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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22:05

후야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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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총서기
후야오방
[ruby(胡, ruby=Hú)][ruby(耀, ruby=Yào)][ruby(邦, ruby=bāng)](호요방) | Hu Yaobang
파일:후야오방.jpg
출생 1915년 11월 20일
중화민국 후난성 류양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류양시)
사망 1989년 4월 15일 (향년 73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둥청구 베이징의원
재임기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1981년 6월 29일 ~ 1982년 9월 1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장[1]
1978년 12월 25일 ~ 1980년 2월 29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2]
1980년 2월 29일 ~ 1982년 9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년 9월 12일 ~ 1987년 1월 16일
서명
파일:후야오방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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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신장 155cm
학력 중학교 중퇴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국광(國光) }}}}}}}}}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대장정, 중일전쟁, 국공내전2.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서 문화대혁명 종결까지2.4.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
3. 사망4. 사후 파장: 천안문 6.4 항쟁5. 기타

[clearfix]

1. 개요

중국정치가. 81년 화궈펑의 사임 후 잠깐 주석을 맡았다가, 87년까지 명목상 당 서열 1위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3]을 지낸 인물. 자오쯔양 등과 함께 20세기 좌절된 중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후야오방은 국가 체제 재정비와 국력 중흥에서 덩샤오핑과 뜻을 함께 하고 개방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와중에서 학생 소요사태 등이 계속 발생하면서 내부의 혼란이 잇다르자 보수파의 반발로 총서기에서 사임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 공산당의 파벌공청단파의 시조이다. 그가 발탁한 인물이 바로 후진타오원자바오[4]이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915년 11월 20일 후난성 시골 마을 창팡촌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객가인이라고 한다. 부농이었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초년에는 가난때문에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말더듬 증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매우 머리가 좋았고, 이를 깨달은 집안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신식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과정인 인학당에 입학했을 때 공산당원이었던 교사의 영향으로 좌경화되었고, 곧 공산당의 유년조직인 소년선봉대(보이스카웃)에 가입했다.

12세때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여 장제스에 의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고 국민당군이 학교로 닥쳐와 후야오방의 스승을 살해했다. 공산당은 복수를 결의했고,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창사시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창사시민들에게 국민당 타도와 공산당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곧 국민당의 압도적 대군에게 참패하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후야오방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고, 그 이후부터 열렬한 마오쩌둥 지지자가 되었다. 15세인 1929년 공산주의청년단에 비밀리에 가입했는데, 1929년 마오쩌둥의 휘하의 펑더화이군이 창사로 진격해서 학교는 문을 닫았고, 후야오방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홍군에 가담해서 초급 장교로 복무했다. 정확히는 정치위원이라고 불리는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에 정식당원이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소련유학파라고 할 수 있는 28인의 볼셰비키와 대립했다.

2.2. 대장정, 중일전쟁, 국공내전

장시 소비에트 시절 마오쩌둥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28인의 볼셰비키가 자신들이 지휘한 제4차 초공작전의 패배 책임을 마오쩌둥파에 뒤집어 씌울 때, 패전의 책임을 덮어쓰고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처형 직전 대장정을 떠나는 공산군 본류에 떨어져 루이진에 남은 잔류 부대를 지휘하는 탄위바오(谭余保)가 개입하여 처형을 면하고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의 일원으로 대장정에 따라가게 되었다.

대장정 와중에서도 심각한 부상을 당해서 낙오될 수도 있었으나, 어릴 때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산시성 해방구로 향한 마오쩌둥과는 달리 장궈타오는 쓰촨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하자고 주장하였고, 둘은 결별하였다. 하지만 쓰촨성에 잔류한 장궈타오의 부대는 곧 추격해온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개박살이 났고, 부랴부랴 마오쩌둥의 뒤를 쫓아가다가 산시성 근방에서 회교 군벌 마부팡의 부대에 참패했다. 장궈타오는 간신히 최측근들만 거느리고 옌안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후야오방은 포로가 되어서 한동안 마부팡의 영지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 하지만 결국 탈출해서 옌안의 해방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안 사변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후야오방은 옌안의 항일군정학교에서 사상교육을 받았고, 덩샤오핑과 친교를 쌓게 되었다. 이때 덩샤오핑과의 인연은 나중에 그가 출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항일전쟁 내내 후야오방은 옌안에 머무르면서 사상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때 리샤오와 결혼을 하고 1942년 득남했다.

