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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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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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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여흥 민씨
(+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
조선 세도 가문
新 安東 金氏 (壯洞 金氏)
신 안동 김씨 (장동 김씨)
관향 <colbgcolor=#fff,#191919>경상북도 안동시
시조 김선평(金宣平)
중시조 김습돈(金習敦)
집성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기도 고양시
충청북도 청원군
충청북도 괴산군
충청북도 음성군
충청남도 논산군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경상북도 안동시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북도 예천군
인구 47,702명 (2015년) 인구의 0.096%[1]
21,554명 (1985년) 인구의 0.053%[2]
사이트 안동김씨 안동화수회(安東金氏 安東花樹會)

1. 개요2. 역사
2.1. 고려2.2. 조선 전기2.3. 조선 중기2.4. 조선 후기2.5. 세도 정치기
3. 후손
3.1. 15~29세3.2. 30세(基/年)3.3. 31세(鍾/鎰)3.4. 32세(求)3.5. 33세(模)3.6. 34세(然)3.7. 35세(培)
4. 분파
4.1. 항렬
5. 관련 문서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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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개국 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며 김습돈(金習敦)을 중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본관은 경상북도 안동이다. 현대인들에게는 풍양 조씨, 여흥 민씨와 더불어 조선 말기 세도정치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케 하고 조선 왕조의 멸망을 가속화,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를 유발한 가문 중 하나로 익숙하기도 하다. 특히 신 안동 김씨의 내에서도 경복궁 근처 장의동에 거주하면서 세도를 누리던 김상헌의 후손들은 "장동 김씨(壯洞 金氏)"라고 자칭하면서 자신들을 다른 신 안동 김씨들과 다르게 특별한 취급을 하기도 했다.

2. 역사

파일:안동김씨태장재사(安東金氏台庄齋舍).jpg
태장재사 전경모습
조선시대 본관별 당상관 배출 수

2.1. 고려

족보에 따르면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효공왕의 아들로 신유(辛酉, 901)년 흥덕궁(興德宮)에서 봉안용수(鳳眼龍鬚)[3]와 성정호위(星精虎威)[4]의 기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효공왕이 사망했을 당시 11세의 나이라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고 한다.[5]

926년(경애왕 3년) 김선평(金宣平)은 고창의 성주(城主)로 부임했고,930년(고려 태조 13년) 왕건(王建)을 돕기 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고창군(高昌郡)에서 권행(權幸)·장길(張吉)과 함께 견훤(甄萱)의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그 전공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대광(大匡) 작위를 받았다. 족보에 의하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최고위 귀족 태사(太師)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으며, 고창군(古昌郡)은 안동부(安東付)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현재 안동(安東)은 김선평에 의해서 개칭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부(亞父)라는 것은 고려의 황제 왕건(王建)이 김선평(金宣平) 태사를 존경해서 “아버지에 버금간다”라고 해서 버금 아(), 아비 부()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의하면 김선평을 스승처럼 따랐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에는 이들 3태사(太師) -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을 제향하는 태사묘(太師廟)가 남아 있으며, 약 1000년동안 金(김), 權(권), 張(장) 3姓(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신)안동김씨는 개국공신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내내 사환, 학문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향역(호장, 부호장, 호장정위)을 세습하는데 만족하였다. 심지어 세계마저 불완전하여 김선평과 김습돈 사이의 대수(약250년, 7~8대)를 확인할 수 없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이전은 산소의 위치도 알 길이 없다. 이는 같은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고려후기부터 명문으로 성장한 안동권씨와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신안동김씨가 기가(起家)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청음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때였다. 그는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전농정(典農正)을 지냈으며, 풍산류씨 류난옥(柳蘭玉)의 손녀사위가 됨으로써 풍산류씨와의 세의(世誼 : 대대로 사귀어 온 정(情))를 확보하게 된다. 류난옥은 바로 선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풍원부원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8대조이다. 한편 김득우(金得雨, 1332~ ?)는 안동권씨 권희정(權希正)가문과의 혼인을 통해서도 가문의 입지를 더욱 신장하게 된다. 김득우는 권희정(權希正)의 딸을 외아들 김혁(金革)의 아내로 삼았는데, 권희정은 세종조에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권진(權軫)의 아버지였다. 더욱이 김득우는 권진을 사위로 삼음으로서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사이에는 연혼, 중혼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은 안동김씨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안동김씨는 고려시대 이래로 단 한 명의 문과(대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사위이기는 하지만 권진(權軫, 1357~1435)이 문과를 통해 정승(우의정)의 반열에 오름으로서 그 반사적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통혼의 과정에서 김혁은 배상지(裵尙志), 이운후(李云候)와 동서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배상지(裵尙志, 1351~1414)는 고려말의 은사로서 서애 류성룡은 그를 두고 “상설처럼 맑고 옥처럼 정갈하며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고절을 지킨 선비”로 평가하였다. 그의 5세손 배상룡(裵尙龍)은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7세손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은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 :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로서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배삼익의 계열은 조선후기 안동의 대표적인 명망가문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이운후(李云候)는 바로 퇴계 이황의 고조부로서 진성이씨 예안 입향조였다. 이처럼 안동김씨는 혼인을 통해 안동 굴지의 명가들과 연계하였는데, 이는 곧 문호의 신장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아니었다.

