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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74년 (현종 15년) | ||
사망 | 1740년 6월 19일 (향년 66세) (음력 영조 16년 5월 26일) | ||
한성부 | |||
묘소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 ||
재임기간 | 제158대 영의정 | ||
1724년 11월 18일 ~ 1725년 3월 21일 이후 (음력 영조 즉위년 10월 3일 ~ 영조 1년 2월 8일 이후) | |||
제160대 영의정 | |||
1727년 8월 17일 ~ 10월 7일 (음력 영조 3년 7월 1일 ~ 8월 23일) | |||
제161대 영의정 | |||
1727년 11월 19일 ~ 1729년 6월 14일 (음력 영조 3년 10월 7일 ~ 영조 5년 5월 18일) | |||
제166대 영의정 | |||
1737년 9월 5일 ~ 1740년 6월 19일 (음력 영조 13년 10월 7일 ~ 영조 16년 5월 2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b82642><colcolor=#fff> 시호 | 문충(文忠) | |
본관 | 경주 이씨 | ||
자 | 상보(尙輔) | ||
호 | 운곡(雲谷) | ||
붕당 | 소론(완론)[1] | ||
신원 | 1725년(영조 1) 7월 4일 삭탈 1727년(영조 3) 7월 1일 복권 1755년(영조 31) 3월 2일 추탈 1768년(영조 44) 8월 18일 복권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 추탈 1908년(융희 2) 4월 30일 복권 | ||
부모 | 부친: 이세구(李世龜, 1646 ~ 1700) 모친: 고령 박씨 박장원(朴長遠, 1612 ~ 1671)의 3녀 | ||
부인 | 전처: 풍산 홍씨 홍만회(洪萬恢, 1643 ~ 1709)[2]의 3녀 후처: 나주 임씨 임시(林蓍)의 장녀 | ||
자녀 | 양자: 이종익(李宗翼)[3] 서자: 이종인(李宗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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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경종~영조 때의 문신. 소론의 영수.[4] 본관은 경주 이씨. 오성부원군 영의정 이항복의 현손이다.2. 생애
1694년 문과에 장원[5]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한다.정언, 지평, 교리, 이조좌랑등 삼사를 역임하고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나 숙종이 소론을 내친 병신처분으로
경종이 즉위한 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경종 초기에는 노론의 세력이 강력해 경종은 노론의 뜻대로 하는 듯 연기하다가 환국을 일으켜 노론 4대신(이이명, 조태채,[6] 이건명, 김창집)을 사사하고 노론의 세력을 꺾었다. 그는 경종이 노론의 세력을 약하게 하는데 조태구, 조태억, 류봉휘, 최석항 등과 세제대리청정을 반대하였다. 노론이 쫒겨나는 신축환국이후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병조와 이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영조 즉위 직후인 1724년(영조 즉위년) 11월 영의정에 올랐다. 1725년(영조 1) 3월 신임옥사의 책임을 묻는 노론의 공격으로 파직당했고, 동년 7월 4일 류봉휘[7]는 유배 보내졌고 이광좌, 조태억은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송출되었다.[8][9] 1727년(영조 3) 7월 1일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정미환국을 단행하자 특별히 서용(敍用)되어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노론은 힘이 약해졌다.
얼마 후 소론 준론과 남인이 난을 일으키자 침착하게 난의 중심 인물을 체포하고 진압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10]에 책록되었으며, 동시에 두 달 동안[11] 영조를 보좌하여 대리집정을 맡았다. 1729년 5월 소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니 임금이 허부(許副)[12]하였고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탕평책의 신봉자였으나, 당시 노론 영수인 민진원과 정호가 노론 역사상 송시열 이후로 최고의 강경파인지라 노론들에게 광좌놈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영조가 직접 노론 신하들을 불러서 대신에게 무엄하게 무슨 짓이냐라고 야단을 쳐도 노론 신하들은 우리 집안에서는 어린애들도 광좌나 광좌놈이라고 부른다라고 지지않고 맞섰다.
다른 소론 대신들이 영조에게 납작 업드린 상황에서도 삼수의 옥은 역적이 맞다고 강변하였고 덕분에 노론의 공적 1호가 되어 무수한 탄핵을 받았다.
