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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05:28:53

병인갱화



1. 개요2. 대혼저지기도 사건3. 벽파 자살골을 넣다4. 팔자 흉언의 진실과 벽파의 멸당
4.1. 김이영의 상소4.2. 팔자 흉언의 진실4.3. 벽파 역당으로 몰리다
5. 결과6. 같이보기

1. 개요

1806년(순조 6년) 노론 시파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조정의 주도권을 잡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최후의 당파 벽파가 사라졌고, 시파도 무의미해지면서 붕당정치가 종식되고 세도정치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2. 대혼저지기도 사건

정순왕후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벽파가 집권하기 시작한 후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들을 박멸하고, 시파에 대한 공세로 시파를 쫓아냈으며, 1804년까지 4년간 집권하였다. 순조가 성년이 되자 정순왕후가 수렴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정순왕후는 수렴을 거두어도 자신들과 벽파가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시파가 복귀하면서 이전과 상황이 달라졌고, 순조 또한 정순왕후의 정치와 벽파들의 의리를 보면서 의문점이 들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순조 1년에 순조가 시파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삼아 혼인하려 했는데, 벽파의 일원이었던 권유(權裕, 1745 ~ 1804)의 소를 문제삼고 대신들도 동조했는데 '곡돌사신(曲突徙薪)'[1]이란 말까지 하며 헤아릴 수 없는 의도를 드러내었으니 국문하여 죄를 밝히라하였다.

권유의 소는 역적 토벌에 대해 고하면서 이런 내용을 덧붙였다. '돌아보건대 저 명문거족중에 역적의 집안과 관련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나이다. 옛 사람이 천재를 피하기 위해 굴뚝을 굽게 만들고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한 경계는 이런 일을 염려한 것이옵니다'.라고 소를 올렸는데 당시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실록》은 단지 심환지의 요청에 따라 가볍게 조사한 일만 기록하고 있다. 심환지가 말하길 "무릇 '교목세가'란 모두 충신•명신의 후손입니다. 저 권유의 소 중 덧붙인 몇 줄은 실로 살피지 않은 것으로 믿는 뜻이 결여되어 있사옵니다." 하였고 여러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권유는 잡혀와 추국 중에 상소를 올리기 전 노론 벽파인 이안묵(李安默, 1756 ~ 1804)및 정재민(? ~ 1804)과 그 주변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때 참 잘 지은 글이고, 이 상소로 대혼을 훼방놓을 수 있겠다. 지금 국구가 될 사람[2]은 본래 의리를 지키는 쪽 사람이 아닌 데다[3] 금상이 즉위한 이후 더욱 믿을 만한 것이 없다. 대혼이 저지될지 보장은 없지만 일단 이 상소를 올려보자라고 실토했다. 이는 시파의 반격에 충분한 재료가 되어주는 발언들이었다. 결국 대혼저지기도 사건이 일어나 권유가 소를 올려 대혼을 훼방놓는 짓을 저질렀다고 보아 역적으로 정법되었다. 벽파의 맹장인 이안묵 또한 권유의 말에 찬동하였다하여 정법되었고, 벽파의 유생인 정재민 또한 권유의 상소에 찬동하였다 하여 정법되었다. 그러나 벽파의 몰락과 시파의 반격은 전초전이 되었고, 이 사건은 맛보기에 불과했으니...