2.2. 조선 전기

한편 신안동김씨는 김득우(金得雨), 김혁(金革), 김삼근(金三近)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우선 김득우, 김혁 부자는 시조 이래 450년 세거지인 안동의 강정촌(江亭村, 현재 안동시 정상동 귀래정 부근)을 떠나 풍산현의 불정촌(佛頂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들의 풍산 이거는 처가이며 외가인 풍산류씨(豊山柳氏)의 경제적 기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풍산현 불정촌(안동시 풍산읍 하리리)도 안동김씨의 영원한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김득우의 손자 김삼근(金三近, 1390~1465) 대에 이르러 인근의 소요산(素耀山)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소요산은 풍산현의 치소와 5리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원래의 명칭은 금산촌(金山村=소산리)이었다. 김삼근의 입거를 계기로 풍산 소산은 안동김씨의 <백세터전>으로 자리하게 된다. 현재 안동에서는 이들을 <素山金氏>로 부르고 있으며 안동, 파주, 서울, 충청 등 경향 일대에 거주하는 신안동김씨 11개파 모두 소산에서 분파된 가문들이다.

김삼근이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풍산읍 하리리)에서 풍산현 소산리(금산촌)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1430년(세종 12년) 전후로 짐작된다. 이주와 동시에 제택(第宅 : 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건립하여 정착의 토대를 다지는 한편 자질(자식과 조카)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이런 기반 위에서 (신)안동김씨는 무려 550년 만에 비로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게 된다. 김삼근에게는 김계권(金係權), 김계행(金係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차남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1447년(세종 29년) 17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1480년(성종 11년) 50세의 고령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것이다. 김계행은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까지 올랐으며 청백(淸白)을 <傳家之至寶>로 삼아 향리에서는 보백선생(寶白先生)으로 칭송되었다. 말년에는 안동부(安東府) 길안(吉安) 묵계(墨溪)로 이주(첫째부인 이천서씨를 23세에 사별한후 24세때 의령남씨 사헌부장령 남상치의 차녀와 재혼하였다. 쌍청공 남상치는 사헌부지평 및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으며 도덕과 문장이 뛰어났다. 계유정난단종이 폐위되자 한양에서 안동으로 낙향하여 길안 거묵역 - 거묵동, 묵촌, 묵계에 쌍청헌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아들이 없어 후일 사위인 김계행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내외묘사를 당부했다. 남상치(南尙致)공의 조부는 의성군에 봉해지고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을 역임한 보리공신 양정공 남좌시(南佐時)이며 부친은 좌명원종공신 상호군 남심(南深)이다.)하였는데, 후학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이 곳에 묵계서원(墨溪書院)을 건립하였다. 그의 가계는 안동김씨 중에서도 보백당파(寶白堂派 또는 定獻公派)로 불리고 있으며, 후손 중 현달(顯達)한 인물로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고제(高弟 :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구전 김중청(金中淸, 1567~1629 : 김계행의 5대손)을 들 수 있다.

