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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8:40:53

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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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천주교 박해
정조 15년 순조 원년 헌종 5년 헌종 12년 고종 3년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1. 개요2. 배경
2.1. 조선인,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이다2.2. 교황청, 제사를 금하다2.3. 신해박해(진산 사건)2.4. 폭풍전야
3. 전개
3.1. 수렴청정3.2. 무부무군(無父無君)3.3. 순교3.4. 황사영 백서 사건
4. 결과5. 여담6. 관련 문서

1. 개요

신유박해()는 1801년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를 말한다. 신유사옥()이라고 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의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 박해다. 순조 즉위와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을 계기로, 그녀를 중심으로 한 노론 강경세력이 박해를 주도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니, 정조 재위시기 유력하게 성장한 남인계 인사들을 숙청하려는 것. 박해의 결과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1]를 포함한 300여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남인 세력은 리더 이가환이 사망하며 치명상을 입었다.

2. 배경

2.1. 조선인,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이다

자세한 것은 가톨릭/대한민국 문서를 참조.

조선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은, 중국에 정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의도치 않은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매우 박식했다. 자연과학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황제는 강희제대포에 맞은 직후의 누르하치 정도였겠지만, 어쨌거나 달력은 제왕의 초월적 위엄을 나타내는 중요한 징표였다. 선교사들은 천체운동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 황제의 호의를 샀으며, 덕분에 북경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예수회 선교사제들은 본업인 중국 선교활동에도 힘써, 한문으로 성경과 교리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것들이 외교 사절로 북경과 서울을 오가는 조선인들의 눈에 뜨이게 된다. 이들은 중국인은 아니었지만 한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어떤 학문의 하나로 인식하였으며, 선교사들이 중국에 소개한 다른 '과학적인 것'들과 함께 별 거부감 없이 천주교 서적을 조선으로 들여오게 된다.

여담으로 동시대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 선교사들에 대한 박지원의 은근한 관심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과학기술과는 달리 천주교에는 상세한 의견을 밝히지 않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할 문제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겠다. 그에게는 딱 문제가 될 만한 선에서 대충 뭉개며 넘어가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뭔가 불온하기는 한데 꼭 집어 말하기는 불가능하니, 오직 기발함만에 술렁일 수밖에. 정조도 트집을 잡을 것은 결국 문체밖에 없었던 것이다(문체반정 참조).[2] 박지원이 티베트 불교개소리로 매도하고 달라이 라마를 사기꾼 취급하며 미친 듯이 까긴 했지만, 불교 배척한다고 천주교에 호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도 면천군 군수 시절 잡아들인 천주교도에 대해 크게 해코지를 하진 않았지만, 다만 말과 이론으로써 천주교도들의 논박을 뭉개버리는 등 글을 통해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

북경으로부터 들여 온 천주학 서적(대표적으로 천주실의)을 접하고, 조선인들은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대체로 천주교를 불교의 아종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교산 허균. 천주학 서적을 들여온 장본인이자 비록 이단아라 불렸음에도, 그는 천주교를 '천당과 지옥으로 어리석은 대중에게 겁을 준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남인계의 거목이었던 이익은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이란 논문에서 천주교에 대해 조목조목 비평하는데, 그가 보기에 천주교는 합리성을 결여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익이 상세한 비판을 남겼다는 것은 천주교의 중심 교리가 조선 사상계에도 알려져 있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상황이 이익의 비판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니 얄궂은 일.

1779년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權哲身,1736 ~ 1801), 이총억(李寵億) 등이 경기도 광주시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의하는 모임을 가졌다.[4] 이들은 남인계 학자들로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천주교는 이 청년들에게 진리로서 다가오게 된다.

남인들은 정계에서 상대적으로 불우한 상태였고, 그들의 원리주의적 성향에 비추어 천주교의 교리는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천진암의 멤버들 중 하나인 이승훈1784년 베이징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세례명베드로) 공식 신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전 세계 역사상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이는 후일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의 시성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2.2. 교황청, 제사를 금하다

본래 예수회제사를 종교행사가 아닌, 조상에게 차리는 단순한 예에 불과한 것으로 결론내렸다.[5] 하지만 이는 곧 반론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교리논쟁인 동시에 수도회들 사이의 권력다툼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는 예수회를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교황청의 명령으로 제사는 금지된다.

이로 인해 예수회중국 선교는 치명타를 입는다. 그리고 이 소식은 1790년 조선에도 전해지는데, 막 정착하던 천주교 공동체에 파란을 흩뿌리게 된다. 제사유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아니 기원전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하고 유교에 의해 정립된 제례의식으로 하나의 문화이며 윤리적 상식이었다. 조상을 기리는 일은 사실 서양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다, '조상을 기리는 일=제사'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심어진 조선인들이 쉽게 내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선에서 제사를 내버린다는 말은 불효, 즉 천륜을 내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몇몇 인사들은 이 문제로 자신은 일찌감치 천주교에서 돌아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다수 천주교인들의 선택은 타협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과감한 선택을 하는 자도 나오기 마련이다.

