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0:56:48

기묘사화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1. 개요2. 발생 원인
2.1. 과거 인식2.2. 주초위왕설
2.2.1. 과학적으로 불가능2.2.2. 후대의 윤색
2.3. 현대의 해석: 중종의 친위 쿠데타
3. 진행 과정
3.1. 조광조의 득세3.2. 소격서 폐지와 중종의 권위 실추3.3. 친위 쿠데타 개시3.4. 사화 이후
4. 중종의 의중5. 후일담6. 관련 문서

1. 개요


기묘사화()는 중종 14년 기묘년(1519) 일어난 사화(士禍)이다.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림파들이 신권 대부분을 장악하고 왕권을 위협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이 극형을 당했고 나머지 사림들도 대부분 귀양가거나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 밖에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던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중앙 정치 진출은 한 세대 밀렸다.

흔히 '주초위왕(走肖)'이라는 문구가 기묘사화의 일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연구 결과 후대에 만든 루머임이 밝혀졌고, 실제로는 중종의 친위 쿠데타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중종은 사화를 일으키기 전에 조광조 일파로의 정보 전달을 차단하고 몰래 숙정문으로 군 병력을 소집하여 조광조 세력을 긴급체포하였다.

2. 발생 원인

2.1. 과거 인식

과거에는 조광조 등 신진 사류가 성리학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개혁에 훈구파가 반감을 품어 기묘사화로 발전했다는 인식이 다수였다. 훈구파에 대항해 일어난 사림파들이 원칙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중종이 이에 동조하여 힘을 싣자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힘을 잃기 전에 사림들을 모략해 일어난 사화가 기묘사화라는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위훈삭제 사건으로 중종반정으로 공신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 실제 참여가 없었던 자들의 공신첩을 회수하자는 사림파의 주장이 관철되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가 공작을 펼친 결과라는 것. 홍경주의 위치에 주목하여 아직 군부에 세력이 남은 훈구 세력이 군사력으로 중종을 협박했다는 시각도 있었다.

기묘사화를 상징하는 문구인 '주초위왕'(走肖爲王)은 이 같은 시중의 인식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여겼다. 주초위왕의 '走肖'(주초)는 '趙'(조)를 파자하여 만든 말이다.[1] 따라서 주초위왕은 곧 '조위왕(趙爲王)' 다시 말해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뜻이 된다. 훈구파 중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였기에,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적은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어 글자 모양을 나뭇잎에 새기면,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여 사화를 일으켰다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다. 나뭇잎이 기묘

주의할 점은 주초위왕은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실록에 여러 번 기록된 정사라는 점이다. 주초위왕은 중종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후일 선조실록에 언급되기 때문에 엄연한 정사다. 흔히 '정사 = 정확한 역사' 정도로 받아들여서 생기는 오류인데 정사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역사를 의미하지 내용의 정확성은 별개다.

2.2. 주초위왕설

2.2.1. 과학적으로 불가능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우선 과학적 근거를 보자면 실제로 벌레가 파먹기는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KBS 역사스페셜팀이 실제로 실험을 해봤는데, 결과 벌레는 그런 거 신경 안 썼다. 즉, 주초위왕은 근거가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벌레는 애초에 잎을 먹는데 거기에 꿀만 바른다고 해서 그 부분만 파먹을 이유가 없다. 그냥 잎도 먹으면서 꿀 발린 부분도 같이 먹을 것이다.

2001-02년에 선풍적 인기를 얻은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도 주초위왕 소재를 등장시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꿀은 물론이고 포도당, 액즙, 효소에다 애벌레, 누에, 등애, 사마귀, 심지어 쥐까지 동원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고 결국 달군 인두로 나뭇잎을 조잡하게 주초위왕이라고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 방영에서는 앵글을 엄청 뒤에서 잡았고, 나뭇잎의 주초위왕도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조잡하다. 나뭇잎 군데군데 탄 자국이 있음은 덤.

이후 인하대학교 생명과학과 연구팀이 제대로 된 연구방법론을 통해 이 토픽을 검증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가 <Entomological Research>라는 국제학술지에 정식 논문으로 게재되었다. 결과는 역시 실패였다. 논문 링크


유튜버 공돌이 용달도 이를 시도한 영상을 업로드했다. 역시 재현에는 실패하였고, 영상 후반부에는 상술한 인하대 연구팀과 만나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주초위왕' 에피소드의 과학적 검증이다. 검증에서 볼 수 있듯이, '벌레'가 글자 부분만 골라 잎을 파먹게 유도하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과학적으론 불가능해도 남곤 등 일당이 일부러 글자 모양으로 잎을 파내고 벌레가 먹은 것이라고 둘러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또한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다.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 카더라.

2.2.2. 후대의 윤색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1년(1568) 9월 21일 2번째 기사#

주초위왕 일화는 당대 기록인 중종실록에는 없으며 50여 년이 지난 선조실록 1568년 기사에 뜬금없이 '남곤 등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라 하여 사관이 기록해 놓은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모와 관련된 내용이면 미신이나 주술적인 요소도 빠짐없이 기록했기 때문에 당대에 기록되지 않은 것에서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신빙성을 의심하고도 남으며, 후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관은 이 이야기를 저술하면서 중종실록에 누락된 내용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일파에게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쟁은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만약 주초위왕 사건이 정말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면 당대 중종과 신하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안 나왔을 수가 없고 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중종은 온 신하들이 다 반대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기어코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뜬소문으로라도 주초위왕 같은 말이 나돌았다면 중종 본인이라도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된다는 참언만큼 죽이기 좋은 명분은 없다.

하지만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는 순간이나 투옥 이후 심문을 할 당시에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실록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기묘사화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실록을 적던 사관들도 왕의 의중을 모르겠다며 매우 답답해하는 심정으로 실록을 서술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그 자리에 '대궐에 글자가 새겨진 잎이 발견되었다.'느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 같은 말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사관이 적극적으로 적으면 적었지 이를 굳이 은폐할 이유는 없다.[2]

따라서 '주초위왕'은 조광조의 신원이 회복되고 '성현'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는 선조 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봐야 한다. '주초위왕' 설이 나온 이유는 중종에게 성현을 숙청한 왕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고 이는 왕실의 이미지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 내내 주초위왕 설이 정설처럼 여겨졌던 것이다.[3]

이후 주초위왕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 조선시대 내내 정설처럼 통했고, 현대에도 한동안 진실처럼 여겨졌다. 이는 조선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실록이 완역되기 전까지는 기묘사화 당대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 이야기는 사실인 줄 알았으나 거듭된 연구로 현재는 주초위왕은 허구이며 기묘사화는 중종 본인이 조광조 숙청을 목적으로 일으킨 친위 쿠데타라는 것이 정설이다. 왕조 이미지를 위해 후대에 윤색된 내용이 첨가되었다는 점에서 양녕대군이 양보했다는 속설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2.3. 현대의 해석: 중종의 친위 쿠데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6일 병자 2번째 기사
주초위왕 설이 사실상 허구로 밝혀진 지금, 기묘사화는 중종이 스스로 일으켰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기묘사화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일반적 인식과는 다른 상황들이 나타난다. 우선 기묘사화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조정 회의에서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종 단 한 명뿐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은 물론이고, 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곤도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는 데에는 반대했다. 이들은 조광조 일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광조를 가장 강경하게 견제하던 세력들이었다.[4] 조광조가 처음에 사형을 면하고 능성[5]으로 귀양간 것도 남곤과 정광필이 결사적으로 반대한 덕이었다.

