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FF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마오쩌둥 | 류사오치 | 리셴녠 | 양상쿤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 ||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권한대행 | ||||
삼황오제 · 하 · 상 · 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한 삼국시대 · 사마진 · 오호십육국 · 남북조 · 수 · 당 오대 · 십국 · 송 · 서하 · 요 · 금 · 원 · 명 · 청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 |
중화인민공화국 제5대 주석 장쩌민 [ruby(江,ruby=Jiāng)][ruby(泽,ruby=Zé)][ruby(民,ruby=mín)]|江澤民(강택민)|Jiang Zemin | |||
| |||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출생 | 1926년 8월 17일 | ||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시 | |||
사망 | 2022년 11월 30일 (향년 96세) | ||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 |||
재임기간 | 제3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 ||
1989년 6월 24일 ~ 2002년 11월 15일 | |||
제4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1989년 11월 9일 ~ 2004년 9월 19일 | |||
제5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 |||
1993년 3월 27일 ~ 2003년 3월 1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부모 | 아버지 장스쥔(江世俊), 양부 장상칭(江上青)[1] 어머니 우웨칭(吴月卿), 양모 왕저란(王者籣) | |
형제자매 | 동생 장쩌쥔, 장쩌콴 | ||
배우자 | 왕예핑 | ||
자녀 | 아들 장몐헝, 장몐캉 | ||
학력 | 양저우중학(江苏省扬州中学) (졸업) 중앙대학[2] (수료) 상하이교통대학 (전기기계학과 / 학사)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3] | ||
신장 | 172cm[4] | ||
소속 정당 | }}}}}}}}} |
[clearfix]
1. 개요
|
'''2019년 국경절 열병식에 등장한 초상화 ''' |
1세대 마오쩌둥, 2세대 덩샤오핑 등에 이은 중국의 3세대 독재자로 분류된다.
퇴임 이후 후진타오 시대까지 중국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시진핑 독재 체제가 된 2018년 이후로는 전직 국가원수 예우만 받고 있다. 그러나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시절과 2010년대 중후반 이후의 중국의 스탠스나 상황이 워낙 달라진데다, 후임이 된 시진핑이 주석 임기제를 깨고 종신 집권제를 꾀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후임인 후진타오와 함께 다시금 재평가되고 있다.
2022년 11월 30일 백혈병 투병 도중에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 생애
3. 기타
- 장쩌민 시대에 파룬궁 탄압을 시작했다. 의외로 장쩌민은 초기에는 파룬궁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표창장까지 수여했지만, 점차 파룬궁 수련자의 수가 공산당 당원 수를 넘어서게 되자 파룬궁 탄압을 지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 #
- 중국에서 마약사범에 대한 처벌이 심해진 것도 장쩌민 시대부터이다. 정확히는 장쩌민 2기 때인 1999년부터로, 그 이전까지는 마약사범을 최대 25년 유기징역 + 가택연금 20년으로 정하고 감옥에서 약물 중독 치료를 하는 데 그쳤지만 1999년부터 마약사범을 대거 사형시키기 시작하였다. 명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 장쩌민 주석이 주석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총살형이 상당히 잦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로는 덩샤오핑 시절이 훨씬 많았다. 덩샤오핑은 홍위병의 난동이 만연했던 문혁으로 실추된 공권력의 엄정함을 인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범죄자에 대한 공개처형을 대거 단행했다. 이것을 엄타라고 한다.
-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권력 공고화를 분석되었는데 장쩌민 주석의 권력 공고화 방법이 과거 진시황을 연상시킨다는 평가가 있다. 첫째는 중국 정치에서 최고 지도자들이 행사하는 권력과, 권력 공고화를 위한 전략인 정풍운동(整風運動). 둘째는 장쩌민의 권력 공고화.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는 군 통수권, 이념적 권위, 지지 세력을 획득해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정풍운동은 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장쩌민은 개혁기 총서기가 어떻게 권력을 공고화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전형을 들었다. ‘지지 세력의충원 → 정풍운동과 반부패운동의 전개 → 새로운 지도이념의 확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혁기 중국의 엘리트 정치에서 ‘권력 승계의 제도화’와 함께‘권력 공고화의 제도화’도 진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6]
- 장쩌민의 정상회담 활동 내역은 다음과 같다.