3. 벽파 자살골을 넣다

시파는 그 동안 취한 정보와 들어온 풍문을 거론하며 강력하게 벽파를 몰아 세웠는데 정순왕후 김씨가 벽파가 밀리는 것을 보자 다시 정사에 관여하려고 수렴을 치려하자 이때 소론 시파의 대신 이시수(李時秀, 1745 ~ 1821)가 명분과 논리를 따져 정순왕후에게 "수렴이 웬말입니까?" 하여 정순왕후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고, 자신은 대혼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해명소를 올린 후 몇달이 지나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국구인 김조순(시파)이 주목을 받았는데 시파인 그는 벽파를 몰아내기 위해 순조의 외가인 반남 박씨와 손을 잡았다. 당시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 외삼촌 박종경, 박종보를 비롯해 반남 박씨가 제법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제 국왕에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보가 올라왔다. 왕은 벽파의 공격을 받고 유배된 김이교, 김이익, 이재학, 채홍원 등을 방면했다. 벽파는 수적으로는 시파에 비하면 열세였고,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심환지도 1802년 세상을 떠났으며 정순왕후 김씨도 세상을 떠나 서서히 멸당(滅黨)의 먹구름이 드리웠는데.. 1805년에 우의정에 제수된 안동 김씨이면서 벽파인 김달순(1760 ~ 1806)이 자살골을 넣어 이런 소를 올렸다.
'''의리(義理)를 천명하는 것은 곧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마음을 귀일시키는 방법입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先大王)[4]께서 굳게 지켜 행한 의리는 천지에 세워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대의 성인(聖人)을 기다려 질의해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24년 동안 풍속을 바로잡고 세상을 다스려온 정치가 이 의리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어찌 죄를 범한 모년(某年)의 역괴(逆魁)와 흉당(凶黨)들이 무함 핍박하는 말에 간여되어 번복(翻覆)시킬 계교를 도모하는 것이 한 번 변하고 두 번 변하여 임자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요망한 정동준(鄭東浚, 1753 ~ 1795)은 안에서 농간을 부렸고, 역적 채제공(蔡濟恭)은 밖에서 성원(聲援)하여 네 글자의 흉언(凶言)을 사방에 전파시킴으로써 일세(一世)의 인심을 광혹(誑惑)[5]시켰는데 학유(學儒)와 영인(嶺人)의 상소가 나오기에 이르러서는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성궁(聖躬)을 무함 • 핍박한 것이 이덕사(李德師, 1721~1776)·조재한(趙載翰, 1722~1776)의 말보다 더 참혹하였고, 정희량(鄭希亮, ? ~ 1728)·이인좌(李麟佐)의 격문(檄文)보다도 더 극심했습니다. 이들의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은 선조(先祖)만을 무함하고 핍박했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경모궁(景慕宮)을 무함하고 핍박한 것이며, 경모궁을 무함하고 핍박했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영묘(英廟)[6]를 무함하고 핍박한 것이니, 세상에 꽉 찬 죄는 위로 하늘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조(先朝)께서 질서를 펴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권한을 지니시고, 어찌 그 죄를 분명히 바루고 와굴(窩窟)[7]을 타파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단지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숨겨두고 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은미하고 완곡한 뜻이고, 정미로운 의리인 것인데, 그의 의리를 천명(闡明)하는 근본은 오직 성무(聖誣)를 분변한다[辨聖誣]는 세 글자에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양조(兩朝)의 아름다운 덕을 천명하여 거의 끊겨져가는 이륜(彛倫)[8]과 이미 회색(晦塞)[9]된 의리를 해와 달처럼 환히 밝히고 단청(丹靑)[10]처럼 찬란히 빛나게 해야 합니다. 이제야 세상의 도의(道義)가 안정되고, 백성의 마음이 귀일(歸一)되어 우리 400년 종사(宗社)를 반석(磐石)처럼 영원히 평안하게 만드는 것이 곧 선조(先朝)에서 만세(萬世)에 편안함을 남겨 준 계책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린 뒤로 자성(慈聖)의 휘지(徽旨)를 우러러 받들고, 선조(先朝)의 지사(志事)를 천발(闡發)[11]하여 왔으므로 성효(聖孝)가 더욱 빛나고 국시(國是)[12]가 크게 정하여졌는데 유독 영소(嶺疏)의 흉괴(凶魁)인 이우(李堣)를 지금까지 용서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형(失刑) 가운데 큰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추로(鄒魯)의 유풍(遺風)이 헛되이 흉당(凶黨)이 만인(萬人)이나 된다는 이름을 덮어쓰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런 까닭에 온 도내(道內)의 충지(忠志)를 지닌 선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난번 박하원(朴夏源)·홍지섭(洪志燮, 1754 ~ ?)을 곧바로 석방하기를 마치 잡범(雜犯)인 사죄(死罪)로서 때로 소석(疏釋)시킬 수 있는 것처럼 하였는가 하면 원의(院議)와 대장(臺章)을 일례(一例)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삼가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지고 사설(邪設)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행해져 인심이 의혹스러워하고 세도(世道)가 안정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이우·박하원·홍지섭에게는 모두 도배(島配)[13]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세상의 도의(道義)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마음을 귀일시키는 근본으로 삼아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선조(先朝)에서 경모궁의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면서 제일 먼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덕으로서 칭호를 높이고 덕을 찬양하는 제일의 의리로 삼았으니, 그때의 간신(諫臣)은 당초 포가(褒嘉)하는 전례(典禮)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절로 영광스러운 칭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가 점점 내려갈수록 의리가 회색(晦塞)되어가는 때에 이르러서는 충신(忠臣)과 사신(邪臣)을 변별(卞別)함에 있어 착한 것을 표창하고 악한 것을 괴롭히는 것보다 먼저해야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고(故) 지사(知事) 신 박치원(朴致遠, 1690 ~ 1767), 고(故) 사간(司諫) 신 윤재겸(尹在謙, 1701 ~ ?)에게는 특별히 시호와 벼슬을 추증하여 표창함으로써 선조(先朝)의 뜻을 계술(繼述)[14]하고 아름다운 덕을 천발(闡發)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실로 성효(聖孝)에 보답하소서"