심지어 훗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사관은 "정광필이 가장 슬퍼하였고 남곤 또한 슬퍼했다." 하고 기록했다. 훗날 권신이 되는 심정, 이행 등도 조광조를 죽일 필요까진 없을 것이라며 사사에는 반대했고, 정책적으로는 조광조의 반대파이지만 대쪽 같은 정승이었던 정광필은 "신은 임금을 살육의 길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저들은 조금도 삐뚤지 않은 사람들인데 어찌 죽음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언하면서 아예 모가지까지 내어놓고 중종을 만류했지만, 중종은 기어코 추가죄목을 찾아내 조광조를 죽였다.

따라서 기묘사화는 중종 자신의 의지로 일이 촉발되었고, 중종 스스로 밀어붙여 조광조를 숙청했다고 봐야한다. 중종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기묘사화의 주역은 남곤이나 심정이 아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중종 14년(1519) 11월에 대신들을 은밀히 소집한 것도 중종이고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조광조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린 것도 중종 혼자 저지른 일이다.

특히 야밤에 미리 군 병력을 소집해 궁궐 내에 배치한 후 조광조 일파였던 승지들을 체포하고 임시 승지를 임명해 조광조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누가 봐도 친위 쿠데타의 모습이다. 아무리 권력의 핵심인 고위직 신하라고 해도 남곤, 심정 같은 신하가 군 병력을 소집해서 궁궐 내부로 불러들인다는 미친 행위를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왕을 끌어내리는 정변이나 역성혁명에서나 볼법한 일이지,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과는 한참 거리가 먼 상황인 것이다. 남곤이나 심정이 한 건 그냥 중종의 발표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일 뿐이다. 중중과 훈구파 사이에 뭔가 뒷거래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훈구파가 주도하고 중종이 마지못해 허락한 모습은 절대 아니다. 그나마도 '조광조의 실각'에 지지를 보냈을 뿐이며, 위에서 언급했듯 중종이 조광조를 처형하려 하자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인물들이었다.

거기다가 리더라고 불렸던 남곤은 사실 훈구파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인물이다.[6] 당시에는 훈구와 사림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딱딱 나뉘는 개념도 아니었다. 훈구 대신은 말 그대로 원훈들, 즉 정통 공신 가문 출신을 말하고, 사림은 개인의 학문 사조를 말하는 것이라서 충분히 겹칠 수도 있었다. 현대 정치로 비유하자면 훈구는 원로, 사림은 진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진보 세력에도 얼마든지 나이많고 경력도 오래된 원로 정치인이 있듯, 당시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선조 시대에 "훈구파가 실각하고 사림이 집권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훈구 공신의 후손들도 점점 사림의 의견에 동조하고 구분이 옅어지면서 훈구라는 집단의 정체성만 사라진거지, 집권 세력이 교체되는 실질적인 사건이 일어난게 아니다. 훈구 공신들의 후손들은 선조대 이후로도 대대로 요직을 지냈다.

남곤은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라 공신 가문이지만 사림의 종장인 김종직의 제자로서 어찌되었건 사림에 속했다. 그는 정통 관료 출신이면서도 사림 세력[7]과 교류를 많이 한 사림 온건파에 가까웠으며, 중종 즉위 후에는 성희안, 박원종 등 기존 공신들과 대립각을 세웠고, 나름 청렴하고 깨끗한 인물이기도 했다. 능력도 출중해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서신을 만드는 일도 이 사람 혼자 전담했다. 그리고 사림의 대표 주자로 여겨진 조광조도 개국공신 조온의 후손이며 명망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문을 기준으로 본다면 훈구에 속했다. 정굉필의 경우 부친이 훈구파에 속하기에 훈구라고 볼수도 있지만 생전의 행적은 훈구나 사림에 구애받지 않았다

계파 분류상 겹친다는 점은 제외하고도 애초에 남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8] 남곤이 조광조와 정치적으로 척을 졌음은 사실이었지만, 기묘사화 당시에 남곤은 '귀양 정도나 한 몇 년 정도만 있다가 돌아오겠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실록 기록을 보면 남곤의 발언은 어느 순간부터 기묘하게 달라져 나중에는 조광조 일파로 보일 정도로 그들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당시 남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결국 기묘사화는 주연 중종, 조연 남곤·심정·홍경주, 피해자 조광조로 봐야 한다. 즉, 중종에 씐 유약한 이미지와 주초위왕 에피소드, 후대의 윤색이 섞이면서 주·조연이 바뀐 셈.

후대에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의 주역으로 남은 이유는 간단하다. 훗날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되면서 사실상 '조선판 유교 성인'의 위치로까지 추앙받았다. 따라서 당연히 조광조의 일생을 다루면서 그의 몰락하는 과정을 안 다룰 수가 없는데, 기묘사화의 주역을 중종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중종은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성현(聖賢)을 죽였다는 오점이 남는다. 중종의 체면과 이후 왕통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조광조를 신원하려면 누군가 그 책임을 대신 져야 했고, 그것이 남곤과 심정이었기에 이 둘은 '주초위왕'이라는 낭설과 함께 모든 오명을 대신 뒤집어 쓴 것이다.

3. 진행 과정

3.1. 조광조의 득세

1515년(중종 10년), 당시 이미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대표격 인물로 꼽혔던 조광조는 34살의 나이에 문과 전시에 합격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다. 성균관에선 나름 이름 알려진 유생이었지만 정계 신인이었던 조광조는 자신이 진출하기 직전,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이 올린 상소로 촉발된 '폐비 신씨 복위 상소 사건'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인다. 실록 기사

당시 조선의 조정을 틀어쥐고 있었던 반정세력은 대간을 이용해 박상과 김정을 탄핵하고 유배형에 처한 상태였다. 당연히 조광조의 의견도 꺾으려 했으나, 조광조는 이미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많이 확보해놓은 상태에서 이슈를 만든 것인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신하들 전체 여론이 조광조와 대간, 어느 쪽의 의견이 옳냐 틀리냐로 갈렸고 사태가 커진 끝에 대간은 교체되고 박상과 김정은 복직한다. 새파란 젊은 신인이 정계에 등장하자마자 두각을 보인 것이다.