2.3. 신해박해(진산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진산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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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윤지충 바오로전라도[6] 평범한 양반으로, 1791년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그리고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는 단순히 "나는 이제부터 제사 안 지냄" 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모욕하는 행위로 도굴죄와 마찬가지로 처벌된다. 단순히 제사를 안 지내려면 신주를 땅에 묻으면 되고 이 경우 처벌은 없다. 윤지충은 이 모든 일들을 슬그머니 벌인 것도 아니라 외사촌인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대놓고 자행했으며, 경악한 친척들과 대판 싸웠다. 결국 이 소동은 나라 전체에 소문이 퍼졌고, 조정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조사 결과 윤지충의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신주를 불태운 것이 윤지충 하나만은 아니었으니… 잡혀온 윤지충은 처음에는 신주를 땅에 묻었다고 거짓말하다가 이를 증명하지 못하자 "천주님께 죄를 짓느니 사대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낫다"고 일갈해 조정에 극심한 반발을 부른 후 결국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자리에는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들어서 있다.

당연히 사대부로 이루어져 있는 조정이 당파를 막론하고 천주교가 반체제라며 극딜을 퍼부은 건 당연지사. 벽파는 말할 것도 없고 시파, 남인들조차도 맹비난을 퍼부었다. 아니, 국가체제의 존재의의가 유교에서 나왔던 조선에서 "제사가 별건가"라고 말하는 윤지충은 대역죄 확정.[7] 참수형도 어떻게 생각하면 제법 관대한 처사다.[8]

여기서 정조는 일을 대충 덮었는데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인 몇을 불러 "얘들아, 천주교는 불경스러우니까 앞으로 멀리해라, 알았지?"라고 타이르고 덮어버렸다.

벽파 세력이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상식적으로 가난해서 제사를 못 지냈다고 하더라도 신주를 불태울 것까진 없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얼마 지나 제사를 폐한 천주교 신자가 또 나타난다. 지방관의 보고로 중앙정계에 알려진 이 건에 대해 정조는, '내가 끝내자고 했지? 너 지금 나한테 불만 있냐? 개기냐?'라는 격한 반응을 보인다. 정조는 자신의 더러운 성깔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고자를 열렬히 디스했으며, 이 관리는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귀양길을 가던 중 병사… 사실 관리 입장에선 보고를 안 하기도 뭐한 게, 나중에 천주교인들을 일부러 봐 줬다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기 때문. 무엇보다 관리의 의무가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인데 제사를 폐한 불경스러운 인물을 묵인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가 않다. 조선의 관리로서는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대충 묻으려는 왕의 의도를 읽지 못해 명을 재촉한 것.

이 해프닝은 천주교 관련 문제를 대충 묻겠다는 정조의 의지의 표현이었고, 강경파 쪽에서는 이런 처사에 이만 갈게 된다.[9][10]
"정학(正學)을 바로 펴면 사학(邪學)은 절로 없어진다"는 것이 정조의 논리였고, 정조는 문체와 서체를 가만두지 않고 문체반정과 서체반정을 일으킨다.

사실 정조의 방침은 에도 막부후미에(십자가 밟기)처럼 천주교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이긴 했다. 바로 배교라는 절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 증언이라도 배교한다고 뱉는 순간 10년 공부(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신앙)가 녹아버린 얼음처럼 되는 것"[11]
"말만 해라. 그럼 살려는 드릴게.”라는 논지. 이 정조식 방침은 이후의 천주교 박해 때도 그 자체는 유지되었다.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이었고, 이런 관대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향후 수십년간 순교자는 늘어만 갔다.
당대 유교사회에서 이런 (가문의 운명까지 포함 된) 집단자살(!)로 볼 만한 “서학쟁이”, “천주학쟁이”들의 순교가 얼마나 컬쳐쇼크였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2.4. 폭풍전야

정조 치세에 박해가 아주 없었다는 건 아니다. 윤지충 바오로 사건 외에도 1785년 명례방[12]에서 모인 이벽 세례자 요한,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총억 등 양반 자제들이 모여 신앙집회를 열었는데 우연히 형조의 관리들에게 들킨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다. 장소를 제공해 준 집주인인 역관 김범우[13] 토마스가 모든 책임을 지고 혹한 고초 끝에 밀양으로 유배되어 사망했고[14], 이벽 등은 양반가의 자제라는 점이 적용되어 가볍게 훈방 조치만 당했다.[15]