그리고 연이어 이런 소를 올렸는데 이것은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한 벽파의 의리를 단단히 무장한다는 것인데 10일 후 순조는 영의정 서매수(徐邁修, 1731 ~ 1818), 좌의정 한용귀(韓用龜, 1747 ~ 1828)를 불러
우상의 거조 가운데 이우(李㙖)·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은 바로 근래에 관계되는 일이니, 으레 상량(商量)[15]하여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것이니, 상세히 살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하여 보니, 세초(洗草)속에 들어가 있었다. 우상으로 하여금 두 글을 찾아서 들여오게 했는데 원본(原本)을 보니, 과연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를 살펴보건대, 선조(先朝)께서 세초할 것을 앙청한 것과 영묘(英廟, 영조)께서 특별히 세초할 것을 허락한 것은 대개 이런 등류의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문적(文蹟)을 세간(世間)에 남기고 싶지 않은 데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양조(兩朝)의 성의(聖意)가 이미 이와 같으니, 후사(後嗣)로서 준수(遵守)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차마 추후에 거론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도리어 원서(原書)를 찾아본 것을 후회하는 것은 물론 마치 영묘·경모궁(景慕宮)·선조(先朝)께 죄를 진 것만 같다. 경모궁이 간언(諫言)을 용납한 성덕(聖德)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흠앙하지만 조(祖)·자(子)·손(孫)은 본래 일체(一體)인데, 선조(先朝)께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할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은 모두 선조의 구신(舊臣)들이니, 모쪼록 차례대로 상세히 진달하는 것이 옳겠다.

라고 정중하고도 완곡하게 거절하였는데 서매수와 한용귀는 세상에 어찌 만인소가 있을 수 있겠나이까? 협박하고 무함하고 다그치는 계교가 있으니 김달순의 의견에 동조하였고, 이우 등을 절도에 귀양보내라 하였는데 순조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시행하였다.

때마침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1762 ~ 1824)이 상소하기를 "김달순은 선왕일 때 한마디 의리를 아뢰지 않고 이제서야 아뢴다 말입니까? 정승에 제수될 때 의리를 알아 이제와서 의리를 깨달았단 말입니까? 저 대신은 선조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하였는데 그렇다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나이까? 김달순을 엄히 다스려 성효를 밝히시옵소서.." 라고 상소를 올렸고,

이를 본 순조는 "분발하고 통렬하고 명백하고 감동했도다." 라고 하였다. 이에 때를 맞추어 삼사들이 "김달순을 정법하고 엄히 다스리라하였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아뢰어 전하의 위상을 더럽힌 죄를 물어 삭탈관직하고 엄히물으라" 하였는데 이를 본 순조가 "대신이 고의로 그런 망동을 하였는가? 그냥 떠본 것을 뿐이요!"라고 응대했는데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이르기를 "하긴 정말 하나하나의 소가 나중에 불안까지 드러내 보였다. 한두 가지 말이 뼈와 살이 떨리고 치솟게 하는구나!! 김달순을 삭탈관직하고 도성 밖으로 문외송출하라." 했다.