이후 조광조는 문묘 배향 논쟁이나 군자-소인 논쟁 등 당시 조선의 주요 정쟁에 끝없이 참여했고 중종은 조광조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조광조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승진으로 도왔다. 급기야 1518년(중종 13년)에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의 의지로 과거제도를 보조하는 인맥 추천 천거제도인 '현량과'가 실시된다. 정광필 등 훈구파는 "애초에 과거제도 자체가 현량과, 효렴과 등의 구제도가 불러온 폐단을 거치고 성립된 제도이니 절대 시행해선 안된다."는 논리를 들어 반대했지만,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 세력들에게 묵살당했다.
사신은 논한다. 심하도다, 사람을 알기 어려움이여! 당요(唐堯)와 같은 성인도 그것을 걱정하였으니 진실로 어려운 일이로다. 김식이 바야흐로 경사(經史)에 잠심하고 있을 때에는 장차 성현의 학문을 궁구하여 일세를 요·순 같은 시대로 만들어 보고자 하였던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러나 시세에 편승하여 발탁된 뒤로는 조광조 등의 무리와 함께 대각(臺閣)을 차지하고, 또 안당(安瑭)의 논계(論啓)로 승진하여 조광조와 조정에 올라가서는, 조정의 정사(政事)를 변란시키고 국론(國論)을 어지럽히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좋아하고 자기와 지취가 다른 자는 배척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기세를 두려워해서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여 나라가 장차 위망(危亡)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광조 일파가 대거 등용된 실록 기사에서의 사신의 논평 실록 기사
결국 시행된 현량과는 시행과 동시에 온갖 폐단이 터져나왔고 조광조 일파만이 등용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 소격서 폐지 논란까지 불붙자, 조광조는 종종 중종의 권위마저 위협하는 발언을 보인다. 소격서 폐지를 중종이 반대하자 당시 조광조가 올린 상소를 보면 '임금의 계책에 법이 없어서이니 하민(下民)들이 어디에서 본받겠습니까?', '정도(正道)를 버리고 사도(邪都)에 미련을 두고 곧 용단을 내리지 못하시니', '신 등은 전하의 마음이 정일(精一)한 공부에 혹 이르지 못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등등 가관이 아니다. 중종이 조광조 숙청을 가닥으로 잡은 시기는 아무래도 이 '현량과 폐단'과 '소격서 폐지 논쟁'에서 조광조가 보인 모욕에 가까운 표현이 원인이 되었을 확률이 크다.

3.2. 소격서 폐지와 중종의 권위 실추

중종은 끈질기게 소격서 폐지를 반대했으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거의 하루에 1번 꼴로 소격서를 혁파하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사실 소격서는 정치적 기구도 아니고 '도교 의례를 지내는 왕실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이 유교 국가이긴 했지만, 정치사회적 교리에 끼어드는게 아닌 이상 민간 신앙 정도의 행위는 충분히 눈감아 주었다. 물론 '숭유억불' 기조를 끝까지 유지했고 불교에 대한 취급이 박하긴 했으며, 일부 과격한 유생들은 불교나 도교 시설 또는 관련 인물들과 '민간 차원'에서 마찰을 빚긴 했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종교 탄압은 없었다.

때문에 조광조의 집요한 소격서 혁파에 대한 집착은 꽤나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기구도 아니었으므로, 정쟁의 중심에 설만한 시설도 아니었다. 훈구파들도 "쟤네는 왜 저렇게까지 하지. 전하, 대간들이 출근도 안하고 드러눕는데 그냥 없애버리죠?" 수준의 반응이었고 중종 혼자 끊임없이 반대하는 와중에도 사림들은 물고 늘어졌다. 이때 사림들이 보인 태도도 참으로 '능멸'에 가까운 표현을 쓰고 있다.
중종: 소격서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아조(我朝)의 세종과 성종께서 태평의 정치를 이룬 것은 본디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혁파하지 않으셨으며, 이는 지금 창설한 것이 아니니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조광조: 가령 세종·성종께서 대성(大聖)이라 하더라도 이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으신 것은 큰 잘못입니다. (중종 13년 8월 28일)

조광조: 밝은 임금은 남의 말을 좋아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으며, 어두운 임금은 자기 의견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돌보지 않습니다. (중략) 조정 의논을 배격하시고, 간언(諫言)을 다한 사람을 갑자기 물리쳐 사기(士氣)를 꺾어서 위망(危亡)의 조짐을 보이니, 이는 어두운 임금이 하는 일이거늘 전하의 평소 학문으로 이처럼 극도에 이르실 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중종 13년 8월 30일)

신광한: 반복하여 헤아려보아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상(임금)께서 반성하고 깨닫는 바가 있게 하고자 하니, 모름지기 다시 참작하시어 조정이 안정되도록 하시는 것이 가합니다. 이제 또 윤허를 받지 못하면 신 등도 거취를 결정해야겠습니다. (중종 13년 9월 1일)
결국 1518년 7월 말부터 시작된 소격서 혁파 소동은 매일매일 혁파를 요구하는 아룀이 빗발치고, 대간들은 파업에 들어가고 중종에게 온갖 비아냥과 '암군'이라는 비난까지 서슴지 않고 온 조정의 업무가 마비된 끝에 중종이 항복하여 9월 3일 혁파가 선언된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이 승리하긴 했지만 중종의 자존심이 크게 깎여나갔음은 물론이다.[9] 사실 숭유억불 기조가 매우 심했던 조선 초기에도 왕실에서 개인적으로 불공을 드리거나, 절을 짓는 일 정도는 허용이 되었다. 중종은 느닷없이 이를 공격받았고 세종과 성종까지 들먹였음에도 결국 지키지 못했던 것.

이렇게 왕권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중종은 1519년에도 공신 위훈 삭제를 놓고도 사림에게 굴복해야 했으며, 점차 조광조의 숙청으로 가닥을 잡은듯 하다. 결국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칼을 빼든다.