정조 입장에서야 천주교는 뭐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의지가 미치지 않는 종교문제로 정국이 요동치는 것을 싫어했을 뿐. 중앙정치와 상관없는 동네에서 천주교를 털든지 말든지 정조가 알 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정조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은 "정학인 성리학이 바로 세워진다면 저절로 사라질 사()"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주교 공동체는 정조가 죽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하지만 말 그대로 문제를 대충 묻은 것에 불과해, 언젠가는 크게 터질 일이었다. 남북 전쟁 남인은 정계에서 소수당파인 데다 유교적 명분도 부족했다. 여전히 비천주교인이 대부분이었을 남인 세력의 딜레마가 여기서 드러난다.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좋게 말해도 들을 리가 없고, 드러내놓고 천주교를 공격하면 상대 당파의 먹잇감이 되는 셈이었으니까. 어쩌면 성호 이익의 천주교 극딜은 이런 사태들을 조금은 예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795년 북경교구에서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를 조선으로 파견한다. 당시까지 조선은 신자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주교신부를 선출하는 가성직제도를 운용해 성무와 강론을 처리했다.[16]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교리서를 집필해 쓰기도 했는데, 나중에 주문모 신부는 이 <주교요지>를 보고 호평했다고. 신부의 입국은 조선 신자들에게 한 줄기 빛… 이 되는 듯했으나, 정부에서 이것까지 고이 두고 볼 일은 없어 주문모 신부는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3. 전개

3.1. 수렴청정

1800년, 몸이 좋지 않아 골골대던 정조가 승하, 순조가 즉위한다. 나이가 어렸던 왕을 대리해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에 나선다. 원래 벽파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파벌 내 강경세력과 연합하여 시파-남인 세력을 선제공격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좋은 먹잇감이 있었으니 천주교 신자 남인들이었다.

3.2. 무부무군(無父無君)

이듬해인 1801년(신유년)에 박해가 시작됐다. 애초에 정치공작으로 시작한 터라 타겟은 분명했다. 천주교 신자로 유명했던 남인 인사들을 잡들이하는 게 의도였고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원래 혐의가 있던 최필공(토마스)을 잡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의 사촌동생이 또 축일에 사람들과 의식을 치르다, 어이없게도 도박판을 단속하는 관원들에게 걸려서(…) 적발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앞서 말했듯 천주교진산 사건을 거치며 반체제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영 불리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인의 핵심 인사였던 채제공[17]도 2년 전 사망한 상태라, 정순왕후 김씨를 제어할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었고 단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남인들마저 서로 물어뜯기 바빴다.

이 시점에서 신나게 털리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참으로 재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정약종은 압박이 심해지자 땔감으로 위장해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聖物)들을 숨기려 했는데, 이것이 또 하필이면 불법 도살을 단속하는 인원들에게 적발되었다. 경찰국가 조선의 위엄 이 책에 정약종이 쓴 낙서가 있었으니, 바로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이었다.[18]

대체 이 낙서를 정약종이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는 불분명하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가 곧 무부무군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즉 천주교도들은 '부모고 나랏님이고 뭐고 없는 패륜종교를 믿는 역적도당'으로 취급당한 것이다. 윤지충의 사례에 덧씌워 확신하기에 더없이 좋은 껀수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천주교도 부모를 공경하는 종교고, 천주교인들은 "그거 오해입니다!! 우리 말을 좀 들어 보세요!!"를 외치며 반박했지만, 본디 남인 공격이 목적인데다가, 때마침 나온 저 충격적인 낙서는 오해고 뭐고 천주교인들을 제거하기엔 충분한 명분이었다. 이 무군무부 꼬리표는 오랫동안 이어져서, 정약종의 차남 정하상도 이것에 대해 상재상서로 해명해야 했다. 역모를 입에만 담아도 가족과 함께 이승을 하직해야할 판에[19] 그걸 기록으로 남겼으니 얼마나 좋은 먹잇감이겠는가. 있는 그대로만 봐도 충분히 불충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문제다.