이에 대간들이 형을 더 올리라 하였는데 처음에 김달순을 정배하고 극변으로 유배보냈으나 신하들의 처벌 요구가 거세 수위가 높아졌다. 결국 김달순은 절도에 안치된 채 가극하였고, 영의정은 이병모(李秉模, 1742 ~ 1806)로 교체되었으며, 조득영은 병조판서로 특진되었다. 이를 틈타 시파의 공세가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시파의 탄핵 내용을 보면
"김달순이 지금의 김달순이 된 것은 심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환지는 역적 권유의 대혼저지기도를 살짝 찬동하는 기미를 보였고, 김달순의 와굴로 도당을 불러모아 선왕의 의리를 바꿔버렸으며, 대혼을 저지하고 삼간택을 않는다고 흉론을 창도하는 자는 정일환도 마찬가지라 죽었다 하더라도 죄는 마찬가지입니다."

김관주에 이르러서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인류(人類)에도 끼일 수가 없는 사람인데, 척리(戚里)의 기세를 빙자하여 스스로 추류(醜類)[16]들이 연수(淵藪)[17]를 만들었습니다. 흉악하고 패리(悖理)[18]한 계모(計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고, 간역(奸逆)들과 속마음이 서로 화응(和應)되어 심지어는 강연(講筵)에서 아뢰게 되었는데, 그의 역절(逆節)이 남김없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아! 우리 선대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교화는 하늘이 덮어 감싸 주는 것과 같아서 온 동토(東土)의 생명을 지닌 무리들은 도(道)와 의(義)를 준행하여 황극(皇極)으로 모이는[會極] 교화속에 들어서 다함께 탕평(蕩平)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히 수십년 동안 군흉(群凶)들이 조정을 탁란시켜 온 이야기를 멋대로 발론하여 우리 선조(先朝)의 청명(淸明)한 정치를 무함하였으니, 이 한 가지 조항만으로도 1만번(壹萬番)죽여도 오히려 가벼운 형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은 이미 바로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심환지와 정일환(鄭日煥, 1726 ~ ?)의 관직을 추탈하고, 김관주를 문외출송시켜 극변으로 유배보내소서."

이에 순조는 "그대들 의견이 올바른데 어찌 안따르겠는가? 아뢴대로 하여라." 라고 했다.

결국 심환지와 정일환은 추탈되었고, 벽파의 맹장들은 유배되었다. 김달순은 사사되었고, 전 영의정 서매수는 삭탈관직되었다. 김관주는 극변으로 이송중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4. 팔자 흉언의 진실과 벽파의 멸당