- 조지 W.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만났다. #
-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났다. #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
-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을 만났다. #
-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을 만났다. #
- 김수한 제15대 국회의장을 만났다. #
- 김종필 제11·31대 국무총리를 만났다. #
- 외에도 여러 저명한 국왕, 여왕, 대통령, 영부인, 정치인을 만났다.
- 1997년 국가의 경제 관리의 대부분을 총리 주룽지에게 넘겼으며 아시아 금융 위기를 통하여 직무에 남아있었다. 이때 국가 채무를 사형수들의 재산을 몰수시켜서 채우거나 했고, 수직적인 권력 아래에 중국은 해마다 8 퍼센트 국내총생산 성장의 평균을 유지하여 주요 세계 경제에서 1인당 경제성장의 최고 속도를 달성하였다. # #
- 1990년 미국 ABC 방송과의 인터뷰 중 천안문 항쟁 당시 탱크맨의 생사에 대한 질문을 받자, 곤란해하면서도 살아있다고 영어로[7] 대답을 한 적 있는데, 실제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걸로 확인되었다.
- 2010년대 중반부터 2020년 전후로 중국 인터넷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 현지에서는 '막하(膜蛤, Mo Ha)'라고 하는 문화로 위에서 언급한 바지 문제,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화를 내는 모습과 그때 내뱉은 대사[8][9][10] , 그리고 두꺼비[11], 수명 연장 드립[12] 등이 필수요소. 유튜브 등지에서 검색하면 중국 국적 약쟁이들의 재기발랄함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매년 장쩌민의 생일 즈음에 인터넷 상에서 기념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13]
- 바지의 밑위를 길게 해서 바지가 배에 덮게 입는 소위 배바지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구글에서 'Jiang Zemin' 이미지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Pants'가 뜰 정도로 유명하다. 직위상 기성복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맞춰 입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마 밑위를 길게 주문하는 듯하다. 가끔 나이가 좀 있는 사람 중 배를 감싸는 게 좋다고 이런 걸 선호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 2017년엔 자신이 장쩌민의 조카라며 한국인에게 10억대의 사기를 친 조선족 남성이 구속되었다.
- 중국 2차 세계대전사 연구회 회원이자 작가, 평론가인 뤼자핑(呂加平)이 2000년대 초반 그의 부친과 그에게 친일-소련 스파이라는 주장을 하다가 출처 체포되어 2011년 국가전복죄(颠覆国家政权罪)에 걸려 10년의 중형을 받았다가, 상고심에서 5년으로 감형되었다. 뤼자핑은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어서 그의 주장이 별 근거가 없다는 반박도 있다. 뤼자핑은 풀려나와 고생을 하다가 2021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에서 김 대통령을 '따거'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대중(1924년생)과의 나이차는 2살 차이이다.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도 회담한 적이 있었는데, 중국어에 능했던 김일성과도 통역없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 중국어를 비롯해 4개 국어를 하는데, 영어, 러시아어, 루마니아어를 한다고 한다. 영어는 앞서 언급한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 때 밝혔듯 중학교 시절 공부했고[14], 러시아어와 루마니아어는 각각 해외 파견 중 익혔으니, 어학에 관심을 가졌다.[15]
-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공식 석상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한 것이 장쩌민 때 부터이다. 마오쩌둥과 화궈펑, 덩샤오핑은 모두 인민복을 입었지만, 장쩌민 이후의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평소에는 양복을 입고 천안문 성루에서 열리는 대형 행사 시에만 인민복을 입고 있다.