김계행의 문과(대과)급제는 신안동김씨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 김삼근이 득성 이래 최초의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였다면, 그는 최초의 문과(文科) 합격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안동김씨는 김계행을 통해 과거의 문턱을 넘음으로서 향반(鄕班)에서 점차 도반(道班), 국반(國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계행은 어디까지나 장동김씨(김삼근-김계권 계행-김영수-영 김번 순-김생해-대효 원효 김극효-상용 상준 상관 김상헌 상복-김광찬-수증 수흥 김수항-김창집 창협 창흡-김제겸-김달행-김이중-김조순-김좌근-병기)의 직계조상은 아니었다. 장동김씨(壯洞金氏)의 선대가 과거를 통해 출사하기까지는 이로부터 2대(김영, 김번 형제의 문과급제)를 더 기다려야 했다. 청음(김상헌)의 5대조 김계권(1410~1458)은 과거 출신이 아닌 관계로 벼슬이 한성부판관(종5품)에 그쳤지만 그는 예천권씨(醴泉權氏) 권맹손(權孟孫)의 사위가 됨으로써 자식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권맹손(權孟孫, 1390~1456)은 1408년(태종 8년) 문과에 급제하고, 1429년(세종 11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 승진시험)에도 급제한 수재였다. 특히 그는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세종조의 문병(文柄 : 學文과 文治상의권리)을 좌우하였으며,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과 같은 문사와의 교유도 깊었다.

한편, 김계권은 5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세조의 국사를 지낸 명승 학조대사(學組大師)이고, 둘째 김영전(金永詮)은 사헌부감찰, 셋째 김영균(金永勻)은 진사, 넷째 김영추(金永錘)는 수원부사, 다섯째 김영수(金永銖)는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다섯째 사헌장령 김영수는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김영(金瑛)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를 지내고, 둘째 김번(金璠)도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서윤을 지냈으며, 셋째 김순(金珣)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형조좌랑을 지냈다.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주도한 세력은 흔히 장동 김씨(壯洞 金氏)라 불리는, 한양을 근거로 한 신 안동 김씨의 한 분파였다.

평양서윤을 역임한 김번(金璠)의 후손들이 안동 김씨 서윤공파로 분파하였는데, 김번(金璠)이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장동 김씨(壯洞 金氏)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의 청풍계(淸風溪)와 장의동(壯義洞)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김번의 후손들은 왕비 3명, 후궁 1명, 부마도위 2명, 종묘공신 6명, 판서 35명, 당상관(정3품 이상) 140여명 등을 배출하였다.

2.3. 조선 중기

한편, 김계권의 5대손이자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헌(金尙憲)이 인조 때에 왕실의 외척이 되면서 조선 말기에 권력이 정점에 이르게된다. 이들은 세도 정치를 통하여 60년간 이들은 왕의 권력을 넘보는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종친의 권력을 유지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3명의 왕비 곧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를 왕들과 혼인시켰다. 가문을 사칭하는 백성을 능지형에 처해 가문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극소수 정예 가문이 되었다.

김창집의 증조부 김상헌에 이르러 그들의 가문은 충절(忠節)의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상헌은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으로,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은 강화도 남문루에서 분신하였고, 척화항전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또한 김상헌은 1639년에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대로(大老)로 인정받으며 북벌의 상징적 인물로 숭앙되었으나, 양주의 석실촌(石室村)에 은거하였다.

2.4. 조선 후기

장동 김씨(壯洞 金氏)는 노론에 합류하였는데, 김수증(金壽增),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은 장동 김씨 가문을 노론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충청의 산림 송시열·송준길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며, 현종조의 예송논쟁·숙종조의 환국기를 지나며 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은 1674년의 갑인예송 때에는 춘천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 이후에는 10년간 형제가 번갈아 가며 영의정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1689년의 기사환국에 즈음하여 유배 후 사사(賜死)라는 파란을 겪는다. 김수증은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華嶽山)에 은거하며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김창집노론 4대신으로 경종에 의해서 성주에서 사사되었으나, 동생인 김창협김창흡은 학문과 문장에서 당대를 호령하였고 그 후손들과 사위, 제자들은 학력(학맥), (가문)혼맥으로 얽히며 장동 김씨는 최고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다. 이후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로 노선을 타면서[6] 정조의 눈에 들게 된다. 김조순(金祖淳)은 정조가 총애했고 생전에도 그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정조 본인도 김조순의 5대조인 김수항 등의 학문을 정순하다고 여겨 존경했을 정도였다. 정조 본인은 노론 자체를 싫어한 것도 아니며, 싫어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노론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인물이다. 정조는 문체반정이니 하는 행보를 밟았고 심환지에게 나도 벽파라며 시인했다.

