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조선의 역대 권력자 | ||||||||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 문종 | |||||
정도전 | 이방원 | 정사공신 (하륜, 조영무 등) | 관학파, 종친 (황희, 맹사성 등) |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 | ||||||
안평대군, 고명대신 | 정난공신 (수양대군) | 훈구파 (한명회, 신숙주 등) | |||||||
성종 | 연산군 | 중종 | |||||||
대신 vs. 대간 | 대신 | 궁중파 (임사홍, 신수근) | 반정공신 (3훈) | 사림파 (조광조) | 反김안로계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 김안로 | |||
인종 | 명종 | 선조 | |||||||
대윤 (윤임) | 소윤 (윤원형) | 윤원형 vs. 이량 | 사림파 | 동인 vs. 서인 | 서인 (이이, 성혼, 정철) | 범 동인 (류성룡, 이산해) | |||
선조 | 광해군 | 인조 | |||||||
연립 (서인, 남인) (윤두수, 류성룡 등) | 북인 (이산해 등) | 탁소북 (류영경) | 청소북, 대북 (3창) | 대북 (이이첨) | 반정공신 (이귀, 김류) | 공서 (김류, 최명길 등) | 낙당, 원당 (김자점, 원두표) | ||
효종 | 현종 | 숙종 | |||||||
산당 (송시열, 송준길) | 서인 vs. 남인 | 범 남인 (허적, 윤휴) | 일부 서인 (김석주) | 산당 (송시열) | 남인 (민암, 장희재 등) | ||||
숙종 | 경종 | 영조 | |||||||
소론 (남구만 등) | 노론 (노론 4대신) | 소론 (소론 5대신) | 노론 (정호, 민진원 등) | 온건 소론 (이광좌) | 노론 (김재로 등) | ||||
영조 | 정조 | 순조 | |||||||
완론 탕평 (탕평당, 청명당) | 청명당 vs. 홍인한과 정후겸 | 홍인한과 정후겸 | 외척 (홍국영) | 소론 (서명선 등) | 준론 탕평 (벽파, 시파) | 벽파 (심환지 등) | 시파 (김조순 등) | ||
순조 | 헌종 | 철종 | |||||||
안동 김씨 | 세도가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 ||||||||
고종 | |||||||||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 여흥 민씨 (+ 개화파) | 흥선대원군 |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 ||||||
고종 | 순종 | ||||||||
급진 개화파 | 여흥 민씨 |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 근왕파 | 친일반민족행위자 | |||||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外 | }}}}}}}}} |
조선의 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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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 훈구파 | ||||||
동인 | 서인 | ||||||
북인 | 남인 | 소론 | 노론 | ||||
세도정치 | |||||||
위정척사파 | 개화파 | ||||||
친청파 | 개화당 | ||||||
▼ 대한제국 이후 (공산정당) | |||||||
※ 붉은 계열은 원리주의적 강경파, 노란 계열은 탈이념적 정파, 푸른 계열은 개량주의적 온건파 | |||||||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친청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1. 개요
時波조선 후기, 사도세자의 추숭에 찬성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찬성한 정파. 대부분의 남인들과 소론,[1] 그리고 노론 시파로 이루어졌던 정파이다.
2. 역사
벽파가 노론 청명당에서 유래가 된 정파적 성격이 뚜렷한 집단이었다면, 시파는 그런 집단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파가 형성되게 된 계기는 사도세자의 추숭이 아니라 정조 초기 정국을 주도하던 홍국영이 탄핵당한 이후 새롭게 등장한 소론 서명선에 따르는 세력이 '시류에 편승하는 자'라며 시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시파의 중심인물이라 불리었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도 서명선에 의해 배척당했기 때문에 반 시파에 속했다.이 중 노론 시파의 근원 집단을 굳이 따지자면, 영조 시기 노론 중 홍봉한을 중심으로 한 척신당(북당) 잔여세력에 북당과 남당[2] 모두 척신세력이라며 비판하는 양척론을 펼치던 동당, 중당계 관료 및 산림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특히 노론 낙론계 산림의 종장인 장동 김씨 김원행이 양척론자였기에, 같은 가문의 김조순을 비롯한 장동김씨 일문들 역시 자연스레 시파가 되었다. 사실 노론 시파의 경우 영조 시기만 해도 반척신, 노론의리의 기치 하에 벽파 못지않게 강경한 의리론을 고수하는 세력이었지만[3], 정조 연간의 정계 재편 와중에 다른 세력들과 섞이며 잡탕(…)으로 변하면서 정체성이 희미해졌다.
