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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목만중 睦萬中 | |
형조판서(刑曹判書)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 초상화[1] | |
이름 | 목만중(睦萬中) |
본관 | 사천 목씨 (泗川睦氏)[2] |
시호 | 여와(餘窩)[3] |
출생 | 1727년(영조 3년) 1월 25일 |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 |
사망 | 1810년(순조 10년) 9월 14일 (향년 84세) |
종교 | 유교(성리학) |
부모 | 부친 - 진사(進士) 목조우(睦祖禹) 모친 -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명익(韓命翼)의 딸 |
부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한덕(李漢德)의 딸 |
자녀 | 장남 - 목인노(睦仁老) 차남 - 목인규(睦仁圭) 차녀 - 사헌부 지평(持平)홍의현(洪羲玄)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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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이며 남인 계열의 정치가 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자는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이다.1759년(영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6년(정조 10) 문과에 장원 급제(壯元及第) 하여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다.
1794년(정조 18)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고 태천현감(泰川縣監)을 거쳐 1797년(정조 21) 병조참의, 승지(承旨)를 지내고 1798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정조 임금 시대에는 영의정(領議政) 채제공, 규당(葵堂) 정범조 등과 함께 18세기 남인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문장가로 활동하였다.
과거시험에 장원급제(壯元及第) 할 만큼 어릴 적부터 일찍이 천자문을 떼고 뛰어난 시재(詩才)를 선보이며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아래는 목만중이 12세때 지은 안경(眼鏡)이란 시이다.
南國碧玉鏡 高堂白髮年 (남국에서 만들어진 구슬 안경을 높다랗게 지은 집에서 나이 드셔 쓰시게 됐네)
向燈逾歷歷 出匣更娟娟 (등불 향하면 더욱 또렷해지고 안경 갑에서 꺼내면 더욱 곱도다)
膜外乾坤大 眉間日月懸 (눈 밖으로 천지는 크게 보이고 눈썹 새에 해와 달 달려 있는 듯)
床頭萬卷在 老眼爾多權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권의 책 노안은 온통 네 힘 빌려야하지)
-睦萬中, 眼鏡 戊午○十二歲作-
이 시는 할아버지 목경연(睦慶衍)이 안경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보라 시키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었다고 한다. 삼명시화(三溟詩話)[4]에도 실려져 있다.
2. 생애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부터는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인 같은 남인들과 갈등이 생기면서 정치적 굴곡이 생기기 시작한다.목만중(睦萬中)은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남인(南人) 시파(時派) 계열의 천주교도들과 이념적 차이가 생겼고, 서학을 반대하던 벽파(僻波) 안정복(安鼎福), 홍낙안 등 공서파(攻西派)와 찬성하는 정약용(丁若鏞), 이가환 등 신서파(信西派)와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신서파는 황사영 백서 사건(黃嗣永帛書)을 결정적 계기로 대대적인 숙청과 재기불능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하고 말았고 남인들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후 조선은 멸망 전까지 당파보다는 왕조의 외척 가문이 이끄는 세도 정치를 맞이하게 되었다.[5]
1805년(순조 5)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06년(순조 6)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고 18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9월 14일에 노병으로 서부 반송방(盤松坊) 근동(芹洞)[6] 자신의집에서 돌아갔으며 향년 84세였다.
3. 대중매체에서
- KBS2TV 소설 목민심서(드라마)에서 김인태가 연기했다.
[1]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당시 실제 초상화이다.[2] 현헌공파(玄軒公派) 하담공댁(荷潭公宅)이다.[3] 대표저서 여와집(餘窩集)이 있으며 18권 9책,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도서에 보관되어 있다.[4] 삼명시화는 최치원(崔致遠)부터 조수삼(趙秀三)까지 100여 명의 시인을 대상으로 127편의 시화(詩話)가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5] 조선 멸망후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남인들이 상당수 있었다.[6] 지금의 서울 중구 을지로5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