항일 전쟁이 끝난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펑더화이 휘하 18병단 정치장교로 후쭝난, 옌시산 등이 지휘하는 국민당군을 교란하면서 활약을 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후야오방의 부대는 후쭝난군을 계속 추격하여 청두까지 점령했다. 이후 다시 남진하여 구이저우 방면으로 진격하여 운남성까지 장악했다.

이 당시 후야오방은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심리전과 정치공작에 능해서 여러 국민당군 장성들을 설득하여 투항시켰으며, 점령지의 관리에도 능해서 별 잡음없이 공산당이 행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후 군부와 당에서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2.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서 문화대혁명 종결까지

1949년말 쓰촨성은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그 서부에는 국민당군 잔당이 출몰했고, 쓰촨성 자체도 대지주에 의한 농장경영이 많았다. 후야오방은 국민당 잔당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는 한편, 전란으로 피폐해진 쓰촨성을 위해 여러 행정조치를 실시하였다. 정세안정을 위해 공산당원뿐만 아니라 무당파 인사들도 적극 행정에 끌어들여 현지 민심을 돌봤다. 이런 행정업무를 총괄하게 되면서 군에서 제대하여 행정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중앙(베이징)으로 전근 와서 공산당의 청년조직인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후야오방은 이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후야오방은 간부와 단원이 적극 소통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이는 굉장히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구조였다. 그리하여 1956년에는 공청단 중앙위원, 1958년에는 대표인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당시부터 후야오방은 당의 차세대 주자로 널리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1958년 대약진운동의 후폭풍이 중국을 덮치치고, 이에 따라 이를 주도한 마오쩌둥 책임론이 불거졌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의 강행을 재고해달라는 서신을 썼다가 마오의 반격으로 반동으로 몰려 실각했다. 마오쩌둥은 공청단에도 펑더화이를 비난하는 집회를 열라고 지시하나, 후야오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동안 그를 고향후배로 총애하던 마오쩌둥의 눈밖에 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외적으로 리더십을 널리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1964년에는 섬서성의 제1서기로 발령나는 등 계속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섬서성에서 그는 대약진운동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인민들과 적극 소통하고, 여러 방안을 모색하여 섬서성의 경제 발전에서 여러 성과를 냈다. 다만 이때 격무로 건강을 해쳐서 장기간 베이징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마오의 눈밖에 났던 사람들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3후라 불리던 후커스(胡克實), 후치리(胡啓立)와 함께 비투회에 끌려가 홍위병들에게 구타, 모욕을 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은데다가, 당을 극좌파들이 장악하면서 정무직과 당직에서 쫓겨나서 야인이 되었다. 1973년부터 마오가 병석으로 정무에 신경쓸 수 없게 되자, 저우언라이는 후야오방을 슬그머니 복직시켰지만, 다시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으로 병석에 들고 4인방이 득세하자 다시 쫓겨났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바로 복직, 복당이 되었고, 1977년 공산당 조직부장을 맡으며 중앙에 진출했고, 덩샤오핑에 의해 후계자로 선정돼 1980년 공산당 총서기에 임명됐다. 공식 당서열은 1위였으나 경력이나 권위에서 후야오방을 훨씬 앞서는 덩샤오핑, 천윈, 예젠잉, 양상쿤, 보이보 등의 원로들이 중앙고문위원회[5]에 즐비했고,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1981년부터 군권을 가진 중군위 주석을 맡게된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후야오방의 위치는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원로들의 결정을 뒷받침하고 실행하는 실무 최고 책임자에 가까웠다.[6]

2.4.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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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후 정치·사회 개혁을 적극 추진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인사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단행했다. 류사오치의 공식적인 복권과 국장도 그의 중앙위원회 주석 재임기인 1981년에 이루어졌다. 인사 능력도 뛰어나 공청단 출신 중 후진타오, 원자바오 그리고 상하이방주룽지를 발탁해 그들이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였으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공산당의 1인자인 총서기로 부임한 뒤에도 다른 공산당 고위 관료들과 달리 권력의 상징인 중난하이에 들어가는 대신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집에 머물렀고, 다만 출퇴근의 편의를 위해 담장을 허물어 문을 내기만 했다. 그는 보통 시민이라고 해도 언제나 성심 성의껏 대했고, 스쳐갔던 사람이라도 절대 잊지 않고 근황을 물어보며 하나하나 관심을 보이고 마음을 썼다. 때문에 그의 인간적 매력과 선량함은 정적들까지 인정할 정도였다.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던 당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폐지하고 이를 총서기 직함으로 대체하면서 당내 민주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물론 이건 후야오방의 결단이라기보단 덩샤오핑의 결단이었다.