4.1. 김이영의 상소

안동 김씨의 시파인 도승지 김이영(金履永, 1755 ~ 1845)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가만히 보건대, 근일 대각(臺閣)에서 성토(聲討)함에 있어 엄격함이 가위 ‘여온(餘蘊)이 다하여 없어지고 근와(根窩)가 다 드러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천하의 일은 본원(本源)이 없지 아니하여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라 그 점차적으로 유래된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유래된 곳에 밝게 분변하여 쪼개어 깨뜨리지 않는다면 의리가 오히려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 신이 어찌 차마 말하겠으며 전하께서도 어찌 차마 들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만약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말하지 않는다면 의리가 끝내 밝혀질 날이 없을 것이니, 이에 신이 부득이 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영묘(英廟) 신사년 이후로는 곧 천지가 번복(翻覆)되는 시기였고, 신민이 진탕(震蕩)한 때였습니다. 삼종(三宗)이 왕업을 위탁하고 사해(四海)가 은덕을 칭송한 것은 오직 선대왕(先大王)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이른바 김한록(金漢祿)이란 자가 있어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을 끌어대어 한두 지구(知舊)의 사이에 문난(問難)하다가, 마침내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정론(正論)에 저지된 격이 되었습니다. 이미 또 명위(名位)가 정해지고 국본(國本)이 영구히 공고해졌으면 그가 감히 전언(前言)을 다시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이어서,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이미 그의 마음을 주토(誅討)하여 진심으로 거절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 말이 문자(文字)에 나타나지 않았고 자취가 일한 데에 드러나지 않아서, 후려쳐도 형체가 없고 잡아도 흔적이 없어 여러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리워서 한평생의 진위(眞僞)를 현혹시킬 것 같았는데, 어찌하다가 그 말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더듬을 수 없고 이치가 그윽함이 없어도 나타나지 않으며 깊이 베어들고 널리 전파되어 덮어 둘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소리로 화답한 홍양해(洪量海)는 역적의 소굴에 주련(株連)되어 먼저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으나, 그가 요행히 모면하여 혼자만 온전한 것은 우리 선대왕의 산수(山藪)와 같이 넓으신 마음이며 전보(全保)하시려는 은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아는 사람의 분노를 쌓고 한탄을 품은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사이에도 한두 신하가 연전에 앙주(仰奏)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개 그 한 마음이 가려지고 한마디 말의 흉한 것은 그 시초가 비록 미미하나, 그 지류(支流)는 대단히 넓어서 곳에 따라 근원을 만나고 유(類)에 부딪쳐 근본을 돌이켜 역적 권유(權裕)의 변이 나오고 김관주(金觀柱)의 죄가 드러나기에 이르렀으니, 이 아비에 이 아들이 한 법을 서로 전하고 앞뒤의 몸뚱이가 한 꿰미에 꿰어져서 막 타오르는 불길과 졸졸 흐르던 물이 점차 들판에 번지고 하늘까지 불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징토(懲討)하자는 논의도 또한 그 지류를 밟으니 그 원류는 알지 못하고 그 끝은 다스리나 그 근본을 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부득이해 말하는 소이(所以)이나, 또한 신이 사사롭게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니며 대개 온 나라가 거론할 공공(共公)의 논의이지만, 특별히 신으로부터 드러나게 되었을 뿐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이 소장을 가져다가 조정 신하들에게 내보여, 신의 말을 만약 무고(誣告)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 죄에 복주(伏誅)할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빨리 천토(天討)를 시행하소서.

라고 소를 올리고 순조는 김이영의 소를 받고 대신들과 상의를 해보왔다.

4.2. 팔자 흉언의 진실

순조는 삼정승, 즉 이시수 이병모 서용보와 김이행 김희순을 불러 차대(次對)[19]하였다. 임금이 승지 홍석주(洪奭周)에게 명하여 도승지 김이영(金履永)의 소장을 독주(讀奏)[20]하게 하여 끝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상소 가운데에 이른바 김한록(金漢祿, 1722 ~ 1790)은 김관주(金觀柱)의 아비인가?"