《실록》에서의 시파와 벽파의 분열은 1780년(정조 4년)이라고 하지만 시파, 벽파라는 용어는 1784년(정조 8년)부터 등장한다.
하지만 1788년 정조가 서명선을 대신해 새로운 3정승 체제를 구축하고 사도세자 추숭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시파의 성격도 과거 서명선이 주도하는 정국을 따르는 것에서 정조가 주도하는 사도세자의 추숭을 따른다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시파는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노력에 따라 상당한 집권 능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채제공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세력과 소론 강경파 그리고 노론의 김조순과 같은 온건파들도 중용되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벽파에 의해 정국에서 밀려났다가 경주 김씨 출신의 정순왕후의 사망 이후 다시 집권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때부터 시파 일'붕'당제가 되긴 했지만, 이 시기부턴 순조의 장인 김조순(신 안동 김씨)이 주도하는 정국이었기 때문에 정파로서의 성격은 사실상 없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김조순 이후 붕당정치는 종식되고, 이른바 세도정치기가 시작된다.
3. 영수
- 서명선 - 원래 시파의 뜻에 부합되어서 시파를 이끈 사람은 서명선이었다. 소론에도 속한다.
- 채제공 - 1788년 전격적으로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이 때부터 시파를 이끌었다. 남인에도 속한다.
- 정민시 - 정조 시대 노론 시파의 영수이며, 정조의 측근이기도 하다
- 이조원 - 본관은 연안. 순조 이후 노론 시파로 활약하다가 1805년, 벽파인 김달순과 함께 신 안동 김씨의 김좌근에 맞서다 방귀전리[4]당했다.
- 김조순 - 노론 시파 출신으로 순조의 장인이기도 하다. 김조순 이후로는 세도정치가 이어진다.
- 이병모, 이시수: 최후의 소론 영수로, 정조 중반기 이후 서명선이 사실상 벽파가 되면서 소론 시파를 순조 때까지 이끌었다.
4. 둘러보기
노론 老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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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674 ~ 1720) | |||||||
산당 | 한당 | ||||||
송시열 | 김수흥 | 민정중 | 김수항 | 김육 | |||
민유중 | 김만기 | 이세백 | 김만중 | 김우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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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1720 ~ 1724) | |||||||
김창집 | 민진원 | 이건명 | 이이명 | 정호 | |||
조태채 | 김용택 | 윤지술 | |||||
영조 (1724 ~ 177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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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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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674 ~ 1720) | |||||||
윤증 | 남구만 | 조사석 | 박세채 | 류상운 | |||
서문중 | 최석정 | 박세당 | 오도일 | 나양좌 | |||
최규서 | 정제두 | 박태보 | |||||
경종 (1720 ~ 1724) | |||||||
급소 | 준소 | 완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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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724 ~ 177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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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 | 박필몽 | 이광좌 | 오명항 | 조문명 | |||
정사효 | 목호룡 | 송인명 | 조현명 | 박문수 | |||
이인좌 | 정희량 | 이종성 | 조재호 | 이광사 | |||
이진유 | 이진검 | 이태좌 | |||||
정조 - 순조 (1776 ~ 18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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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 | 이성원 | 김상철 | 이병모 | 서유구 | |||
서명선 | 이복원 | 이시수 | 이만수 | 이긍익 | |||
세도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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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575 ~ 16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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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 허목 | 민희 | 민점 | 윤휴 | |
목내선 | 류형원 | 이서우 | 김덕원 | 민암 | |
이의징 | 신경제 | 이운징 | 신필청 | 장희재 | |
청남 | 탁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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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정 | 오시수 | 오정창 | 류혁연 | 허견 | |
경종 이후 (1720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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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 | |||||
신서 | 공서(벽파) | ||||
채제공 | 이가환 | 이승훈 | 신후담 | 안정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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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인과 소론은 당시 비주류에 가까웠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정조를 밀어줄 때가 많았다. 반대로 말하면 이들 중에서도 벽파는 있었다. 당장 시파의 영수기도 했던 서명선이 시기에 따라선 소론 벽파 테크를 타기도 했다.[2]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세력에 김종수가 이끄는 재야 청명당이 결합한 붕당. 벽파의 전신이다.[3] 노론 시파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심낙수는 김종수의 의리가 국가의 의리와 사적인 의리를 혼동하는 것이라면서 비판했고, 다른 시파 산림들은 벽파가 군신의 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치는 결국 군주가 하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뒤흔든다며 싫어했다.[4] 조선 시절,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 유배보다는 한 등급 가벼운 형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