2.5. 세도 정치기

신 안동 김씨는 나라 망하게 한 귀족 가문으로 인식이 되어 있지만 청백리나 훌륭한 관리, 재상, 학자가 많다.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에 일찌기 가문이 융성하게 된 것이다. 세도 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도 실록을 보면 관서 지방을 다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소한 일도 나오고, 관대한 면도 있는 유능하고 곧은 관료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생전에 정조의 큰 신임을 받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도 정조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신 안동 김씨를 이끌던 시기는 전횡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김조순은 당대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조순의 뒤를 이어 아들인 김좌근(金左根)과 양손자인 김병기, 또 다른 장동 김씨인 김문근 등이 세도정치를 하면서 모두가 아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거에서 왕족은 멸시를 받고 신 안동 김씨 출신이 급제하자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를 외친 경평군 이세보[7]가 눈엣가시가 되어 유배를 갔을 정도였다. 어찌나 이들의 위세가 높았는지 이원경을 추존하려던 역모의 주모자들도 왕은 폐위시켜야 하지만 신 안동 김씨는 보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상황이 급변하면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음을 우려했는지 왕실의 외척 즉 왕의 장인 자리는 놓지 않았다.

비록 헌종조 초와 철종조의 신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은 조선이 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기 집안이라면 능력도 안 보고 무조건 요직에 앉힌 여흥 민씨(驪興 閔氏)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일족 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편이다. 참고로 이 집안은 무능하다고 판단되면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건 기본이고 승진도 안 시켜준다. 그 흥선대원군마저도 신 안동 김씨 중 유능한 인사들을 판서급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을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다.[8] 고종 초의 정승과 재상직을 역임하며 대원군의 개혁 공신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병학은 고종 초의 대표적 영의정이었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그의 아우인 김병국(金炳國)은 이조 판서, 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사창제 실시에 크게 기여했다.[9] 그렇지만 끝내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됐는지 대원군 하야를 거들었고 덕분에 고종 친정 이후에 이최응과 함께 정승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김병기는 병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에는 김병덕, 김병교, 김병시, 김병지 등 신 안동 김씨들이 판서급의 요직에 대거 기용되었다. 왕후 3명·부원군 3명·정승 15명·배향공신 6명·판서 35명 등 많은 고관대작을 배출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일합방에 협력한 공으로 8명이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작위를 수작하거나 습작하였다.[10]

신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선 큰 관심이 없던 것에 가깝다. 천주교 박해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순왕후와 벽파 세력이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안동 김씨 입장에선 굳이 천주교 잡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신 안동 김씨 내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도 간간히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상헌의 봉사손인 김건순으로[11] 이 사람은 병자호란치욕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망상을 품고 있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여러 의미에서 시파(時派: 시류에 영합)다운 면모. 헌종 때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를 주도한 세력은 풍양 조씨.[12][13] 그들 자신도 유자고, 유자 중에 신주 불태우고 제사 안 지내는 행위를 옹호할 사람도 그걸 주장할 명분이 있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신 안동 김씨가 강하나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몰아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기해박해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박해라는 해석이 있다.
自洪國榮專權以來, 凡戚畹當路者, 謂之勢塗, 其指勢塗也, 必擧其所居坊洞之名, 如明世宰輔之擧地以號而曰, 長沙·江陵·分宜·貴溪之類, 故金氏稱典·校洞, 趙氏稱磚洞, 至大院君居雲峴, 故稱雲峴, 非但勢塗爲然, 近世之稱大臣也亦然, 必以閤字, 配其洞名曰某閤, 如居會洞則曰會閤, 升洞則曰升閤。

홍국영이 집권한 후 외척으로 출세한 사람들을 세도가로 칭하였다. 그 세도가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그들이 거주한 방리와 동명을 들어, 명나라 때 대신들이 지명을 따라 장사(長沙)[14] · 강릉(江陵)[15] · 분의(分宜)[16] · 귀계(貴溪)[17] 등으로 불렀던 것과 같이, 김씨들도 전동(典洞)교동(校洞)으로 부르고, 조씨들은 전동(磚洞), 대원군운현궁에서 살았으므로 운현(雲峴)이라고 한 것이다.
비단 세도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근세의 대신들도 그렇게 하여, 반드시 「閤」 자를 洞名에다가 붙여 ‘某閤’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會洞에 거주할 경우 會閤, 升洞에 거주할 경우는 升閤이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1권 上 - 세도가의 칭호[勢塗稱號]

