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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7 23:42:27

안정복

安鼎福
(1712~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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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동사강목, 여용국전 등을 집필하였으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이다.

2. 생애

1712년 현재의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했다. 안정복의 가문이었던 광주 안씨는 당시 남인 계열의 집안[1]으로 그의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예조참의도 역임했지만 이후 숙종 시절의 경신환국갑술환국으로 완전히 중앙 정계에서는 배척당하고 만다. 안정복이 청소년을 보낼 시절이었던 1728년 이인좌의 난까지 터져주는 덕에 벼슬길은 영원히 막혔다. 집안이 가담한 것은 아니니 과거를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설사 붙는다해도 평생 한직에서 머무를 가능성이 컸고 안정복 본인이 벼슬을 단념하고 살면서 한번도 과거를 응시조차 하지 않는다.

이후 성호 이익 밑에서 수학하며 이익의 실학성리학에 영향을 받게 된다.[2] 실학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안정복의 유학관은 보수적이어서 스승 이익과는 달리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가 주자대전을 편찬할 때 불러들인다거나 세손의 스승 가운데 1명으로 발탁하는 등 정통 성리학자의 면모만 두드러진다.

안정복이 이익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역사학이었는데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이라는 사관은 이익을 통해서 탄생하고 안정복에 의해 초석을 다졌다는게 일반적인 평가. 안정복과 이익의 자주적 역사관의 정수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스승과 함께 만든[3] 저서 동사강목.[4] 30대 후반에는 음서로 관직에 나가서 사헌부에서 근무하기도 하지만 부친상을 당하기도 했고 젊어서 고생[5]을 너무 해서 본인의 건강도 좋지는 않았던터라 곧 사직했다가 복직하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주자대전 간행이나 세자시강원을 역임한 것이 이 시기. 노년 이후에는 남인 계열을 중용했고 자기가 가르치기도 했던 정조가 즉위하자 인생이 펴서 노년에 지방 사또 자리를 맡기도 하다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인 1791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근래의 이른바 천학이라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있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지상의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내리셨으니, 그 변함없는 본성을 따라서 그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다면’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문왕(文王)께서는 삼가고 조심하여 상제를 잘 섬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 유업(遺業)을 보전하리라.’ 하였으며, 공자(孔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한다.’ 하였으며, 자사(子思)는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하였다. 우리 유자(儒者)의 학문 또한 하늘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천학문답(天學問答)>


[1] 남인에서 날리던 집안은 아니고 그냥 남인 소속. 남인의 거두였으면 안정복의 증조부나 고조부가 사또랑 종8품 정도에서 벼슬길이 막히지는 않았을 것. 사실 막힌건 연산군 탓.[2] 흔히 사람들이 실학자는 성리학자랑은 양립 불가능한 관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잦은데 시대 특성상 실학자들도 성리학자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가기는 했다. 단지 성리학을 절대 신봉하지 않았으며 실생활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는게 차이일 뿐이다.[3] 이익이 쓴 항목은 없지만 자료 수집과 감수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줬다. 이거 만들 때 돈이 없어서 굶으면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단재 신채호도 동사강목에 대해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1급 사료는 얻어보지도 못하고 그나마 얻은 자료도 제책 수준이 형편없어서 해석을 잘못한 부분도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4] 거의 20년에 걸친 평생의 역작이었다. 단재 신채호독립운동하러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유일하게 갖고 갔던 것.[5] 아버지가 전답을 다 팔아서 노비랑 같이 숯을 구워서 그걸 팔아서 먹고 살았을 정도.[6] <순암집>은 27권 연보 합 15책의 목활자본으로 제자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 편집하고 뒤에 안경위(安景褘)가 잡저의 편목을 수정했으며 5세손 안종엽(安鍾曄)이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