하니,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이른바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과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 1133~1180)에게 답한 서찰[21]이란 곧 무슨 뜻인가? 관계됨이 대단히 중대하여 경들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하려 했던 까닭에 아직껏 비답을 내리지 않고 먼저 경들에게 보이는 것이니, 상세하게 진달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 등이 이 소어(疏語)를 보고는 가슴이 뛰고 뼈가 오싹하여 진달할 바를 몰랐습니다. 선조(先朝)의 초년에 홍상길(洪相吉, 1746 ~ 1777)의 역옥(逆獄) 때 선조께서 친히 묻기를, ‘이와 같다면 향후의 일을 장차 어떻게 하려고 생각했느냐?’ 하니, 홍상길이 말하기를, ‘추대(推戴)한다면 이찬(李禶)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자, 선조께서 진노하시어 어안(御案)을 밀어붙이고 하교하기를, ‘이는 모두 〈당나라 중종의 일을 인용한〉 여덟 글자[八字]의 흉언(凶言)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시고 그대로 일어나서 바로 소차(小次)로 드시었습니다. 신이 그때에 성교(聖敎)를 우러러 듣고서 비로소 ‘여덟 자의 흉언’이 있은 줄 알았으나, 오히려 그 언근(言根)의 출처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뒤쫓아 들으니 그 언근은 김한록한테서 나왔다는데, 대개 김한록이 호중(湖中)에 있으면서 이러한 흉언을 발설하자, 고 참판 김이성(金履成)의 부형 김의행(金毅行)과 지금 중신(重臣) 김희순(金羲淳, 1757 ~ 1821)의 조부 김교행(金敎行, 1712 - 1766)이 심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호중은 본래 사부향(士夫鄕)[22]입니다. 이같은 흉론(凶論)이 이미 나온 뒤 온 세상에 유파(流播)되었는데도 아래에서 힐문(詰問)[23]할 길이 없었으니 단지 분개하여 한탄하는 심정만 간절하였을 뿐입니다. 고 참판 신 김이성이 무신년 ·기유년 사이에 이 일을 연중(筵中)[24]에서 주달하였는데, 선조께서는 함인(含忍)[25]하며 드러내지 않으시고 끝내 처분이 없었으므로 신(臣)도 역시 그가 주달한 바가 어떠하였는가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고 상신(相臣) 윤시동(尹蓍東)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대개 선조 때에 김관주를 소통(疏通)시키는 일로써 고 상신에게 하교하자 고 상신이, ‘신은 듣건대, 김이성이 김한록의 여덟 글자 흉언으로써 그 가정에서 들은 바를 연중에서 앙진(仰陳)하였다.’고 대답하였으니, 그 아비의 흉언이 이와 같다면 소통시키라는 명을 어찌 감히 받들겠습니까? 고 상신이 이로써 신에게 전부 말하였기 때문에 신이 그 흉언을 직접 들은 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아직도 본가(本家) 사람의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 소장을 보니 도승지가 그 집의 사람으로서 어찌 사실과 틀리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비국 당상 김희순이 바야흐로 들어왔으니, 이는 그 집 안에서 들은 바를 더욱 당연히 자세하게 알 것입니다만, 그 지극히 참혹하고 패려한 흉언을 실로 신자(臣子)로서 차마 형용하여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이같이 옛날에도 없었던 역적에게 어찌 잠시라도 왕법(王法)을 굽힐 수 있겠습니까마는, 일이 대단히 중차대한 데에 관계되니, 신 등이 비록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죄를 청하였으나 그 사체를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대동(大同)한 논의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삼사(三司)의 인원을 갖추어 신속히 극률(極律)을 실시하도록 하소서."

하고,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이 말이 전언(傳言)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십분 상세하게 알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분명히 듣고서 아는 사람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께서 비록 그 흉언을 하순(下詢)하셔도 이는 신자가 차마 형언할 것이 못됩니다. 이같은 흉역(凶逆)에게 왕장(王章)을 시행하지 않았는데 귀신이 먼저 벌을 더하였으니, 이미 아주 대단히 마음 아프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은 일찍이 상세하게 알지 못하고 흉역의 도당과 함께 아울러 조신(朝臣)의 첫 반열을 계승하였으니, 지금까지 부끄럽고 분개하여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신 등이 바깥에서 소장 가운데에 논한 바를 듣고서 요상(僚相)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곧바로 처분을 청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관계됨이 대단히 중대하니 온 나라에서 똑같이 주장하는 주토(誅討)가 없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삼사를 빨리 갖추어 형장(刑章)을 펴도록 하소서."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1757 ~ 1824)는 말하기를,
"신은 연기(年紀)가 많지 아니하여 오래 된 일을 비록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나 입조(立朝)한 이후의 일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고, 김한록의 흉언은 신도 또한 들은 지 이미 오래 되어 마음속으로 늘 몹시 한탄하였습니다. 비단 신뿐만 아니라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역시 들은 사람이 많지마는, 특히 관계됨이 중대하다고 여기어 감히 형용하여 말하지 않은 까닭에 근본되는 원인이 감추어져 증거할 바가 없어서 추궁하여 힐문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 나타내어 말하는 처지에 이러한 쪼개어 깨뜨려 환하게 진달한 말이 있어서 이같이 사실 그대로이고 의심이 없으니, 이는 실로 사적(史籍)을 기록한 이래로 있지 않았던 바 대단한 흉역(凶逆)입니다. 신 등의 놀라고 아픈 마음으로 일이 곧바로 극률을 청하여 즉시 몽윤(蒙允) 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관계됨이 대단히 엄하고 사체가 심히 중대하니, 반드시 온 나라의 공통된 의논을 기다리는 것이 비로소 흡당(恰當)하겠습니다. 오직 삼사의 자리를 빨리 갖추어 극률을 신속히 실시할 것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아까 하순하신 데 대하여 차마 말로 표현해서 우러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만, 대개 이른바 ‘여덟 글자의 흉언’이란 것은 곧 당나라 중종 때의 일을 들어서 지금에 견준 것이고 ‘주자가 장경부에게 답한 서찰’이란 것은 곧 그 의논이 불가함을 엄히 배척한 것입니다. ‘여덟 글자의 흉언’에 대해서는 일찍이 선조의 하교를 받들어 옥음(玉音)이 아직까지 귀에 남아 있는데, 이는 신자(臣子)로서 감히 제기해 말하고 차마 표현하여 말하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또한 언근(言根)을 핵실하라고 청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그때 기주(記注)의 신하도 상상컨대, 반드시 감히 재록(載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은 반드시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신이 아뢴 바를 들으니, 대단히 놀랍고 두렵다. 이 일이 어떻게 되어 지금에 와서야 처음으로 발설되는 것인가?"

