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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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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임사홍
任士洪
파일:임사홍.jpg
성명 <colbgcolor=#fff,#1f2023>임사홍 (任士洪)
아명 임사의 (任士毅)
본관 풍천 임씨(豊川 任氏)
이의 (而毅)
출생 1445년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음력 1506년 9월 2일 (향년 61세)
직업 관료, 정치가, 외교관, 사상가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붕당 훈구파 (궁중파)
약력 병조판서
가족 관계 부 : 임원준
자녀 : 임광재, 임희재, 임문재, 임숭재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가족 관계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정치가이자 외척.

2. 생애

임원준의 아들로 1445년 태어났으며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 1466년(세조 12년) 사재감사정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사홍은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고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 선위사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그래서 임사홍의 능력을 높게 산 성종은 임사홍을 문관으로 등용했고 홍문관교리,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대사간, 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역임시켰다.
정승이라도 법령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임사홍은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판을 자주했는데 이로 인해 사림의 눈엣가시가 되었는데 장인인 보성군의 손자이고 처조카가 되는 이심원이 임사홍을 매우 싫어하여 시시콜콜 집요하게 탄핵했다. 그런데 이심원은 임사홍과 나이차가 5세 밖에 안 되었지만 엄연히 고모부와 처조카였기에 이심원은 작정하고 고모부인 임사홍과 사돈어르신인 임원준을 말도 안되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 성종에게 탄핵을 요청했지만 이를 들은 성종도 기가 막혀 사소한 것을 집요하게 이야기한 이심원에게 짜증을 냈다. 이를 들은 보성군 이합과 아들 이위가 성종에게 와서 이심원의 행동을 성종에게 사죄드리며 손자의 행동에 벌을 주라 청하였다. 이심원의 탄핵을 요약하자면 왕에게 고모부가 소인배이고 사돈어르신이 똑같은 부류이니 처벌해달라하니 왕도 기가 차서 한 소리 하고, 이를 듣고 당황하고 화가 난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자기 사위이면서 처남과 사돈 양반을 탄핵한 손자에게 "고모부와 사돈어르신께 무슨 무례한 짓이냐?"하고 꾸짖었는데도 손자가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자 안되겠다 싶어서 임금한테 고발한 것이다.[1]
비록 (술을) 금할지라도 조사(朝士)는 적발당함이 없고 오직 소민(小民)만 죄를 받을 뿐입니다.
성종실록 91권, 성종 9년 4월 21일 임자 4번째기사

1478년(성종 9년) 4월 전국에 '흙비(황사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사람들은 하늘의 변괴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이에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여기서 도승지였던 임사홍은 흙비는 재이(災異)가 아니며 국가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간언하였다. 그러자 3사는 임사홍의 발언을 비판하였고 대간들 역시 임사홍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줄줄이 올렸다. 성종은 처음에 임사홍의 편을 들면서 대간들의 탄핵을 저지했으나 대간들의 탄핵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성종도 뜻을 거두고 대간들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2]

결국 임사홍은 위의 사건과 더불어 유자광 등과 파당을 만들고 현석규를 음해했다는 죄목으로[3] 의주유배를 가게 된다.[4] 임사홍이 유배를 간 이후 성종은 임사홍을 정식으로 복권시키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불발되었으며 결국 임사홍은 12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성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사홍을 유배에서 풀어주고 다시 등용한다. 성종은 1490년(성종 2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에 임사홍을 임명하였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사홍을 제수하면서 같은 해에 임사홍은 선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만 이렇게 성종이 등용을 했다고는 해도 정식으로 정계에 복귀한 것은 아니었다.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엄청난 탄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거의 2페이지 분량이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탄핵 상소문으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반대가 심했으니 이라 하더라도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복권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원자를 생각해서라도 폐비만은 불가합니다.[5]

