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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8:41:40

후미에

1. 일본의 인명2. 17세기 일본에서 쓰인 가톨릭 신자 박해 도구
2.1. 개요2.2. 역사2.3. 관용어2.4. 매체에서의 묘사2.5. 같이보기

1. 일본의 인명

주로 여자 이름. 한자 표기는 文恵, 史惠, 史絵, 章枝 등등등.

2. 17세기 일본에서 쓰인 가톨릭 신자 박해 도구

2.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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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에(踏み絵, 밟는 그림)란 에도 막부가 당시 서역을 통해 전래, 교세가 확대되었던 일본 내 기리시탄(가톨릭 신자)들을 색출, 박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이다.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에부미(絵踏み, 그림 밟기)라고 했다.[1]

1629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 때 도입했다. 최초로 시행한 이 중 하나인 나가사키 부교 타케나카 시게요시는 타케나카 한베에의 조카이다.

2.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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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방법은 예수 또는 성모 마리아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2]을 바닥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 성상은 대체로 금속으로 만들었고 나중엔 물량이 부족해지자 천이나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 IHS[3]를 그려(쉽게 말해 성체의 모습) 만들기도 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차마 못 밟을 때는 물론이고, 밟기 직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거나 성호를 긋거나 조용히 통회의 기도를 올리기만 해도 바로 잡아갔다. 심지어 아기들이나 병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은 후미에를 발에 갖다대는 식으로 행했다. 당사자의 자백에 달린 문제이니 만큼 별 효과가 없어 보이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시행했을 당시 신자들에게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해서 이로 인해 잡히고 고문을 당하고 순교한 신자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는 성상이나 성화 등 종교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행위를 엄금하고 배교하는 표시로 어떤 외적인 불경한 행위를 강제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는 가톨릭 교리의 영향 때문이다.

막부도 무턱대로 죽이는 것이 꺼림칙했는지 '배교만 하면 살려 주겠다'고 회유도 해봤지만 대부분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4] 참고로 에도 막부는 유럽 출신 천주교 성직자들도 배교하기 or 순교하기의 선택지만 허용되었고, 귀국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성직자가 배교한 예시로는 크리스토방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5] 이들은 배교후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인으로 전향하여 카쿠레키리시탄의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소수의 배교자들의 경우, 남만서사(南蛮誓詞)라는 서약서를 제출[6]시키고 불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포르투갈 이후로 일본에 들어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들도 에도 막부기독교 선교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순히 후미에에 협조했다. 사실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 칼뱅개신교 신자였는데 칼뱅파 교회는 가톨릭 성상도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에 성상을 밟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7] 더군다나 일본을 자주 왕래하는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종교와 무관한 상인들이었다. 참고로 에도 막부도 무리하게 불교나 신토를 네덜란드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미국에서 10년간 살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존 만지로도 취조 당하면서 후미에를 밟았다.

하지만 탄압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신자들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냈다. 신자들이 어느정도 줄었을 때 막부는 길거리가 아닌 각 마을별로 에부미를 실행했는데 보통 정초에 했다. 에부미 날짜가 마을로 공지되면 신자들은 에부미 전날에 발을 최대한 깨끗이 씻고, 또 최대한 성상의 얼굴을 피해 밟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발을 씻고 참회의 뜻으로 발씻은 물을 다 마시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당시 극심한 박해와 탄압으로 사제가 한 명도 없어 고해성사를 볼 수 없었던 상황에 신자들이 나름대로 고안해낸 방법으로 보인다. 이후 1854년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이 서방세계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공식적인 탄압은 사라졌으나 암묵적인 압박은 이어졌다. 그리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에서 조상 제사는 민속 관습일 뿐 가톨릭 교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라는 칙서를 발표하면서[8] 가톨릭에 대한 외압은 조금 줄어들었다. 참고로 이 시기 가톨릭을 탄압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신토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가 되어서야 일본에서 가톨릭은 정부의 탄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2.3. 관용어

현대 일본어에서는 '권력자 등이 개인을 조사하는 행위, 또는 그 수단'이나 '어떠한 결정에서 몰래 반대한 사람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 등을 후미에라고 부르는 용례가 생겼다.

종교적 상징을 밟아 모욕을 준다는 발상은 종교 박해 경험이 있는 나라라면 흔히들 떠올리기 때문인지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종북 논란과 관련해 "십자가를 밟게 해서 천주교 신자를 가려낸 것처럼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일은 적도 있었다.

