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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조선 제2대 내각총리대신 박정양 朴定陽 | Bak Jeong-yang | |||
출생 | 1841년 (헌종 7) 12월 24일 |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
사망 | 1905년 (고종 42) 11월 2일 (향년 64세) |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
재임기간 | 조선 제2대 내각총리대신 | ||
1895년 8월 20일 - 1895년 10월 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시호 | 문익 (文翼) | |
본관 | 반남 박씨 (潘南) | ||
자 | 치중(致中) | ||
호 | 죽천(竹泉) | ||
주요 경력 | 주미전권대사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학부대신 제2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내부무대신 표훈원 총재 | ||
소속 단체 | [[독립협회|]] | ||
부모 | 부 : 박제근(朴齊近, 1819년 - 1885년) 모 : 이응재(李應在)의 딸 | ||
배우자 | 본처 : 양주 조씨(? - 1892년 1월) 후처 : 인동 장씨 | ||
자녀 | 슬하 3남 2녀 박승길(朴勝吉, 1871년 - 1891년) 박승철(朴勝喆, 1897년 ~ ?) 박승희(朴勝喜, 1901년 ~ 196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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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대한제국의 정치가. 온건 개화파의 대표 인물이며 조선 최초의 주미대사.2. 생애
본관은 반남 박씨.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일족으로[1] 마찬가지로 먼 친척인[2]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유대치 문하에서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등과 교우하였다. 186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866년 문과에서 급제하였으며 온건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관직에서 승승장구하여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87년 주미 특파 전권 대사가 되어 워싱턴 D.C.에 부임했다.
1889년 귀국하여 홍문관 제학,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고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11월 제2차 김홍집 내각 때는 학무대신이 되었고 1895년 삼국간섭 등으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 내각을 세웠다가 을미사변 때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다시금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내부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진행하다가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당해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내부대신, 총리대신 서리,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1897년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참가하였다. 독립협회가 폭력적으로 탄압당하자 사직서를 올렸으나 반대로 고종에 의해 내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9월 표훈원 총재가 되었고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으나 병이 악화되어 11월 사임 후 곧바로 사망하였다. 순종 때 문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여담
- 개화에 앞장섰으나 온건 개화파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해서 정쟁에 자주 휘말렸다. 김홍집의 3번의 내각에 모두 참가하였으면서도 제3차 김홍집 내각 전후로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다는 점에서 박정양의 정치 역경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당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수습은 거의 박정양이 맡았다는 것이다.
- 친일적인 측면이 엿보였다는 평도 있으나[3]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계속 참가했다는 점과,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는 점, 그리고 이상재 등 젊은 개화파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친일파하고는 거리가 멀다.[4]
- 미국 사교계 파티에 참석했다가 문화충격을 받기도 했다. 파티에 여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저 여자들은 모두 기생인가?'라고 물었다가,[6] '저 여자들은 미국 저명인사들의 아내이거나 딸이다'라는 대답을 듣고 놀랐다. 그런가 하면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의 옷차림(가슴과 어깨를 많이 드러낸 드레스)과 남녀가 짝이 되어 서로의 몸을 잡고 춤을 추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 박정양의 둘째 아들 박승철은 독립운동가로 아버지가 타계한 후 아버지의 문인이었던 이상재로부터 영어를 교육받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22년엔 해방 후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준연과 함께 독일 베를린 대학교로 다시 유학을 갔으며 막 독립한 폴란드를 포함해서 유럽권 일대를 순회하고 잡지에 기행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귀국 후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농촌 운동과 관련된 기독교계 항일 민족주의 단체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될 때까진 고향인 연천군에서 계속 거주한 것으로 보이나 해방 후 38선이 그어져 연천이 북한에 속하게 되자 월남해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이기도 한 남선전기의 사장을 지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면서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다.
4. 관련 문서
5. 둘러보기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 ・ 을미개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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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부대신 | 서광범 | 서광범 | 장석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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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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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8년 7월 17일 제명되었다. |
[1] 촌수로는 7촌. 수빈의 큰아버지인 박윤원의 현손이다. 반대로 말하면 박정양의 증조부 박종여의 사촌이 수빈과 박종경 남매이다.[2] 이쪽은 훨씬 멀다. 22촌(...) 조손 항렬이고 박규수가 할아버지뻘. 한참 예전 사건인 기묘사화의 희생자인 소위 기묘명현 중 한 명인 박소의 장남 박응천의 11대손이 박정양, 4남인 박응복의 9대손이 박규수이다.[3] 본래 개화파치고 친일 의혹 안 받아보는 사람이 없다. 19세기에는 어느 국가와 가까운지에 따라 파당 이름이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친일파라고 해서 이완용 등과 동급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4] 사실 이완용 같이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친일파는 정확히 말하면 '매국노'라고 지칭하는게 맞다. 현대 정치인들의 성향을 서술할때도 친미나 친중이란 식으로 묘사되듯이, 친~란 것은 사전적으로 특정 국가에 비교적 우호적이거나 그 국가와 협조하려는 성향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을사오적 같은 경우 일본과 협조하려는 것을 떠나서 나라를 아예 팔아먹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다.[5] 조선시대에 태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란 개념을 이해 못하고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일국의 군주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신으로서 대국에 파견된 입장에서 군주를 만나면 절하며 예를 표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6] 유교 문화권인 조선에서는 큰 잔치를 벌여도 남녀의 자리를 별도로 마련했고, 남자들 자리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자들은 음식 시중 드는 노비이거나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기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