달라이 라마티베트에 관해서도 온건하게 대하였다. 마오쩌둥 시절 금지됐던 티베트 불교 사원 내 종교활동을 허용했고, 티베트인들을 공무원에 대거 임명했다. 또 달라이 라마가 하나의 중국을 지키고 독립 노선을 포기하면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고 티베트인을 중국공산당의 당직에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유화적인 면모도 보였다.[7]

1983년 11월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일본이 적당하게 자위력을 증강시키는 것에 대해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10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예젠잉이 사망하면서 후야오방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1986년 말 상하이교통대학에서 개최한 강연에서 중국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인 물리학자 팡리즈가 권력분립, 다당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중국공산당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시작으로 1986년 12월 5일, 허페이의 중국과학기술대학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순식간에 17개시 15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상하이교통대학, 푸단대학, 퉁지대학, 푸저우대학, 선전대학, 윈난대학, 광둥 중산대학, 난징대학, 톈진 난카이대학, 베이징사범대학에서도 모두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펑전, 리셴녠, 덩리췬, 리펑, 야오이린 등 보수파는 후야오방에게 맹공을 퍼부었고, 칭화대학과 베이징대학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자 덩샤오핑까지도 격노하였다. 후야오방은 학생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12월 말에 이르러 정부는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학생운동은 생각 없는 인간들이 당의 지도를 부정하려는 난동이라면서 더 까불면 재미 없을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고, 주요 대도시에서의 시위를 금지하였다.

12월 30일, 덩샤오핑은 후야오방, 완리, 후치리, 리펑, 허둥창을 불러 학생시위를 다루지 못한 것을 꾸짖고 학생운동은 부르주아 자유화 사상을 막지 못해서 일어났다고 질책했다. 여러 지식인들이 출당, 제명당하고 1987년 1월 15일부터 1월 16일까지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는 후야오방이 학생운동을 엄격히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조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후야오방과 같은 공청단 출신의 왕자오궈 서기와 주허우쩌 중앙선전부장 두 사람만 침묵했고 시중쉰은 문화대혁명식 인신공격을 해선 안된다고 동료들을 말렸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정치국원과 서기들이 후야오방을 물어뜯었고 후야오방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자아비판한 후 총서기 사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86년 5월 중공 13대 인사를 정하기 위해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예방하였다. 여기서 덩샤오핑에게 총서기직을 70세 이상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히는데 덩샤오핑은 자신과 다른 원로들이 은퇴할 것이며 후야오방은 완전 은퇴하지 말고 총서기직 대신 13대에서 국가주석이나 종군위 주석 직으로 옮기라고 제시한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81세 생일 축하연에서 이를 다른 원로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덩샤오핑은 실제로 은퇴할 생각이 잔혀 없었고 원로들에게 이때 부터 모진 비판을 받으며 13대 인사귄은 중앙고문위원회 소속 8대 원로이자 위원회 상무부 주임인 보이보에게 넘겨주었다

앞서 설명한 학생운동 사건도 겹치면서 원로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기 시작하여 총서기 사퇴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정치국 확대회의가 이를 수용하면서 후야오방은 총서기에서 사임, 그의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빼앗지는 않았으나 직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총서기는 자오쯔양이 대행했다. 펑전은 후야오방은 당의 집단지도체제 원칙을 위반하고, 정치 원칙상의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는 죄목을 발표했다.

후야오방이 실각하면서 그동안 그가 추진해 오던 개혁 작업도 결국 좌초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그가 "자산계급 자유화를 용인하는 '치명적 실수'를 했다" 하고 평가했다. 다만, 이후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는 탈락했으나 정치국원으로는 재선되는 등 정치적 경력을 유지하는 것은 허용되었다.[8] 하지만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덩샤오핑은 아주 냉정하게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가끔 게임을 하러 그를 부를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후야오방이 그의 초대를 거절하자 곧 중단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에게 배신감을 느껴 그와 어울리기 거부했다는 말도 있고 반대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싸늘하게 벽을 친 것이라는 말도 있다.