3.3. 친위 쿠데타 개시

밤 2고(鼓)[10] 금중(禁中)이 소요하므로, 승지(承旨) 윤자임(尹自任) 공서린(孔瑞麟)·주서(注書) 안정(安珽)·검열(檢閱) 이구(李構) 등이 허둥지둥 나가 보니, 연추문(延秋門)이 이미 활짝 열리고 문졸(門卒)들이 정돈해 서 있었고, 근정전(勤政殿)으로 향해 들어가며 바라보니 청의(靑衣)의 군졸들이 전폐(殿陛) 아래에 좌우로 옹립(擁立)하여 있었다. 윤자임 등이 밀어제치고 들어가 곧바로 경연청(經筵廳)으로 가니 합문(閤門)의 안팎에 다 등불을 벌여 밝혔고, 합문 밖에는 병조 판서 이장곤(李長坤)·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전(金詮)·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화천군(花川君) 심정(沈貞)·병조 참지(兵曹參知) 성운(成雲)이 앉아 있었다.
11월 15일 늦은 밤, 중종은 이장곤, 김전, 고형산 등 사림 중 조광조 반대파와 사림의 개혁 정치에 반대했던 훈구파 대신들을 불러온 다음 병졸들을 경복궁 안으로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친위 쿠데타를 전개한다.[11] 당황한 조광조 일파 승지들은 한밤중에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오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면서 화를 냈지만 이미 중종이 비밀리에 야간통행증인 '표신'까지 발급해주었고 허락을 맡은 일이었다.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한성 우윤(漢城右尹) 최한홍(崔漢洪)·청성군(靑城君) 심순경(沈順徑) 등과 정광필·안당·이유청·이장곤·이자를 명소(命召)하여 함께 공신의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 (중종 14년 11월 11일)

《정원일기(政院日記)》에는 "임금이 편전(便殿)에서 홍경주·남곤·김전·정광필을 비밀히 불렀고 이장곤·안당(安瑭)은 뒤에 도착하였는데, 조광조(趙光祖) 등을 조옥(詔獄)에 내릴 것을 의논하였다."하였다.
작전 모의 과정은 중종이 따로 사람들을 모아 비밀리에 진행했다. 실록을 보면 사화가 벌어지기 4일 전, 중종은 홍경주, 정광필 등 훈구파와 이장곤 등 사건 당일날의 공모자들을 불러 '공신의 일'을 논했다고 되어 있다. 허나 사화가 벌어진 당일날의 실록 기록에는 그 때의 대화를 직접 실어두진 않았지만, 승정원일기에 중종이 따로 비밀리에 사람들을 불러 조광조를 숙청하고 의금부에 투옥하기로 의논한 기록이 있다고 주석으로 적어놨다. 다시 말해 사관에게는 '공신의 일'을 논했다고 둘러댄 다음, 사관이 입시하지 않은 자리에서 몰래 조광조의 숙청을 논의한 것이다.[12] 중종 대의 승정원일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사전 계획된 친위 쿠데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군 병력이 삼엄하게 근정전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광조 일파였던 승지 윤자임은 승지의 허락없이 어떻게 표신이 발급되었냐면서 중종을 만나고자 했다. 허나 돌아온 답은 오히려 윤자임은 승지에서 해임되었고 병조 참지 성운이 즉석에서 승지가 되었다는 하교였다. 즉각에서 승지가 된 성운보고 전교를 들으라는 명이 떨어지자 윤자임은 그렇다한들 어찌 사관없이 입대를 할 수 있냐고 승정원 주서(注書)를 맡고 있던 안정(安珽)이라도 들여보내려 했으나 무장한 군졸들이 안정을 강제로 떼어내고 성운 혼자 전교를 듣게 한다.
승전색 신순강(辛順强)이 곧 나와서 성운을 불러 말하기를, "당신이 승지가 되었으니 곧 들어가 전교를 들으시오."
하니, 윤자임이 외치기를,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였으나, 성운이 곧 일어나 들어가려 하니, 윤자임이 성운에게 외치기를,

"승지가 되었더라도 어찌 사관(史官)이 없이 입대(入對)할 수 있겠소?" 하고, 주서 안정(安珽)을 시켜 성운을 말리게 하였다. 안정이 말하기를,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관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소."

하고, 드디어 성운의 띠를 잡고 함께 들어가려 하였으나, 성운이 안정의 팔을 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문을 지키는 5∼6인이 안정을 밀어냈다. 얼마 안 지나서 성운이 도로 나와 종이 쪽지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을 다 의금부에 내리라."

하였는데, 거기에 적힌 것은 승정원(承政院)에 직숙(直宿)하던 승지(承旨) 윤자임(尹自任) 공서린(孔瑞麟)·주서(注書) 안정(安珽)·한림(翰林) 이구(李構) 및 홍문관(弘文館)에 직숙하던 응교(應敎) 기준(奇遵)·부수찬(副修撰) 심달원(沈達源)이었다. 윤자임 등이 다 옥에 갇히고, 또 금부(禁府) 에 명하여 우참찬(右參贊) 이자(李耔)·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정(金凈)·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도승지(都承旨) 유인숙(柳仁淑)·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朴薰)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이후로는 사관(史官)이 참여하지 않았다.】

내려진 전교의 명은 조광조 일파를 싸그리 의금부에 투옥하라는 명이었다. 이후의 일은 남은 기록이 없고, 실록에서도 적지 못하고 있어 대부분 추측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2고(二鼓)에 시작된 쿠데타가 5고(五鼓)[13]에 끝났으므로 새벽 내내 급박하게 사건이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16일 아침이 되자 조정의 직책에는 대격변이 일어났으며 중종은 훈구파 및 사건을 주도한 신하들을 싸그리 불러 입시하게 한 후, 조광조 일파를 '조광조를 우두머리로 하는 붕당'으로 지목하고 죄목을 추고하라는 명을 의금부에 내린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여 권요의 자리를 차지하고,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이 버릇이 되게 하여 국론과 조정을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朝廷)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게 된 일과, 윤자임·박세희·박훈·기준 등이 궤격한 논의에 화부한 일들을 추고하라.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을사 7번째 기사
얼떨결에 불려나간 정광필이나 안당 등은 중종의 처벌 리스트를 보고 당황하여 "전하께서 갑자기 이러실리 없다. 혹시 참소가 들어간게 아니냐"는 말까지 했고 사신이 이를 듣고 기록까지 해놨다.

