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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9:51:57

이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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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부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副議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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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부의장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법부대신
이유인
李裕寅
파일:이유인.png
출생 1843년
사망 1907년
본관 경주 이씨[1]
희재(希齋)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구한말의 정치가, 관료.

2. 생애

경주 이씨 상서공파 파조 이과(李薖)의 증손인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연손(李延孫, ?~1463)의 14대손[2]이다. 김해의 중인 출신으로 한양에 올라와 명성황후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다. 1888년(고종 25) 파주목사(坡州牧使)로서 전무위원(電務委員)이 되어 기해전선(畿海電線)을 연로(沿路)에 가설하는 데 공헌하였다. 1891년(고종 28)부터 수차례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1894년(고종 31)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896년(고종 33)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1897년(고종 34) 덕수궁을 수리했으며 뮈텔 주교를 고종에게 소개하여 국호(대한제국) 및 연호(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고종 35) 법부대신을 지냈다. 1899년(고종 36) 중추원 의관, 경무사, 궁내부 특진관, 1900년(고종 37) 평리원 재판장 서리, 1902년(고종 39) 경상북도관찰사, 시종원 경, 평리원 재판장 서리, 궁내부 특진관[3]을 지냈다. 1903년(고종 40) 한성부판윤, 시종원 경, 경무사 서리를 지냈다. 1904년(고종 41)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동년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조직하여 부회장[4]으로서 배일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고종 42)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다음해인 1906년(고종 43) 석방되었다. 친일조정에 의해 항일의병의 배후로 지목됐다(저상일월, 대한매일신보). 1907년(고종 44년) 6월 권한남용 혐의로 김해에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중 1살 위의 부인 송씨를 남겨두고 사망하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왜경이 보낸 의사는 경기(驚氣)로 인한 뇌막염으로 진단하였다. 6일 후 아들 이소영이 충청북도 충주 국망봉 높은 곳에 묻었다.

3. 평가

평가가 엇갈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종래 보안회 부회장으로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선 항일운동가로 적었으나 현재는 보안회 해체에 일정 부분 관여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및 경기도 양주시의 향토문화백과사전 등에서는 국권 회복 운동을 했다든가 일본의 정탐 기록을 근거로 항일 의병 운동에 앞장섰던 허위(許蔿) 등과 관계를 맺었다든가 한 사실을 적고 있다.#1#2 그러나 매천야록, 한국구비문학대계[5], 백촌한국학연구원 등은 명성황후가 언니라고 불렀다던 무녀 진령군(眞靈君)과 추문을 뿌렸다든가# 항일지사로 포장된 탐관오리였다든가# 하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4. 여담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金塘室 : 상금곡리) 함안 박씨 집안에는 길흉을 알려준다는 기이한 거문고가 가보로 전해진다. 자명금(自鳴琴) 또는 태랑금(泰娘琴) 으로 불려지는 이 거문고는 1671년(현종 12) 박정시(朴廷蓍)가 충청도 태안군수(泰安郡守)로 있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95cm, 폭 25cm, 6현으로 되어 있다. 1670년(현종 11) 박정시가 태안군수로 부임하기 몇 해 전인 1666년(현종 7)부터 이곳에 부임하는 군수는 첫날 밤에 죽어버려 다들 부임을 꺼렸는데, 당시 형조(刑曹)에서 근무하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박정시가 해괴한 이 사실을 밝혀 민심을 수습하고자 자원하여 이 곳에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첫날 밤, 관복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혀 놓고 동헌(東軒)에 정좌하고 있었는데, 밤 삼경(三更)이 되자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휘익 몰아치자 밝혀 놓은 촛불이 일시에 탁 꺼져 버리고 비릿한 피 냄새와 더불어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며 점점 동헌 쪽을 향하여 가까워지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동헌 마루 끝에 와서는 뚝 끊겨 지더니 동헌 뜰 아래에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아래 위로 소복을 한 소녀가 목에 칼을 꽂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박 군수에게 얌전히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에 박 군수가 호통을 치며,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역대 군수가 까닭없이 죽은 것은 네 소행이었구나! 사람이라면 이 밤중에 여기에 온 까닭을 고할 것이며, 귀신이라면 사불범정(邪不犯正)인데, 네 어찌 감히 관장(官長) 앞에 이런 꼴로 나타났느냐?" 하고 소녀를 꾸짖었는데, 소녀가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이런 모습으로 이 시각에 나타나겠습니까? 소녀는 틀림없이 귀신이온데, 원귀가 되어 신원(伸寃)을 하려고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나타났사오나 소녀의 비참한 꼴을 본 전임 사또께서 마음이 약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소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명관을 만나 이런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정 이야기를 하였는데 2가지 설이 있다. 이상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전설/설화에서 발췌함.


[1] 상서공파. 중시조 34세 '裕'자 항렬이다.[2] 중시조 34세.[3] 칙임관 1등에 서임됨.[4] 전 중추원 의관 송수만, 심상진 등이 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민중회의를 열고 보안회(保安會)를 창설하였고, 회장에 신기선, 부회장에 이유인, 대판회장(代辦會長)에 송수만을 추대하였다.[5] 예천 박춘수, 박연식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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