이 낙서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라 오히려 소문이 늦게 퍼졌다고 한다. '무부무군'이라는 4글자를 사람들이 감히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흉흉한 글귀' 따위로 돌려말하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3.3. 순교

초기 천주교의 주요 인사들이 이 박해로 인해 순교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약종은 땅이 아닌 하늘을 보며 칼을 받았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성가(천주교 수원교구 김태진 베난시오 신부 작곡)
정약종의 작은형 정약전과 남동생 정약용은 아직 젊은 덕택에 고문을 버텨냈으며, 배교를 약속한 다음 귀양길에 오른다. 이가환과 권철신 등은 자신들이 천주교를 버렸다고 이미 주장했지만 매를 피할 수가 없었으며 결국 사망. 이는 이승훈도 비슷하여서, 자신이 천주교의 수괴로 여겨지는 걸 잘 알았기에(즉 어떻든 죽을 팔자였기에)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여성 평신도들의 지도자 강완숙 골롬바는 주문모 신부의 도피를 도왔기에 처형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도피하려 황해도에 피신해 있었다고 하나, 3월 중순 서울에서 자수한다. 주 신부가 말하기를,
"나 역시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받드는 사람으로, 지금 소문을 들으니 조정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하여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하여,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에 스스로 와서 죽기를 구하는 것이오."
이러한 초기 사제의 순교 정신은 오페르트 도굴 사건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20] 그리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등에서 드러난 후배들의 추태와 대조를 이루었다.

위 사람들을 포함하여 약 50명 가량이 순교했다.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좋은 뜻과는 달리 순교자의 숫자를 +20명 하는 효과를 낳았다. 주문모 신부를 참수하는 와중에 주문모 신부의 도피를 도운 사람을 안 죽일 수 없는 상황이 되다보니. 배교자를 막겠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다면 그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겠지만.

주문모 신부의 자수의 여파로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 이인의 아내 송 마리아와 그 아들 상계군의 아내 신 마리아도 함께 사사된다. 그리고 이에 연계되어 은언군과 홍낙임이 사사된다. 주문모 신부가 왕족궁녀(문영인 비비안나 등)에게도 선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한테 직접 세례성사를 받은 사실까지 들통이 났다. 이 외에 김상헌의 봉사손인 김건순도 신자인 것으로 밝혀져 유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상헌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파 인사로서 당시 유림에겐 절대적인 칭송을 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의 제사를 지내는 후계자가 '천주학쟁이'였다는 건 유림으로선 상상도 못할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김건순은 주문모와 처음 접촉했을 때 '무기를 모으고 배를 구해서 중국에 쳐들어가 병자년의 치욕을 씻겠다'라는 발언을 해서 주문모가 이를 만류하였다. 이후에도 변란을 꾀하는 자들과 접촉하는 등 뭔가 일을 꾸미는 모습을 보였다고. 특히 주문모는 청나라 사람이라 그를 베는 데 후환이 있을까 대왕대비도 많이 망설였는데, 이 병자년의 치욕을 씻겠다라는 발언은 만약 주문모를 청나라로 이송하면 그가 조사를 받다가 그 내용을 청나라 관원에게 말해 트집을 잡힐 것을 우려해 주문모를 군법으로 빨리 베어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정순왕후와 벽파 유학자들의 "사학"에 대한 단호한 대처와 당시 교황청의 보수성, 천주교도들을 둘러싼 몇몇 불운들이 낳은 일대 참사였다. 그래도 정순왕후가 편벽하고 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여기까지는 적당히 죽이고 쫓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나 싶었다. 노론 음모론자들의 망상과는 달리 다른 정책에서도 정순왕후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어느 정도 유연하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신유박해 직전에 벽파가 정적들을 탄핵했는데 이에 대한 처벌수위는 높아봐야 절도유배였고 그 이후에도 이인과 홍낙임 사사 외에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인사를 죽인 사례는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벌어지는 사건은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3.4. 황사영 백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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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인 황사영 알렉시오는 어린 시절 수재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후 어째서인지 과거를 보지 않았다. 야사에 따르면 당시 정조가 손을 잡고 격려까지 할 정도였으며, 황사영은 정조가 잡은 손을 붉은 천으로 둘러 싸매고 다녔다고. 위인전 특유의 부풀린 이야기일 듯. 근데 황사영은 역적이잖아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의 한 동굴에 피신해 있었다. 친족과 친구들이 모두 당하고, 도피생활에도 지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비단에 전갈을 적어 북경에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에서 벌어진 이례적인 박해를 설명하고,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청하려 하였다. 문제는 도움의 내용이다.
  1. 조선 신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
  2. 청나라의 황제에게 청원하여 조선의 천주교를 합법화.
  3. 2가 통하지 않을 경우 청나라에 의한 조선의 속국화.[22]
  4. 3이 통하지 않을 경우 서양 군대에 의한 조선점령.
안타깝게도 황사영의 요청 중 실현가능성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었고,[23] 이딴 걸 보호하겠다고 조선을 공격한다는 건 어림 반푼어치 없는 소리였다. 거기에다 당시 청나라는 수 년 째 이어지는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고 있어서 조선 내정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가톨릭을 믿는 서양 열강들도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조선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기독교 국가로 가면 언젠가 조선을 침략할 명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가 그 당시에는 전쟁 중이라서 올 처지가 못되었지만 만일 편지가 프랑스 가톨릭교회에 무사히 도착하고 후에 혼란기가 수습된다면 프랑스에서 조선에 올 명분이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황사영은 프랑스에게 조선을 각인시켜 "아, 조선에는 이교도 정권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는구나. 그래서 우리의 지배를 받고 해방되고 싶어하는 민중들이 많나 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이고 백인의 의무 같은 경향이 있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도 가톨릭 박해 문제가 구실이 되었다.[24] 실제로 병인양요 때도 선교사들이 "전함을 한강에 띄워 진격하면 천주교인들이 환영하면서 조정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만 와서 당황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25] 이 편지가 조선이 프랑스(혹은 다른 가톨릭 국가)의 식민지가 됐을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사영은 서양 군대의 강력함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특히 전투함이 매우 거대하며 조선의 전력으로는 상대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한다.[26] 황사영이 서양에 최종적으로 요청한 이게 큰 대(大)에 배 박(舶)자를 써서 대박인데… 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편지가 국경을 넘지도 못하고 걸려버린 것.