또한 정광필은 이 일에 관여를 거부했다는 정황을 사관이 주석으로 실어놨다. 11월 16일의 기사를 보면, 친위 쿠데타가 터지기 전 남곤과 이장곤이 정광필에게 밀지를 들고 찾아갔으나 정광필은 접대하지 않고 남곤을 역으로 쏘아 봤다는 기록을 넣어놨다. 아무래도 정광필은 조광조의 정책에는 끝없이 반대했으나, 계파를 만들고 잘못된 정책을 시행한 정도로 신하를 숙청하고 죽이는 행보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새벽에 있었던 일에도 힌트가 있는 기록이 있다. 조광조를 벌주는 것을 반대하여 훈구파 대신들이 16일에 입대하여 중종과 논하는 기록에서 정광필은 "과격한 버릇을 구제하지 못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이제 듣건대, 조광조 등이 처음에는 이 일이 위에서 나온 줄 모르고 중간에서 변경이 있는가 하여 곧 나오지 않고 제 집에서 주저하였다 하니, 지극히 놀랍습니다."라고 언급한다. 즉, 11월 15일부터 16일까지 중종의 명령으로 이장곤이 불러온 군졸들은 한양도성 내부를 돌아다니며 위에서 언급된 체포 리스트에 적힌 조광조 일파를 모조리 체포했던 것이다. 늦은 밤에 자택에 있던 조광조는 영문도 모른 채 체포 명령을 듣고 처음엔 무언가 잘못 전달된게 아니냐면서 집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

또한 16일 아침부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바로 당일날에 성균관 유생 150명이 경복궁 궐문을 밀고 난입하여 곡소리를 내며 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중종은 시위가 커질 것을 우려했는지 주모자 5~6인을 체포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3.4. 사화 이후

중종은 모든 신하들과 유생들이 반대하는 와중에 조광조와 김정을 사사하겠다는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기겁하여 반대한다. 그러자 남곤은 조광조는 임사홍과 달리 그냥 "옳은 일을 하려다가 자신의 뜻이 저지될 것이 두려워서 자신이 소인이 되어가는 줄도 몰랐을 뿐이며, 임사홍도 유배에 끝났지 사사하진 않았다면서 법률에 어긋난다"고 말한다. 또한 정광필 역시 임사홍이 비슷한 죄를 지었어도 죽지 않았지만, 임사홍은 간교하나 조광조는 나라의 일을 위했을 뿐이라고 죽일 죄가 아니라 반박한다.[14] 특히 남곤은 중종이 죽여야 한다는 이유를 말할 때마다 모조리 반박하면서[15], 모든 신하들이 저마다의 근거를 대며 사형을 반대하자 일단 중종은 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한다.

대신들의 반대가 극렬하자 중종은 일단 사형은 취소하고 장 1백대에 처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정광필은 그것은 몸이 약한 선비들에게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고 또다시 항변했고[16] 이에 정광필은 끝까지 장형을 철회하라고 항변했고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때 이미 시각이 16일 3고(밤11시~새벽1시)를 넘겼다고 한다. 이장곤 등이 16일 새벽에 조광조를 체포했고, 중종은 그날 아침 바로 신하들을 소집해 조광조 일당을 사형하려 했으나, 정광필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끝까지 반대 작전을 펼쳐 결국 만 하루를 꼬박 새워가며 시간을 끈 것이다.[17]

결국 반대가 계속되자 중종은 일단 조광조를 멀리 귀양보내 안치하는 것으로 형벌을 바꾼다. 허나 사건이 1달여 쯤 지났을 때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일부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고 중종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사하라는 명을 내린다.[18] 그러자 이번에는 남곤 등이 나서서 반대했으나 끝내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한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가관이 아닌게, 관직에 있던 인물도 아니고 고작 생원이 올린 상소를 보고 사형을 때린다. 생원이 아예 일자무식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조정의 고관대작들에게 비하면 아무런 감투도 없는 무명의 선비에 불과하다. 수십 년간 관직에 몸을 담아온 정광필, 남곤 등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면서 생원의 상소는 받아들여 사형을 때린 것을 보면 중종이 얼마나 조광조를 죽이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임금이 더욱 의구하여 홍경주에게 여러 번 밀지를 내렸는데, 그 밀지에는 글의 뜻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고 언서(諺書)를 섞은 것도 있으므로 이제 기록하지 않으나 그 대개는 이러하다. "임금이 신하와 함께 신하를 제거하려고 꾀하는 것은 도모(盜謀)에 가깝기는 하나, 간당(奸黨)이 이미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하여 제재하기 어려우니, 함께 꾀하여 제거해서 종사(宗社)를 안정하게 하려 한다……"
조광조의 사후, 실록을 적던 사관은 어떻게 밀지의 내용을 얻었는지 중종이 홍경주에게 내린 밀지의 일부 내용을 기록해놓았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중종이 홍경주, 이장곤 등과 도모하여 조광조를 숙청한 친위 쿠데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마저도 이장곤은 왕명을 따랐을뿐, 남곤과 정광필과 마찬가지로 조광조의 사사에 반대한다.[19] 사실상 친위쿠데타의 모든 주도권이 중종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중종의 의중

중종이 기묘사화의 주역이라는 점은 이처럼 확실하지만 '중종이 왜?'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중종이 회고록을 남긴 것도 아니고[20] 중종 본인이 당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1차적으로 꼽히는 원인은 우선 조광조가 왕권과 조선 왕실에 대한 도전 행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실 중종 치세 초기는 아무리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섰다고는 해도 반정은 반정이라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거기에 운도 없이 중종 치세때 재난이 매우 잦았다. 종묘에 벼락만 2번 떨어졌고, 성저십리쪽인 지금의 성북구에서 진도 6.7의 지진이 일어나 전국이 흔들리고, 가뭄, 가을장마,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가 한해 몰아서 일어나고, 전염병도 돌았다. 이러니 가뜩이나 약했던 왕권이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중종과 조광조는 당시 조선 왕실에서 전통적으로 존중해왔던 도교풍 제사기관인 소격서 철폐를 놓고 격심한 의견 대립을 보인 적이 있다. 이때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에 두고 강경하게 폐지를 요구했다. 수차례 폐지 논의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성종 같은 역대 왕들이 지켰던 소격서가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없어지게 되자 중종은 체면이 깎이게 되었다. 결국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조광조의 행동을 중종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계속해서 왕권을 위협하고 신하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태도에 슬슬 화도 났을 것이다.
홍문관에 전교하기를, "소격서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아조(我朝)의 세종과 성종께서 태평의 정치를 이룬 것은 본디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혁파하지 않으셨으며, 이는 지금 창설한 것이 아니니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매, 조광조 등이 재차 아뢰기를,

"가령 세종·성종께서 대성(大聖)이라 하더라도 이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으신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 만약 세종·성종께서 혁파하지 않으신 것이라 하여 끝내 혁파하지 못하시면, 뒤를 잇는 자손도 반드시 성상을 핑계하여 말할 것이니, 유행하는 폐단이 오늘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 8월 28일 4번째 기사#
실제로 실록 기사에 따르면 조광조는 점점 선을 넘는 발언을 일삼고, 조선 왕조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이전 왕의 행동을 신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발언까지 했다.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 하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받아쳤다.

