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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11:57

관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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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계파4. 한계5. 몰락6. 나무위키에 등재된 관학파 인물7. 관학파의 집권 기간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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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학파()는 조선 태조 시기부터 단종 시기까지 조선통치에 일익을 담당했던 관료집단이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 출신들이 많다. 그 외에 권문세족 출신들도 많이 있었다.

관학파는 일반적으로 관학(官學), 즉 국가에서 세운 학습 체계를 이용하여 발전하였다. 성균관에서 유학을 배우고 등과한 다음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신 대신 집단을 가리킨다.

관학파=훈구파라는 잘못된 등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는 네이버 백과사전으로 관학파를 치면 자동적으로 훈구파 항목이 뜬다. 그러나 관학파와 훈구파는 엄밀히 다르며, 훈구파에 관학파들이 제법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관학파와는 관련없는 양아치가 포함된 경우가 있으며, 훈구파 중에 양아치로 불린 세력들은 양정이 사형당하고, 홍윤성이 죽으면서 일찍 몰락했다.

관학파 중에 김종서 계열과 사육신 세력, 생육신 세력을 포함한 절의파는 이들 훈구파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절의파나 김종서 세력 일부는 나중에 사림파에 제법 합류했다. 단 정인지나 신숙주, 최항 같은 이들처럼 집현전 출신이면서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권력을 누린 이들은 관학파와 훈구파 모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 때문에 훈구파와 관학파가 혼동되고 있는 셈. 반대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은 관학파긴 하지만 훈구파는 아니다.

2. 특징

존재시기가 너무 짧았지만(불과 50년) 태조 대에서 문종 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조선 초기 찬란한 문화적 성취 대부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은 세종 시기로 대표되는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새 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민심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고려/불교조선/유교(성리학)으로 갈아치우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구시대의 악풍습 쇄신이 병행된 덕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무에 있어서도 후대의 사림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세종대왕 시대의 양전 정리 사업을 후대에는 도저히 이런 걸 어떻게 했는지 수학적으로 감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름부터가 관학(館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무능력을 중심으로 성립된 집단일 뿐 아직 성리학은 초기단계에 불과했던지라 사상적으로는 유학에 깊지는 못했다. 때문에 겉으로는 숭유억불을 주장하고 유교를 국시로 삼아야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유학을 깊이 익히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문장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 것인가를 궁리하고, 스님이랑 놀거나 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1] 물론 후기 사림파 뺨치게 유교원리주의자였던 정도전이나 윤소종 같은 인물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3. 계파

관학파에도 여러 파벌이 존재했는데 태조 이성계 때는 이방석을 비호하는 정도전 계열과 반정도전파인 이방원 계열이 있었고 정종 때는 박포 계열과 이방원 계열, 태조 시대 원로 계열이 있었다. 이어 태종 때는 외척, 공신 쪽의 파벌과 태종 친위세력 쪽의 파벌이 있었고 그 외에도 원로계열 또한 있었다.

그러다 세종 초에는 구왕파 파벌과 신왕파 파벌로 나뉘었고 세종 집권기에는 신왕파가 계속 우세했다. 그러다가 문종 때부터는 다시 계파가 나뉘는데, 친김종서파와 반김종서파가 대립했고 단종 때 계유정난 이후로는 친수양대군파와 반수양대군파로 나뉘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친수양대군파가 승리한다.

4. 한계

사람들 사이엔 '관학파 = 훈구파'라는 등식이 널리 퍼져있어서 사림파가 관학을 몰락시키고 성리학 원리주의 국가를 만들었다고 사림파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에서 말했듯 훈구파는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집단을 이르는 말이며, 관학파 = 훈구파인 것도 아니다. 관학파 중에서도 계유정난에 반대해 후일 사림파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사림파들 역시 자주적인 의식을 가진 이들도 많았으며, 사대를 강조한 것은 조선이 명나라에 험악한 관계로 지내봤자 좋을게 없으니 그런 것에 가깝다.

또한 당시에는 일반 민중들에게 유교 규범이 널리 퍼지지 못해 불교와 결합된 토속 신앙 미신과 도덕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팽배했기에 유교를 사회 곳곳에 퍼트려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집중하느라 그런 이미지가 씌워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실무분야의 능력에서도, 사실 성균관이나 향교 역시 어차피 서원과 같은 유학 커리큘럼인 것은 다름 없어서 특별히 체계적으로 실무 능력을 배양하거나 이러한 인재를 육성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교적인 부분에서 쓸모가 많은 사장을 중시했다거나 하는 점이 언급되고, 무엇보다도 이후의 사림파가 임금을 도와 국정을 보좌하는 관료, 아주 쉽게 뭉뚱그리면 실무 담당 행정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웠다는 것'이 문제다.