후야오방은 형식적 비판을 받고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예상 외로 절친했던 친구들에게까지 조리돌림을 당하게되자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회의가 끝난 이후 그는 집에 가지 않고 회인당 앞에서 대성통곡하였으며 정치국 공보에서 자신의 과오로 지적한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음해라고 반박하는 한편, 총서기에게 그 정도 권력도 없느냐고 항변하고 이럴 줄 알았다면 총서기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사실상) 지시에 따라 후야오방은 비판 회의(민주생활회) 전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는데, 회의에서 집요하게 공격을 받자 사직원을 제출했음을 후회한 것.

이렇게 후야오방 공격에 참여했던 다른 정치국원들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완리는 후야오방이 좋아하는 개고기 요리를 후야오방의 집에 보내주었으며 자오쯔양은 자신은 후야오방을 크게 공격하지 않았다고 훗날 변명했지만 회의록에는 자오쯔양도 상당히 쎄게 후야오방을 공격했다. 강경파 리펑도 천안문 사태 관련 회고록인 '6.4일기'에서 후야오방에 대해서 정치적 견해는 달랐으나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후야오방과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쟁했던[9] 자오쯔양 역시 자신의 구술 회고록에서 후야오방에 대해 비록 경제 분야에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했지만, 청렴하고 정직하고 민주적인 지도자였다면서 그가 더 집권했다면 중국은 더 좋은 나라가 되었으리라 믿는다고 높이 평가했다.

3. 사망

1989년 4월 8일 오전 9시, 정치국 회의에서 중국의 교육문제에 관한 발언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하얗게 질린 후야오방은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자오쯔양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냐고 요청하려다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황한 자오쯔양이 니트로글리세린을 가진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장쩌민이 니트로글리세린 약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복용하는지를 몰랐다.

정치국원들은 재빨리 후야오방에게 알약 2알을 먹이고 중난하이 건너편의 305호 병원에 연락했다. 문제는 중난하이 경비대에 의사들이 긴급하게 올 것이라는 연락이 가지 않아서 의사들은 경비대에게 막혀서 10분이나 지연되고 말았다. 중난하이에 겨우 들어온 의사들은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고 후야오방을 병원에 옮겨 치료했지만 결국 1989년 4월 15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덩샤오핑은 매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양상쿤 이하 정치국원들은 덩샤오핑에게 2번이나 후야오방을 문병해달라고 청했으나 덩샤오핑은 자신이 의사도 아닌데 왜 가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의 죽음은 중국 공산당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부고에 놀라 피우던 담배를 끈 후 양손을 마주잡아 가슴에 대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맹렬하게' 피웠다고 한다. 천윈, 리셴녠, 왕전 등도 모두 비통해했고 덩샤오핑은 아내 줘린을 시켜 후야오방의 아내에게 위로를 전하게 하였다.

정치국 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어 장례 절차를 정하는 한편 정국의 혼란 가능성을 점검했는데,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차오스는 "현재 전국의 전체적인 상황은 양호하다. 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대규모의 집단적인 소요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4월 20일, 자오쯔양이 낭독할 추도사를 검토하던 덩샤오핑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대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장점들에 대한 내용은 이미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그의 해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저를 포함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저도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라는 구실로 이를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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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추모식이 열렸다. 20만명의 군중이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가운데,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과 현직 지도자들이 추모식에 참여했다. 양상쿤이 추도식을 주재했고 자오쯔양이 추도사를 낭독했다.[10]
"동지 여러분. 오늘 우리는 침통한 심정으로, 오랜 시련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우리 군의 걸출한 공직자로서 장기간 당의 중요한 영도 직무를 담당한 탁월한 영도자인 후야오방 동지를 추모하는 바입니다."
후야오방의 유족들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칭호도 달라고 요구했으나,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자유화 조치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한 것이라 여겨 이를 거절했다.

이후 자오쯔양이 숙청되자 정치국 내부 강경파들은 반동 후야오방의 정치적 생명을 말살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 자오쯔양의 배반을 낳게 했다면서 과거의 처분이 너무 자비로운 것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죽은 후야오방에게 추가적 제재가 가해지진 않았다. 덕분에 북한에서 발간하는 조중친선 화보집에서도 자오쯔양은 기록말살당했지만 후야오방은 잘 남아있다.