원래 노론에도 친정조 온건세력인 시파가 존재하였고, 왕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에 속했다. 이들은 정순왕후 김씨의 박해를 방관하는 입장이었다.애초에 조정관료치고 천주교 옹호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27] 당시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핑계삼아 남인 및 시파 계열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남인을 모조리 처벌하라는 몇몇 신하들의 요구를 7달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벽파들조차도 기존의 정조식 처리(일종의 후미에)를 고수하여 일반 신자들은 굳이 죽겠다는 사람만 두들겨 패고 나머지는 거의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앞서의 "무부무군"과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극렬 반체제세력임이 증명되어 버린 셈이다.트롤러

이를 계기로, 남인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터지게 된다. 사실 황사영 백서의 주장은 궁지에 몰린 개인의 공상적인 내용들로 그것이 천주교인들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허나 그런 거 알 거 없이 조선의 천주교 대책은 탄압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이는 정순왕후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므로, 나름대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정약전(정약용의 둘째 형) → 정약종(정약용의 셋째 형) → 황사영(정약용의 맏형의 딸과 혼인) 순으로 포교가 진행되었기에 당시 이미 귀양간 상태였던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비롯한 남인의 핵심인물들을 다시 국문해 처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미 분 놈들은 빨리 사형시키고, 만악의 근원인 정약전을 포항에서 절해고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남도 땅끝으로 귀양지를 재배치해 사건의 확대를 막았다. 더불어 이승훈 → 정약종 → 황사영으로 위 순서를 바꾸어 이승훈이 다 뒤집어 쓰게 된다.

신유박해에서 '배교한 것 같은데 죽은 사람'과 '배교 안 한 것 같은데 산 사람'이 생기게 된 것은 신자를 많이 불 것 같은 사람을 일찌감치 죽인 정순왕후의 대처 탓이 크고, 사회지도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까지 많이 죽은 것은 눈치 없이 가톨릭 신자가 맞다고 순순하게 말하지 않으면 살려준 정순왕후의 깊은(?) 뜻에 기인한 바가 크다.

신자라고 증언해 줄 사람이 이미 죽어 이후에 잡힌 사람은 본인이 가톨릭 신자라고 본인이 자백하기 전에는 증거불충분으로 잡혀가 죽는 일은 드물게 되었다.[28] 실제 전북 충남 일대 신자 200명이 밝혀지는 초대형 병크가 터지자 소외(?) 신앙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유항검, 유관검 일가를 모조리 참형하고, 신자 200여명에게 앞으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대부분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정약용도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니 반박할 증거가 없어 목숨을 건지게 되고, 심지어 신앙을 유지한 것이 어느 정도 확실시 되는 정약전도 본인이 대놓고 신자라는 증거를 내놓지 않으니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이승훈은 정약용(정약전)의 친누이와 혼인한 매형, 황사영은 정약용과 정약전의 조카사위였음에도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살아 남았다. 이승훈과 정약종은 증거가 워낙에 확실해서 죽었지만 그 둘만 죽었을 뿐, 막상 사위를 잘못 둔 정약현(황사영의 장인)은 유배조차도 가지 않았다.[29]

그래도 다달이 10명씩 처벌한 것이 쌓여 결국 사형(사약, 능지처참, 참형)당한 사람이 100명, 유배 및 삭탈관직이 300명에 달하는 대형참사가 벌어지게 되자, 결국 정순왕후는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반포하였다.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歲前)[30]에 끝내며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리게 된다.