1730년 복상(卜相)[13]할 때 우의정 이집(李㙫)이 복상할 명단을 봉입(封入)하자, 가복(加卜)[14]하라고 명하므로, 이집이 임금의 의중이 어디 있는지를 앙청(仰請)하자, 영조가 답하길,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은 진실로 오늘날의 영수(領袖)[15]이지마는, 이광좌는 타인이 그를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고, 민진원은 자기 스스로 조정에 있지 않으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는, 이조판서 조문명(趙文命)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1733년 1월 영조가 영중추부사 이광좌와 판중추부사 민진원의 입시(入侍)를 명하여 밤중[16]에 탕평의 일에 대해 하교하였다. 하교를 마친 후 영조가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서 이대로 머물러 있고 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감히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만약 윤허를 받는다면 여유를 갖고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도 벼슬을 그만두는 윤허를 받게 되면 마땅히 서울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역시 윤허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비록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하더라도 간혹 상참(常參) 등의 큰 일을 만나면 당연히 들어와 참여해야 할 것이며, 강연(講筵)의 빈대(賓對)에도 때때로 입시(入侍)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737년(영조 13) 영의정에 4번째 올랐다. 1740년(영조 16) 영의정 재임 중 탄핵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중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영조는 숙종의 사당을 찾아 비를 맞으면서 "신하 놈들이 탕평을 하래도 안 하고 깽판치니 내가 못난 탓이다! 왕 안해!"라고 선포하자 신하들이 또 우리들이 당파 싸움이나 하면 우릴 벌하소서!라고 울고불며 말린 다음 날로 상대적 강경파였던 이광좌의 죽음으로 조정은 그나마 좀 조용해진다.
사후 15년 뒤인 1755년(영조 31)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768년(영조 44) 정후겸(鄭厚謙)의 주선으로 복권되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직후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고 1908년(융희 2) 순종 때 최종 복권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여담
- 영조의 명령으로 인해 강제로 노론 대신들과 악수를 한 적이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 박문수와 인척 관계[19]로 그의 후원자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박문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의지하여 자랐는데, 그의 스승이자 외숙부[20]가 좌의정을 지낸 이태좌이며, 이광좌의 재종형이다. 이광좌는 박문수 관련 설화에도 드문드문 출연한다.
- 글씨를 잘 썼고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1] 소론 완론 중에서는 가장 강경파로 이인좌의 난 직후 소론 준론이 소멸하자 상대적으로 강경파가 되어 노론에게 많은 탄핵을 받았다.[2] 선조의 10녀 정명공주의 7남.[3] 생부는 이세필(李世弼)의 3남 관찰사 이형좌(李衡佐)로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의 동생이다.[4] 소론 완론에 속했으나 준소에 속했다고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완소란 경종 신축환국 이후 비주류를 말하며 왕세제 보호론을 주창한 조현명과 조문명 형제, 박문수, 송인명 등을 의미하며 김일경 등을 급소, 조태구나 이광좌 등을 준소로 보는 경향도 있다. 즉 쉽게 얘기하자면 김일경은 타협 자체를 불허하는 초강경파였고, 이광좌는 그래도 일단 한번 정도는 들어보자하는 강경파 정도. 하지만 소론 완론 중에서 가장 강경파였다. 소론 준론 소멸 이후 강경파가 되어서 노론에게 많은 공격을 받았다.[5] 20세 약관에 그것도 장원급제한 것이다[6] 소론 대신 조태구의 친척이다.[7] 동년 5월 13일에 이미 관작이 삭탈되었다.[8] 조태구, 최석항은 이미 사망했다. 그래서 남은 류봉휘, 조태억과 그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9] 영조(당시 연잉군)는 노론이 지지하고 있었고 경종(당시 세자)은 소론이 지지하고 있었음.[10] 원종공신이므로 정공신 명단에는 없다.[11] 1728년 4월부터 1728년 6월까지.[12] 정승의 사임을 허락함.[13] 정승을 가려 뽑음.[14] 정승으로 추천한 후보자 명단에 임금 의중의 인물이 없을 경우, 다시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을 추가하여 추천하는 일.[15] 당시 이광좌는 소론의 영수, 민진원은 노론의 영수였다.[16] 밤 2경(二更)으로 밤 9~11시쯤이었다.[17] 사실 민진원은 비타협적인 이미지 때문에 과소평가되는 점이 많다. 하지만 장희재, 장희빈을 변호하다 귀양을 간 원로 대신 남구만(소론 대신)을 변호해 준 적 있고 붕당 정치를 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18] 당사자들은 싫어했겠지만 악수를 시킨 영조 본인은 이것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9] 이광좌는 고령 박씨 박장원(朴長遠)의 3녀의 아들이고, 박문수는 박장원의 차남의 손자이다.[20] 이태좌는 이세필(李世弼)의 장남이고, 박문수는 이세필의 장녀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