하매, 이병모가 말하기를,
"그때에 선조의 하교를 조정 신하들이 자세하게 깨닫지를 못하였고, 김이성이 아뢴 바를 들은 자가 심히 적었기 때문에 미처 성토(聲討)하는 자가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 때에 비록 용서하여 죄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이미 발설된 뒤에야 어찌 용인하고 그냥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선조 때에라도 명백하게 탄로되었다면 또한 어찌 한결같이 가리어 덮어둠이 용납되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사체(事體)가 더욱 자별한데, 이미 발설된 뒤에 어찌 잠시인들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은 집안에서 들은 바를 자세하게 아뢰어라."

하므로, 행 대호군(行大護軍) 김희순이 말하기를,
"신이 그때에 나이가 어려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집안에서 말한 바를 나중에 들으니, 김한록이 당나라 중종 때의 일을 가지고 신의 조부에게 묻자, 신의 조부가 주자가 장경부에게 답한 서찰을 보이며 엄격히 말하여 물리쳤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밖에도 또한 들은 것이 있는가?"

하니, 김희순이 말하기를,
"이것 외에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하고, 이병모가 말하기를,
"이 일은 별로 다시 더 자세하게 밝혀야 할 단서가 없으니, 마땅히 시행할 형률을 어찌 한 시각인들 잠시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시수가 말하기를,
"천하의 난역(亂逆)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어찌 이러한 흉역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이병모는 말하기를,
"선대왕께서 하해와 같은 도량으로 덮어두고 핵실하지 않으셨으나, 전하께서 이미 이 소장을 보셨으니 천토(天討)의 시행을 어찌 한 시각인들 넘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비국 당상들은 모두 자세히 들었는가?"

하므로,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 1752 ~ 1820)·호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1744 ~ 1811)·상호군(上護軍) 김사목(金思穆, 1740 ~ 1829)·지중추부사 서영보(徐榮輔, 1759 ~ 1816)·이조 판서 박종래(朴宗來, 1746 ~ 1831)·행 대호군 김희순·병조 판서 조득영(趙得永)·형조 판서 이시원(李始源, 1753 - 1809)·행 호군(行護軍) 이득제(李得濟, , 1743 ~ 1819)·예조 참판 박종경(朴宗慶, 1765 ~ 1817) 등이 함께 말하기를,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여러 사람의 분노를 신속히 씻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홍계능(洪啓能, ? ~ 1776)·홍상길의 흉언은 곧 태갑(太甲)의 동궁(桐宮)에 대한 말이겠으나, 김한록의 흉언은 이것보다 지나침이 있으니, 곧 최초 흉언의 근저(根柢)입니다. 이것이 어찌 마음에 싹틔워 입으로 발설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만, 그 무리들이 부도(不道)한 말을 발설하였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차대(次對)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을 널리 묻고자 와서 모이게 한 것인데, 이렇게 아뢰는 바를 들으니 아주 대단히 놀랍고 두렵다. 어찌 차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다른 일은 아뢰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절실하고 당연하십니다. 천토(天討)를 시행하기 전에 어찌 다른 일에 미칠 겨를을 가지겠습니까?"