3. 후손


3.1. 15~29세

<rowcolor=#FFFFFF> 성명 출생 분파 직책
15세
김상용(金尙容) 1561년 문충공파 우의정
김상헌(金尙憲) 1570년 문정공파 좌의정
17세
김수항(金壽恒) 1629년 문정공파 영의정
18세
김창집(金昌集) 1648년 문정공파 영의정
김창협(金昌協) 1651년 문정공파 고위관료
김창흡(金昌翕) 1653년 문정공파 고위관료
김창업(金昌業) 1658년 문정공파 고위관료
김창즙(金昌楫) 1662년 문정공파 고위관료
19세
영빈 김씨(寧嬪 金氏) 1669년 문정공파 숙종후궁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년 문정공파 시인
21세
김이소(金履素) 1735년 문정공파 좌의정
김이교(金履喬) 1764년 문충공파 우의정
22세(淳)[18]
김희순(金羲淳) 1757년 문충공파 이조판서
김명순(金明淳) 1759년 문충공파 이조참판
김달순(金達淳) 1760년 문정공파 우의정
김조순(金祖淳) 1765년 문정공파 부원군
김온순(金蘊淳) 1776년 문충공파 예조참판
김매순(金邁淳) 1812년 문충공파 예조참의
23세(根)
김홍근(金弘根) 1788년 문정공파 좌의정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년 문정공파 순조왕후
김조근(金祖根) 1793년 문정공파 부원군
김흥근(金興根) 1796년 문정공파 영의정
김좌근(金左根) 1797년 문정공파 영의정
김수근(金洙根) 1798년 문정공파 배향공신
김문근(金汶根) 1801년 문정공파 부원군
김보근(金輔根) 1803년 문충공파 병조판서
김성근(金聲根) 1835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24세(炳)
김병연(金炳淵) 1807년 휴암공파 시인[19]
김병운(金炳雲) 1814년 문정공파 한성판윤
김병기(金炳基) 1814년 문충공파 형조참의
김병학(金炳學) 1821년 문정공파 영의정
김병국(金炳國) 1825년 문정공파 영의정
김병덕(金炳雲) 1825년 문충공파 우의정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년 문정공파 헌종왕후
김병시(金炳始) 1832년 문정공파 영의정
철인왕후(哲仁 王后) 1837년 문정공파 철종왕후
김병익(金炳翊) 1837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김병필(金炳弼) 1839년 문정공파 예조판서
김병원(金炳鵷) 1880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25세(均/圭)
김응균(金應均) 1801년 문충공파 예조판서
김옥균(金玉均) 1851년 문충공파 급진개화파
김병규(金炳奎) 1874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김서규(金瑞圭) 1875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김호규(金虎圭) 1911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김성락(金成洛) 1919년 예의소승공파 국회의원
김창규(金昌圭) 1920년 참봉공파 공군참모총장
김덕규(金德圭) 1941년 참봉공파 국회부의장
김충립(金忠立) 1947년 승의랑공파 정당인
김충환(金忠環) 1954년 생원공파 국회의원
26세(鎭)
김학진(金鶴鎭) 1838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김석진(金奭鎭) 1843년 문충공파 독립유공자
김가진(金嘉鎭) 1846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 독립운동가
김영진(金英鎭) 1876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김좌진(金佐鎭) 1889년 문충공파 독립유공자
김동진(金東鎭) 1891년 문충공파 독립유공자
김경진(金慶鎭) 1895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김익진(金翼鎭) 1896년 문충공파 검찰총장
김우진(金祐鎭) 1897년 승의랑공파  작가
김종진(金宗鎭) 1901년 문충공파 독립유공자
김기진(金基鎭) 1903년 문충공파 소설가
김성진(金晟鎭) 1905년 문충공파 보건사회부장관
김대진(金大鎭) 1917년 어담공파 국회의원
김성진(金聖鎭) 1931년 문정공파 문화공보부장관
김덕진(金德鎭) 1954년 문정공파 고위관료
김웅진(金雄鎭) 1957년 어담공파 생물학자
27세(漢)
김종한(金宗漢) 1844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김영한(金榮漢) 1857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김복한(金復漢) 1860년 문충공파 독립유공자
김창한(金榮漢) 1870년 문충공파 중추원참의
김덕한(金宗漢) 1874년 문정공파 조선귀족
김의한(金毅漢) 1900년 문충공파 독립유공자
김을한(金乙漢) 1905년 문정공파 기자
김중한(金重漢) 1909년 처사공파 국회의원
김두한(金斗漢) 1918년 문충공파 국회의원
김증한(金曾漢) 1920년 문충공파 문교부차관
김흥한(金興漢) 1924년 문충공파 고위법관
김수한(金守漢) 1928년 예의소승공파 국회의장
김광림(金光琳) 1948년 처사공파 재정경제부차관
김혜경(金惠京) 1966년 문정공파 이재명 당대표부인
김민지(金玟志) 1985년 문충공파 아나운서
28세(東)
김명동(金明東) 1903년 문충공파 국회의원
김동인(金東仁) 1927년 진사공파 국회의원
김익동(金益東) 1930년 참봉공파 국립대학총장
김복동(金復東) 1933년 참봉공파 국회의원
김옥숙(金玉淑) 1935년 참봉공파 노태우 대통령의 영부인
김휘동(金暉東) 1944년 사헌공파 기초자치단체장
김을동(金乙東) 1945년 문충공파 국회의원
김성동(金聖東) 1947년 문충공파 소설가
김성동(金盛東) 1954년 예의소승공파 국회의장비서실장차관
김경동(金慶東) 1955년 문충공파 정당인
김현동(金賢東) 1970년 문정공파 MC
김형동(金亨東) 1975년 생원공파 국회의원
김창동(金彰東) 2000년 참봉공파 프로게이머
29세(顯)
김시현(金始顯) 1883년 승의랑공파 독립운동가
김세현(金始顯) 1895년 문충공파 조선귀족
김엽(金燁) 1933년 사직서령공파 국립대학총장
김동현(金東顯) 1998년 문정공파 가수

