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역은 전주교구 설정 이전인 조선 시대부터 신앙이 이어져 오던 곳이었다. 호남지역의 첫 신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6]인데,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 가족과 친척, 친구 등에게 전교하였다. 이후 일가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의 사촌인 윤지충 바오로 또한 김범우 토마스를 통해서 천주교를 접하고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초기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794년 윤지충 바오로와 그 사촌 권상연 야고보[7]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제사를 올리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으로 인해 전주에서 순교하면서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를 신해박해라고 하며 이들이 순교한 장소가 바로 지금의 전주 전동성당 자리였다.
정조가 승하한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박해가 벌어지자, 각지의 신자들은 산간지역으로 이전해서 몰래 신앙을 지켜왔다. 이때 교우촌을 형성했는데,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수류(수류성당), 되재(되재성당지), 고산(고산성당), 전주 대승리, 여산 천호동 등이 있었다.
그후, 신앙의 자유가 생기면서 한국 천주교도 교구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1911년에 조선대목구[8]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은 대구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당시만 해도 전라도 전체에 7개의 성당과 7명의 신부[9]가 있었으나, 교세가 성장하면서 1931년 전라북도 지역을 전주감목대리구가 설정[10]되었으며, 초대 감목대리로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가 임명되었다. 김양홍 신부의 교구장 임명은 방인 출신 사제로써는 처음이었으며, 이로써 전주교구는 한국 지역에 설정된 교구 중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교회 행정이 완전히 이루어진 곳이 되었다. 1937년에는 광주감목대리구와 함께 전주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구대목구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전주지역에 새로운 교구가 설정되게 되었다.
지목구 설정 후 최초의 주교좌성당은 전동성당이었으나, 1957년 서노송동에 위치한 중앙성당으로 주교좌성당이 변경되었었다. 그 후, 1962년 한국에 정식교구체계가 설정되면서 전주지목구는 전주교구로 승격하게 되었다.
1963년에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이관함에 따라, 그 후 1980년 8월 29일자로 금산군의 각 본당을 천주교 대전교구로 이관시켰다.
조선대목구에서 서울대목구, 대구대목구의 분리가 논의되던 당시 전주교구 또한 분리될 뻔했다. 당초 뮈텔[23] 주교는 교구 분리를 두고 파리 외방전교회 측과 협의할 당시 전주교구[24]까지 포함해 3곳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했다.[25] 하지만 파리 외방전교회가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대구가 먼저 분리되었다.
분리 당시 신자 수는 대구교구보다 전주교구가 많았음에도 뮈텔 주교가 대구를 분리시키기로 했던 이유는 이러하다. 먼저 호남 지역보다 영남 지방에 기차가 뚫리면서 선교의 가능성이 높았고[26], 무엇보다 전주교구가 '가난하기로 유명한 교구'였기 때문. 그래서 새로운 성당을 짓는 등 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전라도 지방의 교우들은 가난하여 이를 충당하기 어렵다고 판단[27], 결국 대구 지역에 먼저 교구가 설정되었다.
매주 주일에 신자들에게 발부되는 주보는 '숲정이'. 전주시덕진구 진북동에 있는 숲정이성지의 이름을 따 왔다. 전주교구 내 신부님들의 강론글, 교구 행사 관련 소식, 교구 소식 및 공지와 각 본당별 소식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농 현상이 있는 지역이라 도시권역에 성당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북 최대 지역인 동/서/남/북 전주지구의 성당만 42개로, 총 96개 성당 중 절반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하며, 도시권인 전주시, 완주군, 익산시, 군산시의 성당만 총 96개 성당 중 72개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1] 사무처장 겸직[2] 7위 모두 전주 인근 교우촌에서 살다 병인박해 때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성인들이다.[3] 현재의 교구청 자리에는 과거 전주공업전문대학이 있었으나 1998년 효자동으로 캠퍼스를 옮기면서 빈 터가 됐고 2005년 전주교구가 이 땅을 사들여 새 교구청을 지었다. 2007년 새 교구청이 문을 열기 전까지는 서노송동 전주시청 인근에 있는 가톨릭센터를 교구청으로 활용했다. 참고로 옛 가톨릭센터는 1970~1980년대 전북지역 민주화 운동의 거점 역할을 한 곳이기에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이다.[4]전북특별자치도 인구의 약 10.7%에 해당한다.[5] 2017년 전주교구 교세통계표(천주교 전주교구 발간), 천주교 전주교구 홈페이지 참조[6]2014년8월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복자로 시복됐다. 유항검의 아들인 유중철 요한과 유중철의 아내인 이순이 루갈다, 유항검의 또 다른 아들인 유문석 요한 등 그의 가족도 다수 이때 함께 시복됐다. (한국 124위 순교복자)[7] 두 사람은 나란히 2014년8월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복자로 시복됐다.[8] 분리 후 경성대목구로 개칭.[9]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외국인 신부 5명 포함.[10] 이때 전라남도 지역도 함께 감목대리구로 분리되었으나, 전남 지역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완전히 위임되었다는 점이 전주와 달랐다. 해당 내용은 천주교 광주대교구 역사 항목 참조 바람.[11] 사목표어 "복자 안드레아여 인도하소서 (B.ANDREA DUCE)"[12] 사목표어 "십자가로 구원 (SALUS IN CRUCE)"[13] 사목표어 "네 나라가 임하시며 (ADVENIAT REGNUM TUUM)"[14] 사목표어 "스승의 말씀대로 그물을 치리이다 (IN VERBO TUO LAXABO FETE)"[15] 사목표어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PER QUEM OMNIA)"[16] 사목표어 "충성과 온유 (IN FIDE ET LENITATE)"[17] 사목표어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NON QUOD EGO VOLO SED QUOD TU)"[18] 사목표어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VADE ET TU FAC SIMILITER 루카 10,37)"[19] 교구 관할 내 출신 교구장은 모두 5명인데, 이 중 김현배ㆍ이병호ㆍ김선태 주교는 모두 천호동-여산 성치골 교우촌의 김해 김씨 한 집안에서 나왔다.[건립중][한]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소속[22] 퀘존한인성당 주임 겸직[23]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24] 처음 논의될 당시에는 '전라도 교구'.[25] 조현범(2007),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대목구의 분할」, 『교회사연구』 29, 31쪽[26] 조현범(2007),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대목구의 분할」, 32쪽; 35쪽.[27] 김진소(1998), 『천주교 전주교구사 1』, 도서출판 빅벨, 7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