하였다.

4.3. 벽파 역당으로 몰리다

위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영조 37년 즈음에 김한록이 흉언했다가 김이영 집안의 사람에게 배척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증명할 글과 증언이 없고, 관련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정조도 즉위 초부터 알고 있었는데 정조 12년, 13년에 김이성이 아뢰었지만 정조는 그냥 덮었으며, 이 역시 들은 이가 극히 적어 증언해줄 이가 없다는 것 정도인데 대신 삼사가 격렬히 반응했고 "김한록을 노륙하고 김일주를 국문하소서."라고 요구했고 불똥은 곧장 벽파의 중심을 향했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김귀주와 역적 김한록은 두몸이면서 같은 창자이옵니다."하였고, 이시수 또 한 "흉언은 김한록에게서 나왔지만 그 근본은 김귀주에게 있나이다! " 삼사가 동조하기를 "그러하옵니다! 김귀주의 관작을 추탈하시고 김종수는 김귀주에게서 의지했고 김귀주는 김종수에게 의지했습니다. 김종수를 추탈하고 출향하소서." 이에 순조김귀주김종수를 추탈하라는 명을 내렸다.

5. 결과

권유의 상소에서 비롯된 대혼 저지 기도사건으로 권유, 이안묵, 정재민 등 벽파의 맹장들이 정법되었고, 이미 죽은 벽파의 중추인 심환지와 정일환은 추탈되었으며, 김달순의 발언과 관련해 김달순 등 벽파의 지도부가 제거되었다. 또한 8자 흉언 사건으로 벽파의 근간인 김귀주와 김종수는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벽파는 과거에 소론과 남인처럼 역당으로 몰렸다.

결국 노론이 주류였던 최후의 당파인 벽파는 4년의 집권 뒤 불과 2년만에 역당으로 몰려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병인갱화 후 현실주의 세력인 노론 시파만 남았지만 당색이 무색무취하고, 그나마 당파다운 당파인 남인신유박해로 이미 멸당되었으며, 소론은 소수당으로 있다가 이병모•이시수가 사망한 후에 후계자 양성에 관심도 없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붕당은 소멸하였고, 외척 안동 김씨가 막후로 있는 노론 시파들이 집권하였다. 허나 시파 또한 '선왕 정치 복원, 선왕 정치 계승'의 명분으로 올랐으나, 사도세자의 추숭문제에서는 선왕이 이렇게 적극 지지했다하여 시파란 이름을 얻은 집권세력도 누구 하나 건의도 못했는데 자칫하다간 죽은 벽파가 되살아나 보복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순조와 집권 시파는 사실상 정순왕후 김씨와 벽파의 정책을 대부분 뒤집지 못했다.[26]

6. 같이보기


[1]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화근을 미리 방지하라는 말[2] 김조순[3]시파[4] 정조[5] 속여 홀림[6] 영조[7] 좋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8] 떳떳이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9] 캄캄하게 아주 콱 막히는 것[10]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려서 장식한 것[11] 밝히어 드러냄[12] 국가의 이념이나 국정상의 큰 방침.[13] 섬으로 유배[14] 선조나 부형의 뜻과 사업을 이어 가는 것[15] 헤아려 생각하는 것[16] 더럽고 지저분한 무리[17] 모여드는 곳[18] 이치에 어긋남[19] 국가 행정에 관계된 일을 보고하던 일[20] 상주(上奏)할 것을 어전에서 읽는 것[21] 주자서절요에 주자가 장식(張栻)에게 보내는 답장(答張敬夫)에 나오는 것이다.[22] 사대부가 많이 사는 시골[23] 트집을 잡아 따져 묻는 것[24]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자문(諮問)ㆍ주달(奏達)하던 자리[25] 마음속에 넣어 두고 참는 것[26] 다만 김조순이 등용한 안동 김씨 시파 세력 중엔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문제에선 다시 한동안 온건 노선을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