선대 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당시 시대에서 사안에 따라서는 역도로 몰리기에도 충분한 언행이었다.[21] 선왕에 대한 평가는 설령 지금 왕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지라 조선 역사를 보면 선왕의 결정을 뒤엎지 못하거나 뒤엎어도 실제 생각은 달랐을 것이라느니 신하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느니 하면서 우회적으로 건드렸을 정도이다.[22][23]

따라서 조광조의 행동은 전제 왕권 체제에서 용납될 수 없었고, 면전에서 자신의 고조부에 대한 지적을 들은 중종도 그 앙금을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둘 만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은 당대나 현재나 조선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사람인데 유일한 오점이 어쩌고 하는 것 자체는 왕 입장에서는 더욱 꺼림찍할 수 있었다. 즉, 이런 식으로 조광조 일파가 점차 '선을 넘는 발언'을 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에 숙청하기로 가닥을 잡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이 소격서 혁파 사건 전에도, 조정이 '조광조 일파'로 채워지기 시작하자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광조 세력 신하들이 근래에 나라가 바로잡혀가고 있다며 이게 다 조광조 덕이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 역시도 문제인 것이 전제군주제 하의 국가에서는 정말 왕이 쉴드 불가능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의 실책은 신하의 실책이 되고 신하의 공적은 왕의 공적이 된다. 그런데 저 발언은 중종 면전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조광조의 정책은 조광조에게서 나온 것이니 실제로는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 앞에서 조광조 덕이에요(=당신 덕이 아니다) 라고 하는것에 중종의 기분이 어땠을까?[24]

이외에도 기묘사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위훈삭제 사건에서 조광조 일파가 주장했던 삭제 명단에는 종친들도 많이 있었기에 왕가의 지지 세력이 흔들리게 되자 중종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있다. 어느 방향이든 왕권에 위협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당대의 위훈삭제 사건이 나름 정당한 행동이긴 했다. 위훈의 수가 너무 많고 반정공신들 중엔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껴서 논란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위훈삭제는 이미 중종 초의 대간들도 주창했던 일이며 실제로도 일부가 개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정당하고 부당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종 입장에서 그들이야말로 임금인 자신에게 가장 든든한 친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종반정을 기획, 실행하여 중종 정권을 출범시켰고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3은 이미 사망한 뒤라, 남은 공신들은 정말 중종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모조리 삭제하자는 주장은 중종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느낄 소지가 충분하다.[25]

나름 개혁파라고 생각해서 힘을 몰아줬지만, 그게 제대로된 개혁이라기보다는 사림끼리 정계 인맥을 형성하고 코드인사로 점철된 '우리끼리' 정치를 보여줬기 때문에 중종이 실망해서 숙청을 결심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조광조가 실각한 이후 조광조 및 그 일파가 저지른 현량과의 폐단이 온갖 곳에서 고발되어 나온다. 주된 고발 내용은 급에 맞지 않고 실력이 부족한 인사를 단지 사림 조광조 일파라는 이유만으로 두루 요직에 앉혔다는 것.
현량과(賢良科)는 부득이 혁파해야 합니다. 당초에 듣건대, 김식(金湜)은 급제한 자가 아니건만 저들이 다 끌어들여서 경연관(經筵官) 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게 하고자 하였으나 조종의 법이 아니므로 현량과라는 명목으로 저희가 아는 자들만을 뽑아서 시험하되 그 사람들의 이름 밑에 ‘경제(經濟)가 유여(裕餘)하다.’ 느니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 느니 주를 달았다 합니다. 대저 경제가 유여하다는 것은 능히 성인 지위에 도달한 자라야 그런 것입니다. 널리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사람을 경제가 유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도 성인 지위인 사람입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 오직 안자(顔子)한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자유(子游)·자하(子夏)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저런 자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26] 이것은 다 임금을 속인 것이며 그 나머지도 이와 같습니다. 임금께서 능히 깨달으시면 쾌히 결단하여 혁파해야 하고 이렇게 유난하셔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4일 2번째 기사#
이러한 고발이 사화 이후에 터져나온 것은 조광조 일파가 죄다 실각했기 때문에 뒤이어 나온 것이지 인사 비리 자체는 이전부터 계속 암암리에 문제제기되었을 확률이 높다. 당연히 중종 귀에도 들어갔을테니 조광조에게 크게 실망하여 결국 숙청으로 가닥을 잡지 않았겠냐는 것. 그전까지는 문제제기가 거의 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연하다. 조정의 요직들이 죄다 조광조 일파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제기를 할래도 할수가 없었던 것. 괜히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면서 숙정문으로 몰래 훈구파들을 입궐시키고 조광조 일파 모르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게 아니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이 서로 붕비(朋比)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궤격(詭激)이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朝政)이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왕법(王法)으로 논하면 본디 안율(按律)하여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특별히 말감(末減)하며 혹 안치(安置)하거나 부처(付處)한다. 대저 죄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데 벌은 경중이 없이 한 과조(科條)로 죄주는 것은 법에 어그러지므로 대신들과 경중을 상의하여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김식·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6일 2번째 기사#
실제로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중종의 전교를 보면 중종이 지목한 조광조의 핵심 죄목은 자신들끼리 편을 만들어 싸고 돌았고, 자기 사람들만 천거하는 코드인사를 행했으며 국론이 뒤집히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내린다. 중종이 생각한 조광조 숙청 사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교에는 아무래도 생각하기에 가장 큰 핵심적인 죄목을 대표로 언급했을테니 이게 숙청을 결심한 결정적인 사유일 확률이 높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종이 폐위 과정을 눈으로 목격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왕권에 위협되는 조광조와 그 이상의 권력을 갖는 권신 김안로의 숙청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 추측이 설왕설래하지만, 중종이 실제로 어떤 의도로 숙청을 밀어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명했다시피 중종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위의 추측 중 하나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사유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숙청을 결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중종이 조정 중신들의 수차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하여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고, 심야에 미리 친위 세력까지 준비해 조광조 일파를 일거에 쓸어낸 것을 보면, 중종의 조광조 숙청 의지는 예전부터 확고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평범하게 정국을 돌보다가 벌레에게 파먹힌 나뭇잎 따위를 보고 홧김에 갑자기 결정한 숙청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5. 후일담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입궐명령을 내렸고, 남곤, 심정 등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신무문으로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갑자기 소집된 조정 회의에 놀란 조광조 등 사림파는 부랴부랴 경복궁으로 들어왔지만 회의는 이미 끝난 뒤였고 곧바로 체포되었다. 어리둥절했던 조광조는 감옥 안에서 배신감을 가져서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고 한다. 죄인이 어떻게 감옥에서 술을 구했나 싶을 텐데, 조선시대의 감옥은 사식이 없으면 수감자가 굶어 죽을 만큼 거의 식사를 챙겨주지 않았다. 대신 감옥 밖에 있는 가족들이 수감자 먹을 음식을 챙겨주게 하였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잘 살던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더라도 다른 가족만 멀쩡하다면 그만큼 사식이 잘 들어갈 수 있었다는 뜻도 된다. 그래도 술은 너무했다.