4. 사후 파장: 천안문 6.4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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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저녁 후야오방의 사망 소식이 중앙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졌고 전국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주요 대도시 대학엔 분향소와 대자보, 현수막이 설치되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
야오방은 이미 죽었고, 좌파가 또다시 번성하니, 국민이여 깨어나라, 투쟁을 잊지 말라.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야오방 동지는 민주운동의 최전선에 선 강한 투사다. 그의 서거는 중국 인민에게 메울 수 없는 대손실이다. 우리들의 비할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하이 푸단대학의 대자보
학생들은 4월 17일부터 천안문 광장에 모여 추모 의식을 열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4월 18일부터 체계화되어 후 전 총서기를 추모하고 재평가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유례없는 전국적 민주화 시위로 번졌고, 이것이 바로 1989년에 벌어진 천안문 6.4 항쟁의 시작이었다.(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 직후 4인방문화대혁명에 반대해서 일어난 1976년의 천안문 사태와 구분된다.)

5. 기타


[1] 中央委员会秘书长을 단어 그대로 읽은 것. 서기장 정도로 의역될 수 있으나 임기 중 비서장, 총서기 등 비슷한 이름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여 구분을 위해 따로 적음.[2] 당 주석제가 폐지되어 총서기가 당의 1인자가 된 시절과 구분하기 위해, 당 주석제 시절의 총서기를 중앙서기처 총서기(중앙위원회 서기처 총서기)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중앙위원회 총서기였다.[3] 1982년 12차 당대회에서 당 주석직이 폐지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서열 1위를 맡는 것으로 개편된 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는 후야오방이 명목상 서열 1위로서 당을 이끌게 하면서도,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주석직을 맡기지는 않아 배후의 덩샤오핑, 천윈 등 원로들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이는 덩샤오핑을 위한 꼼수였는데, 56년부터 69년까지 마오쩌둥 주석 밑에서 총서기를 지낸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경력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후야오방은 마오와 화궈펑의 후계자가 아니라 전임 총서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서 당 서열 1위 총서기를 맡게 된 것. 덩샤오핑이 맡았던 총서기는 지금의 중앙서기처 제1서기처럼 당의 일상 실무를 관장하는 보직이었고, 당 서열 1위였다지만 80년대 후야오방이 총서기로서 수행한 실제 역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4] 원자바오는 후야오방이 실각하여 죽고도, 유능함으로 인해 자오쯔양한테도 금방 심복으로 뽑혔고 계속 승승장구했다.[5]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이들이 원로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도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의 실무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6] 당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아무 직함도 없는) 8대 원로들이 토론으로 결정하고, 후야오방 이하 정치국원들은 그 결정에 따른 실무지침을 만드는 수준이었다.[7]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후야오방의 해임 후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 대해 강경책으로 돌아섰으며, 이에 분노한 티베트인들이 라싸에서 시위를 펼치자 중국은 군과 무경을 동원해서 이를 유혈 진압하였다. 1989년 시위 이후 중국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불타협, 불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이때 직접 방탄모를 쓰고 라싸 시내에서 유혈 진압을 진두지휘한 게 바로 후야오방의 정치적 제자인 후진타오였다. 이 공로로 후진타오는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의 눈에 들었고, 중앙당으로 진출해서 차세대 지도자 후보군에 들게 된다.[8] 이때 후의 전임 당 주석이었던 화궈펑도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좌파 왕(王)으로 불리던 덩리췬(등력군)은 1차 투표에서 최저 득표라는 굴욕을 받고 스스로 사임했다. 여기에 자그마한 스캔들이 있었다. 1930년대 옌안 정풍운동 때 덩리췬은 반당분자로 몰려 투옥된 동지 리루이 (1917-2019) 의 아내와 간통하여 리루이는 아내와 이혼했는데, 50여 년이 지난 후 당대회에서 이 문제를 폭로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덩리췬은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서 표를 거의 얻을 수 없었다. 사실 20~30년대 중국공산당의 해방구는 엄청난 남초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런 불륜 사건은 상당히 흔한 사건이었고 조강지처만 본 저우언라이 정도나 좀 특이한 경우다.[9] 일각에서는 후야오방의 실각에 자오쯔양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자오쯔양 본인은 이를 부정했다. 자오쯔양과 함께 실각한 또 다른 온건파인 후치리는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지나치게 비판했다고 그를 비판했다.[10] 자오쯔양은 1987년부터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로 재임 중이었다. 허나 그도 2개월 후의 천안문 사태에서 자유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민들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이유로 진압 후 실각했다.[11] 당시 후야오방뿐 아니라 대부분의 중국공산당 수뇌부들이 김일성의 노골적인 권력세습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당장 마오쩌둥도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러면 우리가 봉건군주랑 뭐가 다르냐"면서 상당한 불쾌감을 내보인적이 있다.