4.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ee1c25> | 장쩌민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e1c25> 생애 | 생애(장쩌민 시대) | |
가족 | 아버지 장스쥔 | ||
사건사고 | 홍콩 반환,(1997), 마카오 반환,(1999), | ||
기타 | 상하이방 · 반분열국가법 · 파룬궁 |
중국공산당 당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FFFFF | 초대(제1-5차) | 임시(제5차) | 제2대(제6차) |
천두슈 | 취추바이 | 샹중파 | |
임시(제6차) | 제3대(제6차) | 제4대(제6차) | |
왕밍 | 보구 | 장원텐 | |
제5대(제6-10차) | 제6대(10-11차) | 제7대(제11-12차) | |
마오쩌둥 | 화궈펑 | 후야오방 | |
제8대(13차) | 제9대(제13-15차) | 제10대(16-17차) | |
자오쯔양 | 장쩌민 | 후진타오 | |
제11대(제18-20차) | |||
시진핑 | }}}}}}}}}}}}}}} |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000,#e5e5e5 |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1949년-1954년) | |||
초대 | ||||
마오쩌둥 | ||||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주석 (1954년-1975년) | ||||
초대 | 제2대 | |||
마오쩌둥 | 류사오치 | |||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83년-)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덩샤오핑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FFFFF | 초대 | 제2대 | 제3대 |
마오쩌둥 | 화궈펑 | 덩샤오핑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 |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26px;" {{{#000000,#EFEFE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서열순 | ||
1위 | |||
장쩌민 (최고영도인) | |||
2위 | 3위 | 4위 | |
리펑 (전인대 상무위원장) | 주룽지 (국무원 총리) | 리루이환 (정협 전국위원회 주석) | |
5위 | 6위 | 7위 | |
후진타오 (부주석) | 웨이젠싱 (기율위 서기) | 리란칭 (상무부총리) | |
←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4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6기)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26px;" {{{#000000,#EFEFE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서열순 | ||
1위 | |||
장쩌민 (최고영도인) | |||
2위 | 3위 | 4위 | |
리펑 (국무원 총리) | 차오스 (전인대 상무위원장) | 리루이환 (정협 전국위원회 주석) | |
5위 | 6위 | 7위 | |
주룽지 (상무부총리) | 류화칭 (중앙군사위 부주석) | 후진타오 (중앙서기처 제1서기) | |
←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3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5기) → |
상하이시 영도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f00 {{{#!folding [ 시장 ] {{{#!wiki style="margin: -6px -1px;" {{{#FFF | 상하이시 인민정부 시장 | ||
초대 | |||
천이 | |||
상하이시 인민위원회 시장 | |||
초대 | 제2대 | 제3대 | |
천이 | 커칭스 | 차오훠추 | |
상하이 인민공사 임시위원회 주임 | |||
초대 | |||
장춘차오 | |||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주임 | |||
초대 | 제2대 | 제3대 | |
장춘차오 | 쑤전화 | 펑충 | |
상하이시 인민정부 시장 | |||
초대 | 제2대 | 제3대 | |
펑충 | 왕다오한 | 장쩌민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주룽지 | 황쥐 | 쉬쾅디 |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천량위 | 한정 | 양슝 | |
제10대 | 제10대 | ||
잉융 | 궁정 |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f00 {{{#!folding [ 중국공산당 지방위원회 서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FFF | 초대 | 제2대 | 제3대 |
라오수스 | 천이 | 커칭스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천피셴 | 장춘차오 | 쑤전화 |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펑충 | 천궈둥 | 루이싱원 |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장쩌민 | 주룽지 | 우팡궈 | |
제13대 | 제14대 | 대리 | |
황쥐 | 천량위 | 한정 |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시진핑 | 위정성 | 한정 | |
제18대 | 제19대 | ||
리창 | 천지닝 | }}}}}}}}}}}}}}} |
