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황사영 黃嗣永 | |
생몰 년도 | 1775년(영조 51) ~ 1801년(순조 1) |
국적 | 조선 |
직업 | 진사 |
본관 | 창원 황씨 |
호 | 비원(昌原) |
자 | 덕소(德紹) |
종교 | 기독교 (천주교 | 세례명: 알렉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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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양반 출신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며,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동자이다. 본관은 창원(昌原)[1], 자는 덕소(德紹).천주교 일각에서 순교자로 보는 몇몇 견해를 제외하면 반역자, 매국노로 비판하는 시각이 더 많은 편이다. 당시 황사영이 저지른 죄는 외환죄, 즉 처형에 해당하는 최악의 죄였다. 심지어 천주교에서조차 대외적으로는 그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2]
신유박해를 즈음한 조선의 자세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황사영 백서'를 남겼다.
다산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丁蘭珠)[3]와 혼인하여 다산과는 조카딸 사위이자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의 제자이다. 자산어보의 저자로 알려진 다산의 작은 형 정약전과도 조카딸 사위이다. 이로 인해서 다산과 작은 형 약전이 유학파 신하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이 사건과 동시에 황사영의 조카 사위이기 때문에 이에 연루되어서 각각 전라남도 강진군과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2. 생애(백서 사건 이전)
황사영은 1775년 한성부 서부 반송방(성외) 아현계 아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4]에서 정8품 휘릉별검(徽陵別檢)을 지낸 황석범(黃錫範)의 유복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790년(정조 14)에 증광시 진사시에 3등 83위로 입격했다. 천주교 교육 만화에 따르면 이 때 정조가 친히 두 손으로 황사영의 오른손을 꼬옥 쥐고 격려를 했는데, 본인은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겨 오른손에 비단을 감고 평생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후술하는 체포되는 순간까지도.[5]하지만 실록을 보면 정조는 열렬한 성리학 중심주의자였고, 천주교에 대해 금지의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움으로써 사학(천주교)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 임금 및 실권자들과 방식이 다를 뿐, 천주교에 대해 선은 확실히 그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 마리아[6]와 혼인했으며, 셋째 처숙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7]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3. 황사영 백서 사건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현 배론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기면서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을 담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는데, 그중에 외국의 군대를 이용해 정부를 뒤집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편지를 보내려다가 도중에 검문으로 발각되면서 결국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자세한 것은 해당 사건 문서 참고.
4. 시복 추진
황사영은 순교자이기는 하나 백서 사건이 국가적 시각으로는 반역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복시성이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다가, 2013년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선정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가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교황청 시성성은 2013년 황사영을 포함한 133위 순교자에 대한 예비심사 관할권을 마산교구에 부여함으로써, 황사영 알렉시오에게도 시복 후보자에게 부여되는 “하느님의 종(Servus Dei)”[8]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산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예비심사권한을 위임하였고,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유흥식 라자로 주교가 2017년 1월 21일 시복 안건을 재판할 법정 구성을 명함으로써 현재 시복을 위한 소송 절차가 진행 중이다.
2021년 6월 10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시복 133위의 예비심사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하였다.# 다만 교황청 내에서 결론이 나오기까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 내부에서도 "이건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5. 유적과 유물
충청북도 제천시에 소재한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는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황사영 역시 이곳에 몸을 숨기고 백서를 작성했다. 현지에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한 토굴이 복원되어 있고, 황사영의 동상 및 순교현양탑이 있다.한편,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바티칸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전부 복제품이다.
6. 후손
황사영의 직계후손은 의외로 추자도에 산다. 황사영이 정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황경헌(黃敬憲)[9]은 추자도로 유배를 갔다. 황경헌은 역적의 아들임에도 아직 2살이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지 않는 대신 평생 노비로 살도록 하였는데, 하나 남은 혈육을 평생 노비로 살게 할 수 없어서 호송관원을 매수하여 황경한은 유배 도중 죽어서 수장한 것으로 처리하고, 대신 포구의 바위에 두고 갔다.마침 포구 근처의 오씨 성을 쓰는 어부가 황경헌을 거두어 길렀으며, 황경헌은 평범한 어부로 살다가 생을 마쳤고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이 추자도에 살고 있다. 어부 오씨와 황경헌이 사실상 친부자 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추자도에서는 그 집안끼리도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사영의 현손 중 하나가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의 아들인 황사영의 5대손은 도쿄에서 외국어학원 원장으로 지내다가 사망해, 일본에도 황사영의 후손이 살고 있다.
황사영의 후손 중에서도 천주교 신자는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7. 창작물
- 김훈의 소설인 <흑산>에서는 정약전과 함께 스토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사실상 주인공급의 비중을 지니고 있는데, 외모와 마음, 성격 등이 모두 맑고 순수하며 깨끗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러나 조정의 극렬한 천주교 박해와 부패한 사회상, 신분 차별 등에 염증을 느껴 토굴 안에서 글을 쓰다가 정탐꾼에게 발각당해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 흥선대원군을 주제로 나온 <석파란>에 잠깐 나온다.
[1] 공희공계 17세 영(永) 항렬.[2] 다른 순교자들은 대부분이 이미 시복/시성되었는데, 황사영의 경우 순교자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지만, 워낙 그의 행적이 논란, 비판의 소지가 컸던 탓에 꽤 오랫동안 시성 과정에서 후순위로 밀렸다가 2013년에서야 '가경자'(하느님의 종. 복자 전 단계)로 선포되었고, 다시 2021년에 시복 청원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3] 본명은 정명련(丁命連)이다.[4] 경기도 강화유수부 장령면 고월동(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65-1번지)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이 곳은 현재도 창원 황씨 집성촌이다.#[5] 다만 이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애초에 진사시는 과거 중에서도 지역에서 보는 최초의 시험인 소과로, 임금 앞에서 보는 대과 전시도 아닐 뿐더러 당시 황사영의 합격 등수는 3등의 83위로 고작 126명 중 113등에 불과했다. 좋게 보면 위인전에서 흔한 과장인데, 이 내용을 김훈의 소설인 <흑산>에서도 사실인 것처럼 반영했다. 다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합격했다는 점과 정조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예뻐했던 정약용의 조카사위라는 점에서 정조가 기대를 걸고 따로 불러 격려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진사가 된 것 자체로도 어쨌든 지방에서는 큰소리 칠 만큼 대단해진 거나 다름없다.[6] 정난주라고도 한다. 남편이 처형되자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인 황경한(당시 2살)은 추자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자라났다. 제주시 외도동에 정난주 마리아의 이름을 딴 '정난주성당'이 있다.[7]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을 참조.[8] “하느님의 종” 단계에 있는 순교자에 대하여는 성당 안팎에서 행하는 공식 장엄행사나 찬양기도가 금지되고, 성화를 그릴 때 성인임을 나타내는 후광을 그려넣는 것도 금지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지순례,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종'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은 권장된다.[9] 황경한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