이 교문 반포가 참 절묘한 게, 신속한 사형 집행을 명함으로서 더 이상의 사건 확대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고, 애매한 반포 시점으로 인해 추가적인 조사도 곤란하여 더 이상의 수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즉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도록 하는 정순왕후의 의도가 담긴 것.정순왕후: 죽일 애들 다 죽였으니 이제 좀 자제하자[31]

4. 결과

100명 이상이 순교. 주로 남인계의 양반계급이 대상[32]이었고 이로서 남인은 대몰락. 이후의 천주교는 중인 계층과 일반 민중들이 앞서 주도하게 된다. 물론 신유박해에서도 일반인 순교자는 꽤 있었고 신유박해 이후에도 양반계층 순교자는 꽤 존재했지만 말이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종교탄압으로, 황사영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에서 백서를 쓰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넘어서는 더 가혹한 참사가 일어났으니, 병인박해 문서 참조.

기존 유학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불신은 이로써 확고해졌다. 서양에 대한 반발감이 생긴 건 덤. "서양 = 천주교 = 부모/군주/나라 부정 = 반역"이라는 레퍼토리는 이후 척화세력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순왕후 김씨순조가 16세에 이를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지배했고 수렴을 거두고도 조정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지 스스로 수렴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수렴을 거두기가 무섭게 시파에서는 "벽파들이 국혼을 방해하고 안동 김씨들을 모함했다!!"고 맹렬히 공격했고, 정순왕후는 벽파에 대한 공격에 자신에 대한 은근한 공격으로까지 확대되자 다시 수렴을 치려다가 소론 이시수의 논리적인 반발에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순원왕후를 들이는 것을 자신이 지지했다고 해명하는 글을 남긴 다음에 불과 몇달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2년 만에 벽파는 이안묵, 권유, 김달순 등의 자폭으로 사실상 싹쓸이를 당해 최후의 정치적 당파인 벽파가 사라지게 된다. 남인들의 무부무군으로 인해 대역죄로 숙청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병인갱화로 벽파 또 한 대역죄로 인해 자멸했으니 말이다 시파는 특정 정치적 의리를 띄고 있지 않으니 무색무취했고 결과적으로 조정의 권력은 김조순에게 넘어갔다. 김조순은 막후 정치로 만족했으되 그가 죽은 이후 안동 김씨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조선은 세도정치의 어두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신유박해 이래 조선은 박해로, 천주교도들은 순교로 대응하는 전통(?)이 생겨났으며,[33] 이는 이후 기해박해, 병오박해[34] 병인박해 등 60년에 걸쳐 이어지는 대규모 박해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의 단초가 되었던 교황청의 제사 금지는 1939년 완화되었다. 천주교가 전통 유교식 제사를 완전히 허용한 것이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금하고, 조상에 대한 추모와 공경 차원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신(神)이라고 쓰인 위패를 사용하는 것, (혼령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두는 것, 기타 미신적인 행위들은 여전히 금한다.

그리고 드디어 2014년, 윤지충 등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고.[35] 그러나, 정약종, 홍낙민, 강완숙, 동정부부 유중철 이순이 등은 들어갔으나,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등은 순교 과정에 석연찮은 면이 있다 판단되어 제외되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제사 금지는 교황청의 실수이자 문제로도 볼 수 있다. 현대 시각으로 보자면 조선의 제사를 금지시키는 것은 엄연히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간섭과 침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효를 가장 중요시했던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제사는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옛 조상에 대한 당연한 의무이자 그들에게 경건한 자세로 예(禮)를 다하는 것이었다. 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제사같은 행사를 안 하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조선은 가난해서 제사를 치르지 못하면 "사정이 그러니 제사를 못할 수도 있지, 뭐."라고 넘어갈 정도로, 제사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미신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하층민같은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하층민들이 하는 미신적인 제사 광경만 접하고 제대로 된 제사를 행하는 곳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조선은 미신적인 제사만 하는 곳이다."만 보고하면서 제사 전체를 금지시킨 것이다.[36] 이로 인해 나름 나쁘지 않았던 동양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으로 변해 이탈자가 속출했고, 일부 과격파들이 정신나간 짓을 하면서 조선 전체가 천주교에 대한 척화와 박해라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교황청의 잘못으로도 볼 수 있다. 만약 선교사들이 제대로 조사를 해서 "조선의 조정에서 문제 삼고 있는 미신적인 제사를 없애는데 우리도 동조하겠다."라고 의견을 내놓았다면, 조선의 조정에서도 천주교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봤을지도 모르며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37]