다음 날 취조를 위해 간수들이 조광조를 끌어냈을 때는 이미 너무 취해서 심문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서 만취한 나머지 조광조는 심문관이었던 병조판서 이장곤에게 술주정을 했는데 "희강(이장곤의 자)아!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못난이 같으니라구!"라는 반말도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결국 이게 조광조를 죽음으로 모는데 중요한 명분 중 하나를 제공했다. 중종은 대신들 거의 전부가 조광조의 사형을 반대하는 와중에 "국문장에서 한 짓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하며 사형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남곤이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습니다."라고 술에 취해서 벌인 실수라 죽이는 것은 심하다며 반박했기에 사형을 언급하지 못하고 결국 유배로 끝이 났었다.[27]

앞에서 말했다시피 남곤과 정광필의 만류로 조광조는 능성으로 귀양 당했지만 한 달도 못 돼 바로 사사당했다. 이 외에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 수십 명도 역시 유배됐다. 현랑과는 없어졌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긴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불렀다. 다만 조선 당대에도 비판이 있어서 율곡 이이는 16세기 후반에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했고, 퇴계 이황 또한 조광조를 두고 공부가 부족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대체로 조광조가 너무 과격하게 이상 정치를 추구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조광조의 개혁에 긍정적인 부분도 있기는 하다. 한전론과 노비 종모법을 중심으로 연산군 이후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국역의 이완, 지배층의 모랄해저드와 토지 잠식, 양소천다 현상을 해결하려 했고 훈구와의 격렬한 충돌 끝에 절충론이라 할 수 있는 급양자 3자 첨입까진 이끌어 낸다. 이 시기 조선 인구의 50%가 노비였다. 국가가 내부에서 완전히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 대에 집권한 후대 사림들 중에 이 정도로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사람이 없다. 제대로 언급이나 관련된 개혁 논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치부에만 열을 올렸다. 사림, 특히 서인을 중심으로 개혁론이 제기되고 사족들이 동감하게 된 건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 이후다. 개혁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나서야 움직였다. 허나 조광조도 그 일파도 사실 민생문제나 부국강병보다는 자신들의 성리학적 이념 실현에 더 맹목적으로 매달려 있었기에 맞는 얘기는 아니다. 즉 조광조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수구반동이라기보다는 자기네들 눈에 보기에도 조광조가 너무 맹목적이라 공부가 부족하다고 평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도 세종대왕, 성종대왕이라도 잘못했습니다란 돌직구는 시대관을 감안하면 망언급이다. 또한 현량과를 통해서 코드인사라는 무능한 자기 일파로만 가득 채운 후 자신들에게 반대하면 무조건 소인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비롯해 시와 문장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망언과 속고내 토벌 반대를 하면서 보인 망언 등은 옹호의 여지가 없고, 조광조를 신격화시킨 사림들도 해당 부분의 언급을 하지 않을 정도.

선조 1년에 조광조는 신원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는 등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주범이자 선왕인 중종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왕조 국가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초위왕' 날조설이 공식화되고 모든 책임은 남곤과 심정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때 이순신의 조부인 이백록도 기묘사화에 휘말려 처벌을 받았다. 단,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처럼 사약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 생활을 한다. 그러니 이순신더러 역적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틀린 말.

게다가 이순신이 벼슬 생활을 시작한 선조 시대에는 여론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사림들에게는 더욱 오래 전부터 기묘사화가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상이 기묘사화 때 해를 입었다.'고 하면 역적의 자손이라 하여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만한 일이었다. 당장 인조 때 명신 김육만 해도 증조부가 조광조 때 같이 피해를 입은 김식이었다. 김육의 가문은 송시열과 대대로 대립하며 김석주까지 번영을 누렸으나 후반기에는 송시열과 다시 손을 잡았다.

한편 이 사화는 훗날 이이이준경이 대립하는 한 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이는 을사사화(1545)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반면, 이준경은 함부로 시도해선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준경은 바로 조광조의 제자였고, 그 조광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