실무 능력이 뛰어났다고 하려면 수학이나 행정학처럼 과거시험에서 안보는 학문들을 중시했다는 소린데, 수학은 고려시대부터 너무 어려워서 기피학문이나 마찬가지였으며,[2] 사람들이 생각하는 체계적인 행정학은 20세기에 생겼다. 윗문단에서 사림파가 철학자들이 가깝다고 하는데, 이때는 국가의 이념 철학=통치행정이었던 시절이다.

성종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삼사로 대표되는 청요직이 실무외적인 부분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초임 관료시절부터 행정실무나 외정, 군정보다는 중앙정부에서 말발을 세우는 것이 엘리트코스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이럴 수 있는 배경이 바로 학맥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사림파 고위 대신들의 행적을 보면 잠깐 돌고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실무 경험이 하나도 없는데도 고위관직으로 나가는 신기한 모양새가 자주 발견된다. 중앙내직의 비실무직만으로도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이 가능하고 이걸 엘리트코스 취급한 것이 조선시대 사림파 집권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관학파 중에서도 사림파로 이어진 경우가 있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인-노론계열로 이어질 기호학파의 경우 아예 관학파와 훈구파에 사림파가 합쳐져서 형성되었으며, 퇴계 이황의 본관으로 조선 주자학의 아성이었던 영남학파만 해도 기호학파만큼은 아니지만 유방선 등의 관학파들의 영향력이 꽤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학맥으로 이끌어주는 이런 루트가 없어서 외직도 하고 실무도 거치고 군사 경험도 있는 초기 관학파들이 현장경험 때문에 실무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5. 몰락

관학파는 계유정난 이후 훈구파와 은둔 세력(절의파, 청담파 등)으로 갈라지고,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로 대표되는 관료간의 힘싸움이 시작된다.

계유정난 이후에 집현전이 혁파되고, 세조 시절때 정체당하다가, 1463년에 홍문관이 설치되고 1478년에 홍문관의 기능을 확대함으로써 성종 시절에 관학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504년에 갑자사화에 대한 여파로 연산군에 의해 홍문관이 폐지되었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홍문관이 부활했다.

그러나 중종은 정치 판단력이 낮은 편이라 잦은 옥사로 재위기간 내내 불안정했고,[3] 훈구파들도 자기네끼리 서로 편을 나눠, 정치 투쟁을 벌였던 지라, 관학이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중종 시절에 홍문관이 성종 시절때처럼 국왕 자문과 학술 연구 기관으로 제대로 된 기능을 활약하지 못했으며,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이어진 관학에 대한 관심 부재로 관학은 암흑기에 빠졌다. 관학이 정체되다 보니, 성균관향교는 점점 성리학을 연구한 사림파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관학을 발달시키기 위해 왕이 학문을 좋아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왕들이 아무리 관학 진흥책을 펼쳐봐야 결국 태종이나 세종이나 문종이나 성종처럼 학문에 관심있는 왕이 아니고서야 관학은 쇠퇴되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제왕조의 국가의 특성상 왕과 신하들은 서로 간의 한통속으로 굴러가는데 성종을 뒤를 이은 연산군은 홍문관을 폐지해 관학의 줄기를 잘랐고, 중종은 홍문관을 부활하나 중종 자신이 정치 능력이 한참 모자라 옥사와 같은 사건이 자주 벌어졌고 정국이 불안정해서 관학이 부활할 틈을 막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훈구파는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이어진 정치 혼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관학 쇠퇴, 자신들끼리도 다툰 정치 투쟁으로 스스로 쇠퇴했다.

그리고 중종 시절에 혼란한 정국을 피해 은퇴한 관리와 과거 시험을 통한 관리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리학에 빠지게 되었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급기야는 조선에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과 학설이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기에 서원이 설치되면서 자신들이 내놓은 학설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학문적 중심이 사림파로 가는 상황에서 훈구파는 결국 명종 시절에 사림파의 정치 진출을 허용했고 자연스럽게 소멸하면서 사림파는 선조 시절에 정권을 잡아 이후에 붕당 정치를 이끌게 되었다.

6. 나무위키에 등재된 관학파 인물

7. 관학파의 집권 기간


이후의 문서는 훈구파 참조 바람.

8. 같이보기


[1] 이런 경향은 신진사대부 출신 관학파보다는 문벌귀족에서 관학파로 흡수된 케이스에서 심했다. 대표적으로 진주 강씨 출신인 강회백이 있는데 공양왕의 사위로서 고려와 운명을 같이 했던 강회계의 친형이다.[2] 장난이 아니라 진짜 사실이다, 고려사만 봐도 토지에서 세금을 걷을때 자잘한 단위를 계산하기 귀찮아서 그냥 생략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3] 물론 중종은 연산군때 갑자사화처럼 신하를 많이 죽이지 않았으나 옥사가 자주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이고, 정치적으로 안정 기간이 10년 내외 수준이라서 중종 재위 내내 정치가 불안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