5. 여담

6. 관련 문서



[1] 현대 중국어로는 저우원모. 한국 가톨릭에서 활동한 최초의 성직자.[2] 정조는 "불도노도는 중국에서 굳이 박해한 적이 없다"며 삼무일종법난은? “불교의 별파”인 서학도 정학이 바로 서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3] 기실 박지원 입장에서는 딱히 천주교에 호의적일 이유가 없는 게, 이 사람은 어쨌든 노론 계열인 데다, 당대 기준으로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라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면 부정적이었지 호의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그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하면서도 이치에 닿는 서구의 문명 자체였지, 천주교 교리가 아니었다.[4] 천진암 모임 당시 이총억은 14세였다.[5] 예수회는 상술했다시피 중국 황실과 사대부들과 주로 교류하여 오리지널 유교제사를 접했지만,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는 하층민들을 주로 접하며 그들이 원래의 유교식 제사와 거리가 먼 미신적인 제사를 지내는 걸 보아서 그렇다. 하지만 후자가 조사를 제대로 안 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조선도 이런 미신적인 제사 방식은 없애려고 노력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민심이 그렇게 잘 돌려지지 않듯이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6] 윤지충의 고향인 진산군은 현대에는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추부면, 진산면이지만 당시에는 전라도 소속이었다.[7]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게 대역죄로 비치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조선에선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아비를 받드는걸 임금을 받들듯 했다. 즉 부모에게 제사 지내지 않는 건 부모를 받들지 않은 것이자 군주를 받들지 않는 것이다.[8] 사형 참조. 조선에서는 교수형-참수형-능지형의 순으로 관대한 것으로 보았다. 사약은 왕이 특별히 내리는 자비에 가까웠다. 윤지충의 사례는 거의 강상죄에 상응하는 벌도 받을만한 일인데, 조선에서 강상죄를 저지르면 그 장본인은 물론이고 일족까지 전부 박살난다.[9] 사실, 천주교를 믿어도 정조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인재가 있으니 살살 달래면서 이들을 살려주고픈 의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10] 앞에 말한 천주교에서 자신들도 제사 비스무리한 행사를 하면서 동양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은 엄연히 횡포이자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간섭이고 모욕이다. 거기다 이게 잘못하면 정조의 입지 기반도 흔들 수 있기도 하기에, 웬만하면 좋게좋게 처신해서 넘어가려고 한 것.[11]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 기사[12] 현재 명동. 1898년 이 자리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인 명동성당이 세워진다.[13]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순교자.[14] 김범우의 무덤은 유배지인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산 자락에 남아있고 가톨릭 성지화된 상태다.[15] 이벽은 이후 아버지에게 배교를 강요받고 칩거하다가 사망했다.[16] 이게 사실 엄밀히 말하면 교회법상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독성죄파문에 이를 정도로 큰 문제이지만 선교사도 한 번 파견된 적 없는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신자들이 이런 걸 알 리가 없었으므로 당시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사정을 감안해 경고 조치로 넘어갔다.[17] 차마 정조를 깔 수 없었던 벽파는 대신 그를 '공작정치의 달인'이라며 욕했다.[18] 정확히는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다. 집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 (#) 이 말을 앞뒤 다 자르고 단장취의한 게 '무부무군'이라지만 원문은 원문대로 쇼킹한 게 사실. 앞뒤잘랐다고 해도 무부무군과 크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말도 아니다.[19] 심지어 장난삼아 말했을지라도 죽어야 했다. 예종 때 두 갑사가 새벽에 까치가 운 거 가지고 장난삼아 "새벽에 까치가 울면 주인이 저승 가는데, 이 궁 주인은 주상이니 주상이 곧 죽는거 아님? 그럼 영순군이 왕 되겠네?"라고 했다가 걸려서 참수 후 3일간 효수당했고, 갑사들의 입에 올랐다는 이유로 영순군도 죽을 뻔 했다! 장난삼아 한 말도 이정도다. 다만 이 사건은 왕권에 대한 도전에 극히 민감했던 예종대의 분위기를 감안해야 한다. 국왕이 정치를 못하고 어리석으니 나라가 엉망이다. 라는 요지의 디스에 가까운 상소를 받은 국왕들은 넘쳐났고 경종대의 노론은 국왕이 버젓히 살아있는데도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 한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예종대 같았으면 모두 역모죄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다만 전자의 경우는 흔히들 신하들이 "정치 좀 잘 하세요!" 라는 의미로 날리는 충고였고 후자는 경종의 권위가 워낙 미약해서 벌어진 특이 케이스로 이것도 참다참다 폭발한 경종에 의해 신임옥사가 터지며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2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21] 홍봉한의 친척이나 친아들은 아니다. 