6. 관련 문서


[1] 파자이므로 의미 해석에 의미는 없지만 굳이 해석해보자면 똑같이 달린다가 된다. 왕과 같은 길을 걷다가 결국 추월해버리고 왕이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2] 조선을 비롯한 왕조국가에서는 자신이 연관된 적도 없는 역모 집단이 자신을 추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게 된 왕족들이 많았다. 그만큼 왕의 자리를 노린 죄는 무겁게 다스렸고, 당대 사람들에게 이는 숨을 쉬듯 당연한 패러다임이었다. 따라서 조광조에게 어떤 형태로든 '왕이 된다.'는 참언이 나돌았다면 조광조라는 인간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안타깝다고 여길 수는 있어도 사약을 받는 것 자체는 납득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3] 실제로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 시기, 조광조의 관직이 잠깐 회복되는 일이 있었고 이를 인종 사후 행장에 인종의 업적으로 실으려 하자 '이걸 적으면 인종에게는 업적이 되겠지만 중종에게는 위신이 깎이니 적지 말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삭제된 바 있다. 당시 실록 기사 이걸 기록한 사관은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했는지 삭제한 내용을 실록에 주석으로 적어놨다.[4] 조광조가 현량과를 시행하려 할 때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자가 정광필과 남곤이다.[5] 현재의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이양면, 청풍면, 춘양면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구역.[6] 서얼 출신인 유자광의 어머니가 노비 신분이라는 것을 언급해 유자광을 모욕했다는 설이 있기도 했다. 물론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라서 왕의 권세에만 기대야만 하는 처지라서 훈구파와도 겉도는 수밖에 없는 신세였지만.[7] 남곤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의 동문 겸 친구였다.[8] 오히려 중종이 두려워서 억지로 따른 티가 드러나는데, 정광필을 설득하라고 중종이 밀명을 내려도 정광필에게 가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등 내심 찬성하지는 않지만, 병력까지 동원한 중종이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따르며 방관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광조를 진짜로 죽이려 드는 중종의 행동에 자신의 관직까지 사임할 각오로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돌변하는데, 연산군 때의 사화가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던 것으로 보인다.[9] 소격서 혁파 논란 당시 사림들이 올린 상소에 나온 이야기를 보면 중종은 불교나 도교의 다른 '폐단'들은 혁파를 쉽게 허용해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격서 만큼은 조선왕실의 전유물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10]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11] 여담으로 중종이 작전을 개시한 11월 15일 보다 불과 3일 전에 이장곤을 병조판서로 제수한다. 중종은 미리 이장곤에게 언질을 줬을 확률이 높고 군권을 틀어쥘 수 있는 병조판서 직을 맡자마자 시행되었을 확률이 높다.[12] 실록의 원고인 사초는 춘추관 소속 사관이 기록했으며 승정원일기는 제목 그대로 승정원 소속 정7품 주서(注書)가 기록했다.[13] 고(鼓)는 경(更)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밤 시간을 세던 단위다. 즉 밤9시~11시에 작전이 개시되어 새벽3시~5시에 체포작전이 끝난 것이다.[14] 임사홍은 성종 시절 유자광과 다른 신하들과 '파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의주로 유배된 바 있다. 정광필 입장에선 현량과 같이 폐단이 많은 정책을 잘못 시행한 것은 죄를 줄 사안조차 아니고, 설령 '붕비'를 만들었다는게 사실이라고 쳐도 죽일 정도의 죄목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15] 심지어 중종이 조광조가 이장곤의 이름과 자를 함부로 부른 것을 이유로 죽이겠다고 하자, 남곤은 술에 취해 미친 사람 같았다고 하면서 조광조가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로만 취급하며 반대했다. 그야말로 어떻게든 트집거리를 잡아내서 죽이려고 드는 중종을 필사적으로 막던 것.[16] 장형은 대부분 '속전'이라 하여 돈을 내고 대수를 깎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매우 쎈 벌금형' 정도에 가까웠다. 문제는 속전은 원칙상 왕의 허락이 있을때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평상시라면 '장 1백대'는 때려죽이라는 명이 아니라 벌금을 많이 내라는 형벌이었겠지만, 중종이 조광조를 사형시키려고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이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철회한 것이니 속전을 허가할리가 없었다. 즉, 신하들은 중종의 의도를 뻔히 알았기 때문에 장 1백대도 반대한 것이다.[17] 남곤과 정광필은 적극 반대하고 심정 역시 "(대신들의)뜻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소극적 반대를 표했다. 남곤과 정광필이 둘 다 각자 조광조가 잘못하긴 했어도 옳은 일을 하려다가 자신이 잘못을 범하는 줄도 모르고 실수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조광조에 대한 신료들의 인식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18] 조광조를 죽일 구실이 없어 중종이 고심하던 끝에 상소 하나가 올라왔다고 좋다구나하고 해치워 버리자, 이 상소를 기록한 실록에서 사관은 '사관은 논한다'는 말로 상소를 올린 유생을 대차게 까고 있다.[19] 남곤과 정광필이 조광조 일파와 대립하던 것과 달리 본래부터 이장곤은 조광조와 친분이 있었다.[20] 조선 역대 국왕들의 일기인 일성록이 편찬되는 건 정조 대부터다. 설령 당시에 일기를 적었더라도 기묘사화 같은 파장이 어마어마했던 사건을 기록하면서, 중종 본인이 거기에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기록했을지는 의문이지만.[21] 조선은 엄연히 왕권을 가장 중요시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는지라, 신하의 공로는 왕의 공로가 되고, 왕의 과오는 신하의 과오로 치부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왕의 권위와 무오류성은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왕권 및 왕조 유지를 위한 절대적 기반이다. 만약 이게 금가면 선왕의 정통성 뿐만 아니라 현재 왕의 정통성, 나아가 왕조 전체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22] 당장 무오사화가 왜 일어났는지부터 생각하자. 연산군은 조의제문으로 인해 세조는 왕위 찬탈자이자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고 오명을 씌웠다는 식으로 연결해서 삼사를 숙청했다. 또한, 몇천 년 전 중국 진나라 시기에 번건이 당시 황제인 진무제에게 등애의 사면을 건의한 것이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고 촉한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왜 나왔겠는가? 그를 사면하는 순간 선대 황제이자 아버지인 진문제가 그를 평상시에 위험한 존재로 눈여겨 보고 있다가 종회의 반란을 구실 삼아 죽였다는 점을 자식인 진무제가 시인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23]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잘 보면 알겠지만 조광조 본인의 몰락도 이런 식으로 윤색되었다. 기묘사화는 중종이 주도적으로 나선 숙청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남곤과 심정이 저지른 것으로 바뀌었다.[24]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후세 사람이 보기에도 군주의 권위가 외형상으로도 짓뭉개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왕조 말기, 그것도 에나 보이는 현상이다. 예시를 들어 조조가 동귀인과 복황후를 죽인 일, 고징이 효정제에게 "건배하시지요" 라는 말을 한 일 등에서 당시의 군주인 헌제와 효정제 모두 각각 후한과 동위의 마지막 군주였다. 물론 조광조 일파가 중종을 무시한건 아니다만 다른 신하들이 다른 신하의 공업을 군주의 공업이라 하지 않고 해당 신하의 공업이라 하는 것에 중종의 기분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25] 특히나 중종은 공신 문제로 초기에 여러차례 사건사고를 겪었다. 김공저의 옥사 당시 김공저가 공신이 못 되어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으니 우려스럽다고 말한 게 드러났고 이과의 옥사는 아예 자기가 공신이 못 되었다고 역모를 꾀하다가 걸린 일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반정에 참여하고도 대우받지 못한 무관, 종친이 다수 있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이다. 그 뒤에 벌어진 신복의의 옥사는 개정당한 무관, 종친 출신 공신들이 역모성 발언을 주고받다가 생긴 일이다. 즉, 중종은 이미 공신 책봉, 개정 문제로 초기에 여러 난제들을 충분히 겪었다. 그런데 위훈삭제 대상자는 1등에서 4등까지 숫자도 전체 100여명 중 70여명에 달했다. 이러니 중종은 경악할 수 밖에... 그나마도 처음에 대신들이 주창한대로 4등 중에서 (심지어 이 4등은 대상자가 50여명에 달했다.) 문제 있는 사람만 추려내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중종도 여기까지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는지 별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그것도 아니니...[26] 쉽게 말해 능력보다 훨씬 후하게 평가를 주면서 자기 일파 사람을 일부러 요직에 앉혔다는 뜻이다.[27] 중종은 죽여야 하는 이유를 계속 강조하나 남곤이 그 때마다 막아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선 유배를 보낸 후에 죽여야 했다. 이 때 중종의 위협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감안하면 남곤과 정광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조광조의 사형을 막으려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셈인데, 중종에게 옳은 말을 하는 정광필마저도 중종이 위훈삭제를 취소하라고 계속 압력을 놓자 결국에 굴복해야 했을 지경이었다. 당장 중종의 친위쿠데타로 인한 군대에 의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