가장 격렬한 수위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3] 해당 배우는 후일 왕희지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되는 배우이다. MBC 드라마 아현동 마님에서 주연을 맡았던 적이 있으나 드라마 내용과 본인 연기력이 혹평을 받으면서 이후로 뚜렷한 연기 활동은 없다.[4] 진령군(眞靈君)을 그대로 직역한 칭호다.[5] 이 작품이 히틀러도 개과천선시켜 세계평화에 헌신하게 되는 등 ‘선의’가 작품 주제인지라 이렇게 잘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