3.2. 30세(基/年)

3.3. 31세(鍾/鎰)

3.4. 32세(求)

3.5. 33세(模)

3.6. 34세(然)

3.7. 35세(培)

4. 분파

<rowcolor=#ece5b6> 파명 파조
판관공파(判官公派) 계권(係權)
감찰공파(監察公派) 영전(永銓)
학생공파(學生公派) 호(琥)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헌(瓛)
진사공파(進士公派) 홍(弘)
진사공파(進士公派) 등(登)
구애공파(龜厓公派) 응(譍)
진사공파(進士公派) 영균(永勻)
부사공파(府使公派) 영추(永錘)
장령공파(掌令公派) 영수(永銖)
삼당공파(三塘公派) 영(瑛)
증승지공파(贈承旨公派) 규보(奎報)
목사공파(牧使公派) 성보(星報)
승의랑공파(承議郞公派) 극(克)
증승지공파(贈承旨公派) 태(兌)
춘당공파(春塘公派) 원(元)
봉사공파(奉事公派) 지효(至孝)
통훈공파(通訓公派) 정보(政報)
서윤공파(庶尹公派) 번(璠)
문정공파(文正公派) 상헌(尙憲)
휴암공파(休庵公派) 상준(尙寯)
문충공파(文忠公派) 상용(尙容)
부사공파(府使公派) 상관(尙寬)
부윤공파(府尹公派) 상복(尙宓)
학생공파(學生公派) 선효(善孝)
진사공파(進士公派) 순(珣)
사직영공파(社稷令公派) 생하(生河)
눌제공파(訥薺公派) 생명(生溟)
원천공파(源泉公派) 달행(達行)
정헌공파(定獻公派) 계행(係行)
참봉공파(參奉公派) 극인(克仁)
진사공파(進士公派) 극의(克義)
생원공파(生員公派) 극례(克禮)
학생공파(學生公派) 극지(克智)
군수공파(郡守公派) 극신(克信)
어담공파(漁潭公派) 삼익(三益)
계공랑공파(啓功郞公派) 맹구(孟龜)
참봉공파(參奉公派) 시량(時亮)
생원공파(生員公派) 시우(時佑)
생원공파(生員公派) 이려(以礪)
중파(仲派) 중구(仲龜)
숙파(叔派) 숙구(叔龜)
등암공파(藤菴公派) 계구(季龜)
습독공파(習讀公派) 엄(淹)
첨사공파(僉使公派) 온(溫)
항제공파(恒薺公派) 낙(洛)
낙와공파(樂窩公派) 치림(致林)
참봉공파(參奉公派) 언적(彦迪)
별장공파(別將公派) 홍(洪)
계공랑공파(啓功郞公派) 지형(之炯)
증참의공파(贈參議公派) 지찬(之燦)
예의소승공파(禮儀少丞公派) 생(生)
사직서령공파(社稷署令公派) 생하(生河)
자헌공파(資憲公派) 지병(之炳)
국헌공파(菊軒公派) 준(浚)
학생공파(學生公派) 수정(遂晶)
현감공파(縣監公派) 지철(之哲)
호장공파(戶長公派) 처상(處商)
사헌공파(司憲公派) 원수(元水)
사과공파(司果公派) 열(烈)
선군공파(選軍公派) 여중(呂重)
판관공파(判官公派) 용(龍)
시중공파(侍中公派) 학(鶴)