성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많은 이복 여동생 중 휘숙옹주를 많이 아꼈는데 휘숙옹주의 남편이 바로 임사홍의 4남인 임숭재였기 때문에 연산군은 임숭재를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1500년(연산군 6년) 임숭재는 연산군에게 자신의 아버지 임사홍에 대한 탄핵이 부당함을 탄원하였고[6] 연산군은 이를 받아들여 임사홍을 정식으로 복권시킨다.[7] 그 뒤 갑자사화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참수당할 뻔하나 과거 성종 시절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를 반대한 일로 모면한다. 이후 1505년(연산군 11년) 조선 8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로 임명된다.[8]

하지만 연산군의 폭군 행위에 반발한 대신들은 1506년(연산군 12년 / 중종 1년) 9월 2일에 중종반정을 일으켰고 임사홍은 이날 자택에서 동생인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 의해 살해된다.[9]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매장했으나 이후 20일 뒤에 의금부중종에게 "임사홍을 부관참시하고 적몰 가산해야 한다"고 하였고 중종이 이를 윤허하여 임사홍은 부관참시되어 효수된다.

3. 평가

중종반정에서 처형된 후 성종과 연산군 시절의 행적을 말미암아 간신과 소인(小人)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폐비 윤씨에 대한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려서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하는 주동자로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연산군이 애초부터 계획하며 주도적으로 일으킨 사화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핍박했던 사대부들을 숙청[10]하고 부관참시 했다는 점, 이렇게 경쟁자들을 제거한 후 연산군의 측근으로 아부하면서 은총을 믿고 사욕을 채우는 등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임사홍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관련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임사홍이 갑자사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가 부족하고[11] 그의 행실 또한 간신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한다. 특히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주도했다는 주장의 근거들이 대부분 야사거나 사관 개인의 의견이고 오히려 임사홍은 이극균과 친분 때문에 참수당할 뻔한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도 반정을 일으킨 중종 대의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지며 갑자사화 당시의 <연산군일기>에는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임사홍을 간신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임사홍은 채홍사 일을 할 때 연산군에게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크게 지적을 당한 일이 있다. 심지어 이때 임사홍을 평생 동안 괴롭히던 소인배 소리까지 연산군에게 들어야 했다. 특히 연산군은 임사홍의 2남인 임희재가 자신을 비판한 시를 썼다며 임희재를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임사홍을 재평가하려는 측에서는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크게 신뢰를 받은 관료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4. 여담

5. 가족 관계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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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심원은 이 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집에서 쫓겨나고 훗날 갑자사화 때 두 아들과 화를 입는다.[2] 사실 임사홍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탄핵을 받은 것은 임사홍이 종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국정을 농단할 것을 대간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파악된다. 특히 임사홍이 대간들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도 탄핵을 받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3] 웃기게도 이 때 임사홍을 이 혐의로 탄핵한 대간들은 그 때는 임사홍과 마찬가지로 현석규를 음해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4] 사실 유배를 간 것도 대간들이 사형시키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것을 성종이 반대하며 임사홍을 최대한 배려해 감형한 것이었다.[5] 임사홍의 이 말로 인해 폐비 윤씨의 폐출이 늦춰졌다. 하지만 결국 폐비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6] 연산군일기 38권, 연산 6년 8월 19일 신축 3번째기사[7] 연산군일기 48권, 연산 9년 1월 21일 기축 3번째기사[8] 다만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인지 연산군이 임사홍을 질책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9]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10] 대간들의 견제 때문에 무려 12년 동안 유배를 갔었고 유배에서 해방되고 관직에 복귀한 후에도 대관들의 탄핵에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이 시절에 사대부들에게 맺힌 원한 때문에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도록 부추겼다고 판단된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주동자는 바로 연산군이다.[11]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을 해석해서 나름 핵심적인 역할을 한 유자광과 비교해도 임사홍은 갑자사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다.[12] 이사람과 비슷한 인생을 겪은 사람으로 남곤이 있다. 남곤도 시문에 능했고 중국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였지만 기묘사화의 주동자라는 오명을 쓰고 억울하게 간신으로 몰려 후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13] 다만 해당 기록은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 편이다.[14] 효령대군의 3남[15] 노사신의 아들[16] 연산군 대의 간신 트리오로 대중들에게 손꼽히는 신수근, 유자광, 임사홍을 모두 연기하였다. 다만 신수근과 임사홍은 간신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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