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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07:28:34

김호연재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김호연재
金浩然齋
파일:김호연재.jpg
김호연재 영정[1]
호연재 (浩然齋)
출생 1681년
사망 1722년 (향년 40~41세)
본관 신 안동 김씨
1. 개요2. 상세3. 일생4. 여담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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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 여성 시인이다.

2. 상세

명문 신 안동 김씨 가문의 후손으로 역시 명문가인 은진 송씨 송요화[2]에게 출가하였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논란이 될만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어떤 날은 장사치들을 비난하는 를 써서 신랄하게 깠다고 한다. 시 내용 중에는 미친 백정놈이 돈만 밝히네! 돈만 밝히다 활활 타버리리! 등의 매콤한 시가 있고 페미니스트적인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 정치적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김호연재의 시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3. 일생

호연재(浩然齋) 김씨는 (신)안동김씨로 고조부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고 증조부는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金光炫,1584~1647)으로 충청도 홍주(홍성) 갈산면 오두리(갈뫼)에서 고성군수 김성달(호조참판 고균 김옥균의 7대조)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배움 아래 소학 등 여러가지 학문을 익혔다.

김성달(金盛達,1642~1696)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좌의정 월사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증손녀인 부인 이옥재(李玉齋,1643~1690)과 함께 서로 술을 즐기며 바둑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고 하는데, 안동세고(安東世稿) 연주록 같은 시문집을 남길 정도로 부부시인으로 유명하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김호연재는 20살 차이가 나는 여러 형제들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화목한 집안분위기에서 자랐으나, 안타깝게도 시집간 은진 송씨 가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남편은 밖으로 나돌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시가와의 사이도 그리 좋지 못해 겉돌았다. 본인 스스로 이런저런 실수가 많았음을 실토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피하기 위해 담배에 빠져 예찬시를 쓰기도 했다. 한이 많았는지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어미는 귀신의 희롱을 받아 반평생 일신에 차질이 많았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4. 여담

김호연재의 영정은 2019년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인 윤여환에 의해 그려졌다.

5. 같이보기


[1] 2019년 윤여환 화백이 그린 영정이다.[2] 송준길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