2.4. 매체에서의 묘사

예수상이 새겨진 동판인 후미에를 밟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당시의 기리시탄에게는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의 얼굴을 밟는 일이었습니다. 예컨대 연인의 얼굴을 밟으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습니까? 안 밟으면 고문하고 죽여 버리겠다고 한다면 밟겠습니까? 저라면 아내의 얼굴을 밟겠지만요. (강연장 웃음) 여러분, 지금 웃었습니다만,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에도 시대 기리시탄의 후미에와 마찬가지로 전쟁 중 우리 역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여기는 신조, 동경하는 삶, 그런 것을 흙 묻은 신발로 짓밟듯이 살아야만 했습니다. 전후 사람들이나 요즘 사람들 역시 많든 적든 간에 자신의 '후미에'를 갖고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17쪽
우리는 순교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밟았을지 모르니까요.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침묵의 재 안에서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침묵의 재를 긁어모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울러 저는 박해 시대에 그렇게 많은 탄식과 피가 흘렀는데도 왜 신은 침묵했을까 하는 ‘신의 침묵’과도 겹쳐 놓았습니다.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25쪽
*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에부미를 하고 배교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에부미를 하지 않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소설의 핵심 부분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콜세지감독의 사일런스(2016)에도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Before we took Shipping, I was often asked by some of the Crew, whether I had performed the Ceremony above-mentioned: I evaded the Question by general Answers, that I had satisfied the Emperor and Court in all Particulars. However, a malicious Rogue of a Skipper went to an Officer, and pointing to me, told him, I had not yet trampled on the crucifix: But the other, who had received Instructions to let me pass, gave the Rascal twenty strokes on the Shoulders with a Bamboo, after which I was no more troubled with such Questions.
우리가 배에 타기 전에 나는 몇몇 선원들로부터 앞서 언급한 의식을 행하였는지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하여 황제와 법정이 특히 만족했던 평범한 답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한 사악한 도적놈같은 선장이 한 군관에게 가서 나를 가리키면서 내가 아직 십자가를 밟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를 보내주라는 지시를 받은 다른 군관이 그 악당의 어깨를 대나무로 20대 쳤다. 그 후 나는 그러한 질문을 받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 3권 11장, "럭낵을 떠나 일본으로, 그 후 네덜란드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그 뒤 영국으로" 1892년대 판
* 걸리버 여행기 3권에서 걸리버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네덜란드인 행세를 했다.[10] 이 때 이 에부미를 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얼렁뚱땅 대화로 퉁쳤다. 걸리버는 자신은 무역을 위해서 온게 아니라 난파된 뒤 구조되어서 럭낵을 통해 일본에 오게 된 것이므로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국왕은 걸리버가 럭낵 왕의 친서를 가져온 인물이므로 이 일을 비밀에 부치는 조건 아래 특별히 허락했다고 나온다.

2.5. 같이보기



[1] 일본어는 청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 다른 단어가 붙으면 탁음이 되어서 '후미'가 '부미'로 발음이 바뀐다.[2] 이 판의 모델이 된 그림 중에는 야마다 에모사쿠의 작품도 있었다고 한다.[3] 그리스 문자로 '예수'를 표기한 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라틴 문자로 표기한 약자. 당연히 '예수'를 뜻하지만, 그리스어를 뜸하게 쓰기 시작한 중세부터는 라틴어 문장 Iesus Hominum Salvator(인류의 구원자 예수)의 이니셜이라는 말이 붙어버려서 IHS가 정작 그리스어로 '예수'의 머릿글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적다.[4] 이와 비슷한 경우가 조선에서도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일반 천주교 신도들에게는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이 배교하겠다고 말만 하면 죽이지 않고 즉시 풀어주겠다'라고 권고하였다.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하기 전인 정조 때도 '비록 거짓으로라도 입으로 배교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10년의 공부(신앙)가 햇빛에 녹아버린 얼음과 같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즉 배교 선언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5] 페레이라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등장하며, 작중 로드리고의 모델이 이 주세페 키아라이다. 막부의 관리로 기리시탄 탄압의 선봉으로 그려지는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실존인물로 본명은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正重, 1585~1661)#의 경우 본인도 배교한 기리시탄이었던 탓에 기리시탄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무턱대고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면서 신앙을 버리고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오히려 기리시탄들의 반발과 투쟁심만 더욱 불러일으킬 뿐인 하책(下策)"이라며 기리시탄에 대한 폭압적인 무단책보다는 정신적인 압박을 더욱 중시했으며, 그리고 일반 신자들에 대한 개종보다는 선교사로 온 신부들을 개종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귀 뒤쪽을 살짝 찢어서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서 피가 한 방울씩 찔끔찔끔 떨어지게 해놓은 다음, 결국 괴로워하던 기리시탄이 무의식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 마디만 중얼거려도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고 풀어주는 식이었다(실제로 페레이라가 이렇게 해서 배교했다).소설 침묵에서도 감옥에 갇혀서 옆방에서 들려오는 (고문 당하는 중인) 기리시탄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당신이 배교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저 기리시탄 세 사람을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싶으냐? 왜 그렇게 사람이 이기적이냐?"라며 분개하는 옥졸들의 원망 소리는 덤이다. 사실 종교 문제로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한국의 경우도 무단통치 시절보다 문화통치 시절에 더 많은 변절자가 등장했다.[6] 해석하면 남만(서양)의 종교를 다시는 믿지 않겠다는 서사(맹세문)이다.[7] 이미 1566년 성상파괴 소동이 터지는 등 16세기에 본국에 있던 성상들을 파괴한 전적이 있었고,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에는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상들을 철거해버렸다.[8] 이 조치는 한국 천주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도 조선 후기에 가톨릭 신자들이 유교식 제사를 완전 거부해서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지만, 비오 12세의 선언을 통해 지금은 한국 천주교도 집안들도 조상을 신으로 여기는 등 일부분을 고친 것외에는 일반적인 방식에 가까운 제사를 지낸다.[9] 이러한 논조는 예수가 생전에 했던 발언으로 복음서에 인용된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 인자를 거슬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서 12장 31-32절, 마가복음서 3장 28-29절, 누가복음서 12장 10절 등이 해당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해당 창작물에서처럼 예수 본인이 여전히 실재한다면 죄가 되고 말고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며, 후미에같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일 경우라면 용서해주거나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주의 사후에 교리를 정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교주의 성향과는 별개로 보수적인 잣대를 취할 수밖에 없다.[10] 당연하지만 네덜란드인 아니면 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