홍낙민의 아버지는 홍양한이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고 정조의 외할아버지인데, 임오화변을 주도하였던 사람이다. 홍봉한 등은 정조의 은전을 받았으나, 되려 이 은전 때문에 오빠 김귀주 등 친정이 풍비박산 난 정순왕후로서는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22] 원나라처럼 조선 왕을 사위로 삼아주던가, 아예 조선 왕을 폐하고 청나라 친왕을 한 사람 보내 조선 왕 자리에 앉혀달라고 했다![23] 아마도 황사영은 중국에서 신부가 배출된 것을 보고, 중국은 천주교를 보호하는 국가라고 착각한 듯하다. 그러나 중국은 유교 본고장인만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당연히 나쁘면 나빴지 좋을 리 없었다. 애초에 청은 옹정제 때부터 천주교 탄압을 진행한데다 건륭제는 준가르, 문자의 옥의 사례처럼 청의 통치를 건들면 절멸 수준으로 박살내는 것도 거리낌없이 해왔다.[24] 베트남만이 아닌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로 삼는데 종교를 빌미삼는 일은 많았다. 심지어 미국은 인구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인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며 당시 대통령인 매킨리가 하느님의 계시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25] 물론 이들의 말은 철저히 헛소리다. 사실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병인양요때 서구 세력을 도운 천주교도 셋이 있긴 한데 이보다 이전의 인물인 정하상 같은 경우는 나라를 엎는게 아니라 나라 안에서 천주교를 공인받으려고 했던걸 보면 이쪽은 비주류로 봐야 할 듯하다. 그리고 조선의 천주교 교세가 병인박해 시절에는 처형당한 교인이 8천명이 될 정도로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천주교가 나라를 엎어버릴 정도의 세를 갖췄다기엔... 글쎄?[26] 실제로 이보다 수십년후 터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조선군은 정말 제대로 털렸다. 어찌저찌 이겼다고 평가받긴 하는데 이것도 침략군 측에서 알아서 물러나준거지 정말 전면전으로 갔다면 처참하게 털렸을 것이다.[27] 당장에 정조대에 남인인 채제공도 천주교에 대해 임금과 부모를 업신여기고 허무맹랑하다며 비판한 바 있다.[28] 아마도 끝까지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진짜 가톨릭 신자로 보였을 것이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는 진짜 아니거나 맞다고 쳐도 가톨릭을 버릴 이들로 보았을 듯하다. 실제로 끝까지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온갖 고문에도 배교를 거부하고 설령 잠시 배교를 택해도 곧바로 철회하였으니 누가봐도 천주교 신자로 보일만도 했다.[29]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30] 한 해가 끝나기 전[31] 역대 조선의 사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대적인 숙청은 과거의 중요시되었던 노동력과 관련이 있어서 이만 끝냈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다 그만큼 많이 숙청했는데 천주교인 생존자들이 많이 남았을 가능성도 없고 있어도 다시 재기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이제 내버려둬도 상관없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32] 노론, 소론, 북인 양반 신자도 있었으나 극히 소수이었다.[33] 다만 이는 한국 천주교의 특별한 문화는 아니고, 제국주의 시대 천주교 선교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이었다. 주경철 저, <대항해시대>에서 제국주의 시대를 설명하면서 이를 다루고 있다. 사실 로마시대 초기 기독교도 이런 성향이 있었다.[34]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이때 순교했다.[35] 이는 다른 박해들보다 늦게 이뤄진 것이며, 이들도 절차를 거쳐 시성될 것으로 여겨진다.[36] 사실 천주교라고 모두 제사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이보다 앞선 시대에 온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는 중국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최대한 현지에 깊게 뿌리박힌 유교 친화적인 포교방식을 택했다. 천주라는 이름 역시도 예수회에서 그리스도교식 신 개념이 딱 맞는 한자어가 없고 유교에도 맞춰주다보니 유교경전에서 나오는 '천주' 라는 명칭을 택하여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온 다른 수도회들은 예수회와는 달리 현지에 맞춰주는게 없다보니 이렇게 된 것. 그리고 당연하지만 예수회처럼 현지 친화적인 포교에 나섰을 때는 그나마 중앙정부로부터 어느정도 용납받거나 덜 탄압받거나 했지만 현지를 무시하고 포교에 나서면서 현지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완전히 빠져든 신도 외에는 모두가 돌아서게 되었다.[37] 물론 천주교 신자들이 너무 늘어나면 정치적인 보수파들에 의해 탄압되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척화라는 가혹한 정책을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38] 유중철 요한의 아내. 다만 남편과는 동정(童貞) 부부였다. 천주교 박해가 엄혹했으며 엄격한 유교 사회였던 당시 조선에서는 독신 성직자·수도자로 살아갈 길이 없어서, 유중철과 이순이는 형식적으로만 결혼한 뒤 동정을 지키면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