4.1. 항렬

대부분의 항렬이 이름자의 뒤에 들어가나, 일부 세대의 항렬이 가운데에 들어가므로 유의해야 한다.
<rowcolor=#ece5b6> 세수 항렬자 위치
22世 순(淳)
23世 근(根)
24世 병(炳) 가운데
25世 규(圭)/균(均)
26世 진(鎭)
27世 한(漢)
28世 동(東)
29世 현(顯)
30世 년(年)/기(基)
31世 일(鎰)/종(鍾)
32世 구(求)
33世 모(模)
34世 연(然) 가운데
35世 배(培)
36世 선(銑)
37世 원(源)
38世 영(榮)
39世 사(思) 가운데
40世 준(埈)
41世 선(善) 가운데
42世 택(澤)
43世 식(植)
44世 환(煥)
45世 철(喆) 가운데
46世 용(鏞) 가운데

5. 관련 문서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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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총인구 49,705,663명[2] 총인구 40,419,652명[3] 봉의 눈과 용의 수염.[4] 별의 정기와 호랑이의 위엄.[5] 김선평이 효공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족보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실제로 효공왕은 아들이 없고, 김선평의 출신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고창성의 성주로 있었으니 호족 또는 진골 귀족 출신으로 볼 여지는 있다.[6] 김달순처럼 사도세자를 비판하던 벽파에 가담한 장동 김씨(壯洞 金氏)도 없지는 않았다.[7] 단, 이 말 자체는 경원군 이하전이란 주장도 있다.[8] 참고로 이 둘은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였고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거나 유보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9] 사창제(社倉制)는 사창을 백성이 직접 관리하는 제도이며 주자의 정책이다. 고종 실록에 김병국이 사창제를 건의하는 기사가 실려있는데 김병국과 고종 모두 주자의 정책임을 인지하고 있다. 사창제 자체도 성공적이라 고종 11년 호조 판서가 고종에게 "그래도 사창제가 환곡 중에서 가장 낫습니다." 라고 할 정도이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10] 황실령인《조선귀족령》에 의거해서 조선귀족 작위를 수여하였다. 자작 2명(김성근; 김호규), 남작 6명(김가진, 김병익, 김종한, 김학진; 김덕한, 김세현). 이 중 김가진은 1910년 남작 작위를 수작하였으나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동단 총재, 임시정부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여 남작 작위가 수작 불능 처리되었다. 한편 김석진은 1910년 남작 작위가 수여되자 이를 거절하고 며칠 후 자결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1] 다만 김건순은 당시 조선의 실세인 안동 김씨 집안이며 권력의 핵심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사회에 불만을 품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다소 이상하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나중에 김건순은 역모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으나, 신 안동 김씨 집안의 권세가 워낙 막강해서 일반적으로 역모죄라면 적용되는 연좌제가 신 안동 김씨 집안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김건순 한 명한테만 책임이 쏠렸다.[12] 박해 사건이 풍양 조씨가 득세할 때 일어났기에 풍양 조씨 세력이 박해를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박해를 하라고 시킨 인물은 순원왕후(純元王后)였다.[13] 사실 천주교에 큰 관심이 없었어도 명분으로 탄압했을 것이다. 비슷한 예시로 중국공산당 장쩌민파룬궁(法輪功) 박해가 있다.[14] 명나라 때 대신 이동양(李東陽)[15] 장거정[16] 엄숭[17] 명나라 때 대신 하언(夏言)[18] 22세부터 대동항렬자 사용.[19] 김삿갓이라는 그의 별명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