[1] 장스쥔의 동생이다. 딸만 셋 있고 아들이 없어서 장쩌민을 입양했다.[2] 현 난징대학의 전신. 수료 후 상하이교통대학으로 편입했다.[3] 사망 후 화장되어 장강 하구 바다에 뿌려졌으며, 이에 대하여 신화통신은 “동지는 철저한 유물론자로서 화장 후 장강과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라고 전했다.#[4] 젊었을 적에는 174cm였으나 노화로 인해 172cm로 줄었다.[5] 그가 일당독재 국가였던 중국 정치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확실하나 전제독재자인지는 논란이 있다. 한때 중국의 공식적인 최고지도자로써 삼권을 장악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당 내 유의미한 견제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주의 성향 지도자일지는 몰라도 학술적인 의미의 독재자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넓은 의미에서로 보자면 독재자에 가까운 것이 맞으며, 후임 후진타오에 비해서도 당내 영향력이 컸다고 평가된다.[6] 관련 논문 : 중국 최고 지도자의 권력 공고화: 장쩌민의 사례.[7] 그대로 옮겨보자면, "...but I think he was never killed." 라고 대답했다. 영어에서 never는 매우 강한 부정의 의미로 쓰인다는 점과 장쩌민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8] 2000년 중남해에서 있던 장면이다. 강택민은 당시 홍콩 행정장관 둥젠화의 연임을 내정하고 있었는데(이것은 원래 홍콩인의 선거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선거인단을 움직이는 것은 중국이기 때문에 베이징이 결정하면 그대로 선거에서 당선된다.), 홍콩 기자가 둥젠화를 적임자로 생각하느냐고 물은 뒤에 그렇다는 답변에 이건 흠정(钦定, 황제가 명령하여 정하는 것)이 아닌가고 아픈곳을 찌르자, 장쩌민이 그걸 굳이 부정 못하고 그냥 입다물라며 기자를 꾸짖는 장면이다. "서양기자들(마이크 월레스) 도 당신처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 "내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때로는 다 아는 사실도 모르는척 해야할 때도 있는거야"는 식의 지극히 꼰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홍콩 기자에게 마치 아버지나 동네 어르신이 훈계하듯 분노하면서 받아치는 장면이다. 풍부한 감정표현, 영어, 중국어(보통화), 광둥어 3개 국어를 섞어쓰는 현란함, 꼰대스러운 말투가 겹쳐져 볼만하다. 댓글에 의하면 중국 인터넷에서 유명한 밈이라고 한다.[9] 원래 중국에서 전임 현임을 불문하고 최고지도자를 모욕하는 일은 처벌받지만, 위의 중남해 동영상만 봐서는 언론에서 근엄하게 그려졌던 장쩌민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니 딱히 장쩌민을 모욕하거나 희화화한다고 보기도 힘들다. 유튜브 댓글에서도 "90년대의 중국에서는 기자랑 주석이 대등하게 토론하네?"라는 댓글이 2위의 추천을 받고 있고 많은 유튜브 댓글들이 "그래도 그때는 기자가 저렇게 말할 수 있었네"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임 시진핑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10] 다만 이것도 어느 정도 깨이고 시야가 넓은 중국 청년층이나 개혁개방 이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집권기를 경험하였던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기때 출생한 중국의 중장년층 아저씨나 아줌마 세대들에게나 가능한 생각이지 어린 시절부터 시진핑에 철저히 세뇌되고 그의 사상이 주입된 대다수 2,30대 젊은 층이나 시진핑 사상과 국수주의, 중화주의 외에는 사실상 머릿 속에 아는 게 전무한 소분홍들은(마치 푸틴의 장기독재와 세뇌로 보고 자란게 푸틴인 러시아 청년층들이 이전 옐친이나 소련 시대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듯이) 장쩌민을 비롯, 덩샤오핑이나 후진타오, 주룽지, 원자바오같은 그나마 독재를 지양하고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던 전임 중국 정치인들에 대한 별다른 감회가 없고 되려 그들의 개혁개방정책과 유지에 대한 공적이나 업적을 위대하신 시진핑 주석님만 못하다며 당연스레 부정하고 축소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11] 검은 테 안경을 쓴 모습이 두꺼비와 꽤나 흡사해 얻은 별명이다.[12] 장쩌민이 인신공양 제사를 해서 수명을 연장했다고 주장하는 파룬궁 신도들의 괴담. 이걸로 드립을 치는 네티즌들은 많지만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국내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금괴 루머를 문재인을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보수 성향 네티즌들도 진지하게 믿지는 않지만 드립을 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13]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막하 문화가 확산된 원인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시진핑 정권 수립 이후 나타나는 1인 독재 체제 확립 등 중국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우회적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이 대체적인 평. 물론 장쩌민 시점의 중국 또한 일당독재라는 근본적인 지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필수요소화된 장쩌민의 발언이나 태도에서 현 시대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오히려 인기를 끄는 것일지도.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중국 당국에서는 넷 상에서 관련 글이나 작품의 삭제, 차단 등 다양한 수법을 통하여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후 시진핑 집권 이후에는 완전한 인터넷 통제가 시행되었다. 정치인 비판을 아예 못 하게 댓글 자체를 금지시키거나 정치 풍자시 조사해서 체포하고 죽인다. 다만 중국의 분위기 자체는 정치인=두렵고 경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함부로 댓글을 달 수도 없고 댓글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강력하고 권위적인 통제가 시행되기 때문에 비판 자체가 없긴 하다.[14] 물론 유창한 회화가 가능해진 것은 아마도 대학 시절부터로 보인다. 중화민국 시절 상하이교통대학은 영어로 강의했기 때문이다.[15] 공식적인 당 기관지나 소식에 따르면 스페인어와 일어,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유창히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교적 마이너한 언어인 우르두어도 배웠다고.[16] 처음에는 쑨원이 제안하였으나 계획 구상으로 끝났다.[17] 싼샤댐은 건설 과정에서 비리가 많았고 반대의견이 많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강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